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
유세주에게 받은 약통은 하진의 서랍 속 깊은 곳에 자리 잡았다. 누가 볼까 싶어 마음대로 버릴 수도 없고, 또 그걸 먹을 수도 없었다. 잠들 수 없는 밤이면 한 번씩 유혹이 머릿속을 뒤흔들었지만, 뒤척이면서도 그 약통을 열어 볼 생각은 하지 못했다. 약에 손을 대면 저도 유세주처럼 평생 그 약 없이는 잠들 수 없을 것 같기 때문이었다. 절대 그런 것에 의존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상황은 점점 악화되었다. 리패키지 활동이라도 할 때는 잠을 잘 수 있는 시간이 얼마 없어 차라리 버티기가 쉬웠지만, 활동을 마친 뒤부터는 하진에게 하루는 정말 너무나도 긴 시간이었다.
부모님과 시간을 보내려고 집에 가서도 결국 잠들지 못했다. 엄마는 집에 들어서는 저를 보고 눈물을 보였고, 아빠는 어디 아픈 거 아니냐고, 버티기 힘들 만큼 뭔가를 시키는 거냐고 계속 물어왔다. 하진은 애써 밝게 웃으며 그런 거 아니라는 말만 계속 반복했다.
부모님이 차려주신 저녁밥까지 토하고 싶지는 않아 아주 천천히 식사를 했다. 이것도 먹고 저것도 먹으라면서 챙겨주는 엄마의 걱정 가득한 눈을 보니 마음이 아파 자꾸 눈물이 날 것 같았다.
「하진아, 힘드니? 엄마한테는 말해도 돼. 아빠 걱정하실까 봐 아니라고 한 거 아니야?」
나 힘들어. 힘들어서 잠도 못 자. 뭘 먹기만 하면 토하고, 가끔 다른 사람처럼 변해서 막 화도 내고, 울기도 하고, 소리도 질러.
말하고 싶었지만, 역시 말할 수 없었다. 한참이나 방에 머물며 정말 괜찮은 거냐고, 멤버들과는 잘 지내는 거 맞냐고 묻는 엄마에게 계속 고개를 끄덕이고 웃었다. 그게 하진이 할 수 있는 전부였다.
부모님과 만나고, 집에서 지내면 마음이 편할 줄 알았는데 그것도 아니었다. 하진은 내내 제 걱정을 하고, 이렇게 말라서 어떻게 하면 좋냐고 웃지 못하는 부모님을 보며 마음을 졸였다. 더 무너질 것도 없는 마음에서 뽀얀 가루가 흩날렸다.
“…….”
매일 전화하겠다고 부모님과 약속을 하고, 인사를 한 하진은 숙소로 돌아왔다. 다들 오늘 온다고 했는데, 아직 아무도 오지 않은 건지 숙소는 비어 있었다. 하진은 숙소가 텅 빈 것을 확인하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너무 힘들어 견딜 수가 없었다.
“…….”
안 되는데. 정말 안 되는데. 생각이 행동을 막으려 노력했지만, 극도의 피곤함으로 잔뜩 예민해진 정신은 더 이상 버틸 수 없다고 마구 비명을 질러댔다. 그대로 서랍을 열어 저 깊은 곳에 있는 약통을 꺼낸 하진이 처음으로 그 뚜껑을 열어 안을 보았다.
안에는 스무 알이 조금 넘는 것 같은 알약이 들어 있었다.
「수면유도제 다음, 또 다음, 또 다음에 먹는 거.」
유세주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그 사람이 준 걸 먹어도 되는 걸까. 당장이라도 변기에 넣고 물을 내려버리면 마음이 편하겠지만, 자꾸 이 작은 알약에 기대고 싶어졌다. 무슨 짓을 해서라도 잠들고 싶을 만큼 몸과 마음이 무겁고, 힘들기 때문이었다.
“……하나만.”
알약 하나를 꺼낸 하진이 중얼거렸다. 하나, 그래 딱 하나면 잠들 수 있을지도 몰랐다. 먹었는데도 잠이 들지 않는다면, 유세주에게 속았다고 생각하고 약을 버려버리면 되고, 잠이 든다면 그냥 잘 자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면 될 것이었다. 하진은 그대로 약을 쥔 채 방을 나가 식탁 위에 놓인 물병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단숨에 약을 삼켰다. 더 망설였다가는 아무것도 하지 못할 것 같기 때문이었다.
“…….”
도대체 무슨 상상을 한 걸까. 먹자마자 그 자리에서 바로 잠이 밀려들 거라고 생각했던 자신이 너무 우스웠다. 하진은 약통을 꽉 쥔 채 방으로 들어가 서랍 속 깊은 곳에 넣었다. 그리고 고단한 얼굴로 침대에 누웠다. 이불을 위로 끌어 올릴 힘도 없고, 손을 까딱할 의지도 없었다.
「죽어요.」
빈방으로 또다시 제가 가장 두려워하는 목소리가 울렸다. 꼭 정우가 귀에 대고 몇 번이나 다시 말하는 것 같았다. 죽을 것 같으면 죽어야지. 죽어. 하진은 그 소리를 물리치려고 노력하지 않았다. 사라지라고 아무리 소리를 쳐도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우스웠다. 저에게 죽으라고 말한 사람을 아직도 좋아할 수 있다는 이 사실이 너무 우습고, 참담했다. 왜 마음은 이렇게도 멋대로일까. 불쑥 멋대로 파고들어 사랑이라고 마음을 뒤흔들고, 멈추지도 못하게 만드는 마음 같은 거 이제는 싫었다. 떼어내야 끝나는 걸까. 아니면 정말 멈춰버려야?
“…….”
먼 곳에서 잠이 밀려들었다. 졸린다는 생각을 정확하게 하기도 전에 멀리 있던 잠은 하진의 가까이 다가와 입을 쩌억 벌렸다.
그렇게 하진은 다시는 깨어나고 싶지 않은 마음으로 잠이 들었다.
***
정우는 하진이 잠들고 네 시간 정도 지난 후에야 숙소에 도착했다. 현관에 놓인 하진의 신발을 본 정우가 반쯤 닫힌 방문을 바라보았다. 조용한 것을 보니 자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동안 통 잠을 잘 수가 없다고 피곤해했던 게 떠올라 마음이 꽉 조여들었다. 혹시라도 제 소리에 깰까 싶어 조심스럽게 방으로 가 문을 연 정우가 침대에 누워 잠이 든 하진을 눈에 담았다.
“…….”
창백하고 마른 얼굴과 몸이 꼭 죽은 사람 같았다. 죽은 사람을 한 번도 본 적은 없지만, 책이나 화면에서 본 묘사와 비슷했다. 정우는 저도 모르게 몸을 숙여 손가락을 하진의 코 아래에 대보았다. 살갗으로 닿는 따뜻한 숨을 확인한 뒤에야 작은 안도가 흘렀다.
그날 샵에서 심한 말을 한 뒤로 하진과의 관계에 아주 큰 균열이 생겨버렸다. 점점 벌어지고 있었던 것은 맞지만, 어쩌면 돌이키지 못하겠다 싶을 정도의 흔들림이었다. 정우는 저와 하진 사이에 생긴 텅 빈 공간을 내려 보았다.
“차라리 그냥 그렇게 있어요.”
애원하지도 말고, 매달리지도 말고 그냥 그렇게 가만히.
“더 벌어지면 안 되잖아.”
지금은 이렇게 손을 뻗으면 닿을 정도라 버틸 수 있지만, 조금 더 벌어지면 발이 빠질 거고, 누군가는 추락하게 될 것이었다. 그게 누구든 추락하는 순간 모든 것은 끝난다. 끝은 생각보다 쉽게 찾아온다는 것을 정우는 알고 있었다.
그래서 정우는 하진이 깨지 않도록 내내 숨을 죽이며 방을 벗어나지 못했다. 혹시라도 벌어진 그 틈 사이로 몸이 쑥 빠질까 두려워.
***
저녁때가 되어서야 잠에서 깬 하진은 뿌옇게 뭉쳐 있던 것들이 사라진 머릿속에 긴 숨을 내쉬었다. 전에는 너무나도 당연했던 것들이 더 이상 당연하지 않게 된 지금, 이렇게라도 잘 수 있어 정말 다행이었다. 처음으로 유세주에게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아직도 숙소에 저 혼자인 걸까. 잠시 고요 속에 멍해진 정신을 뚫고 말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해성과 인규의 목소리를 들으니 그제야 마음이 놓였다. 깼을 때는 이 숙소에 혼자가 아니기를 바랐는데, 정말 혼자가 아니라 다행이었다. 하진은 그대로 몸을 일으켜 거실로 나갔다. 축축 늘어지던 발걸음도 한결 가벼워져 있었다.
“깼어? 배고프지! 깨우려고 갔는데 세상모르고 자더라고. 정우가 놔두라고 해서 놔뒀어.”
“정우가요?”
“밥보다 잠이 더 필요할 때도 있다고 하는데 뭐 맞는 말이잖아. 진짜 깊게 자더라.”
“…피곤했나 봐요.”
“뭐 먹을래? 형이 해 줄게. 우리 떡볶이 해 먹었는데, 데워 줄게! 네 거 남겨놨어.”
“아니에요. 제가 데워 먹을게요.”
“어떻게 우리 하진이가 불 앞에 서서 떡볶이 데우는 걸 형이 보고 있어. 내가 해 줘야지.”
흑흑 우는 소리를 낸 해성이 소파에서 일어나 부엌으로 다가왔다. 하진은 묘하게 형들이 제 편의를 봐주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평소와 별로 다를 게 없는 말투와 행동이지만, 그 안에는 더 챙겨줘야 한다는 의지가 담겨 있었다. 과잉보호라는 생각이 들 만큼 티가 나는 행동들이었다.
“우유도 한 잔 따뜻하게 데워줄게. 뜨뜻하게 한 잔 마시면 좋잖아.”
“…….”
우유 역시 따뜻하게 마시면 잠이 잘 온다는 말이 있는 것이었다. 제가 너무 끼워 맞추며 오버 하고 있는 걸까. 식탁에 어색하게 선 하진은 떡볶이를 데우는 해성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하진아!”
“네, 형.”
“우리 내일부터 스쿼시 갈래?”
방에서 나온 영우가 라켓을 휘두르는 시늉을 하며 하진을 바라보았다.
“스쿼시는 갑자기 왜요?”
“운동을 좀 해야겠는데, 아무래도 전신운동을 빡! 하면 좋을 것 같아서. 낮에 몸을 좀 막 써야 밤에 잠도 잘 오고 그러잖아.”
우연의 일치인 걸까. 또 잠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영우를 본 하진이 겨우 미소 지었다. 웃고는 있지만, 눈동자가 마구 떨렸다.
모두가 정상이 아닌 저를 눈치챈 것 같았다. 형들이 걱정한다는 말을 듣기는 했지만, 이렇게까지 저에게 신경을 쓰고 있는 줄은 몰랐다. 상처 받지 않게 하려고 더 잘 챙겨주고, 또 도움을 주기 위해 손을 내미는 멤버들을 보니 고마우면서도 마음이 확 조여들었다. 결국 모두에게 폐를 끼쳤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해성이 데워 잘 담아준 떡볶이를 먹으면서도 내내 웃기가 힘들었다. 그럴 필요 없다고, 그렇게 나에게 집중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하고 싶지만, 혼자 오버 하고 있는 게 될까 봐 말도 꺼낼 수가 없었다. 몸에 든 모든 것들이 달그락 소리를 내며 제각기 엉망으로 움직이는 것만 같았다.
애써 분위기를 맞춰 늦은 저녁을 먹고 설거지까지 하고 들어온 하진이 전부 토하지 않기 위해 마음을 가라앉혔다. 다행히 토할 것 같은 느낌은 들지 않았다.
그렇게 욕실에서 한참이나 머물면서 씻고 나온 하진은 침대에 기대어 누워 휴대폰을 보고 있는 정우를 바라보았다. 같은 숙소 안에 있으면서도 어제 아침에 보고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혹시 형들한테 말했어?”
하진의 물음에 정우의 시선이 휴대폰 너머로 움직여 닿았다.
“나 잠… 못 자는 거.”
“안 했어요.”
“…형들이 자꾸 날 너무 과하게 배려해. 전에도 장난처럼 그런 적은 있었지만, 이렇게 내 눈치 보면서 그런 적은 없었는데…….”
“형 얼굴 보면 다 걱정할 수밖에 없어요. 힘들어 보이고, 아파 보이니까.”
제 얼굴을 보자마자 울던 엄마가 떠올랐다. 하진은 마른 뺨을 괜히 손으로 한 번 문지르며 침대에 걸터앉았다. 그리고 다시 휴대폰을 바라보는 정우를 눈에 잠자코 담았다.
“…우리 섹스할래?”
섹스라는 말과 어울리지 않는 온도의 목소리였다. 정말 섹스하고 싶어 하는 말이라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았다.
“못할 것 같아요?”
“…이따 나 못 자면 해줘.”
휴대폰을 보는 시선이 날카로워졌다. 하진은 그 날카로운 시선이라도 받고 싶었다. 그냥 지금은 정우의 모든 것을 다 받고 싶었다.
“…나 좀 봐주라.”
“…….”
“정우야…….”
불러도 저에게 닿지 않는 고집스러운 시선조차 좋았다. 마음이 타들어 가는데도 좋은 이 마음은 정말 뭘까. 이런 게 사랑은 맞는 걸까. 다른 사람들이 하는 사랑은 참 예쁘고, 행복해 보이던데 왜 내가 하는 사랑은 부서지고, 망가지기만 할까. 왜 모두가 불행해질까.
멍하니 정우를 보던 하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정우가 누운 침대로 가 걸터앉았다. 갑작스러운 하진의 행동에 그제야 정우의 시선이 다시 움직였다.
“지금 뭐 하는…….”
하진의 몸이 기울었다. 분명 욕실에서 나올 때만 해도 막 씻어 촉촉했던 입술이 건조하게 변해 있었다. 체온을 적나라하게 느끼기에는 젖은 입술보다 건조한 입술이 더 좋으니 괜찮았다. 하진은 정우의 입술에 제 입술을 댄 채 살짝 힘을 주어 눌렀다.
“…….”
“…….”
몸이 밀려 바닥으로 넘어질 각오도 했고, 뾰족한 말들을 들을 준비도 됐다. 하지만 정우는 움직이지 않았다. 몸이 밀리지도, 뾰족한 말이 감정을 난도질하지도 않았다. 하진은 살짝 입술을 벌려 정우의 입술을 머금으며 키스했다.
입술을 빨고, 그 사이를 핥으며 입속으로 혀를 넣어도 정우는 하진을 밀어내지 않았다. 이 또한 거실에서 형들에게 느꼈던 것과 비슷한 감정이었다. 아픈 사람을 향한 배려. 아프니까 한 번은 봐주자는 생각. 평소처럼 밀어내고, 심장을 또다시 할퀴었다면 더 나았을지도 몰랐다. 하진은 정우의 혀끝에 제 혀끝을 문지르며 생각했다. 황홀한 비참함이었다.
「죽어요.」
정우의 혀가 움직인 순간 하진은 귀를 찢는 날카로운 소리에 놀라 입술을 떼어냈다. 입속에 죽으라는 정우의 말이 담겨 있었다. 하진은 고개를 저으며 침대에서 일어났다.
“…미안해.”
“…….”
“……잘못했어.”
전에 들은 말을 제가 떠올리고 있는 건지 지금 정우가 또 저에게 같은 말을 한 건지 분간이 가지 않았다. 하진은 시선을 바닥으로 내리깔며 내내 사과했다.
“…미안해, 미안해, 정우야.”
「죽어요, 그럼.」
키스하지 말 걸 그랬다. 닿고 싶은 충동에 다가갔지만, 이럴 줄 알았으면 닿지 않았을 것이었다.
“…잘못했어, 정말.”
“정신 못 차리지, 또.”
“…죽었으면 좋겠어?”
정우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하진은 들리지도 않는 대답의 답을 먼저 들어버렸다. 숨이 가빠지고 눈동자가 빠질 것처럼 뜨거워졌다. 서서 어쩔 줄을 모르는 하진을 보던 정우가 그대로 일어나 하진의 앞에 섰다.
“그래. 정신 못 차리는 형 같은 거 죽었으면 좋겠어. 어차피 내가 알던 형도 아니잖아요.”
정우의 온기가 가까워졌다가 멀어졌다. 방문 닫히는 소리가 들리고, 그제야 물기 어린 눈동자에 오른 열기가 한 꺼풀 벗겨져 흘러내렸다.
***
거실에서 게임을 하며 노는 멤버들의 목소리가 요란하게 들리다가 고요해졌다. 새벽이 되니 이제 자러 들어간 것이었다. 하진은 침대에 앉은 채 빈 정우의 침대를 바라보았다. 아까 그렇게 방을 나간 뒤, 정우는 한 번도 다시 들어오지 않았다.
정우가 나간 방 안에는 저를 향한 혐오의 소리가 가득 차 있었다. 죽어요. 가득 찬 그 소리는 여기저기 벽을 물들이고, 할퀴며 하진의 머리 위로 쏟아졌다. 귀를 막고, 눈을 감아도 소리는 사라지지 않았다.
“…….”
키스하는 저를 밀어내지 않던 정우의 동정. 그리고 눈동자에 묻어 있던 경멸, 머리 위로 다시 한번 쏟아지는 참담함.
자고 싶었다. 자야만 이 모든 것을 잊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중간에 깨지 않고 오랫동안 잠들고 싶었다. 몇 시간을 자야 정신이 돌아올까. 사람들이 알고 있는 강하진으로 돌아가려면 도대체 얼마나 밀린 잠을 자야 하는 걸까.
「그래. 정신 못 차리는 형 같은 거 죽었으면 좋겠어. 어차피 내가 알던 형도 아니잖아요.」
정우가 알던 강하진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죽음 같은 이야기는 소리 낼 일이 없고, 눈만 마주쳐도 웃으며 행복하던 그때로.
“…….”
자야 해. 더는 생각하지 말고 자야 해. 그래야 해. 하진은 비틀대며 일어나 서랍을 열었다. 그리고 깊은 곳에 숨겨두었던 약통을 다시 꺼내 들었다. 한 알을 먹고 그만큼 잤으니까 이걸 다 먹으면, 더 오래 잘 수 있을 것이었다. 그렇게 오래 자고 나면, 정신이 아주 맑아져서 전으로 돌아갈 수 있지 않을까.
부모님의 걱정도 멤버들의 배려도 모두 싫었다. 변해버린 제가 소중한 주변을 다 망가뜨렸다. 어색한 공기, 변해버린 저에게 상처가 될까 봐 눈치를 보는 사람들. 돌아가야만 했다. 그러려면 그동안 자지 못한 밀린 잠을 자야 했다. 하진은 침대로 가 앉아 약통에 든 알약을 전부 손으로 쏟았다.
“…….”
강하진 잘 자. 못나 빠진 지금 모습으로는 다시 만나지 말자.
“…….”
하진은 정우가 마시다가 놓은 물병을 들어 마개를 열었다. 그리고 손에 든 알약들을 몇 개씩 한꺼번에 입에 넣고 삼켰다. 역시 약을 먹기를 잘했다. 아까보다 약효가 좋지 않은가. 아직 두 알을 더 먹어야 하는데 벌써 밀려든 잠이 의식을 뒤흔들었다.
그렇게 하진의 몸이 기울어 바닥으로 쓰러졌다. 그동안 밀린 잠을 몰아 자듯 아주 편하고, 또 그게 죽음이라는 것을 아는 듯, 애달픈 얼굴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