소설리스트

아포제-78화 (78/122)

#78

각 팀의 리허설이 모두 진행되고, 마지막으로 전 출연자가 무대 위로 모였다. 정우는 저 멀리 서 있다가 기어이 가운데로 와 옆에 서서 친한 척을 하는 문혁의 팀을 못마땅하게 바라보았다. 활동이 겹치거나 해서 마주칠 때마다 늘 느끼는 거지만, 저 팀은 유별나게 사교적이었다. 활동하는 모든 사람과 친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마음을 가지고 있는 것 같을 정도였다.

“이따 꼭 나와. 동갑인 애들 다 모았는데 일곱 명이나 되더라고. 아, 여자애들은 빼고. 괜히 같이 술 마셨다가 서로 소문만 나잖아. 걔들도 자기들끼리 모일 것 같더라.”

“아… 그래. 난 이따 매니저 형한테 물어볼게.”

하진과 문혁의 뒤에 서서 가만히 그 둘의 말을 듣고 있던 정우가 앞에서 들려오는 피디의 목소리에 고개를 들며 하진의 팔을 잡아당겼다. 그리고 하진과 문혁의 사이로 들어가 섰다. 하진의 시선이 닿는 게 느껴졌지만, 굳이 바라보지는 않았다. 저도 지금 이상한 짓을 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마지막 무대는 전 출연자가 희망찬 국민가요를 부르는 것으로 마무리된다고 했다. 피디는 열심히 본 공연에 대한 말들을 전달했다. 했던 말을 몇 번이나 반복하는데도 피디의 심기를 건드리고 싶지 않아 모두 그의 말에 집중했다.

“수고하셨습니다.”

마지막 말과 함께 아레나 안으로 수고하셨다는 대답이 크게 울렸다. 그제야 자유롭게 흩어진 가수들이 서로 친한 타 그룹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삼삼오오 모여 약속을 잡기 시작했다. 하진은 그 사이로 문혁이 손을 뻗어 제 손을 잡는 것을 바라보았다.

“톡 할게.”

“응, 알았어.”

“이따 봐.”

당연히 하진이 나올 거라고 생각한 문혁이 손을 흔들며 옆에 선 정우를 바라보았다.

“정우 너도 올래?”

“아니요.”

“하긴 애들은 애들이랑 놀아야지. 얼굴 좀 펴라.”

정우의 등을 두드린 문혁이 그대로 뒤돌았다. 당장이라도 그 어깨를 잡아 돌려 한 대 치고 싶을 정도로 얄미웠지만, 그 마음을 누를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많은 사람이 모인 곳에서 소동을 일으켜서 좋을 게 하나도 없기 때문이었다.

“아, 배고프다. 지창이 형이 방콕 맛집 예약해놨대. 똠얌꿍부터 망고까지 천국이라는데.”

“형은 똠얌꿍 먹어봤어요?”

“나 몇 번 먹어봤어. 누들 추가해서 먹으면 맛있어. 그거 못 먹어도 뭐 팟타이도 있고, 볶음밥도 있고, 몇 개는 먹을 만할걸?”

“우리 규슐랭님 믿습니다. 고독한 규식가님께서 맛있다고 하시면 무조건 맛있는 거잖아요.”

“규식가는 또 뭐야. 해성이 너 가끔 진짜 천재 같아.”

“방콕에 와서 천재가 되다.”

팔을 벌리며 칭찬의 기쁨을 만끽하는 해성을 보고 웃은 하진이 내내 별말이 없는 정우를 슬쩍 바라보았다. 정우가 그런 하진을 내려 보며 뭔가 물으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

지창이 예약해 둔 식당은 아레나에서 그리 멀리 떨어진 곳이 아니었다. 안내를 받아 안으로 들어가자 지창이 미리 주문해 둔 음식들이 차례대로 나오기 시작했다. 태국 음식이라고 하면 가장 먼저 떠올릴 음식들이 금세 테이블 위를 가득 채웠다. 하진은 멤버들을 따라 음식들 사진을 찍었다.

“잘 먹겠습니다!”

잔을 높이 들고 건배한 하진이 시원한 맥주를 먼저 한 모금 마셨다. 그리고 테이블 위에 놓인 음식들을 조금씩 맛보았다.

정말 못 먹겠다 싶은 음식은 없지만, 그래도 맛있다는 생각이 드는 음식이 몇 가지 있었다. 하진은 팟타이와 볶음밥을 접시에 덜어 조금씩 먹었다. 그리고 먹기 좋게 손질되어 잔뜩 쌓여 있는 망고를 먹기 시작했다.

“하진아, 망고 먹는 거 사진 찍어서 공계에 올리자. 너 망고주스 광고 들어올걸.”

영우의 말에 웃은 하진이 포크로 망고를 찍어 들고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쉽게 볼 수 없는 하진의 애교에 영우와 해성이 얼른 카메라를 켜 그런 하진을 찍기 시작했다.

“우리 강댕댕 기분 좋아 보이네. 문혁이 만나서 그런가?”

지워진 줄 알았던 문혁의 이름이 나오는 것에 맥주를 마시던 정우의 눈썹이 일그러졌다. 정우는 문혁의 이름을 소리 낸 해성을 한 번 바라보았다.

“문혁이 걔가 진짜 하진이 바라기잖아. 하진이 여자였으면, 자기 아이돌 바로 때려치우고 결혼했을 거라고 그러잖아. 난 그거 진심 같아.”

“그냥 저 놀리려고 하는 말이에요.”

“아니야. 문혁이 진짜 너 좋아하잖아. 스케줄만 겹치면 우리 대기실 와서 너부터 찾는 앤데.”

“그러지도 않아요. 이번에 그냥 오랜만에 본 거라 그래요.”

“자꾸 부정하는 거 보니까 뭔가 촉이 오는데?”

장난스러운 해성의 말에 하진이 웃었다. 그런 하진을 본 영우가 망고 껍질을 조금 잘라 해성에게 던졌다.

“야, 부부 이혼하면 네가 책임질 거야?”

“아! 맞다. 헐.”

“정우가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여기 있는데 뭔 소리야, 진짜. 우리 정우가 문혁이보다 못한 게 뭐냐? 키도 더 크지, 얼굴 비교할 수도 없지, 노래 잘해, 거기다가 연하야. 길 가는 사람 백 명 잡고 물어봐라. 차정우 대 정문혁.”

“백 명 의견이 왜 필요해. 우리 하진이만 선택하면 되지. 두구두구두구! 과연 강하진의 선택은?”

입으로 당첨자를 발표할 때의 북 치는 소리를 내는 형들을 보던 하진이 정우의 팔을 살짝 잡았다.

“당연히 정우죠. 어떤 경우에도 당연한 거예요, 그건.”

“아, 눈물 나는 순정. 진짜 너희 둘은 책 한 권 나와. 연습생들의 텃세 속에서도 해맑던 갑자기 들어온 신입 연습생과 데뷔 조 예비 1번의 국경 없는 우정!”

거기서 국경이 왜 나오냐고 혀를 차는 영우에게 똑같이 망고 껍질을 던진 해성이 웃기 시작했다. 금세 평소처럼 티격태격 장난스럽게 다투는 해성과 영우를 본 하진이 슬쩍 정우에게 얹었던 손을 떼어냈다. 호텔에서부터 살짝 뭉친 감정들이 아직 전부 풀어지지 않은 것 같아 정우와 편히 시선을 맞추기가 어려웠다.

모든 음식을 싹 다 비우고, 망고 스무디와 각종 디저트까지 전부 비운 뒤에야 식당을 나섰다. 인규와 영우는 매니저와 함께 야시장에 갔고, 해성은 오늘 공연 스태프로 있는 고등학교 동창을 만나러 갔다. 하진은 잠시 고민하다가 호텔에 가 쉬는 것을 택했다. 혹시라도 문혁에게 연락이 오면 나가서 놀고 와도 된다는 허락도 받았다. 정우는 머리가 아프다는 이유로 하진과 함께 호텔로 향했다.

“머리 많이 아파? 훈이 형이 약 가져왔다고 했는데. 내가 가서 달라고 할게.”

“됐어요. 아까보다 나아졌어요.”

방으로 들어온 하진이 모자를 벗어 침대 위로 툭 던지는 정우를 바라보다가 다가가 이마를 짚어보았다. 다행히 열이 있지는 않았다.

“열은 없는 것 같아. 다행이다.”

“먼저 씻을게요.”

“아, 응!”

정우는 캐리어에서 갈아입을 옷을 꺼내 든 채 하진을 바라보았다. 저와는 달리 하진은 전혀 옷을 갈아입을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정문혁에게 연락이 오면 당장이라도 나갈 것만 같아 기분이 자꾸 일그러졌다.

“…….”

그러거나 말거나 뭔 상관인가 싶어 몸을 돌린 순간, 진동 소리가 들렸다. 정우는 침대 위에 놓인 불이 켜지지 않는 제 휴대폰을 한 번 바라보았다. 제 것이 아니라면 하진의 휴대폰에서 난 소리일 수밖에 없었다. 정우는 그대로 뒤돌아 휴대폰을 보고 있는 하진을 바라보았다.

“누구예요?”

“어? 아, 문혁이.”

문혁이. 부드럽게 그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에 짜증이 치솟았다. 정우는 뭔가를 적고 있는 하진에게 성큼 다가가 휴대폰을 빼앗아 들었다. 그리고 나올 수 있냐고 묻는 메시지를 대충 확인했다.

“…뭐 하는 거야?”

“못 간다고 해요.”

정우는 휴대폰을 든 채 하진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하진은 아직 정문혁의 메시지에 답을 하지 않은 상태였다.

“이리 줘.”

“못 간다고 할 거예요?”

“…내가 알아서 할게. 갑자기 뺏어서 이러는 건… 아니라고 생각해.”

“형이 여기저기 흘리고 다니는 건 맞는 거고?”

짜증이 묻은 정우의 목소리에 놀란 하진이 눈이 동그래졌다. 목소리도 목소리지만, 그 목소리가 만들어낸 내용이 더 기가 막혔다.

“흘리고… 다니다니?”

“정문혁이랑 그렇게 붙어 있고 싶으면 애초에 그 새끼한테 매달리지 왜 나한테 그랬어요?”

“…차정우.”

“여기까지 와서 뭐 하는 거냐고. 아, 여기까지 왔으니까 고삐 풀려서 막 나가고 싶은 뭐 그런 거예요?”

“…말 그렇게 하지 마.”

“내가 뭘 어쨌는데. 형이 지금 짜증 나게 만들잖아요. 방에 들어왔으면 여기에나 곱게 붙어 있지, 그 새끼들이 뭐라고 또 거기를 기어나간다고 난리예요.”

말이 잘 나가지가 않았다. 이렇게까지 말하려는 건 아니었는데, 정말 온 정문혁의 메시지를 눈으로 보고, 긍정적으로 지금 어디에 있는지 적다 끊긴 하진의 말을 보니 머리가 확 돌았다. 이상한 기분이었다. 하진을 이 방에서 한 발자국도 나가게 놔두고 싶지 않았다. 절대 그 짜증 나는 새끼와 마주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줘, 빨리.”

“싫어요.”

“…이렇게까지 해야겠어?”

“우리 사귀잖아요. 연애하잖아. 형은 내 건 거잖아요. 나한테 이럴 자격 충분해요.”

“…….”

손에 들고 있던 옷을 아무렇게나 버린 정우가 하진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그리고 손에 든 하진의 휴대폰을 침대 위로 던졌다. 하진의 고개가 그쪽으로 돌아간 순간 정우의 손이 하진의 얼굴을 감싸며 키스했다. 손의 힘과 밀어오는 몸의 힘에 하진이 그대로 밀려났다.

“하지… 흣…….”

하지 말라는 목소리가 숨과 뒤섞여 흘렀지만, 정우는 하진을 놓아주지 않았다. 그대로 더 뒤로 밀린 하진의 등이 에어컨 바람으로 차가워진 창으로 닿았다. 하진은 그대로 창과 정우의 몸 사이에 갇힌 채 정신없이 입안을 헤집는 정우의 혀를 받아들였다. 다른 생각은 하나도 할 수 없을 만큼 몰아쳐 마구 엉망으로 만드는 그 움직임에 조각난 감정들이 열을 머금고 몰려들었다.

“아…… 흐읏… 응…….”

젖은 정우의 입술이 급히 하진의 목덜미를 머금었다. 하진은 그와 동시에 제 셔츠 밑으로 파고드는 손길에 몸을 떨었다. 뭔가 말을 하기는 해야 하는데 정신이 하나도 없어 그 어떤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너무 빨… 라……. 아, 잠, 잠깐… 읏, 거기만 그렇게 하지…….”

집요하게 솟은 유두를 괴롭히는 정우의 손길에 하진이 고개를 저었다. 정우가 하진의 목덜미에서 입술을 떼며 그 달아오른 얼굴을 눈에 담았다.

“하지 말라고? 왜요. 내가 안 하면 정문혁이랑 이러게?”

일어나지 않았고, 또 일어날 일도 없는 일을 상상한 정우가 인상을 쓰며 하진을 잡아당겼다. 하진은 정우의 악력에 이끌려 침대에 쓰러지듯 누웠다. 몸을 순식간에 덮으며 올라타는 정우를 더는 밀어낼 수 없었다. 애초에 저는 차정우를 밀어낼 수 있는 방법 같은 건 알지도 못하고, 또 제 얼굴을 마주 보며 가까이 다가오는 정우가 좋기 때문이었다. 고개를 돌리지 않아도 정우의 얼굴이 보여 좋았다. 눈을 감았다 떠도 사라지지 않고, 제 몸을 만지고, 먹어치우며 흥분하는 그 얼굴을 볼 수 있어 좋았다.

“…조금만, 천천히…….”

“싫어.”

싫다고 말은 하지만, 바지를 벗기는 손길도 조금 부드러워지고, 다리를 벌리는 힘도 조금은 약해졌다. 하진은 속옷까지 발목으로 내린 정우가 다리를 활짝 벌리는 것에 고개를 살짝 돌렸다. 정우가 그런 하진의 턱을 잡아 돌리며 다시 입술을 겹쳤다. 혀가 입속으로 파고드는 것과 동시에 손가락 두 개가 밑으로 파고들었다. 하진은 그 적나라한 침입을 더 꽉 감쌌다. 입술이 맞물린 채 정우가 작게 웃는 느낌이 났다.

“이러면 못 풀어줘요. 움직이지를 못하잖아.”

입술을 살짝 뗀 채 정우가 아래 꽂은 손가락 두 개를 흔들었다. 안 그래도 좁아 빡빡한 아래에 힘까지 잔뜩 들어가니 손가락은 완전 내벽에 휘감겨 갇혀 버린 꼴이 되었다.

“손가락은 모르겠는데, 계속 이렇게 조이면, 형이 좋아하는 내 자지 끊어져요.”

노골적으로 말하는 정우와 눈을 맞춘 하진의 얼굴이 확 빨개졌다. 정우가 그런 하진을 보며 웃었다.

“뭐가 부끄러웠어요? 조인 거? 자지?”

“…그렇게 말하지… 마…….”

“왜요. 양아치 같은가.”

“…….”

그 순간 침대를 울릴 만큼 강한 진동이 울렸다. 하진과 정우의 고개가 동시에 돌아가 침대 위에 아무렇게나 놓인 휴대폰을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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