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
자존심도 없는 걸까. 아니면 누군가를 좋아하면 저렇게까지 할 수 있는 건가? 여자 친구를 사귀었던 때를 떠올려 보아도 하진의 이런 자존심 없이 구는 행동들이 이해가 잘 가지 않았다. 물론 짧은 시간 별 의미도 없이 사귄 것이어서 그런 걸까. 진짜 더 많이 좋아하고, 사랑하게 되면 이렇게 자존심도, 수치심도 없이 매달리게 되는 걸까? 여러 의문이 따라붙었지만, 금세 뒤엉킨 혀의 뜨거움에 생각은 사라지고 옅은 쾌감만이 그 자리를 맴돌았다.
“…….”
정우는 눈을 감지 않았다. 두 눈을 뜬 채 젖은 속눈썹을 내리깔고 저에게 매달리는 하진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혀를 문지르고, 빨아줄 때마다 조금 더 몸을 붙이며 가깝게 다가왔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창백한 얼굴로 있더니 키스를 할 때는 또 힘이 나는 모양이었다. 이게 그렇게 좋은 걸까. 정우는 그대로 하진의 몸을 밀어 문에 기대게 한 채 깊게 입속을 헤집고 잔뜩 제 것처럼 만들었다.
“하아… 하으…… 하아….”
숨이 넘어갈 것처럼 굴면서도 밀어내지를 않는 하진을 조금 더 극으로 몰아가던 정우가 입술을 떼자 두 사람의 입속에 갇혀 있던 숨이 잔뜩 흐트러진 채 터져 나왔다. 정우는 단정하지 못한 하진의 옷을 바로 정리해 주었다. 그리고 그 얼굴을 바라보았다.
“이제 됐죠.”
“…살 것 같아.”
“…….”
전혀 예상하지 못한 하진의 말에 정우는 인상을 썼다. 제가 하진의 상황이라면 이런 취급을 받으며 섹스를 하고 난 뒤에 살 것 같다는 말은 하지 않을 것 같았다. 비참하고, 화가 나고, 이런 취급을 당하는 나 자신이 싫어 미쳐버릴 것만 같을 것이었다. 그런데 왜 하진은 살 것 같다고 하는 걸까. 정우는 한 번씩 하진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며칠 동안 진짜 숨도 안 쉬어졌는데… 이제 진짜 살 것 같아.”
“…….”
“너랑 이렇게 있어서 좋아, 정우야.”
“형 진짜 미쳤어요?”
“…화내지 마.”
“자존심도 없어? 화도 안 나요? 어? 지금 이 상황에 살 것 같다는 말이 나와요?”
“……그런 게 어디 있어. 난 자존심 없어. 너랑 있으려면 없어야 돼. 없어진 지 좀 됐어. 그래도 괜찮아.”
“돌겠다, 진짜.”
그대로 문에 기대 세워둔 하진을 옆으로 민 정우가 문을 열고 안에서 나왔다. 다행히 화장실 안에는 아무도 없고, 바깥 복도도 고요했다. 주변을 한 번 눈으로 확인한 정우가 차가운 물을 틀어 손을 씻으며, 문은 열렸는데 하진이 나오지 않는 그 칸을 거울 안으로 바라보았다.
“…….”
안 나올 거냐고 물으려다가 관둔 정우가 페이퍼타월을 뽑아 손을 닦고, 미련 없이 화장실을 나섰다. 빈 복도로 나와 연습실을 향해 걷는데 괜찮던 머리가 지끈대며 아파왔다. 여전히 기척이 없는 뒤를 돌아볼까 하다가 그것도 관두었다. 정우는 연습실을 향해 고집스레 걸음을 옮겼다. 문을 열자 인규와 영우가 보였다. 영우가 상담이 끝나서 해성이 간 모양이었다.
“왜 혼자 와? 하진이랑 있던 거 아니었어?”
맞아요. 조금 전까지 그 몸 안을 드나들었어요. 형이 말하는 그 강하진이 나를 향해 혀를 내밀고, 내 손에 어쩔 줄을 몰라 하며 몇 번이나 사정했어요. 정우는 그 어떤 한 부분도 말할 수 없는 것에 실소를 터뜨리며 영우의 옆으로 앉았다.
“아니에요. 형 못 봤어요.”
“그래? 하진이 너 찾으러 가는 것 같던데… 어디 갔지.”
“…….”
“오겠지 뭐. 아, 형이랑 이따 숙소 가서 간만에 에스라이브 하자고 얘기하고 있었어. 우리 데뷔 초에 좀 하다가 바빠서 못 했잖아. 팬들이 제발 해달라고 난리야.”
“하면 되죠. 곧 앨범도 나오고 하니까 할 얘기도 많을 거고.”
“지창이 형한테 먹방 라이브 제안해야지. 라이브 하는 겸 은근 맛있는 저녁을 먹는 거지. 팬들이 우리 풀 먹는 거 보면 얼마나 슬프겠어.”
영우의 말에 동조하며 고개를 끄덕인 정우는 그제야 연습실 안으로 들어오는 하진을 바라보았다. 조금 피곤해 보이기는 하지만 섹스하기 전 모습과 그리 다르지 않아 마음이 놓였다.
“어디 갔었어? 정우랑 있는 줄 알았는데 아니래서 놀랐잖아.”
“아… 그냥 회사 한 바퀴 돌았어요. 상담받고 났더니 좀 여러 생각도 들고 해서요.”
“그럴 때가 있지. 이 상담이 좀 그래. 어? 울었어? 눈이 빨개.”
생각하지 못한 말에 조금 당황했지만, 넘기지 못할 말은 아니었다. 하진은 웃으며 괜히 눈가를 손끝으로 꾹꾹 눌렀다.
“상담하다가 좀 울었어요. 안 운 척하려고 회사 돌고 온 건데 결국 들켰네요.”
“오구, 우리 진짜 막내 상담받다가 울었쩌?”
혀 짧은 소리를 내며 다가온 영우가 하진을 와락 안고 등을 토닥토닥 부드럽게 두드려주었다. 분위기를 가라앉게 만들고 싶지 않아 일부러 소리 내어 웃은 하진이 똑같이 혀 짧은 소리를 내며 대답하며 상황을 정리했다. 다행히도 멤버들은 상담에 대해 더 이상 궁금해하지 않았다. 하진은 이야기가 완전히 다른 쪽으로 넘어간 뒤에야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
“…….”
정우와 눈이 마주칠 때마다 몸 전체가 심장이 된 것처럼 쿵쿵 울렸다. 정우가 내내 드나들었던 아래가 움찔대는 것 같기도 하고, 한참이나 깊게 키스해 준 게 떠올라 귓가로 열이 몰렸다. 잔뜩 붙어 있었고, 또 이렇게 같이 있는데도 더 가까이 있고 싶었다.
정우도 저와 같은 생각이면 얼마나 좋을까. 저를 볼 때마다 심장이 흔들리고, 닿고 싶어 견딜 수가 없고, 키스하고 싶어 머리 안이 새빨개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 말도 안 되는 생각인데, 그냥 소리 내지 않는 생각일 뿐이라 마음껏 펼쳐지는 것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형 진짜 미쳤어요?」
살 것 같다는 저의 말에 가장 먼저 나온 반응이었다. 사실 미쳤다는 말이 제일 저의 이런 감정들을 표현하기 적합한 말이었다. 제정신이 아닌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미쳤다. 좋아하는 마음을 펼쳤다가 접으려 하다가 또 놓치고 주워 담고, 흘리고, 누르다가 미쳐버렸다. 상담 선생님의 말 한마디로 꽉 두 손으로 누르고 있던 마음이 펑 터져버린 것 같았다.
「자존심도 없어? 화도 안 나요? 어? 지금 이 상황에 살 것 같다는 말이 나와요?」
자존심이 있어야 할 자리, 아니, 원래 있던 그 자리에 지금은 정우가 있었다. 숨을 쉴 수 있는 몸속 깊은 통로에도 정우가 서 있었다. 그런 정우와 닿아야만 숨을 쉴 수 있게 되었다. 언제부터인지는 모르지만, 그렇게 되어버렸다. 하진은 저의 시선을 외면한 채 고개를 돌린 정우를 가만히 눈에 담았다. 흔들리는 짙은 눈동자 속으로 정우가 일렁였다.
“…….”
나는 네가 필요해. 네가 있어야 숨을 쉴 수 있고, 살 수 있어. 그래서 나는…….
「형 진짜 미쳤어요?」
아직 내 몸에 남은 너의 체온과 흔적에 살고 싶고
「형 진짜 사람 질리게 만들어요.」
또 죽고 싶어.
***
영우와 해성의 강력 주장으로 지창은 결국 피자와 치킨을 시켜 주었다. 풀에 닭가슴살을 먹으면서 라이브를 하면 얼마나 슬퍼 보이겠냐는 시무룩한 그 표정에 넘어간 것이었다. 해성은 맛있는 냄새가 가득한 식탁 위에 카메라를 고정시켜 놓았다. 장시간 해도 꺼지지 않게 충전기를 미리 연결해 두는 것도 잊지 않았다.
“다들 앉아 봐요! 화면에 잘 나오나 보게. 나 여기 앉고, 옆에 정우, 하진이… 어, 이쪽으로 형이랑 영우쓰 앉으면… 잘리나?”
테이블 한 면에 정우와 하진이 그리고 모서리를 돌아 해성과 영우, 인규가 차례대로 앉자 화면 안으로 대충 멤버들 전부가 들어왔다. 해성은 화면을 살피다가 정우와 조금 떨어져 앉은 하진을 바라보았다.
“하진이가 정우 쪽으로 좀만 붙으면 되겠다. 공식 부부가 그렇게 떨어져 있으면 돼?”
하진은 작게 웃으며 정우 쪽으로 의자를 조금 더 당겨 앉았다. 그제야 오케이를 한 해성이 피자와 치킨 박스를 열고 멤버들 앞으로 앞접시를 하나씩 놓아주었다.
“자, 이제 켠다?”
“나 다크서클 안 가렸는데.”
“괜찮아. 어차피 네 얼굴 안 보고 정우 얼굴 봄.”
“인정. 정우야 잘 부탁해.”
작은 웃음소리와 함께 곧 라이브 화면이 켜졌다. 멤버들은 휴대폰 창에 뜬 숫자가 빠르게 올라가는 것을 바라보았다.
“와, 켜자마자 지금 5만 명 넘었어. 8만, 헐, 10만.”
“하트도 엄청 빨리 올라가요.”
순식간에 50만 명이 넘는 팬들이 들어왔다. 멤버들은 화면을 보며 손을 흔들고 구호를 외치며 인사했다. 세계 각국의 언어가 채팅창에 빠르게 올라오는 것을 보며 여러 나라 인사를 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어느 정도 인사가 끝난 뒤, 리더인 인규가 말을 시작했다.
“안녕하세요. 여러분. 저희가 진짜 오랜만에 라이브를 켰습니다. 자주 하고 싶은데, 이렇게 간만에 찾아와서 죄송한 마음이 큽니다. 앞으로는 자주자주 짧게라도 켜도록 노력하겠습니다.”
“형, 너무 막 사과 기자회견 하는 것 같아요.”
“그랬나?”
당황한 인규가 더듬대자 웃음이 터졌다. 그 유쾌해진 분위기를 놓치지 않고 영우와 해성이 피자를 들어 화면으로 가까이 가져갔다.
“저희 오늘 피자랑 이 치킨 먹방 할 거예요. 오늘도 종일 연습하다가 지금 제대로 된 첫 끼 먹는 거라 굉장히 배가 고픕니다. 자, 그럼 먹으면서 얘기해 볼게요. 댓글 많이 올려 주세요.”
정우가 하진 앞에 놓인 접시를 들어 따뜻한 피자와 치킨 몇 조각을 덜어주었다. 그렇게 정우가 하진을 챙기는 모습을 실시간으로 본 팬들의 반응이 빠르게 댓글 창을 점령했다. 영우가 피자를 한입 주욱 늘여 먹으며 그 댓글들을 소리 내어 읽기 시작했다.
“정우 오빠 완전 스윗. 역시 우리 하진 오빠 챙겨주는 사람은 정우 오빠밖에 없어. 에이, 저희도 하진이 엄청 챙기거든요. 정우만큼은 아니지만.”
“저것 봐. 역시 아포제 진짜 막내 강하진. 와, 팬분들도 다 아시네. 하진아 너도 이제 인정해야겠다.”
즐거운 목소리와 시선이 하진에게 몰렸다. 하진은 저에게 닿는 시선에 웃으며 화면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처음으로 목소리를 내었다.
“뭐… 인정할게요. 그냥 제가 막내 하고 형들한테 예쁨 받고 살게요. 저야 완전 좋죠.”
“형들 왜 그래요. 저한테서 하진이 형 뺏어가지 마세요.”
“…….”
정우의 말에 다른 멤버들은 물론이고 채팅창도 그야말로 난리였다. 역시 서로 결혼하고 싶은 사람들은 다르다느니, 공식을 이길 수 없어 운다는 댓글들이 읽기도 힘들 만큼 빠른 속도로 휙휙 올라가기 시작했다.
“와, 피자 한 조각도 아직 다 못 먹었는데 지금 150만 명이 넘는 팬분들이 들어오셨습니다. 감사합니다.”
하진은 정우의 말 이후 무엇에도 집중을 하기 힘들었다. 솔직히 입맛도 없고, 맛있어 보이는 이 피자를 한입 먹는 것도 힘들 정도였다. 하지만 라이브를 저 때문에 망치고 싶지 않아 참고 또 참았다. 아포제 강하진의 자리를 지켜야 하기 때문이었다.
“웃어요, 형.”
저에게만 들릴 정도로 작은 목소리가 귓가에서 울렸다. 하진은 표정이 굳지 않게 웃음 지으며 정우를 바라보았다. 요즘 잘 볼 수 없던 다정한 웃음이 묻은 정우의 얼굴을 보는 순간 마음이 마구 일렁이기 시작했다. 진심이 아니라는 것을 알지만, 그래도 이 얼굴을 볼 수 있어 좋았다.
“더 줄까요?”
“아니, 괜찮아. 배불러.”
“겨우 이거 먹고?”
“아까 이것저것 집어 먹었더니…….”
딱히 먹은 게 없지만, 더는 음식을 먹기가 힘들어 어쩔 수 없었다. 하진은 웃으며 부드럽게 정우의 말을 거절하고 콜라를 집어 들었다.
“정규앨범 스포 좀 해주세요. 스포를 누가 해줄까. 우리 스윗스윗 강스윗이 하자.”
“자꾸 그렇게 부르지 마세요, 진짜 기분 좀 이상해요. 형이 하니까 더 그래.”
“그럼 강댕댕?”
“으, 바로 스포하겠습니다. 음, 타이틀 곡 이야기를 전 하고 싶은데요. 도입부가 굉장히 강렬합니다. 그리고 후렴 안무도 그렇고 전체적으로 굉장히 섹시해요. 기대하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여기 강하진때문에이생망님이 하진 오빠 조금만 더 스포해 주세요. 하시는데? 조금만 더 해주세요.”
“음……. 도입부에 저랑 정우가 같이 하는 안무가 있습니다.”
“네! 여기까지! 너무 다 말했다! 그게 제일 중요한데!”
해성과 영우의 예능감 가득한 멘트들이 사운드가 비지 않도록 내내 영상을 가득 채웠다. 하진은 그런 멤버들을 보며 내내 웃었다. 하도 입술을 올리고 있어 얼굴이 다 뻐근할 정도로 웃고 또 웃었다. 정우와 여러 번 눈이 마주쳤고, 다정한 웃음을 주고받았다. 하진은 기쁘면서도, 참담한 마음에 울고 싶은 기분으로 계속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