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포제-56화 (56/122)

#56

아포제의 정규 1집 발매일이 15일 앞으로 다가오며 프로모션이 시작되었다. 번화가 가로수에 공식 사진이 걸리기 시작했고, 하진의 개인 티저를 시작으로 티저가 공개되었다.

가장 먼저 공개된 하진의 영상 티저는 그동안 보인 모습보다도 훨씬 더 다크하고 섹시한 모습이라 팬들의 반응이 아주 뜨거웠다. 티저가 공개된 자정을 기점으로 24시간 뒤, 인규의 티저가 공개될 때까지 강하진이라는 이름은 메인포털 실시간 검색어 2위 밑으로 내려가지 않았다. 그만큼 하진의 변신은 성공적이었다.

티저는 인규, 영우, 해성, 그리고 정우 순서대로 공개되었다. 모든 멤버들의 반응이 좋았지만, 하진만큼이나 정우 티저에 대한 반응도 폭발적이었다. 하진이 묘한 감정을 들게 하는 느낌의 섹시함이었다면, 정우는 그야말로 연하의 반전매력이었다. 단추가 풀린 셔츠 사이로 아슬아슬하게 보이는 가슴 근육과 복근에 그야말로 커뮤니티가 한 번 더 뒤집어졌다.

2주 동안 받은 정규 1집의 선주문이 100만 장을 돌파했다는 기사는 발매일 사흘 전에 온 언론으로 떠올랐다. 디지털 음원이 잡은 가요계를 뒤집은 최초의 보이그룹이라는 타이틀로 극찬이 쏟아졌다. 때마침 나온 의 30초 티저 또한 큰 화제가 되며 팬과 대중의 기대감을 부추겼다.

“아, 내일이다.”

“이제 오늘이지. 몇 시간 뒤면 사녹이야. 아, 컴백은 몇 번을 해도 떨리네. 와, 미치겠다.”

미니앨범으로 몇 번의 컴백을 했었고, 나름 무대를 서는 것도 또 활동을 하는 것도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다 착각이고 자만이었던 모양이었다. 해성은 앓는 소리를 내며 샵 의자 뒤로 고개를 젖혔다.

음원은 오후 6시에 뜨고, 첫 음악방송은 7시 정도에 나올 예정이었다. 메인 보이그룹의 컴백이기에 각종 방송사 음악방송마다 최고 퀄리티로 신경을 써서 컴백 무대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래서 오늘 첫 방송을 하는 뮤직라이브도 타이틀곡과 서브타이틀곡 모두 사전녹화를 진행할 예정이었다.

“와, 팬들 벌써 기다리나 봐.”

“어제부터 밤샘 중이래요.”

“어제부터? 와, 많이 들어오지도 못할 텐데.”

“그러니까요. 엄청 고생이죠. 힘들 텐데…….”

아침 7시부터 시작될 사전녹화를 보기 위해 아포제의 팬들은 이틀 전부터 방송사 홀 앞에서 밤을 새우고 있었다. 타이틀곡 무대에 300명, 서브타이틀곡 무대에 또 다른 300명을 넣는다고 했는데, 도착해 번호를 받은 팬들만 3천 명이 넘어간다고 했다. 하진은 기사에 난 팬들을 보며 속상한 얼굴을 했다.

“우리 이따 본방 끝나고 대기실에서 짧게라도 라이브 한 번 하면 안 돼요?”

“그래, 하지 뭐. 고맙다고 인사도 하고. 어려운 일도 아니니까.”

라이브 이야기를 하는 하진과 인규를 보던 영우가 뭔가 생각난 듯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제이파이 걔들은 라이브 금지령 떨어졌다더라.”

“왜요?”

“숙소 거실에서 셋이 라이브 하고 있는데 그것도 모르고 방에서 나머지 둘이 쌍욕을 하면서 싸우고 난리가 난 거지.”

“와, 그대로 다 나간 거예요?”

“매니저가 그때 일 보느라 밖에 나가 있었는데 너무 급하니까 라이브 들어와서 댓글에 꺼! 꺼! 꺼! 이 글자만 계속 치고, 그거 보고 급히 끄긴 했는데 저장이 돼버렸네. 욕 수준도 그냥 뭐 싸우면 그럴 수도 있지 할 정도가 아니라 난리가 났나 봐.”

“많이 혼났겠네요.”

“혼나는 게 문젠가. 이미지 완전 갔는데. 세상 가장 순수한 다섯 명 모였다고 구호도 순수! 이러잖아.”

구호를 그대로 따라 하는 영우를 보며 하진이 웃음 지었다. 활동이 겹쳐 몇 번 본 적이 있었는데 솔직히 또래지만, 별로 친해지고 싶은 스타일이 아니라 아직까지도 데면데면한 사이로 지내고 있는 그룹이었다. 무대에서 본 것과는 달리 말을 할 때마다 욕이 섞이고, 또 어깨를 치거나 팔을 때리며 말을 해서 그리 기분이 좋지 않았던 기억이 났다.

“무슨 얘기들을 그렇게 재밌게 해?”

갑자기 파고드는 낯선 목소리에 하진은 고개를 들어 거울 속에 보이는 생각지도 못한 얼굴을 바라보며 반사적으로 일어나 몸을 돌렸다.

“안녕하세요!”

멤버들이 갑자기 샵으로 들어온 유세주를 향해 잔뜩 긴장한 목소리로 인사하는 것을 보던 하진이 얼른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그런 하진에게 다가온 세주가 그 어깨를 쥐고 몸을 돌려세웠다.

“앉아, 앉아. 누가 보면 내가 너희 군기 잡으러 온 줄 알겠다.”

하진은 제 어깨를 양손으로 확 눌러 다시 의자에 앉히는 손길에 무너지듯 주저앉았다. 여전히 어깨 위에는 세주의 손이 놓여 있었다.

“오전 행사가 있어서 준비하러 왔는데 하진이가 보여서.”

친하기라도 한 것처럼 이름을 친근하게 부르는 세주를 본 하진이 어색하게 웃음 지었다. 그때 녹음실에서 본 이후, 처음 보는 건데 꼭 자주 보는 사람처럼 친하게 구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진이 잘 지냈어?”

“아… 네. 선배님도 잘 지내셨어요?”

“나야 뭐 잘 지내지. 연락한다고 해놓고 바빠서 못 했네. 기다렸겠다.”

“…아… 뭐 괜찮습니다.”

“오늘 컴백이라고 들은 것 같은데. 머리 색 잘 어울리네. 색 몇 번 뺀 거야?”

탈색을 하고 부드러운 색을 입힌 하진의 머리칼 사이로 유세주의 손가락이 아무렇지도 않게 확 파고들었다. 하진은 제 머리칼 속으로 손가락을 넣어 매만지는 그 손길에 어깨를 움츠렸다.

“…두 번 탈색하고, 입힌다고 하셨어요.”

“두피 아프지 않았어?”

손끝이 하진의 두피 위를 느릿하게 문지른 순간 하진이 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런 하진을 본 세주가 소리 내어 웃으며 손을 떼어냈다.

“이렇게 민감한데 아팠겠다.”

“…….”

순간 정적이 맴돌았다. 멤버들은 모두 유세주가 어떤 사람인지 알고 있었다. 남자와 엮이면서 세상을 한 번 뒤집은 전적이 있었고, 그 뒤로는 아예 보란 듯이 남자와 다정한 분위기를 연출하며 지내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런 유세주가 하진에게 이러는 것을 좋게 생각할 수가 없는 것도 당연했다. 게다가 조금 전 그 행동과 말은 명백한 성희롱이 아닌가.

“형 집에서 같이 술 마시기로 했잖아. 기억나?”

“…말씀하셨던 건 기억나지만… 바쁘실 텐데 굳이…….”

“뭘 그렇게 긴장하고 그래. 선배가 같은 회사 후배 예뻐서 같이 술 좀 마시자는 건데. 잠깐 저기 가서 따로 얘기할까? 이리 와. 그 정도 시간은 있잖아.”

하진의 어깨를 쥔 채 주물럭대던 손이 팔을 쓸고 내려가며 하진의 손목을 잡아 일으켰다.

“시간 없는데요.”

막무가내로 구는 유세주의 행동을 불안한 눈으로 보던 멤버들의 시선이 정우에게 닿았다. 정우는 그 시선들을 전혀 느끼지도 못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보자 보자 하니 두고 볼 수가 없고, 듣자 듣자 하니 저 개소리를 해대는 입을 찢어버리고 싶었다.

“지금 내려오라는 연락이 와서요.”

“아, 너 그 막내였나?”

“네.”

“너 몇 번 본 적 있었는데 잘 컸네.”

“죄송한데 시간이 정말 없어서요.”

“그래서?”

정우와 유세주 사이에 팽팽한 긴장감이 맴돌았다. 유세주는 자신의 앞을 막아선 정우의 행동에 몹시 기분이 나쁜 것처럼 보였다. 정우는 대놓고 티가 나는 그 표정을 바라보다가 유세주가 쥔 하진의 손목으로 시선을 옮겼다.

“일단 놓으셔야 할 것 같은데.”

“뭐?”

“그 손 놓으시라구요.”

“싫은데. 나 하진이랑 둘이 할 얘기가 있어.”

“놓으라고.”

뒤가 댕강 잘린 말에 유세주는 어이가 없다는 듯 정우를 바라보았다.

“하잖아요.”

그런 유세주를 빤히 본 정우가 그대로 손을 뻗어 하진의 손목을 확 빼내며 감싸 쥐었다. 유세주는 제 손에서 완전히 벗어난 하진을 보며 기어이 실소를 터뜨렸다.

“야, 너 뭐 하는 짓이야? 넌 위아래도 없어?”

“대접받고 싶으면 대접받을 행동을 하세요.”

“뭐?”

“한 번만 더 형한테 이러시면, 그땐 회사에도 알리겠습니다.”

아직도 정신 못 차렸다고. 짓씹는 목소리가 낮게 울렸다. 정우는 더 이상 말도 하고 싶지 않다는 듯 그대로 하진의 손목을 쥔 채 계단을 내려갔다. 새벽이라 그런지 일반 손님들이 없는 샵 1층 휴게실 안으로 들어간 뒤에야 정우는 그러쥔 손목을 놓았다.

“형은 싫으면 싫다고 말 못 해요?”

“…….”

“아, 싫은 게 아니었던 건가?”

이런 식으로 말을 하려고 한 건 아닌데 자꾸 삐뚜름한 말이 흘러나왔다. 정우는 미칠 듯 화가 나는 마음을 누르지 못한 채 확 돌아 하진을 바라보았다. 부드러운 색을 입힌 머리칼 사이로 들어갔던 유세주의 손가락이 떠올랐다.

“…….”

하진의 머리칼을 쥐는 그 느낌을 알고 있었다. 손가락 사이사이로 들어오는 간지럽고 부드러운 그 느낌을. 유세주도 그런 느낌이었을까. 당장이라도 그 머리칼을 움켜쥐고 눌러버리고 싶은 그런 충동에 휩싸였던 걸까.

“내가 안 말렸으면 따라갔겠지.”

“…선배님이잖아.”

“선배면 다 따라가요? 상황파악이 안 돼? 아니면 내가 방해한 거예요?”

“그렇게… 말하지 마. 나도, 나도 다 알아. 따라가면 안 된다는 것도 알고, 그 선배가 어떤 사람인지도 다 알아.”

“아는데 왜 가만히 있어.”

“여기 우리만 있는 곳 아니잖아. 나 하나 때문에 이상한 말 도는 거 싫어. 팀에 피해 주지 말라며. 우리 오늘 컴백이야. 사녹하러 이제 가야 되는데… 큰 소리 나는 거 싫었어.”

목에 탁 걸린 숨을 뱉어낸 정우가 하진에게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갔다. 움찔대기는 하지만 시선을 피하지도 않고, 뒷걸음을 치지도 않는 하진 덕분에 얼굴이 가까워졌다.

“그럼 따라가서 달래기라도 하려고 그랬어요? 형이 잘하는 방식으로?”

“…….”

“아니면 그 집에 가서 술 마실 약속이라도 확실히 해주려고 했어요?”

“…그만 하자. 아무 일도 없었으면 된 거잖아. 너랑 오늘 같은 날… 이런 얘기 하고 싶지 않아.”

아무 일도 없었으면 된 거라는 그 말이 귓가를 찌르며 사라지지 않았다. 정우는 하진이 하는 말에 꼬투리를 잡고 있는 제가 어이없으면서도 멈출 수가 없었다.

“솔직히 말해 봐요. 날 좋아하는 게 아니라 그냥 남자면 다 되는 거 아니에요?”

하진에게 상처가 될 말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날카롭고 뾰족한 저의 이 말이 하진의 심장을 난도질하리라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커진 눈 속 흔들리는 눈동자도, 말을 하려고 달싹이다가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닫히는 입술도 그 충격의 무게를 너무나도 선명하게 보여주었다.

상처 받기를 원했다. 말에 찔려 피가 철철 나서 다시는 유세주와 가까이 서 있지도 못했으면 좋겠다는 생각뿐이었다. 저런 질 낮은 인간이 하진에게 쉽게 다가와 손을 대는 것을 참을 수가 없었다.

“…널 좋아한다고 해서 너한테… 이런 말까지 들을 이유는 없어.”

눈동자로 차오르는 것은 눈물이 아니라 상처였다. 울지 않으려고 눈동자가 젖는 것도 억누른 채 참아내는 하진을 보던 정우가 고개를 기울여 눈을 맞췄다.

“유세주한테는 한마디도 못 하더니 나한테는 하고 싶은 말 다 하네.”

“…….”

“날 좋아하니까 나한테 이런 말 듣는 거예요.”

“…그래, 미안해…….”

조금 전까지만 해도 목소리에 남아 있던 전의가 전부 꺾인 작은 소리가 흘러나왔다. 정우는 기다란 속눈썹이 촘촘히 자리 잡은 그 눈두덩이 힘없이 축 내려가는 것을 바라보았다.

“정우야, 하진아! 뭐해? 빨리 나와. 지금 출발해야 돼!”

마침 다행스럽게도 바깥에서 매니저 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정우는 심호흡을 한 채 뒤돌아 문을 열었다. 그리고 하진의 등을 부드럽게 감싸며 먼저 바깥으로 나가게 도와주었다.

“웃어요, 형. 다 보잖아요.”

하진은 귓가로 흘러 들어오는 정우의 낮은 목소리에 입술을 살짝 끌어올렸다. 웃고 있는데 눈물이 확 쏟아질 것만 같아 눈을 깊게 깜빡이지도 못했다.

“아까 들어올 때는 어두웠는데 해 떴네. 아, 떨려.”

정말 바깥에는 해가 떠 있었다. 하진은 언제 어두웠냐는 듯 밝아진 바깥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한 걸음씩 내디딜 때마다 피가 철철 나는 심장이 덜렁거렸다. 언제 떨어져 짓밟혀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흔들리고, 또 흔들렸다.

그렇게 밝고 아픈 새벽, 아포제 데뷔 1년 4개월, 정규 1집 활동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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