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
정우에게 전화가 오기 전부터 미리 나갈 준비를 마친 하진은 아무렇지도 않게 걸려 오는 전화를 받았다. 스피커폰으로 해서 방송에 그대로 나갈 것을 알기에 이런 전화가 올 줄 몰랐던 것처럼 조금 놀라기도 하고, 기뻐하기도 했다.
“지금? 되긴 하는데, 지금 가도 안 늦어? 준비하고 나가면 30분 정도는 걸릴 것 같은데.”
- 시간은 넉넉해요. 형 와 주세요. 나 형이랑 보고 싶단 말이야. 이거 딱 우리 취향이에요.
준비된 방송용 말이라는 것을 알고 있지만, 그래도 정우의 말에 내내 가라앉아 있던 마음이 뛰기 시작했다.
“알았어. 그럼 영화관으로 갈게. 이따 봐.”
자연스럽게 통화를 마친 하진을 보던 훈이 웃으며 현관으로 나섰다. 하진 역시 얼른 그 뒤를 따라 숙소를 나갔다.
길이 막히지 않아 영화관에는 늦지 않게 도착할 수 있었다. 주차장에 내리자 어떻게 이런 스케줄까지 알고 따라온 건지 미리 와 있는 사생들이 하진에게 다가왔다. 훈은 얼른 그런 하진을 데리고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쟤들 진짜 능력 하나는 인정해 줘야 한다니까. 세상 모든 인맥은 다 가지고 있나 봐. 비행기 스케줄 알아내, 비공개 스케줄 알아내, 호텔 방 번호 알아내. 아, 짜증 나. 괜찮아?”
“괜찮아요.”
훈과 함께 영화관이 있는 층으로 올라간 하진이 작게 숨을 고르며 마음을 다스렸다. 지금부터는 촬영이었다. 절대 사적인 마음을 보이면 안 되고, 팬들이 원하는 모습을 보여줘야 하는 시간이라는 말이었다. 피곤하고 마음이 불편한 티를 내면 안 된다고 계속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저기 있다. 우리 계속 근처 있을 거니까 걱정하지 마. 사생들 다 차단할게.”
“네, 형.”
훈이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하진이 저 앞에 선 정우를 향해 손을 흔들며 다가갔다. 저를 보고 밝게 웃는 정우를 보니 꼭 데뷔 전 같이 연습할 때의 정우를 보는 것 같아 설레면서도 슬펐다.
“형!”
“갑자기 불러서 놀랐잖아. 무슨 영환데?”
“이거요. 봐봐.”
하진은 정우가 미리 뽑아둔 티켓을 바라보았다. 홍보도 많이 하고, 재밌다는 평도 많아서 꼭 보고 싶었던 영화 제목이 보였다.
“어! 나 이거 보고 싶었는데.”
“거봐요. 딱 우리 취향이라고 했잖아요.”
“나 온다고 한 뒤에 티켓 산 거야?”
“아니요. 미리 사뒀어요.”
“못 간다고 하면 어쩌려고 미리 사뒀어.”
“내가 영화 같이 보자고 하는데 형이 안 올 리가 없잖아요.”
“뭐야… 너무 자신만만한 거 아니야? 오지 말걸. 그래야 차정우 인생의 쓴맛을 봤을 텐데.”
웃는 하진을 가만히 본 정우가 그대로 하진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형 안 왔으면 영화도 재미없었을 거예요.”
“에이… 그게 무슨 상관이라고.”
“난 상관있어요. 뭐든 형이랑 해야 제일 재밌고 좋거든.”
나도, 나도 그래. 하진은 하고 싶은 말을 소리 내지 못하며 작게 미소지었다.
“팝콘 살까요?”
“응, 그러자.”
“갑자기 배고프다. 뭐 살까요? 오리지널도 있고, 캐러멜도 있고.”
“오리지널 먹을까? 아, 나초도 맛있는데.”
“나초도 먹어요.”
“너무 많지 않아?”
“많이 먹으면 되죠. 형, 콜라죠?”
“응.”
주문하는 정우를 가만히 바라보던 하진은 얼른 카메라를 보고 웃음 지었다. 그리고 나오는 팝콘을 들고 얼른 하나를 집어 입에 넣었다.
“오랜만에 먹으니까 더 맛있다.”
“아직 시간 좀 있는데 저기 앉았다가 가요.”
“응. 그러자.”
아직 영화 시작까지는 40분 정도가 남아 있었다. 정우와 함께 영화관 한쪽에 놓인 대기하는 테이블에 가서 앉은 하진이 뭔지 모르게 어색한 기운을 감추기 위해 팝콘을 하나씩 집어 계속 입에 넣었다.
“영화 시작 전까지는 여기 개인캠 드릴 테니 자유롭게 대화하시면서 촬영하시면 되고, 입장하시면 들어가서 저희가 앉아서 이제 두 분 착석하고, 뭐 재밌겠다 같은 리액션 하시는 것까지만 찍고 나올 거예요. 영화는 이제 두 분이 진짜 보시면 되고, 나와서 재밌었다, 빨리 가서 뭐 쉬자 이런 식으로 인사하시는 것까지만 촬영하겠습니다.”
“네, 알겠습니다.”
스태프가 캠코더를 정우와 하진의 얼굴이 잘 보이는 옆 테이블에 잘 맞춰 놓아주었다. 하진은 그 렌즈를 보며 팝콘을 하나 더 입에 넣었다.
“…….”
“…….”
30분을 둘이 채워야 한다는 생각에 막막함이 밀려들었다. 정우는 얼굴보다 크게 보이는 큰 콜라를 들어 빨대를 입에 물었다.
“우린 취향 진짜 잘 맞는 것 같아요. 노래도 그렇고. 타이틀곡 고르거나, 뭐 골라야 할 때 우리는 의견 갈린 적 없잖아요.”
“응, 맞아. 의견 다 똑같았어. 그래서 그런 자리에 너 없거나, 나 없을 땐 그냥 한 명 의견만 듣고 두 명으로 표시하면 된다고 할 정도잖아.”
“친형이 있었어도 형보다 가깝지는 않았을 것 같아요.”
“…그 정도로 좋게 생각해 주니까 새삼 고맙네.”
또다시 둘 사이에 침묵이 맴돌았다. 하진은 나초가 담긴 플라스틱 통 옆에 놓인 치즈 소스를 들어 쭉 짜냈다. 그리고 입구에 묻은 것을 입술 사이에 물었다. 정우의 시선이 납작한 소스 비닐을 문 하진의 입술 위로 닿았다. 제 입술도 저렇게 물고 오물댔었다. 아직도 입술 위에 하진의 체온이 살아 있었다.
“음, 맛있다.”
“많이 먹어요.”
“들어가서 먹어야지. 지금 먹으면 들어가기도 전에 다 먹을걸.”
방에서 봤을 때만 해도 분명 몹시 지치고 힘든 얼굴이었다. 이런 목소리, 이런 웃음을 머금을 수 없을 정도로 잔뜩 피곤해 보이던 얼굴 위에 결국 웃음이 흐르고 있었다. 하진은 지금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정우는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자고 싶은데 잠이 안 와. 못 자겠어.」
자고 싶다고 말하던 그 절망에 파묻힌 작은 목소리. 어떻게 해야 잘 수 있는지 모르겠다며 저를 붙잡던 손. 닿아오던 입술과 애원 같던 손의 힘.
“나 불러놓고 무슨 생각을 그렇게 혼자 해?”
“형 생각이요.”
“어?”
놀라서 할 말을 잃은 하진을 본 정우가 다시 콜라를 한 모금 빨아들이며 작게 웃었다.
“형 보고 있으니까 형 생각하지. 그럼 누굴 생각해요.”
“아… 뭐 잘못한 거 있는 줄 알고 괜히 놀랐네.”
그렇게 다소 어색한 대화가 이어졌다. 이제 입장해도 된다는 영화관 안내가 나온 뒤에야 하진은 안도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들어가자.”
“네.”
자리는 중앙 뒤쪽이었다. 늦은 시간이라 그런지 사람이 정말 별로 없었다. 대충 눈으로 봐도 열 명도 되지 않는 사람들이 군데군데 앉아 있었다. 하진은 정우와 나란히 앉아 말없이 팝콘을 먹으며 나오기 시작하는 광고를 바라보았다. 카메라가 없어 계속 웃지 않아도 되어 한결 마음이 편했다.
“……아….”
별생각 없이 팝콘 통으로 손을 가져간 그 순간 따뜻함이 스쳤다. 하진은 정우의 손과 문질린 그 느낌에 놀라 얼른 손을 거두었다. 그렇게 과민반응을 보일 일이 아니었다는 것은 손을 거둔 뒤에 따라온 생각이었다. 하진은 한층 더 어색해진 분위기에 입술을 꾹 깨문 채 제 두 손만 마주 쥐었다.
손이 스친 후, 시작된 영화에 집중할 수 없음은 물론이고, 팝콘이나 나초에도 더 이상 손을 댈 수 없었다. 어떻게든 영화에 집중하려고 화면을 바라보지만, 자꾸 집중이 흐트러졌다. 차라리 잠이라도 오면 피할 수 있을 텐데, 그조차 하진에게는 허락되지 않았다.
“…….”
두 주인공의 감정이 무르익으며 짙은 스킨십 장면이 나올 때마다 괜히 화면을 쳐다볼 수 없어 저절로 고개가 내려갔다. 저런 사소한 영상 하나에도 어쩔 줄 모르는 자신이 한심해 죽을 것 같았지만, 바로 옆에 정우가 있다는 것, 그 이유 하나만으로도 어쩔 수가 없었다.
입술이 닿는 것을 보면 정우와 닿고 싶고, 귓가에 입술을 대고 만져줄 때면 정우의 숨결이 귓가에 닿아오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서로의 몸을 정신없이 만지고, 눈동자를 마주하며 살고 싶다는 듯 서로의 호흡을 갈구하는 장면들에 손끝이 뜨거워졌다. 하진은 그리 길지도 않은 그 장면들을 제대로 마주하지 못한 채 입술을 아플 만큼 꾹꾹 깨물었다. 짧게 닿았던 정우의 체온과 촉감이 아직도 입술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
영화는 한 시간 반 정도 지난 뒤에야 끝이 났다. 반 이상 남은 팝콘과 나초는 쓰레기통 안으로 처참히 버려졌다. 하진은 마스크를 올려 쓰는 정우의 뒤를 따라 영화관을 나섰다. 긴 복도를 따라 말없이 걷다가 영화관 메인 출구 앞 저희를 기다리는 카메라와 매니저 형들을 본 뒤에야 겨우 웃을 수 있었다. 웃고 싶지 않은 마음이 너무 커서 입가가 다 아팠다.
주차장으로 내려가는 동안 영화가 재밌었다는 이야기와 역시 심야 영화는 최고라는 말들을 열심히 해야 했다. 차에 타기 전 카메라를 향해 손을 흔들고, 리얼리티가 역시 최고라는 말까지 한 뒤에야 촬영이 끝났다. 늦은 시간까지 고생했다고 스태프와 서로 한참이나 인사를 한 뒤에야 정우와 하진은 밴에 오를 수 있었다.
새벽 3시가 다 되어서야 숙소에 도착할 수 있었다. 불이 꺼진 숙소 안으로 조용히 들어간 하진은 쓰고 있던 마스크를 벗으며 침대에 앉았다.
“먼저 씻을게요.”
“…응.”
정우가 씻고 오는 사이에도 하진은 멍한 정신으로 앉아만 있었다. 옷도 벗지 않고 그냥 들어와 앉은 그대로였다. 씻고 온 정우가 하진의 어깨를 기어이 잡아 흔들 때까지도 쉽게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하진은 몸이 확 흔들리는 느낌이 난 뒤에야 고개를 들어 저를 내려다보는 정우와 눈을 맞췄다.
“…씻어요.”
“아, 벌써 나왔어? 나도 얼른 씻고 자야겠다. 빨리 자야 내일 스케줄도 하고, 그래야 너도… 아니, 형들한테도 폐 안 끼치고… 그럴 텐데 내가 잠이 잘 안 와서…….”
횡설수설하며 자리에서 일어난 하진이 방향을 순간 잘못 잡아 정우가 선 쪽으로 몸을 돌렸다. 말이 끊겼고, 몸이 부딪쳤다. 하진은 물에 젖은 정우의 머리칼 끄트머리에 맺힌 물방울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정우의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정우야.”
“네.”
“…나 좀 잘 수 있게 해줘. 네 맘대로 해도 돼. 아파도 되고… 넌 나 안 좋아하니까… 다른 건 안 해줘도 돼, 그냥… 그냥 네가 좋은 쪽으로만 막 해도 되니까…….”
“정신 좀 차려 봐요.”
“네가 해주면…… 늘 잠들었잖아. 나 그럼 잘 수 있을 것 같아서 그래……. 욕해도 돼……. 얼굴 안 봐도 되고… 정우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해도 돼… 정말이야. 힘들다고도 안 할게. 키스해 달라고도 안 할 거야.”
하진은 애원했다. 정우를 잡고 잘 맞춰지지 않는 초점을 맞추고 또 맞추며 매달렸다. 저를 혐오해도 좋고, 어떻게 해도 좋았다. 제발, 제발 저를 내버려 두지만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뿐이었다. 여기가 숙소라는 것도, 멤버들과 매니저 형이 있다는 사실도 다 잊었다. 지금 하진의 눈에는 정우밖에 보이지 않았다.
“네 생각이 나서 잠을 못 자……. 왜 나는 너를 좋아하게 됐을까… 답이 너무 많아서 그 답을 하느라고 못 자고, 내가 하는 그 수많은 대답만큼 너도 나를 좋아하지 않는 이유를 말할 것 같아서… 마음이 아파서 또 잘 수가 없어. 네 숨소리를 듣느라… 그걸 듣는 게 좋아서… 네가 잠들면 마음 놓고 들을 수 있으니까, 그러려면 나는 자면 안 되니까…….”
“형, 정신 좀 차려요. 형.”
“…현이진이랑 무슨 얘기를 할까…….”
“…….”
“현이진 아니어도… 다들 널 좋아하고 연락도 하고… 네가 정말 그 사람들 중에 한 명이랑 만나면 어쩌지……. 차정우가 사랑하는 사람은 누굴까. 네가 보고 웃어주겠지? 따뜻할 거야……. 너 원래 따뜻한 사람이잖아.”
“…….”
“손도 잡고, 네가 먼저 키스도 해줄 거고… 너도 설레고, 행복하겠지……. 그때가 되면 정말 나 같은 건…… 봐주지도 않을 거야. 신경도 안 쓰겠지……. 화도 안 낼 거고, 관심이 사라질 거야.”
맺혔던 마음들이 줄줄 쏟아지기 시작했다. 누군가와 통화를 하던 정우의 모습을 보며 혼자 해버렸던 질투와 불안감, 정우에게 사랑하는 사람이 생길지도 모른다는 두려움과 상실감이 하진의 모든 것을 녹여버렸다. 더는 형체도 남지 않을 만큼 하진은 정우의 앞에서 녹아버렸다.
“…나 좀 어떻게 해줘…….”
“강하진.”
“……아직 나랑 자는 거라도… 해줄 수 있다고… 해줘…….”
늘 반짝거리고 밝은 에너지가 보이던 눈동자는 이제 없었다. 정우는 제가 비추는 하진의 초점 없는 눈동자를 가만히 바라보며 욕을 짓씹었다.
“오늘 형 하는 거 보고.”
“…….”
그대로 몸이 기울었다. 하진은 침대 위로 뒷머리를 놓으며 제 위로 덮이는 정우의 그늘을 가득 끌어안았다. 저의 폐허 속 유일한 그 반짝임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