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포제-75화 (75/122)

#75

오 실장과 이야기를 나누고 난 뒤에야 하진은 어느 정도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여론도 불화설에 더 이상 초점을 맞추지 않게 되었고, 자살 기도라는 말도 사라졌다. 악의적인 말을 하는 사람들의 흔적을 모아 팬들이 소속사로 보내고, 소속사 또한 이번에는 그냥 넘기지 않겠다는 뜻을 밝힌 뒤, 악의적인 기사나 댓글을 다는 것도 현저히 줄어들었다.

“숙소로 가는 거 아니에요?”

“애들 곧 도착할 거야. 스케줄 얘기도 해야 하고, 잊은 모양인데 너희 휴식기 끝났거든.”

“아… 맞다. 진짜 잊고 있었어요.”

“바로 앨범 준비 들어갈 건 아니고, 일단 이번 달 말에 뮤직초이스 방콕 공개방송 있는 것부터 준비해야 할 것 같아서. 하진이 너는 상태 봐 가면서 되는 만큼만 일단 하고. 체력 끌어올리고, 컨디션 만드는 게 중요하니까.”

“저 이제 괜찮아요. 전보다 잠도 잘 들고, 배고프다는 생각도 들고… 나아졌어요.”

“알아. 아는데 형 입장에서는 걱정할 수밖에 없고, 체크할 수밖에 없잖아. 이해하지?”

“그럼요. 형한테는 늘 죄송해요.”

“죄송하라고 하는 말 아니야. 다시 한번 잘해보자고 하는 말이지.”

미안한 얼굴을 한 하진의 어깨를 두드려 격려한 지창이 연습실 문을 열어주었다.

“애들 데리고 올게. 쉬고 있어.”

“네.”

연습실 안으로 들어간 하진은 텅 빈 내부를 바라보았다. 요즘 따라 유난히 옛날 생각이 많이 났다.

“…….”

연습실 안으로 정우가 움직이고 있었다. 세팅되지 않은 머리칼이 이마를 부드럽게 덮고, 한 번씩 눈을 간지럽힐 때마다 위로 쓸어올리는 우악스럽지 않은 손길. 입가로 번지는 웃음과 정확히 저에게 늘 닿아 있던 시선. 그냥 너무나도 당연하게 서로가 서로에게 가장 큰 의미였던 그 순간이 그리웠다.

「형은 후회한 적 없어요? 그냥 대학이나 다닐걸, 하고.」

언젠가 바깥이 너무 더워 에어컨을 틀고 연습해도 춤 한 번에 땀으로 흠뻑 젖던 그런 여름날, 정우가 물어온 적이 있었다. 후회한 적 없냐고.

「그런 후회는 한 적 있어. 왜 이쪽에 진작 관심 가져볼 생각을 안 했을까.」

「해 보니까 진짜 형이 갈 길이 여기였다는 게 막 느껴져요?」

한 번의 연습으로는 부족해 몇 번이나 연달아서 하다가 도저히 숨을 쉴 수가 없어 바닥으로 주저앉았었다. 몸을 세우고 앉아 있는 것도 힘들어 정우의 다리 위에 머리를 대고 누워버렸던 그 날을 하진은 똑똑히 기억했다.

「그건 아직 잘 모르겠어. 할수록 재밌기는 한데 내가 소질이 있는 건지, 잘하고 있는 건지 확신은 별로 없어.」

「그럼 왜요?」

「정우 너랑 더 빨리 만나서, 더 오래 연습했을 거 아냐. 시간 가는 게 아쉬워. 너 데뷔하고 나면… 이렇게 같이 연습도 못 하겠지?」

그때도 이미 좋아하고 있었던 건 아닐까. 순수한 우정이었던 걸까. 불순한 마음이 하나도 섞이지 않았던 그때의 나는 어디로 간 걸까. 하진은 고개를 숙여 제 얼굴을 내려 보던 정우를 떠올렸다.

「형 없으면 나도 하기 싫어요, 이제.」

「…….」

「꼭 같이 데뷔해요.」

땀으로 살짝 젖은 앞머리, 얼굴에 지던 부드러운 그늘, 삶의 목표가 바뀌던 그 순간. 눈을 감았다가 뜬 순간 발소리가 들렸다. 하진은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조금 놀라 고개를 돌렸다.

“…….”

머금고 있던 생각 속 정우보다 조금 더 마르고, 무심한 얼굴을 한 현재의 정우가 연습실 안으로 들어왔다. 날카로운 것들이 부드러운 생각들을 몰아냈다.

「형이 이겼어요.」

결론적으로는 그랬다. 목숨을 휘둘러 결국 이겼고, 백기를 든 정우는 연애를 해주기로 한 것이었다. 이겨서 얻어낸 연애. 그렇게라도 얻은 관계의 이름에 기뻐야 하는데, 이상하게 기쁘지가 않았다.

“하진아, 실장님한테 혼났어?”

“아니요. 혼날 줄 알았는데, 안 혼났어요.”

“다행이다. 실장님 좋을 땐 좋은데 무서울 땐 진짜 무릎 꿇고 싶게 무서워서 걱정했는데.”

“안 그래도 그럴 각오 하고 간 건데 다행이죠.”

“그치. 아니면 이 형이 딱! 문 열고 들어가서는! 제가 꿇겠습니다! 우리 막내는 죄 없습니다!”

영웅처럼 외치는 해성의 뒤에 선 정우가 그 어깨를 톡톡 손끝으로 두드렸다. 주먹을 불끈 쥐고 당장이라도 실장실에 올라갈 것처럼 굴던 해성이 뒤를 돌아보았다.

“막내는 전데요.”

“아, 맞다. 아, 진짜 가끔 진짜 진심으로 까먹는다니까. 하진이가 막내 같아.”

고개를 갸웃 기울이는 해성을 보고 웃은 정우가 하진에게 성큼 다가가 어깨에 팔을 둘렀다.

“그럼 제가 막내 넘겨줄게요. 이제 하진이가 막내 하자.”

장난스럽지만, 반말까지 하며 세게 나오는 정우를 본 해성과 영우가 야유를 보냈다. 그 상황에 가볍게 웃은 하진이 정우의 배를 주먹으로 아프지 않게 툭 쳤다.

“하진이 형 주먹 쥐셨다. 야, 정우야 빨리 기어.”

해성이 얼른 공손히 자세를 잡고 고개를 조아리는 것을 본 영우가 옆으로 서서 고개를 숙였다. 인규까지 나란히 서서 벌서는 것처럼 자리를 잡는 것에 웃은 하진이 형들에게 다가가 그 팔을 잡았다.

“진짜 제가 형들 때문에 웃어요.”

연습실이 확 시끄러워졌다가 잠시 가라앉는 순간 들어온 지창이 손뼉을 크게 멤버들을 집중하게 만들어다.

“자자, 방콕 무대에서 이제 타이틀, 리패키지 타이틀 이렇게 두 곡 하고, 한 곡 스페셜 무대 잔잔한 쪽으로 해주기를 바라는데 어떻게 할까? 꼭 전원이 서지는 않아도 되고, 둘이나 셋이 뭐 발라드 한 곡 불러도 되고. 기왕이면 대중적인 팝 쪽으로 해달라던데.”

지창의 말에 인규가 쓰고 있던 마스크를 내리며 말했다.

“정우랑 하진이가 하면 어떨까요? 전 목감기 때문에 연습하기가 힘들 것 같은데. 둘은 메보이기도 하고, 둘 조합을 좋아하기도 하구요.”

인규의 말에 하진은 정우의 눈치를 보았다. 저야 무대에 올라 노래를 하고, 그것도 정우랑 같이한다면 더없이 좋은 일이지만, 정우에게는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었다.

“전 좋아요. 어쿠스틱한 쪽으로 편곡하고 하면, 뭐 안무 익힐 필요도 없을 거고, 형만 괜찮으면 같이 골라서 연습할게요.”

정우가 먼저 흔쾌히 수락하며 대답하는 것에 이제 시선은 하진에게 몰려들었다. 하진은 지창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좋아요. 준비해볼게요.”

“좋아, 그럼 스페셜 무대는 둘이 하는 걸로 하고, 일본 데뷔 싱글 준비도 해야 하고, 이제 한국 미니 준비도 해야 하니까 앞으로 더 바빠질 거야. 너무 잘들 해주고 있는데 한 번 더 당부하고 싶은 게 있다면, 무슨 일 생기면 형한테 바로 말해. 그게 고민이든 뭐든, 생각해서 사소한 일이든 아니든 바로, 빨리 말을 해야 형이, 회사가 해결해 줄 수 있어. 하진이 들으라고 콕 집어서 하는 말 아니고, 너희 말 들어줄 사람 많다고 알려주는 거야. 알았지?”

지창의 말에 제법 진지한 대답 소리가 울렸다. 마지막으로 멤버들을 한 번씩 격려해 준 지창이 연습하라며, 연습실을 나섰다.

“아, 오랜만에 연습실 서니까 되게 이상하다.”

“근데 생각해 봐. 오랜만도 아니야. 한 일 년 지난 것 같은데 보름도 안 됐어.”

“헐, 진짜네. 극소름.”

“더 소름 끼치는 건 노래 나오면 알게 될걸. 몸이 마음대로 안 움직이는 매직.”

“그건 좀 억울하지 않냐? 자다 일어나서도 저절로 다 나오게 연습했는데, 며칠 안 했다고 삐거덕대는 거.”

“나 어젯밤에 오늘 연습할 거 걱정돼서 스트레칭 좀 하고 잤는데, 지금 근육통 왔어.”

해성과 영우의 대화를 들으며 팔을 쭉 펴고 스트레칭을 하던 하진이 작게 웃었다. 매일 연습을 하고, 무대를 하던 때와는 달리 정말 며칠 쉬었다고 몸이 좀 굳은 것 같았다.

“형.”

“…응?”

“곡 정해 볼까요?”

“아, 그러자.”

하진은 제 손목을 잡아 연습실 한쪽으로 데려가는 정우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한풀 누그러진 정우가 좋은데, 분명 좋은데 이 마냥 좋아할 수 없는, 좋아하면 안 될 것 같은 기분은 도대체 뭔지 알 수가 없었다.

“일단 한 다섯 곡씩 추려서 말해 볼까요? 대중적인 걸로. 겹치는 곡 있으면, 뭐 그걸로 하면 되고.”

“응, 그러자. 나도 찾아볼게.”

스트리밍 사이트에 들어가 곡들을 검색하던 하진은 맞은편에서 휴대폰 화면만 바라보는 정우를 흘끔 바라보았다. 분명 더 가까워졌는데, 더는 가까울 수 없는 관계의 이름을 가지게 됐는데, 어쩐지 단단한 벽이 생긴 것만 같았다. 눈으로 보면 보이지 않지만, 손을 뻗으면 닿는 그런 투명한 벽이.

“다 찾았어요?”

“어? 아… 응. 다 하긴 했는데.”

“같이 봐요, 그럼.”

하진은 곡을 메모해 둔 것을 정우에게 보여주었다. 곡 제목들을 눈으로 느릿하게 훑던 정우가 고개를 끄덕이며 제가 메모한 것도 하진에게 내밀었다.

“두 곡이나 겹치네. 둘 중에 하나 하면 되겠다. 형은 둘 중에 뭘 더 잘 알아요? 기왕이면 가사 숙지 된 게 좋잖아요.”

“난 여기 두 번째 곡. 고등학생 때부터 공부하면서 많이 듣던 곡이라 가사랑 완벽히 알아.”

“아, 나도 알아요. 그럼 이걸로 해요.”

“…응. 그러자.”

“쉽게 정해서 다행이네요. 엠알도 있던데, 바로 연습하면 되겠다.”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고, 행동하는 정우를 보며 하진은 제가 이상한 게 맞다고 생각했다. 욕심이 너무 많아서, 바라는 게 정말 너무 많아서 이러는 거라고.

“왜요?”

“…응?”

“아까부터 계속 보잖아요.”

“아…….”

“하고 싶어요?”

“어?”

“하러 갈까요?”

정우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순간 알아듣지 못하던 하진은 곧 그게 무슨 의미인지 너무나도 정확하게 알아버렸다. 왜 저는 매번 헤매고 있는 걸까. 정우가 말하는 것은 이토록 분명한데.

“…그런 거 아니야.”

“난 상관없으니까 언제든 말해요. 나도 말할 테니까.”

“…….”

다시 휴대폰 화면으로 시선을 옮기는 정우를 보던 하진이 입술을 꾹 물었다.

“…왜 넌 상관이 없는데?”

하지 말아야 할 말이라는 생각도 분명 있었다. 그냥 늘 그랬던 것처럼 듣고 지나가면 될 일이었다. 하지만 하진은 그러지 못했다.

“네?”

“…너도 상관있어야 할 일 아니야?”

“말이 그렇다는 거잖아요. 형이 예전 생각해서 괜히 하고 싶은데 말 못 할까 봐 내가 먼저 말한 거예요.”

“예전 생각? 너한테 제발 해달라고 매달리고, 부탁하고 그러던 거?”

“네. 또 그때처럼 보일까 봐 지금은 하고 싶어도 말 못 하고 그럴 것 같아서요.”

“…그때 내가 어떻게 보였는데?”

하진은 하나도 창피하지 않았다. 그때의 저도 분명 저였으니까 지우고 싶지 않았다. 지우고 싶다고 지워지는 일도 아니고, 없던 일로 하자고 정말 없던 일이 되는 것도 아니었다. 어떻게 해서든 사랑받고 싶었고, 사랑하고 싶을 뿐이었다.

“제정신 아니었다 이거지?”

“형.”

“그런데 정우야.”

“…….”

“미안한데, 나 지금도 제정신 아니야. 그때랑 별로 달라진 거 없어. 네가 날 봐주고, 화도 안 내고, 같이 있어 주니까 그럴 필요가 없는 것뿐이지.”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난 하진이 정우에게서 멀어졌다. 연습실 문을 여는 순간 복도에서 밀려든 바람이 얼굴을 뒤덮었다. 그 바람에 얼굴 위에 묻은 여러 감정의 얼룩이 흔들렸다. 마음이 쿡쿡 쑤시고, 머릿속이 엉망이지만 하진은 후회하지 않기로 했다.

“…….”

다시는 자신을 포기할 만큼 무너지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그러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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