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
그렇게 한 시간이 훌쩍 넘도록 라이브를 한 뒤에야 마지막 인사를 나누었다. 다 같이 얼굴을 가까이 대고 손을 한참이나 흔든 뒤에야 라이브를 마칠 수 있었다.
화면이 꺼진 뒤에야 하진은 의자 뒤로 기대어 눈을 깊게 감았다. 팬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만나는 건 참 좋지만, 어디까지나 마음이 편할 때의 이야기였다. 이렇게 정우와 솔직하지 못한 모습을 보여주는 게 힘들었다. 저와 정우 단둘이 있을 때 일어나는 일들이야 어쩔 수 없지만, 모두에게 꾸며진 다정함을 보이는 건 싫었다.
“아, 간만에 재밌었다. 어떻게 200만 명이 넘게 들어오지? 신기해. 200만 명이 얼마나 될까. 난 상상도 안 돼.”
“저도요. 전 음방 관객석만 봐도 많아 보이는데.”
“나도. 쇼케이스 할 때 진짜 기절하는 줄 알았잖아. 사람 너무 많이 와서. 가끔 행사 갈 때도 야외에 사람들 쫙 앉아 있으면 진짜 순간 긴장이 확 된다니까. 그런데 200만 명이 우리 라이브를 보다니… 가끔 무서워. 말 한마디 실수하면 나 진짜 훅 가는 거잖아.”
“그게 제일 힘든 것 같아요. 누구에게는 넘어갈 일이어도, 또 누구에게는 민감한 일이 되니까요.”
“그러게. 조심해야지. 신경 쓰고. 그래도 오늘은 잘한 것 같다?”
“네, 형 최고였어요.”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운 정우를 보고 웃은 해성이 옆에 앉은 지친 얼굴의 하진을 바라보았다.
“하진이 피곤해? 얼른 씻고 오늘 좀 빨리 쉬어.”
“네. 그럴게요. 그럼 저 먼저 들어갈게요.”
“그래. 푹 쉬어.”
“네, 형들도 푹 쉬세요.”
하진은 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그리고 갈아입을 옷을 꺼내려고 서랍을 열다가 머리가 지끈대며 아파오는 것에 침대에 주저앉아버렸다. 하기 싫은 일을 한 건 아니지만, 정우를 내내 의식하고 정우와의 사이가 어색해 보이지 않으려 노력한 탓에 머리가 다 아팠다.
이대로 상관없다고, 정우와 같이 있을 수만 있다면, 닿을 수만 있다면 뭐든 참아낼 수 있다고 생각을 하다가도 너무나 현실적인 이런 상황에 부닥치면 그 대범해졌던 마음이 우그러들었다. 하진은 긴 한숨을 내쉬며 열리는 문을 바라보았다.
“그렇게 해서 되겠어요? 팬들이 얼마나 눈치가 빠른데. 아까도 둘이 싸웠냐고 댓글 올라왔어요.”
“…그랬어? 미안해. 다음에는 더 잘할게.”
“내가 어려운 거 바라는 건가. 멤버 강하진 역할 잘 해달라는 거, 그거 하나잖아요. 형이 원래 하던 거, 형이 원래 있던 그거 지키라는 건데 어려워요?”
“…아니야.”
“난 형이랑 자주기까지 하잖아요. 서로 하기로 한 건 확실하게 해요. 형 책임감 강하잖아.”
“…그럴게. 앞으로는 절대 그럴 일 없게 할게. 미안해, 오늘은.”
“이런 말도 그만 하게 해줘요. 지겨워, 아주.”
더는 정우의 말을 듣고 있을 자신이 없어 자리에서 일어난 하진이 얼른 갈아입을 옷을 꺼내 방을 나섰다. 그리고 숙소에서 유일하게 혼자 있을 수 있는 욕실 안으로 들어가 문을 잠갔다. 그제야 사라졌던 여러 감정이 밀려들었다.
“…….”
요즘 살며 한 번도 해본 적 없던 생각을 하고는 했다. 끝. 끝내는 방법을 가끔 생각했다. 감정은 어떻게 해야 끝낼 수 있을까. 상처 받는 말을 들어도 상처만 받을 뿐, 곧 그 사람의 또 다른 모습에 심장이 뛰어버리는데 도대체 어떻게 접을 수 있는 걸까. 그러다 보면 결국 죽어야 끝나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살며 단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죽음이라는 생각에 하진은 한 번씩 깜짝 놀랐다.
“…….”
괜찮아. 그냥 이렇게라도 지내면 돼. 정우가 봐달라고 하면 봐주잖아. 닿을 수도 있고, 아픈 말이어도 소통할 수 있잖아. 이 팀에 있어야, 여기 버텨야 정우와 이렇게 닿을 수 있어. 그러니까 버티자. 여기 정우가 있잖아. 하진은 거울 속 제 얼굴을 한참이나 바라보다가 고개를 숙이며 눈을 깊게 감았다. 괜찮다는 자신의 생각에 다시 한번 기꺼이 속으며.
***
타이틀곡인 의 뮤직비디오 촬영은 이틀 동안 이어졌다. 절제된 섹시함을 컨셉으로 잡고 시작된 촬영은 수월하게 진행되었다. 멤버들이 입고 촬영을 한 다섯 벌의 슈트는 모두 아무에게나 절대 협찬을 해주지 않는다는 해외 명품 브랜드의 슈트였다. 먼저 요청을 하지 않았는데도 그쪽에서 아포제의 뮤직비디오 컨셉에 맞는 의상을 직접 제작해서 제공하고 싶다는 뜻을 밝혔고, 소속사는 기꺼이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수고 많았어요. 마지막으로 우리 하진 씨랑 정우 씨 둘만 도입부 안무 한 번 해볼까요? 지금 그 의상 입고 한 번 따는 게 좋을 것 같아서.”
“네, 알겠습니다.”
“오 분 후에 시작할게요. 준비해주세요.”
하진은 저에게 다가와 살짝 난 땀을 닦아주고 메이크업을 수정해주는 스타일리스트를 보며 싱긋 웃었다. 저도 저지만, 종일 이렇게 촬영이 멈출 때마다 와서 머리를 만져주고, 화장을 고쳐주는 스타일리스트도 참 고생이었다.
“힘들죠, 누나. 다리 아프겠다.”
“나 계속 앉아 있었는데 뭘. 아, 오늘 진짜 메이크업 찰떡이다. 진짜 하진이 너한텐 화장할 맛이 난다니까. 뭘 해도 찰떡이야. 아, 예뻐.”
“누나가 잘하니까 그런 거죠.”
“네 얼굴이 더 잘하거든. 어디 보자. 됐다.”
뺨 위로 살짝 파우더를 두드려준 스타일리스트가 웃으며 뒤로 물러났다. 하진은 정우와 함께 다시 카메라 앞 세트 중심으로 가 섰다.
“시작부터 할게요. 아예 도입부터 눈을 가린 채 시작하는 걸로 할게요. 계속 가리고 정면 보시다가 안무 바뀌는 부분에서는 원래 안무대로 이어가시면 됩니다.”
지치지 않도록 더 씩씩하게 대답한 하진이 카메라를 보고 섰다. 그런 하진의 뒤로 선 정우가 하진의 눈 위를 손바닥으로 덮었다.
“…….”
어제부터 오늘까지 이 안무를 정말 스무 번은 한 것 같은데, 할 때마다 똑같이 떨리고 기분이 이상했다. 정우의 손이 눈을 가려 앞이 캄캄해진 그 짧은 순간, 여러 생각이 머리 안을 스쳤다. 이대로 다시는 앞을 보지 못할 것 같은 기분도 들고, 또 눈을 가린 정우의 손을 잡아 확 뿌리칠 때면 정말 이런 방법밖에 없나 싶기도 했다.
정우의 의지는 아니지만, 그래도 정우가 만든 어둠이 좋았다. 이 어둠 속에 제가 있을 수 있다는 그 자체만으로도 좋았다. 하진은 익숙한 전주가 흘러나오는 것을 들으며 감고 있던 눈을 살짝 떴다. 하진의 기다란 속눈썹이 눈 위를 덮은 정우의 손가락을 스치며 움직였다.
“…….”
“…….”
순간 정우의 밀착된 몸이 움찔댔다. 하진은 저의 뒤에 밀착해 선 정우의 몸이 살짝 움직이는 것을 느꼈다. 갑자기 왜 그러는 거지,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이 멋대로 흔들리는 순간 뒤로 조금 다른 느낌이 닿아왔다. 하진은 조금 단단한 것이 닿아오는 느낌에 티가 나지 않도록 작게 숨을 내쉬었다.
“…….”
곡은 계속 흘러나오고 있었다. 곧 메인 안무를 시작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하진은 이대로 집중하지 못하다가는 안무를 놓칠 것만 같아 어떻게든 생각을 지우려 애쓰며 곡에 귀를 기울였다. 그리고 안무가 시작되는 부분에서 정우의 손을 잡아 옆으로 확 뿌리치며 카메라를 응시했다. 몸이 살짝 옆으로 비틀리며 정우의 몸과 비벼진 그 순간 느껴지는 분명한 이물감에 하진의 다물렸던 입술이 살짝 벌어졌다.
“컷! 좋아요. 두 번 할 필요도 없겠다! 수고했어요! 진짜 좋았어요! 끝, 끝! 수고했습니다! 아, 진짜 박수 한 번 내가 쳐줘야겠다.”
감독이 일부러 더 크게 말하며 일어나 박수를 쳤다. 그 뒤에 서서 모니터를 하고 있던 멤버들이 휘슬을 불고 놀리듯 웃자 금세 장내가 시끌시끌해졌다. 하진은 씩 웃으며 같이 박수를 치고 정우를 돌아보았다. 어쩐지 조금 불편해 보이는 그 표정에 마음이 철렁 내려앉았다.
“저기…….”
“고생했어요, 형.”
정우는 짧게 대답하며 하진의 모든 추측과 말을 차단했다. 하진은 그대로 뒤돌아 대기실 쪽으로 가는 정우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런 하진에게 다가온 멤버들이 웃으며 엄지손가락을 마구 치켜세웠다.
“표정 진짜 죽였어. 와, 숨도 못 쉬겠더라. 너희 둘이 뭐 있지?”
“…네? 뭐가… 있어요?”
“드라마도 보면 키스신 리얼하거나 그러면 둘이 사귀는 경우가 많잖아. 너희도 그런 거 아냐?”
당연히 농담으로 하는 말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심장이 쿵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하진은 의심하듯 장난치는 해성의 얼굴을 보며 일부러 더 밝게 웃었다.
“그렇게 보일 정도로 잘했어요?”
“그래! 너희는 진짜 아이돌 2회 차야. 괜히 팬들이 그런 말 하는 게 아니야. 정우는 진짜 인생 20년 산 애가 어떻게 저런 분위기를 내냐.”
“정우야 뭐 원래 다 잘하잖아요. 얼굴부터 다 완성형인데.”
“누가 보면 너는 아닌 줄 알겠다. 아무튼 진짜 잘했어.”
그대로 하진의 어깨를 감싸 안은 해성이 대기실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하진은 그렇게 멤버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안으로 걸음을 옮기면서도 그대로 먼저 가버린 정우를 떠올렸다. 정말 제가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 아니, 그렇다고 하기에는 분명 제 몸 뒤로 닿아오던 느낌이 달라졌었다. 조금 더 단단했고, 확실히 그 부피감이 느껴졌었다.
“…….”
정우의 손이 제 눈 위를 덮고 있었고, 이제 곧 시작될 안무를 위해 감고 있던 눈을 뜬 순간 일어난 일이었다. 속눈썹이 정우의 손가락에 문질리며 움직인 그 순간의 느낌. 긴장하듯 움찔대던 정우의 몸과 눈을 가리고 있던 손에 잠시 들어간 힘. 하진은 대기실 쪽으로 들어가며 입술을 꾹꾹 깨물었다. 그리고 대기실 앞에서 멤버들을 바라보았다.
“정우 얘는 어디 간 거야. 요즘 이상해. 자꾸 사라져. 찾아 데려와야겠다.”
“아… 제가, 제가! 찾아서 데려갈게요. 화장실 갔겠죠.”
“그런가. 무슨 전화인지 자꾸 전화도 오는 것 같고 무슨 일 있나 해서. 그럼 정우 데리고 빨리 와. 지창이 형이 우리 고생했다고 피자 시켰댔어.”
“진짜요? 맛있겠다. 빨리 갈게요.”
일부러 더 웃으며 씩씩하게 대답한 하진이 대기실 안으로 들어가는 멤버들을 보며 떨리는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얼른 대기실 맞은편에 있는 화장실 안으로 들어가 안을 살폈다. 너무 대기실 앞이라 없을 것 같다고 예상은 했지만, 정말 텅 빈 안을 보니 막막함이 밀려들었다.
하진은 얼른 화장실을 나서 인적이 없는 복도 끝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극비리에 뮤직비디오 촬영을 하다 보니 오늘은 이 스튜디오 안에 멤버들과 스태프들 외에는 아무도 없어 몹시 조용했다.
“…아… 여기 있었어?”
복도 끝 코너를 돌자 보이는 화장실 안으로 들어간 하진이 세면대 앞에 서 있는 정우를 바라보았다. 거울 안으로 마주친 시선에 해야 할 말들이 전부 눌려 잘게 부스러졌다.
“…해성이 형이 너 어디 갔는지 찾아서.”
“…….”
얼굴에 물을 끼얹은 건지 메이크업을 한 얼굴 위로 물이 묻어 있었다. 하진은 정우의 턱에 맺혀 바닥으로 뚝뚝 떨어지는 물방울을 바라보다가 얼른 다가가 페이퍼타월을 뽑아 그 물기를 닦아주었다.
“됐어요.”
“…….”
하진의 손이 턱에 닿는 순간 정우는 얼른 그 손을 쳐냈다. 그리고 새로 페이퍼타월을 뽑아 대충 얼굴에 물기를 닦아냈다.
“…괜찮아?”
“뭐가요.”
“아까…….”
“그런 건 또 기가 막히게 아네.”
손에 든 젖은 페이퍼타월을 더 확 구겨 휴지통 안으로 아무렇게나 던진 정우가 하진을 돌아보았다. 거울을 통하지 않고 보는 정우의 눈은 거울 속보다 더 짙고 깊었다.
“괜찮은지 물을 일은 아니지 않아요?”
“…어?”
“하나도 안 괜찮아요. 느낌도 기분도 이 상황도 괜찮은 게 하나도 없어.”
“…….”
“형이랑 붙어먹다가 나도 어떻게 된 모양이에요.”
“…….”
“만족해요?”
정우는 저를 바라보고 있는 하진의 옆을 스쳐 지났다. 말한 것처럼 하나도 괜찮지가 않아서 더 이상 머물고 싶지 않았다. 조금 더 마주했다가는 또다시 비어 있는 칸 안으로 하진을 처박아버릴 것 같기 때문이었다.
하진과의 섹스가 가져다주는 쾌감이 얼마나 큰지 정우는 잘 알고 있었다. 그것을 외면하고 뿌리치기 위해서는 마주하지 않는 방법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