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
시야가 아득했다. 길은 하나뿐이라 가기는 가야 하는데 너무 멀어 한숨부터 나는 그런 거리였다. 하진은 할 수 없이 걸음을 옮겼다. 한 걸음, 또 한 걸음 걷고 또 걸어도 전혀 달라지는 게 없었다.
거리가 줄어드는 것도 아니고, 주변에 보이는 게 달라지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계속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래도 하진은 멈출 수 없어 발을 움직이고 또 움직였다.
그렇게 얼마나 움직였을까. 감히 짐작할 수도 없는 저 먼 곳에서 아주 희미한 빛이 보였다. 그 빛을 보는 순간 하진은 하나의 이름을 떠올렸다. 차정우. 정우가 저기에 있다. 이 길을 지나지 않으면, 정우를 볼 수가 없다는 것을 알았다. 하진은 줄어들지 않는 길을 달리기 시작했다.
빛을 향해 몸을 던지는 그 순간, 얇은 눈꺼풀이 흔들렸다. 초점이 제대로 맞지 않아 뿌옇게 모든 것이 흔들렸다.
“하진아! 정신이 들어? 엄마야, 하진아.”
아주 먼 곳에서 엄마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진은 핏기 하나 없는 창백한 얼굴을 소리가 나는 쪽으로 돌렸다.
“엄마 보여? 괜찮아? 하진아, 엄마 목소리 들려?”
고개를 돌리자마자 눈동자에 맺히는 엄마의 얼굴을 본 하진이 울먹였다. 울려고 한 것도 아니고, 슬픈 것도 아닌데 저절로 눈물이 눈동자를 흠뻑 적시며 넘쳐 흘렀다.
“…엄마.”
“그래, 엄마야. 엄마 아는구나. 다행이다. 고마워, 엄마 불러줘서 정말 고마워.”
어떤 상황인지, 여기가 어디인지 머릿속에 정리가 되지 않았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기억은 나는데 이렇게까지 눈물이 날 일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하진의 부모님은 계속 병원에 있겠다는 의사를 밝혔지만, 지창의 만류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아무래도 이곳에 머무는 사람이 늘어나면, 그만큼 보는 눈이 많아지고, 소문이 나기 쉽기 때문이었다. 하진의 부모님을 믿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일이 일인 만큼 확실하게 수습을 해야 했다.
멤버들은 아침이 되어서야 하진이 깨어났다는 말에 병원으로 달려왔다. 혹시 단체로 몰려다니는 것을 누가 보고 이상하게 소문이라도 낼까 싶어 각자 택시를 타고, 한 명은 정문에 또 한 명은 응급실 앞, 각각 다른 곳에 내려 올라갔다.
“하진아!”
병실 안으로 들어서며 마스크를 벗은 해성과 영우가 얼른 침대로 달려가 하진을 끌어안았다. 귓가에 닿는 우는 목소리에 하진은 손을 들어 해성과 영우의 어깨를 부드럽게 두드렸다.
“괜찮아? 수면제까지 먹을 정도면 말을 하지 그랬어. 혼자 왜 그렇게 힘들게 버텨, 응?”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 너 진짜 잘못되는 줄 알고… 이제 좀 살겠네.”
훌쩍이는 해성과 영우를 본 하진이 저에게 다가와 어깨를 두드리는 인규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그리고 그 뒤를 바라보았다.
“정우는 따로 온다고 해서 우리만 왔어. 정우도 많이 놀라서 좀 쉬어야 할 것 같기도 해서.”
“…아……. 네.”
“넌 괜찮아? 응?”
“…괜찮아요. 걱정하게 해서 죄송해요. 잠이 안 와서… 먹은 건데…….”
유세주가 준 수면제를 먹은 기억이 났다. 자고 싶어서, 정말 쉬는 동안 내내 잠들고 싶어서 입에 넣었었다. 깨어나지 않기를 바라기도 했었다.
“다시는 그러지 마, 알았지? 우린 너 죽은 줄 알았잖아. 정말 그러려고 일부러 먹거나 그런 건 아니지?”
“아픈 애한테 그런 무슨 소리야. 하진이가 왜. 자려고 먹은 거라잖아.”
“놀라서 그래, 나도. 아니라면 진짜 다행인 거고.”
걱정스러운 얼굴을 한 형들을 보면서도 하진은 비어 있는 정우의 자리를 바라보았다. 키가 가장 커서 어디에 서 있든 늘 가장 먼저 보일 그 얼굴이 보이지 않아 마음이 아팠다.
“얘들아! 너희 빨리 가야겠다. 어디서 샌 건지 기자들 왔어. 지금 별관 쪽 앞에 훈이가 차 세우고 있다니까, 그쪽으로 가자. 거기까지는 안 갈 거야. 빨리. 하진아, 잠깐만 있어. 여기 병동에는 절대 아무나 못 올라오니까 외부인 들어올 일 없을 거야. 형 빨리 애들 보내고 올게.”
“네…. 다녀오세요.”
숙소에서 보자고 인사하는 멤버들에게 손을 흔든 하진은 나가기 전 다시 가까이 와 휴대폰을 주는 영우를 올려보았다.
“심심할 것 같아서 챙겨왔어. 기사 뜨고 하면 그런 건 보지 말고.”
“네…. 고마워요, 형.”
“고맙기는. 올 수 있으면 또 올게.”
“…네. 가세요.”
마지막으로 병실을 나가는 영우의 뒷모습을 보고, 눈을 감았다가 뜨자 혼자가 되었다. 하진은 가만히 고개를 돌려 병실 안을 살폈다. 수액을 맞거나 한 적은 있지만, 이렇게 쓰러져 입원까지 한 것은 처음이었다. 솔직히 꿈인지 현실인지 분간이 잘 가지 않았다.
“…….”
정우는 왜 오지 않은 걸까. 이런 상황에서도 나를 보고 싶지 않은 걸까. 무의미한 생각이라 여기면서도 자꾸 넘쳐 흐르는 정우의 생각을 주워 담을 수가 없었다. 하진은 제 얼굴을 타고 흘러내려 온몸, 침대 위, 바닥까지 전부 적시는 정우를 바라보았다.
“…….”
나는 이런 상황에서도 네가 보고 싶어. 나 정말 미친 거 맞지. 그치. 지금까지 깨어나지 않았으면, 이런 생각도 하지 않을 텐데. 네가 오지 않아 서운한 마음도 들지 않을 텐데. 엄마는 더 많이 울었겠지?
“…….”
작게 고개를 저어 생각을 흩트린 하진이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정우에게 전화해볼까 잠시 생각하다가 멈추고, 포털 사이트에 들어가 볼까 하다가 또 멈추었다. 그 무엇도 할 용기가 없기 때문이었다. 한숨을 내쉰 하진이 손등에 꽂힌 주삿바늘을 내려보았다.
“…….”
꼭 차정우 같다. 살갗을 뚫고 들어갈 때는 아프지만, 막상 피부를 뚫은 채 머물 때는 아픔이 느껴지지 않고, 빠져나갈 때는 또 아픈 게 정우와 똑같았다.
사랑을 시작할 때 아팠고, 아픈 상태로 계속 아프니 아픈 줄도 몰랐다. 그냥 아픈 줄 모른 채 머물고 싶었는데, 이제 빼내야 한다고 주삿바늘을 잡고 흔드는 정우의 그 날카로운 움직임에 아파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그리고 혼자 남은 지금. 겨우 지킨 피투성이가 된 주삿바늘은 여전히 몸속에 있었다.
“…….”
흔들어도 되니까. 그래서 나 또 아파도 되니까. 눈을 감았다가 떴을 때, 내 앞에 네가 있었으면 좋겠어. 화내도 되고, 욕해도 되고, 차가워도 돼. 그냥 나는 지금 네가 보고 싶어.
하진은 무너지듯 눈을 감았다. 얇은 눈꺼풀이 뒤덮은 눈동자로 열이 올랐다. 잠은 오지 않았지만, 하진은 한참이나 눈을 뜨지 못했다. 눈을 떠도 정우가 없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기에.
***
어디에서 말이 샜는지 정확한 경로는 알지 못하지만, 샐 곳은 사실 충분히 많았다. 병원에 있는 누군가가 봤을 수도 있고, 소속사에 있는 누군가가 친구에게 말을 흘렸을 수도 있었다. 냄새를 맡은 기자들이 병원으로 몰려들었고, 정확한 이유는 알지 못하지만, 아포제의 멤버 강하진이 새벽에 응급실로 실려 왔다, 라는 사실까지는 알려져 버렸다.
“골치 아프네, 정말.”
“…죄송해요.”
“아니야. 원래 감기 걸려서 수액 하나 맞으러만 와도 별말 다 나오는 바닥이잖아, 여기가.”
VVIP 병동이라 기자가 올라올 수 없는 곳임에도 더 확실히 하기 위해 경호원이 곳곳에 배치되었다. 병실 문 앞부터 엘리베이터로 가는 복도에 전부 배치되었고, 소속사는 자극적으로 사실 확인도 되지 않은 말들을 뿌려대는 언론을 통제하기 시작했다. 그런데도 실시간 검색어는 하진으로 도배되었다.
“다행히 사진은 없네. 입원 사실까지 부인하면 더 이상해지니까 그건 이제 인정하고, 거지 같은 말 안 나오게 해야겠다.”
지창은 소파에 앉아 계속 포털사이트를 검색하고, 새로고침을 할 때마다 두세 개씩 뜨는 새로운 기사들을 확인했다.
“자살 기도로도 모자라서 이제는 불화야? 진짜 말 막 지껄이네. 이래서 기레기들한테는 잘해줄 필요가 없다니까.”
골치 아프다는 듯 머리칼을 마구 헝클이며 짜증 난 목소리를 내는 지창을 바라보던 하진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곧 진동 소리와 함께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지창이 병실 안을 왔다 갔다 거리며 전화를 받았다.
“아, 네. 실장님. 죄송합니다. 미처 제가 알지 못한 상황이… 네. 네, 경호원 배치됐고, 기자들이 사진까지 건지지는 못한 것 같습니다. 사실 찍힐 시간도 아니었고, 멤버들도 잘 보내서… 네. 그럼요. 네, 바로 들어가겠습니다.”
통화를 마침과 동시에 어색한 침묵이 맴돌았다. 지창은 휴대폰을 겉옷 주머니 안으로 욱여넣으며 하진을 바라보았다.
“하진아. 형 실장님 호출이라 회사 좀 다녀올게.”
“네. 걱정 말고 다녀오세요.”
“혼자 괜찮겠어? 애들 오라 그럴까? 전화하면 올 거야.”
혼자 두는 게 아무래도 걱정된다는 매니저의 표정에 하진은 고개를 저었다.
“혼자 있을게요. 멤버들 오면 또 사진 찍힐 거고, 힘들 거예요.”
“그래. 걔들 와서 붙잡히기라도 하면… 아, 머리 아파. 그럼 형 금방 올 테니까 자고 있어. 나 오기 전에 불편한 거나, 필요한 거 있으면 침대 옆에 버튼 누르고. 따로 필요한 거 있으면 톡 해. 올 때 사 올게.”
“네. 다녀오세요.”
나가는 지창의 뒷모습을 눈에 담던 하진은 문이 닫히고 완전히 혼자 남겨진 뒤에야 긴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휴대폰을 꺼내 포털사이트에 접속했다. 아까는 용기가 나지 않았는데, 매니저 형도 그렇고, 소속사도 그렇고 난리가 난 것을 보면 저도 이 상황을 제대로 알고 있어야 할 것 같았다.
강하진, 강하진 자살 시도, 강하진 입원, 아포제, 송인규, 강하진 병원, 차정우.
“…….”
실시간 검색어는 온통 저에 대한 것으로 가득 차 있었다. 강하진. 익숙한데 낯선 저의 이름을 바라보던 하진은 마지막에 적힌 차정우라는 이름으로 시선을 옮겼다. 처음부터 그 이름을 보기 위해 들어온 것처럼 시선은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차정우라는 이름을 눈에 담는 순간 감정들은 사라지고, 감각만이 몸과 마음을 저릿하게 조여 왔다.
“…….”
더는 생각할 일이 없을 줄 알았다. 그렇게 되기를 바랐으니까. 숨을 쉬고, 계속 버티며 정우를 떠올리지 않을 방법은 없기에 잠들 수밖에 없었다. 적어도 자는 동안에는 죽을 만큼 아프지는 않으니까. 그런데 결과가 이랬다.
머리가 지끈댈 만큼 따라붙는 상념들을 애써 떨친 하진이 가장 위에 보이는 제 이름을 눌렀다. 손끝에 닿는 이름은 몹시 차가웠다.
<단순 해프닝? 자살 시도? 인기 아이돌 그룹 아포제의 멤버 강하진 비밀리 입원> 자극적인 제목이지만, 틀린 부분은 하나도 없었다. 하진은 단순 해프닝이라는 말을 가만히 보다가 기사를 확인했다.
인기 아이돌 그룹 <아포제>의 멤버 강하진(22) 씨가 오늘 새벽 4시 20분경, 서울의 S병원 응급실로 긴급 이송, 5시경에는 VVIP 병실에 입원했다. 소속사인 한영엔터테인먼트 측은 ‘많은 스케줄을 소화하다가 쌓인 피로와 스트레스로 쇼크가 와 쓰러졌을 뿐이니, 억측을 삼가주기를 바란다.’고 전했다. 또 세간에서 퍼지는 ‘자살기도설’에 대해 묻자 ‘말도 안 되는 소리다. 말도 안 되는 말로 강하진은 물론 멤버들도 큰 상처를 받고 있다. 법적으로 처리할 것.’이라며 자살기도설에 대해 일축했다.
자신에게 닥친 일들의 경과를 떠올리지 못하고, 기사를 통해 알게 되는 기분은 그리 좋지 않았다.
“…….”
또다시 지끈대는 머리에 눈을 깊게 감은 하진이 휴대폰을 내려놓았다. 쿵쿵 세게 뛰는 심장과 함께 머릿속도 무언가로 내리치는 것처럼 징징 울려댔다. 하진은 그 사이로 들려오는 노크 소리에 감고 있던 눈을 떠 문을 바라보았다.
의사 선생님도 저녁 회진 때 다시 온다고 했고, 부모님과 멤버들도 모두 왔다 간 상태였다. 아무나 들어올 수 없게 해서 따로 올 사람이 없을 텐데 도대체 누구일까. 생각을 끝마치기도 전에 문이 열렸다.
“…….”
열리는 문 사이로 보이는 얼굴은 가장 보고 싶고, 또 가장 보고 싶지 않은 얼굴이었다. 끊으려고 했지만, 이번에도 실패한 그 감정의 뿌리, 발화점, 이 상황에도 열렬히 온 감정이 반응하는 유일한 사람.
차정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