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포제-48화 (48/122)

#48

“준비하시고! 액션!”

해성은 오른쪽, 영우는 왼쪽, 그리고 인규는 정면에서 하진과 정우의 연습을 촬영했다. 끈을 당겨 풀어 주머니에 넣고, 손을 앞으로 해 하진의 눈을 가린 정우가 꼭 하진의 목덜미를 물 것처럼 가까이 다가왔다. 하진은 목덜미에 닿는 정우의 숨결을 느끼며 눈을 가린 그 손을 확 뿌리쳤다. 그리고 저를 찍는 카메라를 보며 활짝 웃었다.

“부끄러워서 못 하겠어요.”

“아, 이거 진짜 언젠가 풀어야 된다. 팬 미팅에서 풀거나, 아! 맞다. 이번에 리얼리티 거의 셀프 캠처럼 진행할 건가 봐. 숙소 안이랑 연습실은 아무래도 사람들 와서 여러 명 돌아다니고 하면 우리 불편할 거라고, 필요할 때만 몇 명 와서 같이 찍고, 진짜 숙소 안에서 뭐 하는 건 셀프 캠으로 할 거래. 그때 이것도 풀자 그래야지.”

“안 내보내 줄걸요.”

“하진아, 네 얼굴을 믿고, 또 정우 얼굴을 믿으면 돼. 모든 게 해결될지니.”

해탈이라도 한 것 같은 목소리를 내는 해성을 보며 웃은 하진이 정우를 돌아보았다. 그런 하진을 보고 웃은 정우가 아무렇지도 않게 몸을 숙여 하진의 허리를 자연스럽게 끌어안았다. 그리고 그 어깨 위로 턱을 올렸다.

“…….”

하진은 시끌시끌한 분위기 속 거울 안에 보이는 저와 정우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꼭 예전으로 돌아온 것만 같았다. 데뷔 조 시절 그냥 모두가 좋고, 매일 떨려 하며 연습하고, 더 크게 웃고, 같이 울던 그때로.

결국 저만 달라지면 이렇게 될 수 있었던 것이었다. 지금까지 전혀 모르고 있던 사실은 아니지만, 이렇게까지 극으로 몰린 상태에서 눈으로 확인하니 어쩐지 제가 절대 가져서는 안 될 마음을 가진 것 같았다.

사랑이라는 게 모두에게 피해를 줄 수도 있다는 걸 처음 알아버렸다. 그런데 왜 포기할 수가 없는 걸까. 왜 놓아지지가 않는 걸까. 아무리 중얼거리고, 잊지 않게 외워도 마음이 뻐근하게 조여드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우리도 다각도 캠으로 좀 찍어주라. 우리야말로 진짜 다각도로 보고 분석을 해야 돼.”

“에이, 왜요. 형들 얼마나 잘하는데. 제가 찍어서 보여드릴게요. 진짜 형들 파트 너무 좋아요.”

하진은 해성과 영우, 그리고 인규가 조금 멀찌감치 거울 앞에 대형을 맞춰 서는 것을 바라보며 포켓에 넣어두었던 휴대폰을 꺼내들었다. 그 순간 허리에 감겨 있던 정우의 팔이 확 거두어졌다.

“…….”

조금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내내 이러고 있을 수는 당연히 없고, 팔이 풀어지는 게 이상한 일도 아닌데, 기분이 이상했다. 평소와는 조금 다른 느낌이었다. 뭔가 감정이 실린 것만 같아 심장이 움찔댔다. 하진은 별다른 표정의 변화가 없는 정우를 한 번 보다가 제가 예민한 거라고 결론을 지었다.

개별 연습과 집중 트레이닝은 세 시간 동안 더 이어졌다. 중간중간 휴식을 취하기도 하고, 촬영한 영상을 보며 뭐가 문제인지 파악을 하기도 해서 몸이 그리 고단하지는 않았다. 내일 보자는 댄스 트레이너에게 허리를 꾸벅 숙여 인사한 멤버들이 그대로 연습실 바닥에 주저앉았다.

“제가 가서 음료수 가져올게요!”

지친 멤버들을 본 하진이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하진이 일어남과 거의 동시에 정우도 몸을 일으켰다.

“역시 강하진 가는 길에 차정우도 가야지.”

“전 다른 길 갈려고 일어난 건데, 어쩔 수 없이 가야겠네요.”

영우의 말에 웃으며 답한 정우가 가만히 선 하진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그리고 평소처럼 연습실을 나섰다. 하진은 문이 닫힌 연습실을 한 번 살짝 돌아보고는 정우를 바라보았다. 외면하지 않고, 그래도 전처럼 잘 해줘서 고맙다는 말을 꼭 하고 싶었다. 그렇게 말을 하려는 순간, 하진의 어깨에 둘러져 있던 정우의 팔이 거둬졌다. 이번에도 아까처럼 뭔가 감정이 실린 것 같은 움직임이었다. 하진은 조금 급히 정우를 불렀다.

“정우야.”

그리고 정우는 하진의 부름도 무시한 채 걸음을 옮겼다. 듣지 못한 걸까? 잠시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듣지 못했을 리가 없었다. 멍하니 멀어지는 정우의 뒷모습을 보던 하진이 서둘러 그 뒤를 따라 화장실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손을 씻는 정우를 바라보았다.

“…정우야.”

“음료수 가지러 나온 거면 그거나 가지고 연습실 가요.”

거울 안으로 눈이 마주쳤다. 정우는 무심, 아니 무심함을 넘어선 더 차가운 시선으로 하진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리고 시선을 대놓고 피하며 페이퍼타월을 뽑아 손을 닦았다. 하진은 지금 이 상황을 도통 이해할 수가 없었다. 저와 연습을 하고, 허리를 안고, 웃는 행동을 하던 정우와 너무나도 다르기 때문이었다.

“가라니까요. 형 여기 오려고 나온 것도 아니잖아요.”

“…정우야, 왜 그래.”

“그럼 비켜요. 나가게.”

문 앞쪽으로 선 하진을 본 정우가 고개를 기울였다. 하진은 당장 비키지 않으면 저를 밀어버리고라도 나갈 것 같은 정우의 눈을 바라보았다. 몸에 팔을 감고 있다가 확 떼어내고, 어깨 위에 두른 팔을 또 확 걷어낼 때와 같은 느낌이었다.

하진의 예상대로 정우는 비키지 않는 하진의 어깨를 확 잡아 옆으로 밀었다. 그대로 옆으로 밀려난 하진은 제 옆으로 나가는 정우의 팔을 서둘러 잡았다.

“…갑자기 왜 그래.”

“놔요.”

“정우야.”

“아, 진짜.”

짜증이 묻은 얼굴로 돌아선 정우가 화장실 문을 쾅 소리가 나게 닫았다. 그리고 하진의 어깨를 두 손으로 쥔 채 뒤로 밀며 걸음을 옮겼다. 하진은 뒤로 마구 밀리며 걸음을 옮겼다. 넘어질 것 같아 무섭기도 하고, 또 정우의 예민한 표정도 무서워 그저 밀려날 수밖에 없었다. 그 발이 밀리는 걸음은 화장실 칸 안에 들어가 벽에 등이 닿은 뒤에야 멈추었다.

“아!”

벽으로 확 밀쳐진 순간 몸으로 퍼지는 충격과 함께 문 닫히는 소리가 울렸다. 충격에 눈을 감았던 하진이 그 엄청난 소리에 눈을 떠 제 앞에 선 정우를 바라보았다. 눈이 마주치자마자 정우의 몸이 확 다가와 하진의 몸을 덮었다.

“흐읏!”

목덜미에 정우의 입술이 닿은 순간 하진은 어깨를 움츠렸다. 몸이 완전히 마주한 채로 밀리고, 갇혔다. 벽과 정우의 몸 사이에 갇혀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손이 입고 있는 후드 안으로 거침없이 파고들었고, 티셔츠 위로 허리를 잡아왔다. 하진은 고개를 저으며 정우의 어깨를 겨우 잡아 밀어냈다. 하지만 정우는 조금도 밀려주지 않았다.

“왜, 읏… 왜 이러는, 거야….”

목덜미와 턱으로 닿아오는 정우의 입술에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티셔츠 위에서 허리를 잡고 있던 손은 이제 그 안으로 들어가 피부에 직접 닿아 있었다. 하진은 이 와중에도 쉽게 달아오르는 제 숨을 누르며 겨우 억눌린 목소리를 뱉어냈다.

“나랑 붙어먹으려고 여기까지 따라온 거 아니에요?”

“…뭐?”

“형은 나만 보면 이런 짓 하고 싶어 하잖아요. 비키라는데도 안 비키고 버티고 서 있을 땐 이런 생각 한 거 아니에요?”

“불러도 대답을 안 하니까 따라 들어온 거 아냐.”

하진의 흘러나오는 목소리를 듣던 정우가 목덜미에 파묻고 있던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리고 맞붙어 있던 몸을 떼며 뒤로 조금 물러섰다.

“이유가 뭐든 앞으로 따라 들어오지 말아요. 난 이제 멤버들 없는 곳에서 형이 나를 부르거나, 만지거나, 따라오면 무조건 발정 나서 그러는 거라고 생각할 거니까.”

“…….”

“형이 하는 그 사랑은 나한테 그 정도로밖에 해석이 안 되거든요.”

“…조심하겠다고 했잖아. 너도… 팀도 다 아무 일 없게 내가 조심한다고 그랬잖아.”

“그래서 나도 형이 조심할 수 있게 도와주는 거예요. 내가 그래도 형을 좋아해서 형이 뭔 말을 하면 계속 기회도 주게 되고, 들을 수밖에 없고 그랬었는데 그게 도움이 되는 게 아닌 것 같더라구요.”

“…….”

“뭐라고 하면 손톱만큼 작아졌다가, 괜찮다고 안아주면 그 몇 배로 커져버리잖아. 기대하지 말라고 하는 말에도 혼자 기대하고, 기대가 희망이 되고, 멈추지를 못해서 여기까지 왔잖아요, 우리가.”

같은 말을 계속 하고 싶지 않다는 듯 짜증이 묻은 목소리였다. 하진은 저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는 정우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형은 아파 죽어가면서도 나를 부르더라구요.”

“…내가?”

“아파서 일어나지도 못하는 형 보니까 좀 미안했어요. 내 말이 심했나, 안 그래도 컨디션 안 좋은 사람 잡고 너무 심하게 굴었나. 그래서 이렇게 아픈 건가.”

“…….”

“그런데 형 아파서 자다가 막 우는데, 울면서도 내 이름을 부르는 거야. 안 들었으면 좋았을 텐데 들어버렸어요.”

“…….”

“그때 알았어요. 아, 내 이런 걱정도 형한테는 단순한 걱정으로 닿지 않는구나. 멤버라고 챙긴 것뿐인데도 그게 형한테는 양분이 되는구나. 열 내렸나 이마에 손만 대도 형 눈은 어쩔 줄을 몰라 하는 거 보니까 내가 뭘 해야 할지 이제 알겠더라고.”

반박할 수가 없었다. 정우의 말이 다 맞기 때문이었다. 정우의 사소한 시선, 아무 의미도 없는 웃음, 손길, 걱정, 목소리. 그 모든 것들이 하진의 사랑을 키웠다. 차정우라는 존재가 내보내는 모든 것들이 다 그랬다.

“아무것도 안 하는 거. 그게 내가 할일이더라구요. 난 이제 아무것도 안 하려구요. 그러니까 형. 나한테 손대지 말아요. 멤버들이랑 있을 때는 어쩔 수 없을 거고, 그랬던 것처럼 세상 제일 친한 사이겠지만, 그 외의 시간에는 건들지 말아요. 말도 걸지 말고, 보지도 말아요. 내 이름도 부르지 말고, 그냥 신경을 좀 꺼 줘요.”

“…….”

“난 형의 모든 것을 다 섹스하고 싶다는 신호로 받아들일 거니까, 지금처럼 아무 데나 처박혀서 이런 취급당하고 싶으면 계속 해요. 먼저 건드려놓고 처박혀서 싫다고 왜 그러냐고 말하지 말고.”

“…….”

“솔직히 형 지금도 기대하잖아요. 아니야?”

끝내 아니라는 말을 하지 못하는 하진을 본 정우가 실소를 터뜨리며 몸을 돌려 문을 열었다.

“말로 하는 건 여기까지예요.”

하진은 여전히 화장실 칸 안에 기대어 선 채 정우의 목소리를 들었다. 모습이 보이지 않는데도 꼭 여전히 제 앞에 서서 말하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곧 정우가 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그제야 눌려 있던 숨을 내쉰 하진이 깊게 눈을 감았다가 떴다. 며칠 전 밤, 제 이마에 손을 올리던 정우의 느낌이 다른 때와 달랐던 게 떠올랐다. 착각이 아니었다.

「아무것도 안 하는 거. 그게 내가 할일이더라구요.」

정우의 작은 관심, 배려, 아무 의미 없는 다정과 손길에도 마음이 커졌었다. 정우의 말은 하나도 틀리지 않았다. 저를 생각해서 달래고, 좋게 지내려고 애썼지만, 그 모든 기회를 잃은 것은 저였다. 결국 정우가 그런 저에게 질려버렸고, 이제 정말 다 끝나버린 것 같았다.

「멤버라고 챙긴 것뿐인데도 그게 형한테는 양분이 되는구나.」

적나라하게 전부 보여 버렸다. 이제 정우가 모르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저의 밑바닥에 선 채, 그보다 더 아래까지 완전히 다 보이고야 말았다. 질렸든, 지쳤든 돌이킬 수 없을지도 몰랐다.

“…….”

하진은 기대고 있던 등을 떼며 바깥으로 나왔다. 그리고 차가운 물을 세게 틀어 손을 씻었다. 그래도 답답한 마음이 사라지지 않아 얼굴에도 몇 번 물을 끼얹었다. 멍하던 머리 안으로 차가운 기운이 확 스며들었다. 하진은 페이퍼타월을 뜯어 대충 손과 얼굴을 닦고 화장실을 나섰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