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
“여러분,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드디어! 드디어! 우리 아포제 완전체가 우리 달이 뜬 언덕, 우리 달덕님들을 찾아왔습니다. 소개가 길면 또 우리 달덕님들 줄어드는 시간에 마음 아파하시니! 바로 모셔보겠습니다! 안녕하세요!”
FM라디오 ‘달이 뜬 언덕’은 청취율이 가장 좋은 방송 중 하나였다. 그리고 라디오 스케줄은 내내 앉아서 할 수 있고, 크게 몸을 쓰지 않기 때문에 편안한 분위기로 할 수 있어 그렇게 어렵지 않은 스케줄이었다. 게다가 ‘달이 뜬 언덕’ 디제이는 유세주와 같은 그룹에 있던 정민태라 훨씬 더 편한 분위기에서 긴장하지 않고 임할 수 있었다.
“자, 우리 아포제 여러분들 드디어, 드디어! 힘들게 모셨습니다. 요즘 정말 핫하고 또 핫한 만큼 바쁘시잖아요? 지금 우리 해성 씨 눈 밑에 다크서클이 짙어요. 그래도 잘생겼다, 정말. 다크서클 메이크업 일부러 한 것 같아.”
정민태의 재치 있는 진행에 스튜디오 안이 웃음으로 가득 찼다.
“아니다, 우리 아직 인사 안 했어요. 자, 이미 모든 분들이 우리 대세! 아포제 여러분 다 알고 계시지만 그래도! 우리 돌아가면서 인사 한 번씩 합시다! 자, 우리 리더 인규 씨부터 할까요?”
“네! 저부터 하겠습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그룹 아포제의 리더이자 맏형 송인규라고 합니다. 이렇게 달덕님들 보이는 라디오로 뵙게 되어 정말 기쁩니다. 오늘 즐거운 시간 보냈으면 좋겠습니다.”
“이야, 우리 리더는 다짐부터 다르다. 침착함이 그냥 바로 나온다, 나와. 자, 그럼 우리 예능캐 두 분. 해성 씨랑 영우 씨 인사 재밌게 가봅시다.”
갑자기 재밌게 인사를 하자는 민태의 제안에 해성과 영우는 큰 부담에 휩싸였다. 서로 마주 앉아 눈을 마주치고 아… 아아……. 소리를 내자 금세 댓글 창이 가득 찼다.
“해성 오빠 가오나시 같아요. 가오나시 나왔습니다. 네, 해오나시. 네, 옆에 영우나시. 재밌는 자기소개를 원했을 뿐인데 두 분 지금 별명이 생기셨어요. 역시 예능 캐릭터는 다릅니다. 자, 그럼 이제 평범하게 소개해 볼까요?”
자연스럽고 매끄럽게 진행을 하는 민태를 보던 하진이 제 맞은편에 앉은 정우를 바라보았다. 스튜디오가 그렇게 넓지 않아서 디제이인 민태를 중심으로 오른쪽에 두 명, 왼쪽에 세 명이 마주 보고 앉는 식으로 배치가 되어 있었다. 하진은 인규, 해성과 같이 앉아 있었다. 차라리 정우와 나란히 앉았으면 이렇게 얼굴을 볼 일이 덜 했을 텐데 마주 앉아 자꾸 얼굴을 볼 수밖에 없었다.
“자, 그럼 이제 우리 하진 씨. 인사 한번 해주세요. 요즘 아주 난리예요. 평소에 아이돌을 전혀 모르는 제 주변 분들도 하진 씨를 알더라구요. 그때 공항에서 넘어진 작은 아이 일으켜 준 적 있었죠?”
“아, 네. 그때 공항에 사람이 굉장히 많아서 아이가 넘어졌었어요. 위험할 것 같아서 얼른 일어나는 걸 좀 도와준 게 다인데 기사가 좋게 나고, 또 잘했다고 해주셔서 부끄러웠어요. 정말 제가 아니라도 다 그렇게 하셨을 일이니까요.”
“아니에요. 누구나 생각은 있는데 그 순간에 그렇게 가서 바로 일으켜 주고 그러는 거 쉽게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에요. 게다가 들어가는 길이었잖아요? 하진 씨가 진짜 대단한 일 한 거예요. 자, 여러분! 드디어 우리 강다정 하진 씨 소개 들어보겠습니다. 지금 댓글 창도 그냥 얼굴이 복지다, 숨 쉬어주셔서 고맙습니다, 태어난 걸로 할 일 다 했다, 난리가 났어요.”
너무 칭찬을 해주는 것에 부끄러워 귀가 빨개진 하진이 앞에 놓인 마이크로 얼굴을 가까이 가져갔다. 그리고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달덕 여러분. 저는 아포제의 강하진이라고 합니다. 제가 한 것도 없는데 예뻐해 주셔서 정말 행복한 시간들 보내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아포제 많이 사랑해주세요. 고맙습니다.”
“하진 씨 귀가 빨개졌다고, 귀를 박제하겠다는 댓글이 막 올라오고 있습니다. 좀 무서운데요? 귀 조심하세요. 자, 그럼 우리 막내! 드디어 정우 씨의 차례가 왔습니다. 아니, 아포제 온다고 라디오국이 난리가 났어요. 다른 작가들이랑 저기 앞에 방송 끝난 유미 누나도 저기 계시네요. 아포제 보겠다고 난리가 났는데, 진짜 우리 우월한 막내 보겠다고 줄을 섰어요. 네, 지금 유미 누나가 톡 보내셨는데, 너는 말 그만하고 아포제만 말하게 해. 빨리 막내 인사 시켜. 너는 말 그만해, 경고야. 라고… 네, 죄송합니다. 정우 씨 인사 들어볼게요!”
하진은 일부러 맞은편에 앉은 정우를 바라보지 않았다. 밑에 놓인 대본들을 손끝으로 문지르며 애써 다른 생각을 하려 애썼지만, 결국은 정우의 작게 웃는 그 목소리에 시선을 들어 올릴 수밖에 없었다.
“아포제 막내 차정우입니다. 달이 뜬 언덕에 처음으로 나와서 이렇게 보이는 라디오를 하게 됐는데, 정말 좋습니다. 오늘 라이브도 준비했고, 또 그 외에도 준비한 게 많으니까 끝까지 함께해 주시기를 부탁드리겠습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목소리가 너무 좋다. 아니, 저도 기억이 나는 게 있는데, 정우 씨 처음 연습생 들어왔을 때 정말 한 번 난리가 났었어요. 대박이다. 초대박 연습생 들어왔다. 얼굴 실화? 막 다 이랬는데, 어린 그 나이에 목소리까지 너무 좋은 거예요. 저한테 인사를 딱 한 적 있는데, 제가 진짜 아, 쟤는 뭘 해도 되겠다 하는 느낌이 있었어요. 그런데 정말 되셨어요. 초대박으로. 축하드립니다.”
“아, 고맙습니다. 다 도와주신 덕분이죠.”
“여러분 아포제가 이렇게 겸손합니다. 자, 그럼 본격적으로 이야기 나눠보기 전에! 안 들어볼 수가 없죠. 우리 이번 아포제 정규 1집, 대박이라는 말로도 부족할 만큼 난리가 났어요. 그래서 앨범에 대한 얘기를 안 할 수가 없는데, 먼저 타이틀곡 들으시고! 시작을 해보겠습니다. 자, 그 많은 음원사이트를 다 씹어 먹은! 전체 음원차트 1위에 빛나는 곡입니다. 아포제의 호스티지! 듣고 오겠습니다.”
익숙한 타이틀곡 전주가 흐르며 마이크가 꺼졌다. 멤버들은 귀에 쓴 헤드폰에서 흘러나오는 타이틀곡에 맞춰 앉아 간단히 춤을 추기도 하고, 노래를 따라 부르기도 했다.
“그런데 하진이는 오늘 컨디션 별로야? 텐션이 낮아 보이는데.”
“어, 그래 보여요? 아닌데… 괜찮아요. 들어오기 전에 뭘 너무 많이 먹었나 봐요. 좀 졸려서 그런가……. 더 잘 하겠습니다.”
“왜 안 피곤하겠어. 요즘 잘 시간도 없을 텐데. 하루에 몇 시간씩 자? 시간 단위가 아닌가?”
“많이 자면 두 시간인데 대부분 이동하는 차에서 자요. 숙소 침대에 누워 잔 지는 며칠 된 것 같아요.”
“그래도 그때가 나중에 보면 진짜 행복한 때야. 나중에는 노 젓고 싶은데 물이 안 들어와서 팔만 빠져. 노는 부서지고. 지금 물 들어올 때 열심히들 해. 우리처럼 되지 말고.”
내막을 살펴보자면 그렇게 웃으며 할 이야기가 아닌데도 민태는 농담으로 밝게 이야기를 했다. 엄청난 인기를 누리다가 유세주의 스캔들로 무너지기 시작한 그룹의 이야기는 아이돌을 좋아하는 사람들이라면, 아니, 연예계에 조금만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아는 이야기였다. 하진은 그 말마저 저에게 하는 경고처럼 들려 쉽게 웃을 수가 없었다.
“자, 노래 듣고 다시 돌아왔습니다. 아니, 타이틀곡이 너무 좋아서 앨범 이야기를 안 할 수가 없어요. 그런데 또 우리가 딱딱하게 곡 소개하고 그런 건 다른 데에서 다 하셨을 것 같으니까 오늘은 수록곡들을 라이브로 한 소절씩 돌아가며 부르고, 그 곡에 있는 에피소드를 말해보면 좋을 것 같아요. 어떠세요? 해성 씨 괜찮아요?”
“아, 너무 좋습니다.”
“자, 그럼 우리 정우 씨부터 가볼게요. 역시 타이틀곡부터 얘기를 해야 좋겠죠. 정우 씨 타이틀곡 한 소절 불러주시고, 그 곡과 얽힌 에피소드 하나만 얘기해주세요.”
민태의 말에 웃은 정우가 마이크 가까이로 얼굴을 가져갔다. 그리고 타이틀 의 후렴구를 짤막하게 불렀다. 그 매력적인 음색에 멤버들이 평소보다 조금 더 오버해서 리액션을 보였다.
“어떤 에피소드를 얘기해야 할지 모르겠는데요. 음, 이 곡 안무 연습을 할 때 정말 멤버들 전부 다 고생을 많이 했었어요. 어렵기도 하고, 저희가 포인트를 살려야 하는 부분이 굉장히 많은 안무라 이걸 해낼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어렵고, 또 걱정이 많이 되는 안무였는데요.”
“아니, 안무가 진짜 어렵기도 한데 정말 야하던데요? 특히 도입 뭐예요. 팬분들이 난리예요.”
“아, 저도 도입 안무 부분을 제일 좋아합니다. 하진이 형이랑 맞출 수 있어서 더 좋았어요.”
갑자기 닿아오는 정우의 시선에 하진은 순간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 얼굴을 바라보았다. 정우와 타이틀곡 안무 연습하던 때가 떠올랐다. 밀착하고, 숨이 닿고, 그 손이 눈 위를 덮는 순간의 떨림까지 전부 몸을 타고 흐르는 기분이었다.
“아니, 정우 씨가 지금 하진 씨 얘기하니까 댓글이 난리예요. 전부 다 한 마음으로 부부라는데 이거 뭐예요? 두 분 부부예요? 법적으로? 나만 몰랐던 건가. 부부 아이돌이야? 얘들아, 한영도 알아?”
정말 놀란 듯 눈을 크게 뜬 민태가 속삭이는 것처럼 소속사도 아는 사실이냐고 물으며 장난을 치는 것에 다시 웃음이 크게 터졌다. 그런 민태를 보고 미소 지은 정우가 입을 열었다.
“데뷔 초부터 인터뷰할 때 이제 그런 질문들이 가끔 나오잖아요. 결혼하라면 할 수 있을 것 같은 멤버.”
“아, 그 질문 저도 많이 받았어요.”
“그 질문에 저는 하진이 형을 뽑고, 하진이 형은 저를 뽑았었는데, 이제 그 뒤로도 계속 질문받을 때마다 계속 같은 대답을 했거든요. 그래서 부부라고 별명을 지어주신 것 같아요.”
“아, 그럼 서로 결혼에 대한 생각이 확고하신 거네요?”
“저는 그런데 형도 그래요?”
또다시 시선이 하진에게 몰려들었다. 하진은 저를 바라보는 정우의 눈을 피하지 않았다. 아니, 피할 수가 없다는 게 더 적절한 상황이었다. 카메라가 이 모든 상황을 담고 있고, 실시간으로 내보내는 중이었다. 튀는 행동, 조금이라도 오해를 받을 수 있는 행동을 하면 안 된다는 생각이 머리 안에 가득했다. 그래서 하진은 입술을 올려 환히 웃을 수밖에 없었다.
“전 늘 정우 씨 생각과 같습니다.”
하진의 대답에 스튜디오 안으로 두 사람을 놀리는 목소리들이 가득 퍼졌다. 하진은 모두가 즐겁게 웃고 있는 그 안에서 같은 감정으로 머물지 못하는 자신을 자꾸만 채찍질했다. 팬들이 원하는 대답을 해야 하고, 또 팀에 플러스가 되는 상황을 잘 만들어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정우의 저런 의미 없는 말과 시선에 일희일비하는 제가 싫었다.
“자, 그럼 두 분 결혼 축하드립니다. 청첩장 나오면 꼭 한 장 주세요.”
민태의 깔끔한 마무리로 그 부분에 대한 에피소드는 마무리가 되었지만, 한동안 댓글 창에는 계속 부부가 부부했다, 공식을 이길 수 없는 2차 같은 말들이 올라왔다. 재밌는 댓글이 있으면 언제든 읽어도 된다는 말을 들었지만, 하진은 단 하나도 소리 내어 읽을 수가 없었다. 저와 정우의 이름이 같이 올라오는 것만 봐도 죄책감과 괴로움이 마음을 난도질하기 때문이었다.
“…….”
명치가 답답해 한 번씩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았다. 하진은 노래가 나올 때마다 카메라에 비치지 않도록 살짝 몸을 숙이거나 틀어 가슴 위를 두드렸다. 안 먹다가 먹어서 그런 건지, 아니면 정말 이렇게 모두를 속이고 아무렇지 않은 척하는 상황 때문인지 체한 것처럼 속이 답답하고, 머리가 아팠다.
라디오는 그렇게 한 시간 반 정도 진행이 되었다. 다른 스케줄보다 시간이 더 빨리 가고 그리 힘들지 않았지만, 계속 정우와 하진을 엮어 부부라고 말하는 민태와 팬들의 댓글에 하진은 지끈대는 머리를 내내 눌러야 했다.
“오늘 다들 수고했어. 피곤했을 텐데. 사진 찍고 가면 돼. 아, 그리고 하진아.”
“네?”
“잠깐만.”
주변을 한 번 본 민태가 하진에게 은밀히 손짓했다. 하진은 그 손짓만으로도 무거워지는 마음을 누른 채 다가갔다. 정우가 스튜디오 한쪽에 선 채 그런 하진을 가만히 눈에 담았다.
“너 혹시 세주랑 개인적으로 연락해?”
“아니요. 한 번도 한 적 없었어요.”
“그래? 다행이다. 혹시 연락처는 알아?”
“…네. 저번에 알려달라고 하셔서…….”
“와도 받지 마. 절대 만나지 말고. 세주가 그렇게 쓰레기 짓 할 놈까지는 아니지만, 그래도 하진이 네 입장에서는 안 엮이는 게 좋잖아. 내가 이런 말까지 하는 거 좀 웃기긴 한데… 며칠 전에 만났을 때 네 얘기를 하더라고. 눈여겨봐 뒀다는 식으로.”
“…….”
“너도 알지, 세주. 안 가리고 만나는 거.”
“…네.”
“알아서 잘하겠지만, 그래도 혹시나 해서 말해주는 거야.”
고맙기도 하고, 불편하기도 했다. 솔직히 선배에게 이런 말까지 듣는 것은 그리 기분 좋은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굳이 그 마음을 내색할 필요는 없었다. 하진은 살짝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고 몸을 돌렸다.
“…….”
“…….”
눈이 마주쳤다. 거리가 어느 정도 있기는 하지만, 분명 정우가 저를 보고 있었다. 꼭 나쁜 짓을 하다가 들킨 것처럼 심장이 쿵쿵대기 시작했다. 하진은 그 마음의 울림을 느끼면서도 짐짓 아무렇지 않은 척 멤버들이 있는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