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포제-57화 (57/122)

#57

- 그룹 <아포제>의 정규 1집 앨범 의 판매량이 발매 일주일 만에 백만 장을 돌파했습니다. 디지털 음원이 강세인 요즘 정말 놀라운 소식이 아닐 수 없습니다. 강호진 기자가 자세한 소식 전해드립니다.

- <아포제> 열풍 어디까지 갈까. 발매 일주일 만에 음반 판매 초동 기록 100만 장 훌쩍 넘겨, 존재하는 국내 모든 음원사이트는 물론 해외 유명 음악 차트까지 석권. 뮤직비디오 조회 수 역시 최단기간 기록 경신.

- 실패가 없는 한영 엔터테인먼트, 또 하나의 메가히트 <아포제>

- 아포제 첫 번째 단독 콘서트 오픈 한 시간 전부터 예매 사이트 마비, 오픈 10분 만에 3일 공연 4만 5천 석 매진.

온 언론이 아포제의 성과를 보도했다. 음반판매량은 물론이고 방송사 1위 합산 점수까지 적수가 없었다. 한영엔터테인먼트에서 아포제 앨범, 음원, 노출 모니터를 하던 직원들도 더 볼 필요가 없다며 자리를 떴을 정도로 정규 1집 반응은 압도적으로 좋았다.

특히 타이틀곡인 의 도입 안무에 대한 반응이 뜨거웠다. 정우가 하진의 눈을 가리고, 하진이 그 손을 뿌리치며 카메라를 바라보는 모습만 짧게 잘려 SNS에 퍼졌고, 금세 전 커뮤니티로 퍼져 나갔다. 음악 프로그램에서 팬서비스로 올려준 아포제 하진 개인 직캠과 정우 직캠은 다른 멤버들보다 스무 배나 높은 조회 수를 기록했다. 그렇게 하진은 도입요정이라는 타이틀을 굳건히 지켜냈다.

“아, 배고파. 갑자기 너무 배고파.”

“우리 오늘 한 끼도 못 먹었잖아요.”

활동 2주 차에 접어들자 스케줄이 너무 많아져 정신을 차릴 수가 없을 정도였다. 침대에 등을 붙이고 잔다는 것은 있을 수도 없는 일이 되었고, 새벽부터 샵에 가 준비를 하고, 스케줄을 소화해야 했다.

그중에서도 오늘이 가장 힘든 날이었다. 새벽 4시에 준비를 해서 6시에 사녹을 했고, 오전에는 공중파 예능 프로그램 녹화가 있었다. 그리고 끝나기가 무섭게 이동을 해서 또 다른 케이블 예능프로그램을 하나 촬영했다. 워낙 타이트하게 이어지다 보니 식사는커녕 물 한 모금 제대로 마실 시간도 나지 않았다.

“오늘 이거 보라만 하면 끝나는 거지?”

“네. 내일 오전에 광고 촬영 있어서 얼마 자진 못하겠지만, 그래도 드디어 침대에서 잘 수 있어요.”

“대박. 난 제대로 눕기만 해도 소원이 없을 것 같아.”

하진은 눈을 감은 채 샌드위치를 먹는 해성을 보며 얼른 저도 한입 가득 베어 물었다. 정말 아침부터 너무 바빠서 배가 고픈 줄도 모르고 내내 시간을 보냈었다. 밤 아홉 시에 먹는 이 샌드위치가 오늘의 첫 끼이자 아마 마지막 끼가 될 것이었다.

“무슨 빵이 이렇게 맛있냐.”

“얘들아, 이것도 먹어. 너희 팬들이 서포트 도시락 보냈어. 몸 보양 도시락이라니까 라디오 들어가기 전에 얼른 먹어.”

“헐, 밥이다!”

라디오 대기실로 들어온 지창의 양손에는 커다란 가방이 두 개 들려 있었다. 영우는 샌드위치를 입안 가득 문 채 얼른 그쪽으로 가 가방을 받아들었다. 그리고 안에 든 정성 가득하고 화려한 도시락을 감격한 얼굴로 꺼내 들었다.

“빵 놓고 밥 먹자, 밥. 정우랑 하진이랑 빨리 와. 형! 이리 오세요.”

“난 왜 안 부르냐?”

“넌 이미 들고 있잖아.”

“와, 이게 다 뭐야. 랍스터, 이거 치킨, 스테이크랑 와, 이거 위에 뿌려진 거 금가루 아니야?”

해성과 티격태격하면서도 영우는 투명한 도시락 뚜껑들을 열며 웃음을 감추지 못했다. 하진 역시 먹음직스러운 내용물을 보다가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 인증샷을 몇 장 찍었다.

“아, 역시 우리 강다정은 달라. 우리처럼 밥의 노예가 아니야. 팬부터 생각하는, 인증해 줄 생각을 놓치지 않는 저 프로 아이돌의 마인드. 우리 다 배워야 된다. 그러지 말고 우리 단체로 한 장 찍고 먹자. 지창이 형, 저희 한 장만 찍어주세요. 공계에 올리게.”

“그래, 자, 도시락들 들고.”

하진은 얼른 도시락을 들고 멤버들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비어 있는 손으로 한 번은 브이를 또 한 번은 엄지를 치켜세우며 사진을 찍은 뒤에야 도시락을 먹을 수 있었다.

“아, 진짜 살 것 같다. 태어나 먹은 것 중에 제일 맛있어, 지금.”

통통한 랍스터 살을 들어 입에 넣은 영우와 해성이 의자 뒤로 죽은 듯 몸을 늘어뜨렸다. 그런 멤버들을 본 하진이 웃으며 랍스터 볶음밥을 떠 입에 넣었다. 정말 이 순간 더 바랄 게 없을 만큼 맛있어서 할 말이 없을 정도였다. 멤버들은 대화를 하는 것도 잊은 채 먹는 것에 집중했다. 모이기만 하면 늘 시끌시끌하던 대기실 안에는 젓가락 움직이는 소리 외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기다란 테이블 자리가 부족할 정도로 다양한 종류의 음식을 싹 다 비우자 그제야 여기저기에서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이제 좀 목소리가 커졌네. 아까는 다들 죽어가는 목소리 내더니.”

“형, 이제야 살 것 같아요.”

“안 돼. 더 먹어야 돼. 이제 디저트야.”

지창은 웃으며 다 먹은 것들을 겹쳐놓고 생긴 빈자리에 큰 종이박스를 놓았다. 그 안에는 망고, 청포도, 파인애플, 체리, 멜론, 오렌지, 자몽이 먹기만 하면 되게 각각 담겨 있는 과일 도시락들이 나란히 들어 있었다. 그 외에도 한입 크기의 쿠키와 비타민 음료, 하루 영양제와 착즙 주스까지 리본으로 묶여 있었다.

“아, 진짜 대박이다.”

“라디오 진짜 열심히 해야겠다.”

“결심했어. 혼신의 힘을 다하기로.”

“난 이거 안 먹어도 혼신의 힘 다 하려고 했는데.”

“아, 진짜 조해성 개밉상이야.”

과일을 먹으며 장난치는 멤버들을 본 하진이 의자 뒤로 기대어 휴대폰을 확인하는 정우에게 시선을 옮겼다. 종일 배고팠을 텐데 도시락도 별로 먹지 않고, 과일이나 디저트에도 손도 안 대는 것을 보니 자꾸 신경이 쓰였다.

“정우 너는 왜 그렇게 못 먹어? 어디 안 좋아?”

“저 많이 먹었어요.”

“요즘 수상해. 자꾸 사라지고, 전화도 자주 오는 것 같고. 누구 만나?”

“그런 거 아니에요.”

“기사로 알게 하지 말고 연애하면 미리 말해. 형들이 커버 쳐 줄게.”

“진짜 아니에요. 아무도 없어요. 그냥 일방적인 연락이 자꾸 와서 거절하고 있어요.”

해성과 영우는 흥미진진하다는 듯 정우의 말을 듣다가 일방적인 연락이라는 부분에 꽂혀 환호를 하며 놀리기 시작했다.

“정우야, 어디서 자꾸 연락 와? 나한테 말해. 이제 1년 좀 넘은 애들 망치려고 작정을 했나. 너희 진짜 아직 안 된다, 어? 내 눈도 피해서 만나는 거야 내가 어쩔 수 없는 거지만, 안 들킬 것 같지? 다 들켜. 누군가는 보고 있다는 것만 늘 기억해.”

“제가 해결할게요. 거절 다 하고 있어요.”

“그런 건 매니저한테 제대로 말해야 돼. 여기서 말하기 그러면 나중에 따로 말해줘.”

“네, 그럴게요.”

청포도를 하나 들어 입에 넣었던 하진은 무슨 맛인지도 전혀 느끼지 못한 채 남은 것을 삼켰다. 과일들을 보는 순간 맛있겠다는 생각이 가득 차 있었는데, 우습게도 갑자기 식욕이 뚝 떨어져 버렸다.

“저 먼저 양치하고 올게요.”

“다 먹었어? 더 먹지.”

“저 진짜 많이 먹었어요. 더 먹으면 라디오 하다가 잘 것 같아요.”

“넌 자기만 해도 시청자 수 엄청 오를걸. 얼굴 대유잼.”

얼굴 옆으로 손을 올려 반짝거리는 표시를 하는 영우를 보고 웃은 하진이 가방 안에서 칫솔 케이스를 꺼내 대기실을 나섰다. 그리고 복도 끝 쪽에 있는 화장실로 가 세면대 앞에 섰다.

“…….”

거울 속 보이는 제 얼굴이 심술궂어 보였다. 심술보가 덕지덕지 붙은 투덜이 같아서 실소가 터졌다. 꼭 정우와 무슨 사이라도 되는 것처럼 요동치는 감정에 미칠 것 같았다. 형들이 정우를 놀릴 때 그냥 같이 놀리면 되고, 고개를 끄덕이면 되는데 그게 되지 않았다.

“…….”

정우와 다른 사람이 통화를 한다는 그 자체만으로도 마음이 오목해졌다. 어떻게 이런 것까지 질투할 수가 있는 걸까. 그래, 질투. 이건 명백한 질투였다. 하진은 고개를 저으며 치약을 묻힌 칫솔을 입에 물었다. 그리고 혀가 얼얼해져 입속에 아무런 감각이 없을 때까지 이를 닦고 또 닦았다.

「그냥 일방적인 연락이 자꾸 와서 거절하고 있어요.」

일방적인 연락. 사람들은 정우에게 어떤 말을 할까. 좋아한다고? 관심이 있으니 만나 보자고? 누구일까. 분명 예쁜 아이돌이나 배우일 것이었다. 누가 봐도 예쁘고 반짝반짝한 그들에게 시선이 가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었다.

또 음악방송이나 여러 방송사 스케줄을 하다 보면 자주 만나게 되는 사람들이 있었다. 벌써 어느 정도 친해져서 인사를 하고, 대화를 나누는 그룹들도 여럿 생겼고, 그중에는 여자 아이돌 그룹도 있었다. 그중 한 명인 걸까.

“…….”

정우가 누군가를 좋아하게 되고, 사랑하게 된다는 생각을 하니 견딜 수가 없을 만큼 마음이 아프게 조여들었다. 너는 사랑하는 사람에게 어떤 얼굴을 할까. 오롯이 따뜻한 시선과 손길, 다정한 목소리와 분위기. 하진은 눈물이 날 것처럼 뜨거워진 눈가를 차가운 물이 묻은 손으로 꾹 눌렀다. 그리고 페이퍼타월을 뽑아 물에 젖은 입술을 닦아냈다.

“저번에도 말씀드린 것 같은데요.”

갑자기 예민하고 짜증이 묻은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에 고개를 든 하진은 저를 보고 잠시 걸음을 멈춘 정우를 바라보았다.

“자꾸 메시지 남기시고, 부재중 전화 남아 있고 이러는 자체가 부담스럽습니다.”

하진에게서 시선을 거둔 정우가 안으로 들어와 전부 다 비어 있는 칸을 눈으로 확인한 뒤 물기가 없는 세면대 쪽으로 기대어 섰다. 하진은 물에 젖어 흐물흐물해진 페이퍼타월을 버리지도 못한 채 멍하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한 번만 더 연락하시면 정말 매니저 형한테 말씀드리겠습니다.”

누구일까. 지난번 회사 비상구에서도 정우가 이런 전화를 받는 것을 본 적 있었다. 같은 사람인 걸까. 아니면 또 다른 사람인 걸까. 하진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귓가에 닿아오는 목소리를 들을 수밖에 없었다.

“스케줄 들어가야 해서 먼저 끊겠습니다.”

미간을 확 구긴 채 귀에 대고 있던 휴대폰을 내린 정우가 짜증이 묻은 얼굴로 화면을 눌렀다. 하진은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한 채 그 자리에 서서 그런 정우를 흘끔 바라보았다.

“현이진이에요.”

“…어?”

“전화한 사람.”

“아…….”

“한 번만 만나 보면 생각이 달라질 수도 있으니까 딱 한 번만 만나보자고 자꾸 연락이 와요.”

“…그랬구나. 진짜 네 팬이신가 보다.”

단순히 팬이라 연락을 하는 게 아니라는 것 정도는 하진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 상황에서 다른 말을 붙이고 싶지 않았다.

“내가 자기 이상형이래요.”

“…그래? 그런 사람 많잖아.”

“숙소 앞으로 갈 테니까 잠깐 내려오기만 하라고 그러는데.”

“……지창이 형한테 혼날 거야. 형이 그랬잖아. 보는 눈이 늘 있다고 생각하라고……. 사생들이 있을 수도 있고…….”

“하긴. 형이나 되니까 붙어먹어도 모르는 거지.”

“…….”

그 정도 말로 상처를 받지는 않았다. 정우가 현이진을 만나지 않기로 확실히 마음을 정한 것 같아 오히려 기뻤다. 하진은 그제야 꽉 쥐고 있던 잔뜩 뭉쳐진 페이퍼타월을 휴지통으로 버렸다.

“아니다, 그냥 만나 보고 괜찮으면 사귈까.”

“…어?”

정우의 말에 놀란 하진이 확 몸을 돌려 여전히 휴대폰 화면에 시선을 둔 정우를 바라보았다.

“그럼 형 마음 접을지도 모르잖아요.”

“…….”

“형은 착해서 나 애인 생기면 나 좋아하고 그런 짓 못 할 것 같아.”

“…그런 짓…….”

“나도 좋아하는 사람 생기면 형이 날 좋아하든 말든 별로 중요하지 않아지겠죠. 내 감정이 우선일 테니까.”

“…좋아하는… 사람…….”

하진은 충격에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멍하니 정우가 하는 말의 일부를 되뇌었다. 너무나 현실적으로 당장 내일이라도 닥쳐올 수 있는 일이라 더 그랬다. 정우에게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고, 정우가 그 사람에게 모든 감정을 쏟는 것을 생각하니 질투가 아니라 아픔이 밀려들었다.

“난 좋아하는 게 생기면 정신 못 차리거든요.”

“…….”

내내 휴대폰을 보던 정우가 몸을 바로 세우며 하진을 바라보았다. 하진은 정우의 바지 주머니 속으로 들어가는 휴대폰을 한 번 바라보았다. 내내 그 시선이 닿아 있던 저 기계에게도 질투가 나는 것 같았다.

“그래서 내가 형한테도 정신 못 차렸었잖아요.”

“…….”

“내가 형 진짜 많이 좋아했거든.”

“…….”

하진은 불분명한 초점으로 양치하는 정우를 바라보았다. 기다란 몸을 구부려 세면대 가까이로 얼굴을 대는 정우를 볼 때마다 마음이 따라 기울었다. 네가 흘려버리는 그 물속에 내 마음도, 이 감정도, 이 말도 안 되는 아픔도 다 따라 사라지면 얼마나 좋을까.

“내가 어느 정도로 형을 좋아했었는지 알아요?”

흐르는 물을 잠그고 몸을 돌린 정우가 하진에게 성큼 다가와 가까이 섰다. 그리고 하진의 얼굴 옆으로 손을 뻗어 그 뒤에 있는 페이퍼타월을 한 장 빼냈다.

“자는 시간이 아까웠어요. 형이랑 빨리 연습하고 싶은데 왜 이렇게 시간이 안 가나 이런 생각까지 했다니까.”

“…….”

“같이 데뷔 못 하면 아무 의미가 없다는 생각까지도 했는데.”

“…….”

“섹스까지 할 거라고는 생각 못 했네.”

정우가 한 걸음 더 다가가자 하진의 몸이 뒤로 밀렸다. 하진은 뒤로 한 걸음 물러서면서도 정우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그런 하진의 얼굴을 내려 보던 정우가 웃음기 없는 얼굴로 손을 뻗어 젖은 페이퍼타월을 휴지통 안에 처박았다. 이제 얼굴은 입술이 닿을 정도로 가까워져 있었다.

“숨 쉬어요.”

“…….”

“정신도 좀 차리고.”

“…….”

“기대하는 일 해주기에는 때와 장소가 적절치 않네.”

그대로 얼굴이 멀어졌다. 하진은 먼저 화장실을 나서는 정우의 소리를 들으며 그제야 머금고 있던 숨을 쏟아냈다. 그리고 복도 저 끝에서 저를 부르는 목소리에 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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