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
“나랑 오래오래 팀 하고 싶다며.”
“…….”
“그것도 거짓말이었어요?”
“…아니야. 거짓말 아니야.”
“그럼 대답해요. 팀 흔들 짓 안 하겠다고.”
하진은 떨리는 입술을 겨우 벌렸다. 그리고 작지만 분명한 목소리를 내었다. 정우를 위해서.
“…그렇게 할게.”
“뭘 그렇게 할 건지 말해요. 연습하다가 자위하지 않겠다, 내 손에 발정 나지 않겠다, 뭐 이런 보기라도 줘요? 알려주면 말할래요?”
“…팀… 흔드는 일 다시는… 안 할게. 연습실에서, 또 그 외의 공간에서도… 멤버들이 눈치챌 수 있는 행동, 말… 다 조심할게. 정신 차릴게.”
“전에도 들은 적이 있는 것 같은 말인데, 또 이렇게 들으니 기분이 더럽네.”
“…….”
“이런 상황에서도 그만 좋아한다는 말은 안 하네요. 뭐 됐어요. 그건 형 마음이니까.”
정우는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나 냉장고 안에서 차가운 물 한 병을 꺼내들었다. 그리고 하진에게 그 어떤 시선도 주지 않은 채 거실로 가 앉았다. TV를 켜고, 웃고 있는 화면 속 사람들을 보며 채널을 돌리던 정우가 움직임 하나 없이 앉은 하진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아직 다 마르지 않은 젖은 머리칼 아래로 처연해 보일 만큼 가늘고 긴 하얀 목덜미가 힘없이 처져 있었다.
제 행동이 심했다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후회하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한 게 아니라 심하다는 것을 다 알고 했기 때문이었다. 아포제라는 그룹은 정우에게 오랜 꿈이었고, 다시없을 기회였다. 이 자리에 서기 위해 미친 듯 달려왔고, 노력했다.
당장 중요하지도 않은 사랑이라는 감정 때문에 이 모든 것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그것도 저의 감정이 아니라, 하진의 감정 때문이라면 더더욱.
하진을 좋아했다. 하지만 사랑하지 않았다. 팀을 위태롭게 만드는 감정이라면 더더욱 사랑할 수 없었다. 너무나도 뚜렷한 선례가 있는 일이라 더 그랬다. 하진의 마음이 외부로 조금이라도 새어 나가는 순간 팀은 순식간에 무너질 거고, 다시는 일어설 수 없을 것이었다. 그렇게 되는 것을 보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저에게 닿는 하진의 정확한 마음을 안 이상 더더욱.
“…….”
정우는 그렇게 하진을 외면했다. 그리고 화면 속에서 웃고 있는 사람들을 다시 바라보았다. 저 사람들은 뭐가 그렇게 즐거운 걸까. 저와 하진도 저렇게 다시 웃을 수 있을까.
이 순간이 지나면, 다시 돌아갈 수 있을 것이었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그냥 아주 짧은 열병이었다는 듯. 하진의 마음에 달라붙은 그 끈적끈적한 감정들을 전부 빼앗아버리면 될 것이었다.
정우는 굳게 입술을 다문 채 고집스레 웃는 사람들의 얼굴에 내내 시선을 맞추었다. 하지만 신경은 고요한 식탁으로 향해있었다. 결국 그 프로그램이 끝날 때까지 하진이 죽을 먹는 소리는 나지 않았다.
***
하진은 그 뒤로도 이틀을 더 앓았다. 멘탈이 무너져 몸이 지친 상태로 한 정우와의 섹스를, 그리고 쏟아지던 그 말들을 결국 견디지 못한 것이었다. 병원에 갈 힘도 없고, 또 괜한 소문에 시달리고 싶지 않았기에 집으로 한영엔터테인먼트의 아티스트들을 돌봐주는 의사가 직접 와 영양제를 놓아주었다. 하진은 그렇게 이틀 동안 침대를 벗어나지 못했다.
다른 멤버들까지 쉴 수는 없는 노릇이라 하진은 숙소에 혼자 남아 있었다. 중간에 한 번씩 훈이가 와서 들여다보기도 하고, 죽을 사다 주기도 했다. 하진은 겨우 죽 몇 숟가락을 넘기다가 토해내고, 그렇게 쓰러져 잠들었다.
잠을 자려고 하면 정우의 목소리가 들렸다. 사랑하는 자체가 잘못이라고 저에게 냉정한 목소리를 내며 뒤돌아섰다. 형이 싫다고, 형 같은 거 끔찍하다고 다시는 보고 싶지 않다며 제 어깨를 밀어냈다. 제발 옆에 있게만 해달라고, 그냥 보게만 해달라고 애원하고 빌다가 잠에서 깨어나면, 온몸이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악몽은 반복되었다.
모든 것을 태워버리는 것처럼 지독히도 아팠다. 열이 떨어져 안도를 하면 또 오르고, 또 괜찮아졌다고 생각하면 또 다시 열이 올라 앓고 또 앓았다. 이대로 정우에 대한 마음도 전부 다 타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진은 아파 눈도 뜨지 못하는 그 상황에서도 정우를 떠올렸다.
“깼어요?”
“…왔어? 지금 몇 시야?”
“열두 시 좀 넘었어요.”
“피곤하겠다. 연습 진도 많이 나갔지. 나도 빨리 해야 될 텐데…….”
“몸은 좀 어때요?”
머리 안이 멍하고, 정우의 목소리가 꼭 터널 안에서 듣는 것처럼 울렸다. 하진은 그 목소리를 또렷하게 듣고 싶어 고개를 저었다.
“…그래도 괜찮아졌어. 아까 선생님도 왔다 가셨는데 나으려고 그러는 거래.”
“열은 내렸어요?”
“…응.”
힘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하진을 보던 정우가 손을 뻗었다. 그리고 앞머리 아래에 감춰진 이마를 손으로 덮어보았다. 부드러운 앞머리가 정우의 손등을 간질였다.
“아직 좀 있네요.”
“…….”
그렇게 아팠는데, 그렇게 열이 높게 나서 온몸이 타들어가는 것 같았는데 마음은 결국 하나도 타지 않은 모양이었다. 아무것도 아닐 정우의 손길에 또 마음은 조여들고, 귓가가 뜨거워졌다. 아파서 화끈대는 것일 거라고 애써 외면을 해보지만, 우습게도 아파서 그런 게 아니라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진은 떨어져 나가는 정우의 손을 보며 작게 미소 지었다.
“열이 있는데도 네 손이 따뜻한 건 알겠어.”
“…….”
“그런 의미로 하는 말 아니야. 그냥… 넌 늘 나한테 그랬어. 따뜻하고 다정했어.”
“나 때문이네, 그럼.”
“아니야. 다 나 때문이지……. 그냥 친하고 편해서 한 행동들을 그렇게 받아버린 내가 잘못한 거야.”
“아픈데 그런 얘기 할 거 없어요. 형 마음 모르는 거 아니니까. 그리고 우리 이미 얘기 다 했잖아요. 같은 얘기 반복하지 말아요.”
목소리는 냉정하지 않지만, 그 안에 담긴 말들은 평소와 조금 달랐다. 선을 긋고 그 바깥에 선 채 말을 하고 있는 기분에 하진은 정우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씻고 자야겠다. 먼저 자요, 형.”
“…응.”
그대로 일어나 방을 나가는 정우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하진이 작게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다시 지끈대기 시작하는 머리에 눈을 깊게 감았다가 떴다.
“…….”
뭐라고 설명하기 어려운 기분이었다. 초조하기도 하고 불안하기도 했다. 빠르게 뛰는 심장은 전혀 좋은 쪽의 울림이 아니라 자꾸만 입술이 말랐다.
앉아있기만 해도 머리가 쿵쿵 울리고, 몸이 아파 결국은 누울 수밖에 없었다. 하진은 벽을 보고 누운 채 잠이 오지 않는데도 억지로 눈을 감았다. 이 안 좋은 기분을 잊고 싶기 때문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여전히 잠이 오지 않아 눈만 감고 있던 하진은 정우가 들어오는 소리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모든 감각이 그쪽으로 움직이는 게 느껴졌다. 가까워지는 발소리, 그리고 침대 옆에서 멈춘 움직임.
“…….”
어깨 위로 따뜻함이 내려앉았다. 하진은 제 어깨 위를 덮는 이불의 느낌에 눈을 더 꼭 감았다. 제가 볼 수 없는 상황에서도 정우는 다정했다. 어깨 위로 내려앉은 것은 이불이 아니라 정우의 따뜻함이었다.
곧 불이 꺼졌다. 정우가 침대에 오르는 소리가 들리고, 몇 번 진동 소리가 울렸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소리마저 전부 사라졌다. 정우의 고른 숨소리가 울리는 것을 가만히 듣던 하진은 그제야 용기를 내어 최대한 소리가 나지 않게 몸을 돌려 누웠다. 아직은 익숙해지지 않은 어둠 속, 정우가 불분명하게 눈에 들어왔다.
“…….”
하진은 그렇게 한참이나 어둠 속에서 정우를 눈에 담았다. 어둠에 익숙해져 방 안이 어둡다는 것을 잊을 때까지, 그렇게 아주 한참 동안이나.
***
하진은 딱 하루를 더 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분명 잠들기 전까지만 해도 머리가 무거웠는데, 아침에 눈을 뜰 때는 아주 가볍게 침대에서 일어날 수 있었다. 언제 아팠냐는 듯 머리 안도 맑고, 몸도 가벼웠다. 사흘 동안 내내 저의 머리 위에만 쏟아지던 폭우가 그친 것 같은 기분이었다. 아직 쌀쌀하게 얼굴을 스치는 바람도, 뭔가 오랜만에 가는 것 같은 연습실도 다 좋았다. 어쩐지 이제 정말 다 잘해 낼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었다.
“며칠은 너무 무리하지 말고 몸 챙겨, 알았지?”
“네, 형. 그런데 저 진짜 괜찮아요. 아까 점심도 잘 먹었잖아요.”
“그래. 너 밥 먹는 거 보니까 좀 마음이 놓이더라.”
물 한 모금만 먹어도 쏟아냈던 어제와는 달랐다. 컨디션이 너무 좋아 날아갈 것 같았다.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도 하진은 한편 제가 미친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하진은 혼자 몸을 풀고 있는 정우를 바라보았다. 아침부터 지금까지 단 한마디도 나눈 적이 없었다. 아니, 정우는 단 한 번도 저를 보지 않았다. 멤버들은 알지 못하겠지만, 하진은 알 수 있었다.
“형.”
“…어?”
혼자 몸을 풀던 정우가 먼저 하진에게 다가와 말을 걸었다. 하진은 어쩐지 긴장되는 얼굴로 정우를 바라보았다.
“연습할까요? 맞춰 놔야 진도 나갈 것 같은데.”
“아, 응! 하자.”
하진은 정우가 건네는 안대를 받아들었다. 내내 걱정하고 있었는데 정우가 먼저 말을 걸어줘서 정말 다행이었다. 다시는 대화하지 못하는 건가 싶을 정도로 불안하던 마음이 이제야 놓였다.
“안대 뒤에서 풀 때, 이렇게 당기면 더 멋있게 풀어지는 것 같아. 그때 팔 방향도 그렇고, 안대가 이쪽으로 풀리는 게 더 멋있지 않을까?”
“아, 이쪽이 낫겠다. 그럼 제가 이쪽에서 당기고 길게 풀어낼게요.”
정우를 더 이상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다. 정우가 바라는 ‘아포제 강하진’의 자리를 어떻게든 잘 해내고 싶었다. 저의 선택과 노력으로 온 자리인 만큼 절대 팀이 흔들리게 하고 싶지 않았다. 하진은 정신이 흐트러지지 않도록 계속 생각하고 다짐했다.
너무 가까워 마음이 흔들릴 때에도 외우듯 내내 생각했다. 더 이상 정우와 관계가 어그러질 일은 하지 말자고, 이제 더는 안 된다고, 이제 여기서 더 어그러지면 남은 것은 끝일뿐이라고.
“와, 지금 둘이 완전 섹시했어! 후드 입고 그럴 일이야? 와, 이거 진짜 찍어야겠다. 한 번 더 해 줘. 앵콜!”
앵콜을 외치는 해성의 목소리에 영우의 목소리가 입혀지고, 결국 인규의 목소리까지 겹쳐졌다. 정우가 웃으며 주머니에 넣었던 기다란 안대 끈을 꺼내 하진의 눈에 둘러 묶어 주었다. 하진은 또다시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섞이지 말자. 아포제 강하진과 차정우를 사랑하는 강하진은 별개다, 다르다, 절대 섞이지 말자. 실수하지 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