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포제-67화 (67/122)

#67

축구경기 생중계로 결방이 된 음악방송 덕분에 꽤 여유로운 일요일이었다. 멤버들은 정오가 지날 때까지 누구도 방에서 나오지 않았다.

“…….”

하진 역시 벽을 보며 누워 있었다. 하지만 감긴 눈 속 정신은 너무나도 또렷했다. 다시 받아온 수면유도제를 먹었는데도 얼마 잠들지 못했다. 약을 먹은 뒤에도 두 시간 정도 지난 후에 겨우 잠이 들었고, 그마저도 세 시간을 채 넘기지 못했다.

정우에게 죽으라는 말을 들은 뒤부터는 약을 먹어도 제대로 잠들지 못했다. 계속 머리 안에서 정우가 죽으라고 말하는 것만 같았다. 눈만 마주쳐도 그 눈빛조차 저에게 죽으라 외치는 것 같아 어깨가 움츠러들고 식은땀이 났다.

삼십 분 정도 더 눈을 감고 있던 하진이 도저히 견디지 못하겠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멍한 머리 안으로 날카로운 아픔이 번졌다. 뇌가 망가지고 있는 기분이었다.

평소라면 옆 침대에서 잠든 정우를 봤겠지만, 얼마 전부터는 정우를 볼 수가 없었다. 당장 그 눈앞에서 어떤 방법으로든 죽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었다. 무대 위에서도 조명이 제 위로 떨어지는 상상을 했고, 피투성이가 된 채 죽는 생각을 했다. 환기를 하기 위해 거실 창을 활짝 열면서도 아래로 떨어지면 고통 없이 죽을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확실히 요즘 저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

부엌으로 가 차가운 물을 한 병 열어 단숨에 반을 비운 하진이 힘없이 식탁 의자를 빼내어 앉았다. 어제는 인규도 저에게 물었다. 요즘 무슨 안 좋은 일이 있는 거냐고. 얼버무리며 눈앞에 닥친 상황만 벗어나려 애쓰는 것도 이제는 정말 못 할 일이었다. 애초에 제가 이 팀에 들어오면 안 됐다는 생각만 자꾸 들었다.

“아, 허리야. 너무 자서 허리 무너진다, 무너져. 어? 하진하진. 벌써 깼어?”

“네. 형 잘 잤어요?”

“더 자면 허리 부러져서 실려 갈 정도로 잤어. 어떻게 누워도 아파서 일어났다니까. 아, 배고프다. 늘어져라 자고 눈 뜨자마자 배고프고, 나도 참 노답이야. 배 안 고파? 뭐 먹었어?”

“아니요. 저도 좀 전에 나왔어요.”

“그럼 형이 토스트 만들어 줄까? 우리 둘만 먹자. 끝내주게 해 줄게.”

별로 뭔가를 먹고 싶은 생각이 없었지만, 너무 다정하게 웃으며 말하는 해성의 기분을 상하게 하고 싶지 않아서 하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하진을 보며 씩 웃은 해성이 얼른 싱크대 물을 틀어 손을 빡빡 씻었다.

“우리 오늘 회식이잖아.”

“네.”

“기다리고 기다리던 회식이라 굶을까 생각도 했거든. 그런데 너도 알지? 많이 먹으려고 굶으면 오히려 많이 못 먹는 거.”

“네. 저도 예전에 비싼 뷔페 간다고 전날 저녁부터 다음 날 점심까지 굶었거든요. 그런데 너무 배가 고프다 못해 마비돼서 정작 저녁에는 초밥 몇 개랑 작은 스테이크 한 조각 먹으니까 배불러서 못 먹겠더라구요.”

“아, 내가 다 억울해. 적당히 위를 써줘야 하거든. 더 활발한 활동을 할 수 있게 시동을 걸어두는 게 중요해.”

“맞아요.”

“제대로 시동 걸게 해 줄게. 딱 기다려.”

하진은 해성의 말을 들은 뒤에야 오늘이 회식이라는 것을 떠올렸다. 며칠 전부터 멤버들이 디데이를 세면서 회식을 손꼽아 기다렸던 것을 보고 들었으면서도 감쪽같이 잊어버렸다. 어쩌다가 이렇게 된 걸까. 언제부터 저에게는 멤버들과의 시간이 중요하지 않게 된 걸까. 들뜬 해성의 목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미안해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형.”

“응?”

“우리 데뷔한 지 이제 1년 반 조금 넘었더라구요. 2년도 안 됐어요.”

“뭐? 우리 내일모레 8주년 아니었어?”

놀란 리액션을 한 해성이 프라이팬 위에 버터를 문질렀다.

“이제 우리 1년 7개월 됐나? 진짜 체감상 한 8년은 한 것 같은데. 그만큼 스케줄이 많아서 그런 거겠지?”

“…그러게요. 오래된 것 같은데. 지금부터가 정말 중요한 거겠죠? 계속 잘됐지만… 이제 정규앨범 한 장 나왔고, 보통 아이돌 5년 차, 6년 차… 이럴 때까지도 잘 나가잖아요.”

“그럼. 지금부터가 진짜지. 왜, 많이 힘들어?”

장난과 걱정이 뒤섞인 얼굴로 하진을 돌아본 해성이 축 처진 그 얼굴을 한참이나 말없이 바라보았다. 어떤 이야기를 해야 할지, 어떤 목소리와 어떤 분위기를 만들어야 할지 굉장히 고민하는 얼굴이었다.

“자, 그럼 강하진과 조해성의 1차 회식을 시작할까? 저녁 먹으면서 얘기하려고 한 건데 먼저 해야겠다.”

버터 위에 식빵을 굽던 해성이 밝은 얼굴로 하진을 돌아보았다.

“힘이 안 나면 억지로 안 내도 돼. 무대 위나 방송에서는 어쩔 수 없어도 우리 앞에서는 힘들다고 해도 돼. 네 말대로 아직 1년 조금 지난 사이라 다 털어놓기가 그런 거야?”

“…그런 거 아니에요. 형들 없었으면… 저 하지도 못했어요.”

“나도 마찬가지고, 다른 멤버들도 다 마찬가지야. 너 없었으면 우리도 못 했어.”

“…….”

“하진이 네 멘탈 갈리는 거 알면서도 그거 계속 갈아 넣으라고 할 마음 없다는 거야. 즐겁게 하고 싶어. 하진이 네가 더 힘들 수 있다고 생각해. 솔직히 어릴 때부터 아이돌 하고 싶다고 한 것도 아니고, 네가 가려던 길에서 다른 길로 속도도 못 줄이고 확 튼 거잖아. 생각과 현실은 다르니까 이쯤 하다 보면 괴리도 있을 거고, 몸도 마음도 힘들 거라고 생각해.”

“죄송해요. 형.”

“뭐가 죄송해. 나도 가끔 잠 못 자고 죽겠을 땐 무대 올라가기 싫기도 해. 막상 올라가면 힘도 나고, 또 웃으면서 하는데 올라가기 전에 대기실에서 너무 힘들어서 내가 왜 이러고 있나 그런 생각도 몇 번 했어.”

해성이 그런 생각을 했을 거라고는 전혀 상상도 하지 못했었다. 힘들다고 또 졸리다고 장난스럽게는 말해도 정색하면서 짜증을 내거나, 분위기를 다운되게 만든 적이 한 번도 없기 때문이었다.

“버텨야 할 땐 버티는 거지 뭐. 어떻게 매일이 다 좋기만 해.”

“…….”

“우리 이제 곧 활동 마무리하면 다음 앨범 나오기 전까지 그래도 좀 시간 생길 거 아냐. 뭐 연습도 할 거고, 해외 활동도 하려면 바쁘기는 하겠지만, 그래도 이렇게 매일 밤새고 하지는 않을 거니까… 그때 좀 쉬고, 마음 다스렸으면 좋겠어. 상의해서 앨범이야 한 달이고 두 달이고 늦춰도 되는 거니까.”

“…네. 고마워요, 형. 그렇게 말해 줘서. 혼날 줄 알았거든요. 정신 빼놓고 산다고.”

“이거 먹으면 진짜 정신 나갈걸. 맛있어서.”

하진은 앞으로 놓이는 노릇노릇 잘 구워진 빵을 바라보았다. 빵 사이에는 얇게 부쳐진 계란과 슬라이스 햄도 들어 있었다.

“맛있겠다. 잘 먹을게요, 형.”

얼른 한입을 베어 문 하진이 삼키기도 전에 또 한 입을 가득 베어 물었다.

“많이 먹어. 우리 실질적 막내 증량 프로젝트 짜야겠어.”

“일부러 잘 먹으려고 하고 있어요. 제가 봐도 너무 마른 것 같아서요.”

요즘은 거울을 보는 것도 싫었다. 눈은 커서 퀭하고, 뼈만 남은 목과 어깨, 앙상한 손가락과 생기 하나 없는 얼굴이 너무나도 참담하기 때문이었다. 꼭 해골 같았다. 제 눈에도 이런데 다른 사람들 눈에 괜찮게 보일 리가 없었다. 그래서 하진은 무엇이든 평소 제 양보다도 더 많이 먹으려 애썼다.

“진짜 맛있어요.”

맛있다는 생각도 할 여유가 없을 만큼 빠르게 음식을 입에 넣어 삼킨 하진이 벌써 다 먹었냐고 보는 해성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더 먹을래?”

“네, 더 먹을래요.”

“잘 먹으니까 좋은데? 뭐야, 나 육아 체질인가.”

하진이 토스트를 먹는 사이 다 구워진 토스트 사이에 계란과 햄을 끼워 덮은 해성이 또 하나를 하진의 접시에 놓아주었다. 하진은 토스트를 들어 또 크게 한입 베어 물었다.

“어, 정우야. 일어났어? 너도 토스트 줄까? 이거 원래 나랑 하진이만 몰래 먹으려고 한 건데.”

“주세요. 맛있겠다. 하진이 형 잘 먹는 거 보니까 저도 갑자기 배고픈데요.”

“그치? 하진이 잘 키워서 우리 먹방 시키자.”

“네, 잘 어울릴 것 같은…….”

다 삼키지도 않은 채 또 베어 물고, 또 베어 물어 억지로 삼킨 하진이 의자를 뒤로 밀며 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정우는 이 상황을 보지 못한 해성의 뒷모습을 한 번 보고 일어나 화장실로 들어가는 하진을 따라 움직였다.

“…….”

무너지듯 앉아 변기에 얼굴을 묻고 전부 게워내는 하진의 모습은 처음 보는 것이 아니었다. 얼마 전에도 맛있다고 전부 먹고는 다 게워냈었고, 그전에도 그런 적이 있었다. 그러고 보니 어제도 다 같이 점심을 먹다가 갑자기 대기실을 급히 빠져나갔었다.

“하아… 흐윽…….”

전부 쏟아내고 겨우 물을 내린 하진은 한참이나 일어나지 못하고 눈물을 쏟아냈다. 속도 아프고, 목도, 얼굴도 전부 다 아팠다. 해성이 정성껏 만들어 준 것을 이렇게 다 토해버린 것도 속상해 미칠 것 같았다.

정우는 무너져 앉아 소리 죽여 우는 하진을 보다가 조용히 몸을 돌려 식탁으로 돌아왔다. 해성이 아무것도 모른 채 그런 정우를 보며 웃었다.

“와, 하진이 벌써 다 먹은 거야?”

“네. 진짜 맛있나 봐요.”

“장난 아니라니까. 인규 형은 팬케이크 하면 되고, 나는 옆에서 토스트 팔면 우리 진짜 끝나. 내가 우리 동생들 다 먹여 살린다.”

등 뒤 조금 떨어진 곳에서 하진이 우는 소리가 작게 들려왔다. 귀 기울이지 않으면 그냥 모르고 넘길 만큼 작은 소리지만, 그래도 이미 보고 들어버린 이상 완전히 떨칠 수가 없는 소리였다. 그래서 정우는 그 소리 위를 덮으며 일부러 평소보다 조금 더 큰 목소리를 냈다. 하진이 소리를 죽여서라도 마음껏 울 수 있도록, 해성이 그것을 내내 듣지 못하도록.

***

회식 장소는 한영엔터테인먼트 건물 근처에 있는 고급 고깃집이었다. 룸이 완전히 하나씩 분리되어 기다란 테이블로 되어 있어 다른 손님과 볼 필요도 없고,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되는 꽤 프라이빗한 공간이었다.

고깃집 주인은 평소 한영엔터테인먼트의 모든 아티스트들이나 매니저들, 직원들이 전부 여기에서 회식하는데, 아포제 회식은 처음이라며 반갑다고 인사를 했다. 멤버들은 주인과 간단히 인사를 나누고 넓은 방 큰 테이블에 둘과 셋으로 나누어 마주 앉았다.

“지창이 형이 오늘 가격 그런 거 생각하지 말고, 칼로리 그런 거 생각도 하지 말고 마음껏, 죽지 않을 정도로만! 먹고 마시래. 나중에 아니라고 할 것 같아서 내가 녹화까지 했어.”

영우가 휴대폰을 꺼내 식탁 가운데에 올려놓았다. 멤버들은 화면 안에 보이는 지창을 보며 크게 웃었다.

“카드 중의 카드라는 회사 카드가 인규 형님 손에 있습니다. 거국적으로 박수 한 번 치고 시작하자.”

장난스럽게 박수를 친 멤버들 얼굴에는 웃음이 전부 묻어 있었다.

“형, 제가 주문할게요.”

“그래. 맛있는 걸로 시켜.”

인규에게 메뉴판을 받은 해성이 주문을 받으러 들어온 주인에게 이것저것을 주문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엄청난 양의 고기와 사이드 메뉴, 술, 음료수가 식탁 위에 놓였다.

“아, 오늘 그 민태 씨 있는 그룹. 이름이 뭐더라. 매번 들어도 기억하기가 어려워서……. 그 멤버 분들도 오시는 날이에요.”

민태의 이름에는 별생각이 없었지만, 민태가 속한 그룹에 유세주가 있다는 것을 떠올리자마자 정우의 미간이 구겨졌다. 정우는 얼른 제 옆에 앉은 하진의 얼굴을 살폈다. 못 들은 건지, 아니면 듣고도 별 반응이 없는 건지 몰라도 하진은 그저 멍하니 한 곳에만 시선을 두고 있었다. 차라리 못 들었으면 좋겠다는 게 솔직한 생각이었다.

“자자, 고기 익기 전에 우리 한잔 시원하게 마시자. 아, 이렇게 모여서 마음 놓고 같이 술 마시는 게 진짜 얼마 만이야.”

인규와 해성이 맥주를 열어 멤버들의 컵에 따라주었다. 두 손으로 술을 받은 하진이 모두가 술을 들어 올린 곳으로 술잔을 힘없이 가져다 대었다.

“리더 형 한 말씀 하세요.”

“음, 아직 활동 끝난 건 아니지만, 그래도 다치는 사람 없이 무사히 정규활동, 콘서트까지 잘 해줘서 너무 고맙고, 앞으로 더 오랜 시간 같이할 생각만 해도 너무 좋고 든든하다. 아포제! 오래 같이 가자!”

“같이 가자!”

인규의 마지막 말을 다 같이 외친 멤버들이 잔을 시원하게 부딪쳤다. 그리고 시원하게 맥주잔을 비워냈다. 하진 역시 분위기를 깨고 싶지 않아 잘 넘어가지 않는 술을 전부 넘겼다.

빈 술잔은 빠른 속도로 다시 채워졌다. 맛있게 구워진 고기를 먹고, 또 여러 음식들을 먹으면서 활동에 대한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활동 중에 있었던 크고 작은 에피소드들은 그 당시에는 심각한 일이었지만, 지금은 웃으며 말할 수 있는 별것 아닌 일이 되어 있었다. 하진은 이야기에 동참하기도 하고, 웃기도 하며 계속 채워진 술잔을 비우고 또 비웠다. 음식은 잘 넘어가지 않는데, 술은 답답한 속을 시원하게 만들어줘서 자꾸 더 마시고 싶어졌다.

“적당히 마셔요. 속 아플 텐데.”

“…그럴게.”

멤버들과 웃으며 이야기를 하다가도 정우의 말에는 모든 세포들이 축 가라앉아버렸다. 하진은 손에 땀이 나고, 어깨에 힘이 들어가는 것을 느끼며 정우의 말에 대답했다. 순간 열이 올라 머리 안이 화끈거렸다. 아무래도 취한 모양이었다. 하진은 실수하지 않기 위해 정신을 더 또렷하게 만들려 애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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