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
문을 열자 거울 앞에 서서 옷 위에 에이프런을 두르고 있는 하진이 보였다. 정우는 거울 안에서 마주치는 시선에 아무렇지 않게 방 안으로 완전히 들어가 문을 닫았다.
“촬영은 잘했어?”
“네.”
“저기 정우야.”
“네.”
“이따 저녁에 나 좀 도와주면 안 될까? 저녁 같이 먹는 거 찍을 건데… 내가 요리하는 거 하기로 했거든. 작가 누나 말로는… 너랑 같이하는 게 좋을 것 같다고 하셔서 내가 물어본다고 했어.”
어려운 일도, 또 사적인 부탁도 아닌 말을 참 어렵게 꺼내는 하진을 보니 기분이 좋지 않았다. 정우는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게요. 어차피 나도 형한테 부탁할 거 있었는데 잘됐네.”
“부탁? 뭔데? 내가 다 할게.”
“난 심야 영화 보러 가는 거 오늘 밤에 찍기로 했거든요. 새벽 한 시쯤 시작하는 영화인데, 갑자기 멤버 불러서 같이 보는 뭐 그런 상황이었으면 좋겠다고, 형 부르라고 하더라구요.”
“정말 내가 가도 돼? 나는 너무 좋지. 영화관 가서 너랑 같이 보는 건데 나야 당연히……. 아, 아니 그러니까 우리 같이 그렇게 둘이 가서 본 적은 없는 것 같아서….”
“그럼 난 형 요리하는 거 돕고, 형은 나랑 같이 영화 보는 거 찍고 그렇게 하는 걸로 해요.”
“…응. 그러자.”
“몇 시까지 오면 돼요? 연습실 갈 건데.”
“여섯 시부터 찍는다고 했어. 그때까지만 오면 돼.”
“시간 맞춰 올게요.”
고개를 끄덕이는 하진을 본 정우가 그대로 뒤돌아 방을 나섰다. 저는 뒤돌았는데, 하진은 여전히 저를 보고 선 건지 등 뒤로 닿아오는 시선이 느껴져 불편했다. 정우는 애써 닿아오는 시선을 뿌리친 채 밖으로 나가 문을 닫았다.
“…….”
자꾸만 거실에 멍하니 앉아 반복되는 영화 예고를 보고 있던 하진이 떠올랐다. 자신이 뭘 보고 있는지도 모른 채 그저 멍하니 어딘가에 시선만 두고 있던 그 무너져버린 시선이 마음을 자꾸만 건드렸다.
“정우야!”
“…….”
“차정우!”
“…네? 아, 네, 형.”
“요즘 그 방 기운이 안 좋나. 왜 그렇게 둘 다 멍 때리고 있어?”
“아, 리얼리티 찍는 생각 하느라 못 들었어요.”
“오늘 아주 정신이 없긴 하다. 나도 이따 거리 쇼핑 찍으러 나가야 돼. 바빠, 지금?”
“아니요. 괜찮아요.”
“그럼 오 분만 시간 좀 주라. 할 말 있어.”
영우가 숙소에 있는 스태프들을 한 번씩 보다가 정우에게 손짓했다. 정우는 그런 영우를 따라 아무도 없는 인규의 방으로 들어갔다. 문을 닫은 영우가 바깥으로 소리가 흘러나가지 않도록 목소리를 낮추며 입을 열었다.
“요즘 하진이 좀 이상하지 않아?”
“…형이 왜요?”
영우의 입에서 하진의 이름이 나오는 순간 정우의 심장이 덜컥였다. 정우는 하진의 이름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아니, 며칠 전에 언제였더라. 그… 아, 우리 민태 형 라디오 하고 온 날.”
“…네.”
“씻고 나왔는데 거실에 하진이가 혼자 앉아 있는 거야. 티비를 엄청 집중해서 보길래 뭘 그렇게 재밌게 보나 싶어서 가 봤거든. 그런데 그 티비 틀면 처음에 나오는 그 영화 광고 알지? 그걸 계속 보고 있는 거야.”
“…….”
“이상하잖아. 불러도 잘 모르고, 계속 그것만 봐. 그래서 아, 예고부터 진짜 취향인가 보다 하고, 예고가 그렇게 재밌냐고 물어봤더니 예고요? 그러는 거야. 안 본 거잖아, 화면을.”
“…네.”
“무슨 일 있는 것 같아. 그 한 번이면 모르겠는데, 요즘 다른 생각을 하는 것 같아. 넌 하진이랑 같은 방 쓰기도 하고 둘이 더 친하니까 좀 더 뭘 알 것 같아서.”
하진의 그런 행동에 대해 영우가 이상하게 생각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동안은 티가 나지 않게 잘 지냈다고 하지만, 점점 뒤틀리고 더는 붙을 수 없는 관계가 되면서 숨길 수 없는 순간들이 늘어났다. 하진은 전처럼 웃기도 하고, 맡은 일을 잘하기는 하지만, 분명 전보다는 무기력하고, 쉬는 틈이 생기면 멍하니 있는 시간이 많아진 게 사실이었다. 정우의 눈에도 보이는 그런 변화들이 다른 멤버들의 눈에 보이지 않을 리가 없었다.
“뭐 아는 거 없어? 너한테 뭐 털어놓거나 한 거 있으면 대충 말 좀 해줘. 보기 안쓰러워서 그래.”
“어… 딱히 그런 건 없어요. 활동도 많고 피곤해서 그런 거 아닐까요.”
“그래서 그런 거라고 하기에는… 뭔가 힘들어 보이는데. 혹시 그…….”
너랑 무슨 일 있어? 사실 너희 붙어먹는 거 봤어. 영우의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올 것 같아 정우는 긴장한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유세주 선배 때문인가?”
“…….”
“그 선배 바이잖아. 회사에서 금기어라 쉬쉬해서 그렇지. 샵에서 하진이한테 하는 것만 봐도 관심 있어서 그런 거 아니야? 괴롭힘당하나? 우리한테 말도 못 하고 혼자 고민하는 거 아닐까?”
“…그 이유도 있을 것 같아요. 저번에 민태 선배님도 형한테 유세주 전화 받지 말라고 조언해 주시는 것 같더라구요.”
정우의 말을 들은 영우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이제야 하진이 힘들어하는 이유를 알았다는 표정과 도대체 왜 가만히 있는 하진을 괴롭히는지 모르겠다는 표정이 뒤섞인 그런 얼굴이었다. 정우는 그런 영우를 보며 더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서로 믿으며 거짓은 없어야 할 멤버에게 거짓말을 하는 것 같아 편치 않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유세주가 아니라 저 때문이라고, 하진이 저를 좋아한다고, 멈추게 하려다가 희망 고문이 됐고, 지금은 말도 안 되는 짓거리를 하며 붙어먹게 됐다는 그 말을 할 수는 없었다.
“우리도 신경 더 쓸 테니까 정우 너도 하진이 좀 더 챙겨주라. 너도 하진이 각별하잖아.”
“…네. 그럴게요. 더 신경 쓸게요.”
“그래, 그래도 너랑 얘기하고 나니까 좀 낫네. 연습실 가려던 거야?”
“네. 저 어제 촬영 때문에 못 한 거 보충하기로 해서요.”
“아, 맞다. 어제 못 했지. 그럼 얼른 가. 이따 보자.”
“네.”
어깨를 두드리는 영우에게 가볍게 미소 지은 정우가 먼저 방을 나와 현관으로 움직였다. 바로 나가려고 했지만, 닫힌 방문으로 시선이 가는 것은 막을 수 없었다. 하진은 뭘 하고 있을까. 또 그렇게 가만히 넋을 놓고 앉아 있을까.
“…….”
작게 숨을 내쉰 정우가 그대로 뒤돌아 숙소를 나섰다. 혼자 있는 하진의 시간까지 떠올릴 이유가 없었다. 어떤 모습으로 뭘 하고 있든 그게 저와 무슨 상관이라는 말인가. 정우는 차게 내려앉은 시선으로 다시 짧은 숨을 내뱉었다. 나아지는 것은 단 하나도 없었다.
***
숙소에서는 다른 멤버들의 리얼리티 촬영이 이어졌다. 하진은 거실에서 진행되는 인규와 해성의 게임 촬영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내내 방에 머물렀다. 솔직히 그 무엇에도 흥미가 생기지를 않았다. 원래라면 나가서 구경을 하고, 리액션을 해줬을 텐데 지금은 기분 좋은 소리를 내는 것도, 또 게임에 집중을 하는 것도 힘들었다.
지난밤에도 제대로 잠을 자지 못해 머릿속이 뿌옇고 자꾸만 흘러내리는 것 같았다. 피곤하고 졸려서 눈도 감기고, 몸이 축축 늘어지는데 제대로 잠들 수 없었다. 오랫동안 뒤척이다가 잠깐 잠이 들어도 삼십 분도 버티지를 못했다. 어둠 속 다시 눈을 떠 절망하고, 또 등 뒤에서 들려오는 정우의 숨소리를 들으며 멍하니 새벽을 견뎌냈다. 방 안으로 누군가에게는 반갑고 또 누군가에게는 야속할 아침 햇살이 흘러 들어올 때면 피로가 쌓인 무거운 몸을 일으켰다.
“…….”
오늘도 그러겠지. 하진은 생각에 따라 뇌가 흔들리는 느낌에 미간을 구겼다.
“…….”
자고 싶어. 아무 생각도 안 하고 잠들고 싶어. 어떻게 하면 잘 수 있을까. 침대에 걸터앉은 채 눈을 감고 생각하던 하진은 정우와의 섹스를 떠올렸다. 몸이 무너지고, 머릿속이 전부 녹아 흘러내리는 그 뜨거운 쾌감과 함께 간신히 이어져 있던 무언가가 툭 끊어지는 그 느낌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게 끊어지면 제어할 수 없는 잠이 쏟아졌다. 언제 잠이 들었는지 기억도 나지 않을 만큼 순식간에 또 깊이 잘 수 있었다.
그 달콤함을 느끼고 싶었다. 가지고 있는 모든 것들이 녹아버렸으면 좋겠다. 정우는 저를 그렇게 만들 수 있었다. 섹스라는 건 누구와 해도 다 그렇게 녹아버릴 것처럼 좋은 걸까. 하진은 다른 사람의 손이 제 얼굴과 몸에 닿는 것을 상상해 보았다. 그 많은 얼굴 중 단 하나의 얼굴도 맺히지 않을 만큼 힘든 상상이었다.
“…….”
어떤 다른 얼굴을 떠올리려고 해도 결국 맺히는 것은 정우의 얼굴이었다. 제 얼굴 위로 쏟아지듯 가깝게 다가오던 정우의 얼굴과 몸을 덥히던 그 체온, 맞물리던 입술의 느낌과 떨어질 때의 그 소리, 문질리던 혀, 몸속 깊숙이 들어오던 그 묵직함과 죽어도 좋을 만큼 강한 쾌감까지 전부 느끼고 싶었다. 하진은 눈을 감은 채 긴 숨을 내쉬었다. 생각만으로 달아오른 숨에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사람들이라도 없다면 대충 자위라도 할 수 있을 텐데 지금은 불가능했다. 하진은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저었다.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해대는 자신이 스스로도 이렇게 역겨운데, 정우의 눈에는 더할 것이었다. 섹스에 미쳐 매달리고, 성기를 빨고 싶어 잘하겠다고 무릎을 꿇는 가볍고 더러운 제 마음을 순수한 사랑이라고 알아줄 리가 없었다.
작게 웃음을 터뜨린 하진이 더는 고여 있고 싶지 않아 거실로 나갔다. 시끄럽게 웃고 떠들며 게임 하는 해성과 인규를 보니 이제야 누군가가 살아 있는 세상에 도착한 것 같았다.
“하진아! 너 이리 와서 심판 좀 해라! 나 진짜 인규 형이 우겨서 억울해!”
“와, 내가 언제 우겼어? 하진아, 빨리 와. 네가 공정하게 보고 말해줘. 진짜 나 해성이 때문에 억울하다.”
“형, 진짜… 착했었는데 게임에 이렇게 영혼을 팔아요?”
“원래 게임은 영혼 팔고 하는 거야. 빨리 레디 해.”
“와, 이 형 무섭네.”
카메라가 하진의 얼굴로 향했다. 창백한 그 얼굴 위로 만들어진 웃음이 맺혔다. 하진은 아포제의 강하진이 되어 시간 속으로 파묻혔다. 하루를 어떻게든 보내려면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행복하고, 걱정 없이 밝은 아포제 강하진의 시간이 흐르기 시작했다.
***
하진은 시간을 확인했다. 이제 곧 여섯 시였다. 스태프들은 부엌에 여러 각도로 볼 수 있는 카메라를 설치해두고 돌아갔다. 리얼리티인 만큼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촬영하라는 배려였다. 하진은 부엌뿐만 아니라 거실에도 설치된 여러 대의 카메라를 눈으로 훑어보았다. 몸에 들어간 힘을 풀고 싶은데, 지켜보는 카메라가 많아 그럴 수가 없었다.
“강 셰프님, 오늘 저녁 메뉴는 뭔가요?”
“어, 오늘은 멤버들이 든든하고 맛있게 먹을 수 있는 스테이크 덮밥이랑 칠리새우입니다.”
“아, 대박. 언제 먹을 수 있죠?”
“보조를 해주기로 한 정우가 와야, 어? 문 열리는 소리 나네요.”
캠을 든 해성이 얼른 문 열리는 소리가 나는 현관으로 움직였다. 하진은 해성의 뒤를 따르지 않고 그냥 그 자리에 머물렀다. 곧 종일 그렇게도 내내 떨치지 못하던 정우의 얼굴이 눈동자에 가득 담겼다. 끝없이 반복하던 자기혐오가 아무 효과도 없는 건지 정우를 보자마자 해서는 안 될 생각부터 머리 안을 가득 채웠다.
“…….”
정우가 저대로 다가와 몸을 결박하고, 숨도 쉬지 못할 만큼, 아니 죽어도 좋으니까 죽어버릴 만큼 키스해 주고, 몸을 엉망으로 만들어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네가 밀려들었으면, 뒷걸음칠 무엇도 주지 않고, 사정 같은 거 봐주지 않고, 내 말 같은 건 듣지도 않고 가득, 끝까지 밀려들었으면 좋겠어.
“어? 제가 늦은 건가요? 아직 여섯 시 안 됐는데.”
어쩌지, 정우야.
“안 늦었어. 딱 맞게 왔어. 준비하고 나와.”
“네! 제대로 보조할게요.”
나… 생각을 멈출 수가 없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