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
밤보다 아침에 더 가까운 새벽으로 움직일 때까지 거실에 앉아 머리에 들어오지도 않는 영화를 보던 정우가 엔딩크레딧을 보며 화면을 껐다. 하진에 대한 생각을 안 하고 싶어 택한 영화인데, 결국 다 망쳐버렸다. 무슨 내용인지, 어떤 장르인지도 방금 봤는데 하나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
「…죽었으면 좋겠어?」
창백한 얼굴로 소리 낸 그 말이 자꾸 떠올랐다. 다가와 키스를 하고, 무언가에 놀란 듯 일어나 어울리지 않는 사과를 하던 그 얼굴이 지워지지 않았다. 사랑이라는 게 어떤 감정이면 그렇게 사람을 변하게 만드는 걸까.
하진에게 죽으라고 말했지만, 정말 죽으라고 한 말은 아니었다. 어떤 말을 해도 더는 충격을 받지 않는 하진에게 마지막으로 주는 충격과도 같은 말이었다.
“…….”
다른 건 그렇게 잘 알아듣더니, 왜 죽으라는 말은 간직하고 있었던 걸까. 정우는 불이 꺼진 거실에서 일어나 방으로 향했다.
어둠에 익숙한 상태지만, 완전히 깜깜한 방 안에서 한 번에 하진을 찾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정우는 하진의 침대 위를 바라보았다. 이불을 덮고 있는 불분명한 형체라도 보여야 하는데, 전혀 보이지 않았다.
불을 켤까 하다가 갑작스러운 불빛에 하진이 깨기라도 할까 봐 켤 수 없었다. 안 그래도 잠들지 못해 괴롭다는 사람을 깨울 수는 없지 않은가. 정우는 빈 것처럼 보이는 침대 위를 응시하며 걸음을 옮겼다.
“…….”
조금씩 움직이던 걸음이 멈춘 것은 발끝에 따뜻한 무언가가 닿은 순간이었다. 바닥에 떨어져 있을 게 없는데 도대체 뭐가 떨어진 걸까. 순간 텅 빈 침대와 발끝에 닿은 따뜻함이 뒤섞였다. 정우는 뒤돌아 손을 뻗어 불을 켰다. 그리고 다시 고개를 돌린 순간.
“……뭐야.”
텅 빈 침대가 보이고.
“……형.”
바닥에 쓰러진 하진이 보였다.
“…….”
입술이 달라붙고,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했다. 눈을 깜빡일 수도 없고, 손을 뻗을 수도 없었다. 정우는 멍하니 바닥에 몸을 웅크리고 쓰러진 하진을 바라보았다. 창백한 손끝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약 몇 알과 작은 약통이 떨어져 있었다.
“…형.”
겨우 떨어진 입술 사이로 작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정우는 무너지지 않으려고 버티는 몸을 무너뜨려 하진의 앞에 무릎 꿇었다.
“…형……. 하진이 형….”
목소리가 형편없이 떨렸다. 정우는 미동도 없는 하진의 코 밑으로 손가락을 가져갔다. 미약한 숨이 닿아오자 그제야 몸에 잔뜩 들어간 힘이 빠졌다.
“하진이 형, 강하진, 강하진!”
입안에서 웅얼대던 소리가 터져 방 안 가득 울렸다. 정우는 하진의 어깨를 잡고 마구 흔들었다. 축 늘어진 몸은 정우가 흔드는 힘에 따라 이리저리 흔들렸다.
“눈 떠요. 눈 뜨라고! 강하진!”
전화. 전화해야 했다. 아니, 형들에게 알리는 게 우선이었다. 정우는 차분히 마음을 가라앉히고 일의 순서를 생각하려 애썼지만, 머리 안에 그 무엇도 맺히지 않았다.
“무슨 일이야! 하진이가 왜!”
정우가 소리치는 것을 들은 멤버들과 지창이 방으로 들어왔다. 무슨 일인지 정우에게 묻던 멤버들은 바닥에 쓰러진 하진을 보고 놀라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런 하진을 보고 사색이 된 지창이 얼른 정우의 옆으로 앉아 하진의 코 아래 손을 대보았다.
“얘 왜 이래? 언제부터 이래?”
“…모르겠어요. 자정 정도까지만 해도 괜찮았는데…….”
“뭣들 하고 있어? 아무나 빨리 구급차 불러! 빨리 애 죽게 놔둘 거야?”
지창의 고함에 인규가 얼른 방을 나섰다. 그리고 하진을 팔에 부축해 기대게 한 채 뺨을 두드렸다.
“하진아, 강하진! 하진아! 이게 다 무슨 일이야. 너희 무슨 일 있었어?”
“…….”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정우를 본 지창이 바닥에 떨어진 약과 약통을 주워들었다. 그리고 약 모양을 살폈다.
“스틸녹스잖아.”
“스틸녹스? 그게 뭔데요?”
영우의 물음에 지창은 짧게 숨을 내쉬었다.
“수면제.”
“수면제요? 하진이가 수면제를 먹었어요? 얼마나요? 그냥 먹고 잠든 게 아니에요?”
“병원 가 봐야 알겠지. 얘 언제부터 이거 먹었어? 수면유도제 탄 건 아는데, 스틸녹스는 어디서 난 거야? 이렇게 독한 걸 상담 선생이 처방해 줄 리가 없는데.”
정우는 모든 소리가 귓가에 닿았다가 들어오지 못하고 부서져 흩어지는 것을 경험했다. 소리가 들리기는 하는데 다 무슨 소리인지 알 수가 없었다.
“오 분이면 온대요!”
휴대폰을 들고 방으로 들어온 인규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하진을 보며 말했다. 지창이 그런 인규를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너희는 다 집에 있어. 일 커져서 좋을 거 없으니까.”
“저희도 갈게요! 하진이 어떤지 저희도 가서 봐야죠, 형!”
“있어. 내가 결과 나오면 바로 알려줄 테니까. 우리 다 가면 소문 더 금방 날 거고, 하진이한테도 좋을 거 없어. 알잖아. 새벽에 체해서 병원 한 번만 가도 폭행이니 자살 기도니 헛소리 나는 거. 단체로 움직여서 먹이 주지 말자. 걱정되겠지만, 집에들 있어. 인규야. 멤버들 잘 챙기고.”
지창의 진지한 목소리에 인규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울리는 전화를 받으며 거실로 나갔다.
“네, 올라오시면 돼요. 네, 거기 맞습니다. 버튼 누르시면… 네, 호출 왔어요. 문 열어드릴게요.”
지창은 여전히 하진을 안은 채 방 밖을 내다보았다.
“영우야, 형 겉옷 좀 가져다줄래?”
“네!”
멤버들은 처음 겪는 상황에 어쩔 줄을 몰라 했지만, 지창은 달랐다. 처음에는 놀라 큰 소리를 내기도 했지만, 이내 중심을 잡고 멤버들을 흔들리지 않게 하려 애썼다.
“형! 오셨어요.”
구급대원들이 숙소 안으로 들어왔다. 의식이 없는 하진의 상태를 확인한 구급대원들은 들것 위에 하진을 옮겼다.
“이동하겠습니다. 어떤 분이 함께 가실 건가요?”
“제가 갈 겁니다.”
지창은 영우가 준 겉옷을 아무렇게나 들고 구급대원을 따라 숙소를 나서며 인규의 어깨를 한 번 잡았다가 놓았다. 잘 부탁한다는 말 대신이었다.
“형, 꼭 전화 주세요.”
“알았어. 너무 걱정하지 마. 괜찮을 거야.”
그 말을 끝으로 숙소 문이 닫혔다. 해성과 영우, 인규는 현관에 선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정우는 여전히 하진이 쓰러져 있던 그 바닥에 무릎을 꿇은 채였다. 그런 정우를 본 멤버들이 다가와 어깨를 감싸고, 팔을 잡아 일으켰다.
“괜찮아. 하진이 괜찮을 거야. 그런데 너 하진이 수면제 먹는 거 알고 있었어?”
“…수면유도제 먹는 건 알았어요.”
“하긴 룸메니까 봤겠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어서 그 밝던 애가 잘 웃지도 않고, 잠도 못 자고 그런 거지.”
“…….”
“일단 나가자. 거실에 우리 다 같이 있자.”
놀라 하얗게 질린 정우의 어깨를 감싼 해성이 거실로 향했다. 정우는 바닥에 발이 닿는 느낌도 느끼지 못한 채 걸음을 옮겼다. 불을 켜는 순간 눈에 보이던 하얗게 질린 하진의 얼굴이 자꾸만 눈앞에 아른거렸다.
“이게 무슨 일이야, 진짜…….”
“하진이… 죽으려고 그런 걸까요?”
“설마. 수면제를 모르고 좀 더 먹어서 그런 거 아닐까? 하진이가 왜 죽으려고 해…….”
“…얼마 전부터 좀 걱정 있어 보였거든요.”
인규와 해성이 영우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부담이 될 것 같아 굳이 대놓고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하진이 힘들어하는 것 같다는 건 전부 느끼고 있던 사실이었다.
“괜히 이유 추측해서 좋을 거 없으니까 그건 됐고… 아무 일 없었으면 좋겠다.”
“아무 일도 없을 거예요. 왜 약 잘 받던 것도 컨디션 안 좋고 하면 부작용 생기기도 하고 그러잖아요. 그냥 그런 걸 거예요. 병원 가면 괜찮을 거예요.”
형들의 말을 들으면서도 정우는 끝내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 할 수가 없었다.
「…죽었으면 좋겠어?」
흔들린 정신으로 묻던 그 얼굴이 떠올랐다. 그 순간의 얼굴도, 목소리도, 울 것처럼 젖은 눈동자도 너무나도 생생했다.
「그래. 정신 못 차리는 형 같은 거 죽었으면 좋겠어.」
그리고 저는 그런 하진에게 죽으라고 말했다. 샵에서도 그랬고, 불과 몇 시간 전 이 숙소에서도 그랬다. 죽었으면 좋겠다고.
“정우 많이 놀랐나 보다.”
“우리도 놀랐는데 처음 본 정우는 오죽하겠어. 진정되려면 뭐 차 같은 거 마셔야 하나?”
소리가 가까워졌다가 멀어졌다.
“…….”
정말 죽어버린 걸까.
「차정우가 사랑하는 사람은 누굴까.」
그 질문의 답이 강하진이 아니라서?
「네가 보고 웃어주겠지? 따뜻할 거야……. 너 원래 따뜻한 사람이잖아. 손도 잡고, 네가 먼저 키스도 해 줄 거고… 너도 설레고, 행복하겠지…….」
나열한 그런 것들을 해주지 않아서?
「…나 좀 어떻게 해줘…….」
숨이 막혔다. 멤버들은 괜찮을 거라고 말하지만, 하진과 죽음에 대한 말을 나눈 정우는 쉽게 그 말에 감정을 얹을 수가 없었다. 하진이 죽기를 바라서가 아니었다. 저의 그 말조차 하진의 목을 조를까 무섭기 때문이었다.
“…….”
정우가 바라던 ‘끝’은 하진의 죽음이 아니었다. 하진이 죽는다는 것은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정우는 불안에 잠식된 눈동자를 덮으며 고개를 숙였다.
살아요, 형. 어떻게든 살아. 전부 다 해 줄 테니까. 연애 그런 거, 그게 뭐든 다 할 테니까…….
「죽어요.」
살기만 해요.
***
하진은 숙소에서 가장 가까운 서울병원 응급실로 후송되었다. 아이돌 멤버라 최대한 조용히 진행했으면 좋겠다는 지창의 부탁에 구급대원들은 최대한 하진의 얼굴이 보이지 않도록 차를 바짝 대고, 서둘러 응급실 안으로 들어갔다.
의사와 간호사가 와 급히 하진의 상태를 체크하기 시작했다. 지창은 의사에게 남은 약을 넣어 온 약통을 보여 주었다. 의사는 약을 보자마자 상황 파악을 한 듯 간호사에게 무언가 지시했다.
지창에게는 지옥과도 같은 시간이었다. 며칠 입원을 해서 상태를 보는 게 좋겠다는 말에 운 좋게 남아 있던 VIP 병실을 잡고, 응급치료가 끝날 때까지 내내 기다려야만 했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났는지, 도대체 어떤 상태인지 정확히 알 수가 없어 불안하고 온갖 생각이 머리를 뒤덮었다.
“강하진 환자분 치료 끝나셨습니다. 갑자기 극약이 투여되면서 약물성 중독 쇼크가 온 것으로 보입니다. 의식은 아직 없으신데, 생명에는 지장 없을 것으로 보입니다. 입원 며칠 하시면서 상태를 일단 보면 될 것 같습니다.”
“아… 정말 고맙습니다.”
“병실로 가서 계시면, 제가 다시 올라가겠습니다.”
“네, 고맙습니다.”
의사에게 인사한 지창이 이동 침대 위에 축 늘어져 있는 하진을 바라보았다. 생명에 지장이 없다고 하니 다행이기는 하지만, 하진과 지금 이 상황은 너무나도 어울리지 않아 혼란스러웠다. 늘 밝고 환하게 웃던 하진에게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지창은 간호사와 함께 VIP 엘리베이터에 올라 병실로 올라가는 내내 하얗게 질린 하진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
어둡기만 하던 창밖이 어슴푸레 밝아지고, 어둠보다 빛이 더 많아졌을 때, 인규의 전화벨이 울렸다. 말도 없이 멍하니 거실에 앉아 있던 멤버들의 시선이 모두 그곳으로 닿았다. 짧고 간단한 통화를 마친 인규가 울먹였다.
“하진이 괜찮대. 아직 깨진 않았는데… 생명에 지장 있고 그런 거 아니래.”
인규의 말을 들은 뒤에야 정우는 내내 제대로 쉬지 못하던 숨을 내뱉었다. 그렇다고 꽉 막힌 가슴이 편해지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한고비는 넘겼다. 적어도 하진과 갑작스러운 끝을 맞이하지는 않게 된 것이었다.
“가봐야 하는 거 아니에요?”
“형이 하진이 아직 안 깼으니까 이따가 아침에 오래. 지금 가도 하진이 못 보나 봐. 아, 진짜 한시름 놨네.”
영우가 정우의 어깨에 팔을 둘러 두드려 주었다. 정우는 그제야 고개를 돌려 영우를 눈에 담았다. 하진이 실려 나간 뒤 처음으로 맺힌 초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