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포제-59화 (59/122)

#59

멤버들은 차에 타자마자 모두 잠이 들었지만, 하진은 피곤함이 눈꺼풀을 내리찍는 느낌에도 잠들 수 없었다. 머리만 어디인가에 닿으면 쉽게도 잠이 들었던 전과는 달리 요즘은 잠을 자도 잔 것 같지가 않고, 피곤해도 잠이 들려면 한참이나 뒤척여야 했다. 그래서 늘 머리가 아프고, 정신이 멍했다.

“…….”

몇 번이나 밴 안에서도 잠을 청했지만, 결국 하진은 잠들지 못했다. 어둠 속에서 멍하니 흔들리는 어둠들을 바라볼 때마다 머릿속이 따라 흔들렸다.

“…….”

유세주의 연락이 와도 받지 말라던 민태의 말이 날카롭게 생각을 관통했다. 하진은 그리 기분이 좋지 않았던 그 말을 곱씹어 보았다. 유세주가 저에 대한 이야기를 타인에게 했다는 그 자체로도 마음이 불편했다. 다 알고 있는 건 아닐까. 그래서 저에게 자꾸 말을 걸고, 다가오려는 걸까? 아무것도 확실한 게 없는데도 마음이 조이며 아파 왔다. 꼭 심판의 날을 기다리고 있는 죄인 같았다.

“아, 차에서 자면 이상하게 머리가 아프더라.”

“중간에 깨서 그런 것 같아요. 금방 괜찮아지는 약 있는데 드릴까요?”

“주면 고맙지. 올라가자, 우리 막내.”

“너무 자연스럽게 말하니까 진짜 같잖아요.”

“오구오구, 그랬어? 진짜 같아서 놀랬어?”

혀 짧은 소리를 내는 해성을 보며 대놓고 얼굴을 구긴 영우가 발을 들어 그런 해성의 엉덩이를 걷어찼다. 그리고 하진의 팔을 당겨 자신의 뒤로 숨겼다.

“와, 잠이 다 깨네. 오구오구 뭐야? 머리 아프다더니 맛탱이가 간 듯. 우리 하진이 좋은 것만 보고, 좋은 것만 들어.”

“야, 네가 나보다 더 오염됐어. 넌 오염 그 자체야.”

“자기 소개하지 마시구요. 하진이 맡길 사람이 우리 정우밖에 없다. 우리 인규 형은 못난 조해성 케어 하느라 바쁘시고.”

영우에게 부드럽게 밀린 하진이 정우의 옆으로 섰다. 팔짱을 낀 채 엘리베이터 벽으로 기대어 서 있던 정우가 그대로 팔을 풀어 하진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별다른 대답은 없었지만, 영우의 표정을 봐서 정우가 웃고 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하진은 하마터면 정우의 따뜻한 어깨 위로 머리를 기댈 뻔했다. 아마 조금만 생각이 없었어도 기대어 버렸을지 몰랐다.

티격태격 장난치는 해성과 영우의 소리를 들으며 숙소로 들어간 뒤에야 어깨에 감긴 팔이 풀어졌다. 하진은 방으로 들어가 입고 있던 겉옷을 벗어 내려놓았다.

“아까 유세주 얘기한 거 맞죠.”

“…아, 응.”

“뭐라고 그래요? 유세주가 형한테 껄떡대는 게 거기까지 들어간 거예요?”

“…며칠 전에 만났는데 얘기가 나왔나 봐. 그래서 따로 연락하냐고, 전화 와도 받지 말라고… 조언해 주셨어.”

“미친 새끼네, 진짜. 쪽팔린 줄도 모르고 그걸 여기저기 다 말하고 다닌다는 거잖아요.”

“…….”

정우에게 가진 마음의 무게가 너무 무거워서 그런 건지, 저 말도 전부 저에게 하는 말처럼 들렸다. 하진은 괜히 입고 있는 옷만 만지작거리며 정우의 화가 묻은 낮은 목소리를 담아냈다.

“…만날 일 없을 거야. 전에도 연락한다고 말만 하고 연락 한 번도 안 왔거든.”

“오면요?”

“…바빠서 나갈 시간도 없을 텐데 뭐. 매니저 형이 허락도 안 해줄 거고.”

“시간 있으면, 또 허락해 주면 만날 거라는 말로 들리는데.”

“…사실 같은 회사 선배가 나오라는데 안 나가고 버티는 거… 쉬운 일 아니잖아. 심기 건드려서 좋을 거 없기도 하고.”

하진의 말에 인상을 쓴 정우가 마른 입술을 한 번 감쳐물었다가 놓았다.

“한 번 자 주면 다시는 연락 안 한다고 그러면 자 주기도 하겠네요?”

“…뭐?”

비꼬는 의미의 말이었지만, 목소리가 품은 감정은 비꼼보다는 화에 더 가까웠다. 그리고 시선과 표정 역시 웃음기가 하나도 없는 건조한 화에 물들어 있었다. 실수로 불이라도 붙으면 삽시간에 모든 것을 다 태워버릴 것만 같은, 싸늘함보다도 더 차가운 건조함이었다.

“하긴. 유세주랑 잘 맞을 수도 있지. 비슷하잖아요, 둘이.”

“…그만해.”

“남자 좋아하는 그 마음, 더 잘 알아줄 거 아냐.”

“차정우.”

“끼리끼리 어울린다는 말 듣기 싫으면…….”

행동 똑바로 해요. 뒤에 이어질 말은 흘러나오지 못했다. 예민하게 날이 서 있던 정우의 표정이 놀라움으로 무너졌다. 한마디도 더 말을 잇지 못한 채 하진의 얼굴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조심할게. 그런 말 안 듣도록 조심할게. 미안해.”

“…….”

하진은 울고 있었다. 더는 숨길 수 없는 것처럼 눈동자를 물들이며 왈칵 넘쳐 흘러내렸다. 마른 두 뺨을 적시며 흘러내리는 눈물은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지만, 꼭 온 방 안에 비명 소리가 울리는 것 같았다. 화를 낼 것처럼 말을 꺼냈지만, 결국 하진이 낸 마지막 소리는 미안하다는 말이었다.

“…나 먼저 씻을게.”

그대로 뒤돌아 아무 옷이나 들고 방을 나가는 하진을 보던 정우가 눈을 감으며 숨을 내뱉었다. 모든 게 다 엉망이었다. 즐거워야 할 일도 그렇게 즐겁지 않고, 신경 쓰지 말아야 할 일도 자꾸만 신경이 쓰였다. 활동에만 집중하고 싶은데 하진 때문에 그럴 수가 없어 자꾸만 화가 났다.

정우의 생각 속 하진은 남자를 좋아한다고 해도 유세주와는 너무나도 다른 사람이었다. 남자를 좋아한다고 해서 같은 카테고리에 절대 넣고 싶지 않을 정도로 달랐다. 그래서 하진과 유세주가 자꾸 엮이는 게 싫었다. 같은 공간에 그 둘이 서 있는 것을 보면 화가 나서 미칠 것 같았다. 제가 나설 일이 아닌데도 나서게 되고, 하진에게 날카로운 말을 내뱉게 됐다.

“…….”

신경질적으로 들고 있던 옷을 침대 위로 아무렇게나 던진 정우가 머리를 아무렇게나 마구 헝클였다. 제 말을 듣고 화를 냈다면 지금처럼 신경이 쓰이지는 않을 것이었다. 그런데 울었다. 하진이 울었다.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눈물만 흘려대던 그 얼굴이 떠올라 기분이 더 가라앉았다.

정우는 침대에 앉아 지끈대는 머리를 푹 숙였다. 머릿속으로 하진의 눈물이 자꾸만 흘러내려 정우의 온몸을 적셨다. 그리고 그 눈물이 방 안에 차오르기 시작했다. 발이 젖고, 발목이 잠겨 든다. 그리고 결국 정우의 숨통을 조이고, 머리끝까지 집어 삼켜버렸다.

「…미안해.」

화로 물든 말이 터져 나와야 할 자리에 얼마 전부터 자꾸만 힘이 꺾인 미안하다는 말이 놓이고는 했다. 화가 아니라 사과를 택한 그 마음은 어떤 걸까. 자책일까, 포기일까. 정우는 그대로 몸을 일으켜 하진의 눈물 속에서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걸음이 잘 옮겨지지 않는 눈물의 저항을 이겨내며 다가가 방문을 확 열었다.

방 안을 가득 채운 눈물이 바깥으로 퍼지며,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정우는 문이 조금 열리고 불이 꺼진 욕실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거실 소파에 무릎을 끌어안은 채 앉아 티비를 보고 있는 하진에게 시선을 돌렸다.

“…….”

하진이 보고 있는 화면은 티비를 틀면 가장 먼저 나오는 광고 채널이었다. 계속 같은 영화 예고만 나오는 그 화면에 내내 시선을 주고 있었다. 정우는 같은 영화 광고가 다섯 번 반복이 될 때까지 그 자리에 선 채 하진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하진은 미동도 없이 그 화면에 시선을 맞추고 있을 뿐이었다. 젖은 머리칼 끝에서 물이 뚝뚝 떨어졌다.

“뭘 그렇게 재밌게 봐? 아, 저거. 하진이 너 저런 영화 취향이었어? 저런 괴물 나오는 건 나랑 조해성이 좋아하는데.”

“…….”

“저기요? 강하진 씨? 하진아?”

“…네. 네? 아, 네, 형.”

“뭐야. 저게 그렇게 예고부터 재밌어?”

“예고요?”

하진은 열 번 정도 반복된 영화 예고를 단 한 번도 제대로 보고 있지 않은 것이었다. 정우는 하진의 옆으로 가서 앉는 영우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조금 당황한 하진의 시선이 영우의 뒤로 보이는 정우와 뒤엉켰다. 이대로 있다가는 또 하진이 울어버릴 것 같아서 정우는 얼른 뒤돌아 욕실 안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밖에서 영우의 목소리가 들렸지만, 정확한 대화 내용은 들리지 않았다. 정우는 고개를 젓고 입고 있던 티셔츠를 벗었다.

“…….”

가지지 말았어야 할 감정이 넘쳐 흐를수록 제가 알던 강하진이라는 사람이 텅 비어 가는 것 같았다. 눈물을 쏟아내고, 감정이 무너지며 자꾸만 흐릿해지고 있었다. 초점 없는 시선으로 의미 없이 화면을 보던 그 얼굴과 해야 할 말도 하지 못하고 눈물만 쏟아내던 그 장면이 자꾸만 정우를 뒤흔들었다. 무너짐의 전조인 걸까. 이러다가 저까지 망가지는 건 아닐까.

아니, 싫어. 감정 같은 것에 놀아나서 이 모든 걸 잃고 싶지 않아. 정우는 고개를 세게 저으며 눈을 꽉 감았다. 세면대 위로 얼굴을 푹 묻어버리듯 고개를 숙였다가 들어 수증기가 사라지고 맑아진 거울을 바라보았다.

“…….”

하진이 울고 있었다. 정우는 다시 눈을 꽉 감았다가 떴다. 그제야 거울 속으로 제 얼굴이 보였다.

“…….”

울고 싶은 저의 얼굴이.

***

활동이 시작되며 리얼리티도 막바지 촬영을 하기 시작했다. 아포제의 정규 1집 활동을 리얼하게 보여주기도 하고, 그 바쁜 활동 사이에도 스트레스를 풀며 즐겁게 지내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취지인 만큼 멤버들은 각자 즐겁게 할 일을 정해야 했다. 다행히 리얼리티도 스케줄 중 하나라 조금 여유롭게 하루 정도 시간을 얻을 수 있었다.

“자, 그럼 정우 씨 저번에 심야 영화 보고 싶다고 했었죠? 그럼 오늘 가면 어떨까요? 평일 심야라 사람도 많이 없을 거고. 영화관은 숙소에서 제일 가까운 플레이박스로 가면 좋을 것 같아요.”

“네, 좋아요. 안 그래도 보고 싶은 영화가 있었거든요. 제가 시간 볼게요.”

정우는 영화관 앱으로 들어가 심야 영화 시간을 확인했다.

“12시 40분 영화 있는데, 지금 예매 다섯 석도 안 된 것 같아요. 이거면 될까요?”

“네, 좋아요. 그러면 예매하는 것부터 촬영할게요. 아, 그리고 혼자 말고 영화를 같이 보고 싶은 멤버한테 즉석에서 연락하고, 멤버가 오고 그랬으면 좋겠는데.”

“아, 네. 뭐 다른 멤버들 촬영은 밤이면 다 끝날 것 같으니까 가능할 것 같아요.”

“하진 씨 부르면 어때요?”

“…아, 하진이 형으로요?”

“정우 씨도 알겠지만, 팬들의 니즈를 가장 만족시키는 조합이 정우 씨랑 하진 씨예요. 회사에서도 그렇게 둘 엮어서 홍보하고 그러던데 아니에요?”

아니라고 당당히 말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 정우는 그냥 작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저와 하진을 부부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많고, 또 그 조합을 원하는 말들도 많아 소속사에서도 뭔가 기획을 하거나 멤버를 붙일 때 저와 하진을 일부러 더 붙이는 편이기 때문이었다.

“네, 그럼 이따 영화관 가서 형한테 전화할게요.”

“좋아요. 하진 씨한테 미리 말해두는 거 잊지 말구요.”

“네. 알겠습니다.”

“거기까지만 우리랑 상의한 상황이고 이제 두 분 만나서 얘기하고, 영화 보고 그런 건 다 리얼한 상황으로 갈 거니까 편하게 하시면 됩니다. 그럼 지금 예매하는 거, 같이 보고 싶은 멤버가 있다고 하면서 두 장 예매하는 것부터 촬영하고, 끊었다가 이따 밤에 다시 시작할게요.”

정우는 촬영을 하는 카페에 앉아 다시 처음부터 영화 예매 앱을 켰다. 그리고 화면과 제 얼굴을 비추는 카메라를 한 번 바라보고 다시 예매를 시작했다.

“저는 오늘 평소 제가 보고 싶던 영화를 볼 생각입니다.”

“혼자 보실 거예요?”

“처음에는 혼자 볼까 했는데… 음, 이 영화를 같이 보고 싶은 멤버가 있어서, 그 멤버가 저랑 영화 취향이 비슷하거든요. 그래서 두 장을 예매하고, 이따 같이 보자고 전화를 해볼까 합니다.”

“심야라 멤버가 자면 어떡하죠?”

“어, 아쉽지만 뭐 그건 어쩔 수 없는 거니까요. 그런데 제 생각에는 같이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너무 자신 있게 말했나요? 이러고 혼자 보면 어쩌죠.”

카메라를 보며 웃는 정우의 얼굴이 스태프를 만족스럽게 만들었다. 정우는 화면을 보며 영화를 보기 전까지 해야 할 일들을 이야기했다.

“전 그럼 빨리 밤이 오기를 바라며, 연습실로 가야겠습니다. 저희 곧 콘서트라 이것저것 연습할 게 많거든요.”

“콘서트 스포 좀 해주세요.”

“음, 정말 대단한 무대가 많습니다. 제가 다 말씀드릴 수는 없지만, 멤버 개인 무대가 하나씩 다 있을 예정이구요. 또 멤버끼리 조합을 다양하게 해서 무대를 꾸미기도 할 예정입니다. 멤버 조합이나 그 무대 내용은 정말 특급 비밀이라 저도 말씀드릴 수가 없네요. 콘서트장에서 확인해 주세요.”

“자, 그럼 정우 씨는 밤에 다시 촬영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셀프캠은 연습하실 때 놓고 해주시면 됩니다.”

“네, 알겠습니다.”

스태프에게 인사한 정우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냥 혼자 보거나 다른 멤버를 불러서 같이 보는 거였다면 이렇게까지 신경이 쓰이지는 않았을 텐데 하진을 불러야 하고, 그 얘기를 하진에게 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편치 않았다. 하겠다고 한 이상 어쩔 수 없는 문제기는 하지만. 정우는 그렇게 하진이 있는 방으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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