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포제-77화 (77/122)

#77

하진은 정우에게 몸을 기울여 밀착한 채 뒷걸음쳤다. 저보다 크고 단단한 몸이 밀고 들어오는 것을 막을 재간은 애초에 없었다. 아니, 그런 것을 생각할 여유나 마음 같은 게 없었다. 그저 정우의 목을 두 팔로 가득 끌어안은 채 입속을 헤집는 그 느낌에 집중할 뿐이었다.

“…아…!”

샤워부스 유리로 등이 닿는 순간 놀란 하진이 작게 탄성을 터뜨렸다. 살짝 입술이 떨어진 채 시선이 마주했다. 아니, 마주치고 있는지도 제대로 파악할 수 없을 정도로 너무나도 가까운 거리였다. 하진은 그대로 눈을 감으며 다시 맞물리는 입술을 받아들였다. 다시 미끈하게 문질리는 혀끝에 머릿속이 아찔해졌다. 정우가 저를 원하고 있다는 강렬한 느낌에 몸이 달아오르는 와중에도 등줄기가 다 찌릿거렸다.

“아, 천천히…….”

“싫어요.”

옷 속으로 단숨에 파고드는 손길은 여유가 없었다. 하진은 제 바지와 속옷을 한 번에 내리는 정우의 손을 잡아보았지만, 막을 수 없었다. 정우와 닿는 순간은 매번 처음처럼 떨렸다.

“정우야…….”

“네.”

짧은 대답에는 여유가 없었다. 하진은 왜 이런 순간에 머뭇대는지 원망하는 것 같은 정우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나가서… 하면 안 돼?”

“그럴 시간 없는데.”

“얼굴… 얼굴 보면서 하고 싶어……. 여기서는 얼굴 보면서 하기 힘들잖아.”

“얼굴 보는 게 그렇게 중요해요? 섹스가 뭐 꼭 얼굴 보고해야 하는 건 아니잖아요. 얼굴 보면서 하는 게 자세가 더 불편하지 않나.”

“…넌 내 얼굴 보면서 하는 게 싫어?”

진지하게 파고드는 하진의 말에 정우가 몸을 떼어냈다.

“원래 이런 걸 다 따져야 하는 건가.”

“따지는 게 아니라…….”

그저 정우의 얼굴을 보고 싶을 뿐이었다. 섹스하며 눈을 맞추기도 하고, 입술을 마주하기도 하고, 저를 향해 쏟아지는 그 시선에 잠기고 싶기도 했다. 그냥 아무것도 안 해도, 가만히 눈을 맞추고 싶었다. 그저 교감하고 싶을 뿐이었다. 하진에게는 단순한 쾌락보다, 쾌락이 빠진 시선의 마주침이 더 중요했다.

“됐어요. 어차피 리허설도 해야 하는데 쉬지 뭐.”

몸을 돌려 욕실을 나가는 정우의 등을 보던 하진이 입술을 꾹꾹 깨물며 바닥으로 흘러내린 바지와 속옷을 다시 올렸다. 한동안 느끼지 못한 수치심이 온몸을 찌르고 지났다.

“…….”

섹스를 하면서 쾌락 그 이상을 바라는 제가 이상한 걸까. 넣기 편하도록 뒤를 내어주고, 그냥 교감 따위는 하나도 없이 몸만 섞으면 되는 건데 제가 유난을 떨고 있는 걸까. 하진은 쏟아지는 차가운 물을 얼굴에 몇 번이고 끼얹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게 왜 무리한 요구처럼 받아들여지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

정우가 말하는 연애는 뭘까. 전에는 제가 원하고 매달려야 할 수 있던 섹스를 먼저 자유롭게 할 수 있게 된 거? 그건 하진이 생각하는 연애가 아니었다. 정말 몇 번을 생각하고 또 생각해도 아니었다.

한참이나 찬물로 세수를 하고 손을 씻은 하진이 방으로 들어갔을 때, 정우는 침대에 걸터앉아 있었다. 조금 전까지 서로 몸을 붙이고 뜨겁게 달아올랐었다는 것을 믿을 수 없을 만큼 분위기가 건조했다. 하진은 어색해진 공기를 깰 말도, 행동도 찾지 못하고 창가 앞에 있는 작은 테이블로 가 앉았다.

“얘기 좀 해요.”

“…해.”

“화났어요?”

“…화가 난 게 아니라…….”

다짜고짜 화났냐고 묻는 정우의 말에 정말 화가 날 것 같아 마음을 누른 하진이 뜨거운 감정을 삼킨 뒤에야 다시 입을 열었다. 바깥을 보고 있던 시선이 정우에게 닿았다.

“…난 너랑 이렇게 여기 같이 있기만 해도 좋아. 넌 아니라는 거 알아. 사람이 한순간에 달라질 수 없는 거잖아. 내가 또 허튼짓하면 안 되니까, 그게 아니라면 어쩌면 불쌍해서 이러는 걸지도 모르지. 나도 알아. 네가 연애하자고 했다고 진짜 날 사랑하게 됐겠구나, 그런 생각 바로 할 만큼 바보 아니야.”

“형은 너무 복잡하게 생각하는 것 같아요.”

“…….”

“간단하게 생각해요. 나는 형이 원하는 걸 해주는 거예요. 형은 나랑 있기를 원했잖아요. 내가 다른 사람이랑 엮이는 거 싫다고 했잖아요. 그래서 안 그런다구요. 다른 사람 아니라 형이랑 다 해준다고.”

어디에서 생각이 어긋난 건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하진은 작게 내려앉아 흐르는 숨을 내쉬었다. 몹시 슬프고 참담할 마음이 생각보다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그러면 나는… 해줘서 고마워. 그 말만 하면 되는 거야?”

“누가 그러랬어요? 형이 원하는 대로 해주는데, 도대체 뭐가 그렇게 복잡하고, 불만이냐고 묻는 거예요. 굳이 그렇게 해석을 다 해야 해요? 그냥 섹스하고 싶으면 하고, 키스하고 싶으면 하고 그러면 안 되는 거야?”

“…….”

손에 꽉 쥐고 있던 감정이 터져버린 것 같았다. 손가락 사이를 타고 알알이 흘러내려 잡을 수도 없게 사방으로 흩어졌다. 하진은 손을 흠뻑 적신 감정들을 내려 보았다. 제가 붙잡고 있던 게 감정이 아니라 허상이었다는 걸 알아버린 순간, 바보처럼 눈물이 흘렀다.

“울지 말고 웃어요, 형. 해달라는 거 다 해주는데 짜증 나게 왜 자꾸 울어.”

“…….”

툭 터져 나온 정우의 말에 하진이 눈을 깊게 감았다가 떴다. 이 상황 역시 전부 제가 만든 것 같았다. 그동안 제가 그렇게 굴지 않았는가. 제발 섹스해 달라고, 너 원하는 대로 박아만 달라고, 괜찮으니까 해주기만 해달라고. 하진은 뺨을 흠뻑 적신 눈물을 손으로 아무렇게나 문질러 닦았다.

“…짜증 나게……. 해달라는 거 다 해주는데…….”

정우의 말을 숨처럼 멍하니 곱씹은 하진이 입술을 꾹 다물었다가 천천히 다시 열었다.

“…그래. 정우 네가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다.”

“…….”

“내가 너한테 계속해 달라고 매달렸으니까. 그래도 매달리면 네가 해주는 게 섹스밖에 없어서… 그렇게라도 너랑 닿고 싶어서, 내 몸이라도 네가 좋아해 주면 좋겠어서… 그래, 내가 매달렸어. 해달라고 했고, 네 말처럼… 발정 났었어. 그래, 그랬어.”

“…….”

“…난 뭐가 달라졌는지 모르겠어. 늘 내가 시작하던 섹스를, 네가 먼저 시작하게 됐다는 거?”

“그만 해요.”

“…애처럼 굴지 마.”

“뭐라구요?”

“듣기 싫은 말도 들어.”

더 이상 하진의 깊은 마음을 듣고 싶지 않아 자리에서 일어난 정우가 조금 놀란 눈으로 하진을 바라보았다.

“전에도 말했지만……. 내가 널 좋아한다고 해서… 네가 날 우습게 볼 이유는 없어. 네가 나랑… 진짜든 가짜든 연애를 하기로 마음먹었으면, 더… 더 그러면 안 돼.”

“…….”

“…마지막으로 말할게. 난 섹스만 해주면 만족해서 좋아하고… 안 그래. 그런 마음으로 널 좋아하는 거 아니야.”

“…….”

“…정우 너랑 다른 것도 하고 싶어. 그냥 손도 잡고, 얘기하다가 잠들기도 하고, 예전처럼 같이 몰래 야식도 만들어 먹고… 그냥 눈만 마주쳐도 웃고, 그냥 그런 거.”

남들이 보면 저게 뭐 특별한 일인가 싶은 그런 것들을 하고 싶었다. 정우와 일상을 살고 싶었다. 같이 보내는 하루가 너무 짧아서 잠들고 싶지 않은 그 순간을 기억하고 싶었다. 거창한 것을 바란 건 아니었는데, 정우에게는 저의 그 사소함이 가장 어려운 일이었던 모양이었다.

“말이 심했어요. 미안해요.”

“…….”

다시 침대에 무너지듯 주저앉은 정우가 사과했다. 하진은 젖은 속눈썹을 들어 올려 그런 정우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최대한 아무렇지도 않은 목소리를 내며 일어났다.

“알았어. 나도 여기까지 와서 이렇게 할 얘기는 아니었는데……. 일단 우리 좀 쉬자. 피곤해서 예민해졌을 수도 있잖아. 난 비행기에서 내내 자기만 했는데도 또 졸려. 리허설도 시간 오래 걸릴 거 아냐. 무대가 워낙 많아야지.”

분위기를 완전히 망치고 싶지 않았다. 여기까지 와서 정우와 내내 어색하게 머물다가 돌아가고 싶지 않기 때문이었다. 하진은 구김 하나 없이 정리된 침대 이불 안으로 들어가 푹신한 베개를 목 뒤에 대고 기대어 누워 눈을 감았다.

“…….”

그 무엇으로도 가릴 수 없는 얼굴 위로 정우의 시선이 닿아오는 게 느껴졌지만, 하진은 끝까지 눈을 뜰 수 없었다. 10분 안에 로비로 내려오라는 단체톡이 울릴 때까지, 그렇게 내내.

***

방콕은 무척이나 더웠다. 조금만 움직여도 땀이 나고, 덥다는 말이 저절로 흘러나왔다. 공개방송을 할 공연장도 안에 에어컨을 풀가동 시켰음에도, 조명이 세고, 사람이 많아 그런지 더위를 피할 수는 없었다.

“여기가 무슨 아레나라고 했는데, 진짜 크네요.”

“임팩트 아레나? 그런 이름이었던 것 같은데.”

“아, 맞다. 진짜 임팩트 있네. 내일 여기 다 차면, 멋있겠다. 아까 지창이 형이 그러는데 우리도 내년부터 투어 하잖아요. 여기도 대관했다던데요. 미리 해 본다고 생각하래요.”

“아, 그래? 일정 정확히 안 나온 줄 알았는데.”

“슬슬 나오나 봐요. 아, 떨린다.”

멤버들과 무대 앞 관객석에 앉아 다른 가수들의 리허설을 구경하던 하진은 해성과 인규가 나누는 이야기를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인규를 보고 말하던 해성이 그런 하진과도 눈을 한 번씩 맞추며 웃긴 표정을 지었다. 결국 빵 터져 웃은 하진이 금세 열이 오른 얼굴에 손부채질을 해댔다.

“어! 강하진!”

갑자기 들리는 이름에 고개를 돌린 하진은 저를 보며 활짝 웃고 있는 이유나와 최여윤을 바라보았다. 두 번인가 활동 시기가 겹쳐 인사를 나누다가 그래도 안부 정도는 물을 정도의 사이까지는 된 걸그룹 MRV의 멤버들이었다.

“하진이 안녕!”

관객석 조금 위로 올라가다가 멈춘 유나와 여윤이 하진이 앉은 쪽으로 가까이 다가왔다. 하진은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랜만이네.”

“그러게. 괜찮아? 몸은 어때? 완전 세상을 뒤집었던데.”

“아… 괜찮아. 그냥 별것도 아닌데… 너무 요란하게 아팠지.”

“괜찮다면 다행이다. 걱정했잖아.”

걱정스러운 얼굴로 보는 유나와 여윤에게 괜찮다고 웃은 하진이 괜히 주변을 슬쩍 바라보았다. 혹시 이런 상황조차 기삿거리가 되지는 않을까 걱정이 되기 때문이었다.

“나랑 스캔들 나는 게 그렇게 싫어?”

“어? 아니, 그런 거 아냐.”

“나도 조심하라고 엄청 잔소리 들어서 조심하는 중이야. 근데 넌 기사 보고 처음 보는 거라 걱정돼서 그냥 지날 수가 있어야지. 무튼 괜찮다니 다행이야. 리허설 파이팅. 무대 잘 볼게.”

“응. 나도 잘 볼게. 또 보자.”

하진에게 손을 크게 흔든 유나와 여윤이 다시 멀어지며 위로 올라가는 것을 본 하진이 자리에 앉았다. 한 번도 옆을 보지 않고 앞만 보고 있던 정우의 시선이 그제야 하진에게 살짝 닿았다.

“강아지!”

그때 갑자기 저 앞에서 큰 소리가 들렸다. 하진은 물론이고 정우와 다른 멤버들까지 그 소리가 나는 쪽을 바라보았다. 그 사람을 먼저 발견한 해성이 크게 웃으며 미친놈이라 외쳤다. 정우는 하진을 향해 강아지라 외치며 뛰어 올라오는 그룹 UP5의 멤버 문혁을 못마땅하게 바라보았다.

“우리 강아지 괜찮아? 어?”

오자마자 하진의 옆에 앉은 문혁이 그대로 얼굴을 감싸 쥐었다. 앞을 보던 정우의 시선이 기어이 움직여 하진의 뺨을 감싼 문혁의 손에 닿았다.

“나 기사 보고 기절하는 줄 알았잖아. 내 톡 봤어?”

“…아, 봤어. 답 못 해서 미안해. 내가 그럴 경황이 없어서.”

“당연히 못 하지. 수백 개는 왔을 텐데. 많이 아팠어?”

“그냥 별거 아니었어.”

“힘들었지. 고민 있는 거 아냐? 있으면 나 불러. 내가 대기조잖아. 나 차 샀거든. 부르기만 해. 내가 숙소 앞까지 데리러 갈게.”

정우는 리허설이 이어지고 있는 무대를 고집스럽게 바라보았다. 이렇게 시끄러운데, 도대체 왜 옆에서 하는 이야기가 잘 들리는 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야, 문혁아. 형은 안 보이냐. 하진이만 보이지?”

“형이 왜 안 보여. 하진이 먼저 보이고 그다음에 형도 보이지. 나 하진이 짱팬이잖아.”

“그러다가 둘이 스캔들 난다.”

“난 언제든 환영.”

하진을 보고 씩 웃은 문혁이 뒤에서 저를 부르는 다른 멤버의 목소리에 뒤를 돌아보며 일어났다.

“이따 밤에 전화할게. 여기까지 왔는데 우리 동갑들 모여서 술 한잔하자.”

술 마시는 시늉을 한 문혁이 손을 흔들다가 하진의 옆에 앉은 정우의 모자 위를 한 번 꾹 눌렀다.

“야, 넌 형이 왔는데 아는 척도 안 하냐. 하여튼 정도 없다니까.”

신경질이 난 것 같은 정우의 눈을 보고 웃은 문혁이 다시 하진에게 손을 흔들며 멀어졌다. 그런 문혁을 따라 짜증이 묻은 시선을 길게 잇던 정우가 모자를 한 번 벗었다가 고쳐 썼다.

씨발, 짜증 나게. 입술 사이에서 작게 흐른 말이 요란한 음악에 묻혀 사라졌다.

“…….”

아니, 사라지지 않는 것도 분명 존재했다. 문혁의 손이 하진의 뺨에 닿고, 눈을 맞추며 웃던 그 장면들은 머릿속에 달라붙어 사라지지 않았다. 아무렇지도 않게 하진에게 손을 대는 것도, 또 만지는데 아무렇지도 않게 가만히 있는 하진도 다 마음에 들지 않았다.

“…….”

그중에서도 가장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은 이딴 거에 불쾌감을 느끼고 있는 바로 자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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