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포제-50화 (50/122)

#50

앨범 녹음은 사흘에 걸쳐 이루어졌다. 사실 첫날 멤버 모두가 최상의 컨디션이라 신곡 열 곡의 녹음을 모두 마쳤지만, 그래도 아쉬워 다시 불러보고 싶은 부분이나, 또 방향을 다르게 한 번 불러봤으면 좋겠는 부분이 있어 다시 녹음실을 찾은 멤버들이 있었다.

프로듀서는 물론이고, 아포제가 자신의 곡을 어떻게 부르는지 듣고 싶어 녹음실을 찾은 작곡가와 작사가들도 모두 만족하며 녹음을 마칠 수 있었다.

“녹음하고 나니까 그래도 실감이 난다.”

“그러게요.”

“아직 컴백 날 멀었다고 생각했는데… 얼마 안 남았네.”

“네.”

짧게 대답하는 정우를 본 하진이 하려던 말을 삼킨 채 입술을 닫았다. 그래도 멤버들이 있는 연습실이라 이 정도라도 대답을 해주는 것이었다.

정말 단둘이 있을 때에는 대부분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다. 얼굴을 보지도 않고, 일과 관련된 말이 아니면 대답을 하지도 않으며 철저히 투명인간처럼 대했다. 하진은 그런 정우를 이해하면서도 이제 점점 극에 몰리고 있었다. 제가 앞에 있는데도 없는 사람처럼 시선에 걸리는 것 없이 움직이는 정우를 볼 때마다 무너지고 또 무너졌다. 가까스로 붙들고 있는 이성마저도 너덜너덜해져 이제 어디를 잡아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오늘은 상담만 받고 바로 숙소로 갈 거야. 그동안 뭐 연습하든, 쉬든 회사 안에만 붙어 있어. 차례 되면 상담실로 올라가고. 자, 그럼 오늘은 막내부터 올라가자.”

하진은 정우가 일어나 연습실을 나가는 것을 바라보았다. 오늘은 지창의 말처럼 상담을 받는 날이었다. 한 달에 한 번씩 날을 정해 회사에서는 소속 아티스트들의 정신건강을 위한 상담을 진행하고 있었다. 연예계 활동이라는 게 때로는 참 고되고, 겉으로 표현하지 못하는 상처가 되는 일도 많이 있기에 그것을 담아두다가 우울증이 오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유세주 선배도 이 상담 시간이 없었으면 진작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을 거라는 말을 인터뷰에서 한 적이 있었다.

“…….”

한 달에 한 번씩 아포제도 정신과 선생님에게 상담을 받고 있었다. 하진 역시 매달 선생님을 만나지만, 솔직하게 얘기를 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누구도 이해하지 못할 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아무리 이야기를 들어주는 의사 선생님이라고 해도 이런 말을 할 수는 없었다.

누구라도 알게 되면 팀이 위험해질 수 있다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하진은 상담 시간이 싫었다. 솔직하라고 만들어 준 그 시간에도 거짓으로 점철된 채 앉아 시간을 보내야 하는 제가 싫기 때문이었다.

오늘은 또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할까. 스트레스 잘 안 받아요. 이 일을 택한 것 후회하지 않아요. 저는 다 좋아요. 즐거워요. 매일 매일이 행복해요. 하진은 문이 열리고 정우가 들어오는 것을 바라보았다. 벌써 시간이 그렇게 지난 모양이었다.

“…….”

막내부터 시작했으니 그다음은 저였다. 하진은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정우의 옆을 스쳐 지났다. 그리고 엘리베이터 대신 계단을 이용해 층을 올랐다. 그냥 몸이 더 피곤했으면 좋겠다는 생각만 들었다.

상담실 앞에 선 하진은 심호흡을 하고 노크를 했다. 들어오라는 듣기 좋은 목소리가 들린 뒤에야 문을 열었다. 그곳에는 매달 얼굴을 보는 다정한 인상의 선생님이 앉아 있었다.

“하진 씨, 한 달 만이네요. 잘 지내셨어요?”

“안녕하세요. 전 잘 지냈어요. 선생님도 잘 지내셨어요?”

“네. 많은 분들 이야기를 들으면서 지냈어요. 하진 씨는 어떤 하루하루를 보내셨나요?”

좋아하면 안 되고, 마음을 누르고, 외면당하고, 연기를 하다가 들켜서 밑바닥보다 더 깊은 곳으로 빠져버리는 날들을 지냈어요.

“정규앨범 준비를 하느라 정신이 하나도 없었어요. 눈 뜨면 연습하고, 숙소 가면 또 연습하다가 잠들고, 또 눈 뜨면 연습하고… 그렇게 한 달이 갔어요.”

“바쁘게 지내셨군요. 그 바쁜 날들 중에 하진 씨 마음은 어땠어요?”

더 바빠서 아무 생각도 할 수 없게 되어 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 그 와중에도 나는 왜 이 마음을 그만두지 못하나 자책을 하면서 너무 아팠어요.

“결과물도 기대되고, 제가 연습한 만큼, 힘든 만큼 더 좋은 결과가 나올 걸 알아서 힘들기는 해도 마음은 기뻤어요.”

생각 속에 있는 말들은 단 한마디도 소리 낼 수 없었다. 하진은 미소 짓는 선생님을 보며 따라 미소 지었다.

“자, 그럼 이제 여기서 저를 없애볼까요?”

“네?”

“제가 여기 없고, 앞은 부드러운 벽이 있다고 생각해 보세요. 보통 벽은 딱딱한데, 지금 하진 씨 앞에 있는 벽은 아주 부드러워요. 무슨 말을 해도 부드럽게 받아줄 수 있고, 또 무슨 행동을 해도 부드럽게 감싸줄 수 있어요. 다치지 않고, 아프지도 않아요. 하고 싶은 말이나 행동이 있나요?”

“…….”

부드러운 벽. 어떤 말을 해도 부드럽게 받아주고, 또 어떤 행동을 해도 부드럽게 감싸주는 그런 부드러운 벽. 눈앞이 부드러운 벽으로 변한 순간 하진의 눈동자가 젖어들었다. 하진은 제가 우는 줄도 알지 못했다.

하고 싶은 말이 많은데, 어떤 말부터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무슨 말이든 다 해도 된다는 그 말이 이렇게 막막하고, 정리가 되지 않는 말인지 몰랐다. 하진은 한참이나 아무 말도 없이 저를 기다리고 있는 부드러운 벽을 바라보다가 겨우 입술을 떼었다.

“…미안해.”

널 좋아해서 미안해.

“그래도 나… 네가 좋아. 안 그러려고 하는데 그게… 아직도 안 돼.”

이런 말을 해도 부드럽게 받아줄 수 있을까. 정우 네가 한 번이라도 다시 나한테 따뜻했으면 좋겠어.

“…나 지금도 너랑 같이 있고 싶어.”

눈물이 온 얼굴을 흠뻑 적시며 흘러내렸다. 하진은 정우에게 하지 못한 말들을 아주 작은 목소리로 쏟아냈다. 앞에 놓인 부드러운 벽은 그런 하진의 모든 말들을 아주 다정하게 감싸주었다. 거부하지도 않고, 그러면 안 된다고 밀어내지도 않고, 그저 그렇게 가만히 안아 주었다.

“…….”

하진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한참을 울었다. 정우와 그날 화장실에서 어긋난 이후 처음 소리 내어 울어보는 것이었다. 그런 하진을 보던 선생님은 부드러운 티슈를 하진에게 내밀었다.

“혼자 안고 있기에는 너무 무거운 감정도 있어요.”

“…….”

“때로는 놓아버리는 것도 필요해요.”

“…저도 놓고 싶어요. 포기하고 싶고, 체념했으면 좋겠어요.”

“포기하라는 말이 아니에요. 그 감정을 정리하려고 노력하는 그 강박에서 자유로워졌으면 좋겠다는 의미예요.”

강박. 그래, 강박이라는 말이 맞을지도 몰랐다. 정우를 위해서, 팀을 위해서, 더는 미움 받지 않기 위해서 빨리 정리를 해야 하고, 포기를 해야 했다. 안 되는 것을 하기 위해 억지로 누르고 숨겨 보아도 점점 커지기만 하는 감정들은 결국 아주 작은 틈으로 빠져나와 묻어버렸다.

“하진 씨 감정은 하진 씨 것이에요. 누구도 포기해라, 체념해라, 놓아버려라 할 수 없어요.”

“…….”

“하진 씨 앞에는 하진 씨가 만든 부드러운 벽이 늘 있어요. 말하고 싶으면 하고, 행동하고 싶으면 해도 됩니다. 참는 게 늘 정답은 아니에요.”

“…고맙습니다.”

“그럼 한 달 뒤에 만나요.”

“네.”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숙여 인사한 하진이 상담실을 나섰다. 텅 빈 긴 복도를 보자 마음까지 텅 비어 버리는 것만 같았다.

다시 연습실로 내려가자 모여 게임을 하고 있던 멤버들이 하진을 바라보았다. 그 안에 정우는 보이지 않았다.

“상담 엄청 오래했네?”

“아, 그래요? 얼마나 지났어요?”

“거의 한 시간은 된 것 같은데.”

“그렇게 오래됐어요? 한 30분 된 줄 알았는데. 그런데 정우는 어디 갔어요?”

“정우? 전화 와서 받으러. 아, 이제 나구나? 가야겠다.”

영우가 자리에서 일어나 연습실을 나가는 것을 본 하진이 그 뒤를 따라 연습실을 나섰다. 그리고 엘리베이터에 타는 영우에게 손을 흔들어 인사하고는 빈 복도에 멈추어 섰다.

“…….”

내가 왜 나왔지? 영우를 배웅하러? 아닌데. 결국은 정우였다. 정우가 어디로 갔을지 궁금했다. 하진은 고요한 복도를 바라보다가 화장실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 옆에 있는 휴게실 또한 비어 있었다. 하진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비상계단 문을 아주 살짝 열어 보았다. 어둑한 안쪽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떻게 알고 전화하셨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런 식의 연락 불편합니다. 어떤 의미이든 저는 지금 알고 싶지 않고, 사적으로 만날 생각은 더더욱 없습니다.”

손잡이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하진은 피곤함이 묻은 정우의 목소리에 더는 움직일 수가 없었다. 문을 닫든지 열든지 선택을 해야 하는데 상황이 상황인지라 판단이 빠르게 서지 않았다.

“앞에 하신 말씀 다 들어봤지만, 전 그 좋은 사이가 되고 싶은 마음이 없습니다. 아직 없는 게 아니라 아예 생각이 없어요.”

엿듣는 거 같아서 듣지 않으려고 해도 들리는 소리를 차단할 수는 없었다. 누군가가 정우에게 좋은 사이로 만나보고 싶다는 전화를 한 모양이었다. 누군지 알지도 못하지만, 우습게도 불쑥 마음이 오목하게 조여들었다.

“…….”

뭐 하는 거야. 여기서. 고개를 저은 하진이 얼른 열었던 문을 다시 당겼다.

“…어?”

그런데 문이 닫히지 않았다. 분명 당겼는데 팽팽하게 버티는 느낌이 있었다. 왜 그러는 거지? 잠시 상황 파악을 하지 못하고 선 그 순간 문이 안으로 확 열렸다. 하진은 손잡이를 쥔 채 확 열린 문 안으로 딸려 들어갔다. 그리고 나오려던 정우와 부딪쳤다.

“아야…….”

너무 순식간에 벌어진 예상치 못한 일이라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확 당겨져 부딪친 몸이 조금 아팠다.

“여기서 뭐 해요?”

“어? 아, 그게…….”

“엿듣고 있었던 거예요?”

“…아니야! 아니, 들으려고 들은 게 아니라… 상담 마치고 왔는데 네가 없어서…… 찾다가 보니까….”

“…….”

어둑한 비상구 안 정우의 굳은 표정을 본 하진이 두 손을 들어 마구 저었다.

“아니야, 진짜 다 들은 건 아니야…….”

“뭘 들었는데요.”

“…그냥 곤란한 전화가 온 것 같다는 것밖에는…….”

“나한테 관심 끄라고 했잖아요. 내가 연습실에 있든 없든 형이 상관할 바 아니니까 앞으로는 찾아다니고 그러지 말아요.”

온기가 하나도 없는 시선으로 하진을 본 정우가 앞에 선 하진의 팔을 당겼다. 문을 막고 서 있기 때문이었다. 그런 정우의 손길에 앞으로 살짝 움직인 하진이 얼른 다시 뒤로 몸을 움직였다. 그리고 문을 닫으며 완전히 정우의 길을 막아섰다. 살짝 열린 틈으로 들어오던 빛이 차단되며, 완전히 어두워진 공간 안으로 정우와 하진의 시선이 뒤엉켰다.

“비켜요.”

다시 한번 기회를 주듯, 경고를 하듯 낮은 정우의 목소리가 울렸다.

「말하고 싶으면 하고, 행동하고 싶으면 해도 됩니다. 참는 게 늘 정답은 아니에요.」

상담 선생님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하진은 문에 더 밀착해 서며 뒷짐을 지듯 손을 움직여 문손잡이를 꽉 잡았다.

“…이렇게까지 피할 필요는 없잖아.”

“여기서 하고 싶어요?”

“뭐?”

“내가 말했잖아요. 형이 나한테 들러붙으면 그거 다 섹스하고 싶다는 말로 알아들을 거라고. 나가려는 앞에 막고 서 있는 거 그렇게밖에 해석 안 되는데.”

손잡이를 꽉 쥐고 있는 손이 떨렸다. 하진은 고개를 기울여 저를 바라보는 정우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이렇게 눈을 오래 맞추는 것도 참 오랜만이었다. 제가 좋아하는 정우의 눈동자. 어둠에 물들어 제대로 보이지 않는 그 눈을 보기만 해도 하진의 앞에는 내내 없던 부드러운 벽이 생겨났다. 그 벽은 하고 싶은 말을 할 수 있는 어쩌면 조금은 무모한 용기였다.

“…이상하지. 난 네가 그렇게 말을 해도… 네가 하나도 안 미워.”

“…….”

“싫어지지가 않아.”

“…….”

“…나 정신 못 차렸지. 한심하고, 어이도 없고, 끔찍하지. 불쾌할 거고, 징그러울 거고… 질릴 거야.”

“알면 비키라고.”

하진은 고개를 저었다. 이제 온몸이 다 벌벌 떨리고 있었다. 그 떨림을 누른 채 입술을 꾹 물었다 놓은 하진이 신경질적인 예민한 표정을 한 정우를 바라보며 말했다.

“…너랑 같이 있고 싶어.”

“형.”

“……어떤 식이든 상관없어.”

닿을 수만 있다면, 그게 만들어진 뜨거움이든 경멸이든 그게 무엇이라도 좋을 것 같았다.

「지금의 나도 돌보아 주세요.」

지금의 강하진에게 필요한 유일함, 오늘을 버티고 내일을 시작할 수 있는 그 유일함. 하진은 그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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