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
“난 저 화장실 안 갔거든요. 그래서 못 봤어요. 아마 갔으면 봤을 거예요.”
“……아, 그럼 다른 데 간 거구나. 휴게실이나… 뭐…….”
“아니, 화장실 간 건 맞아요. 어디로 갔냐면.”
“…….”
정우의 검지가 곧게 펴졌다. 하진은 정우의 손가락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손가락은 느릿하게 위로 두 번 움직였다.
“두 층 위에 있는 거기.”
무너지지 않았다. 정우에게 정말 말도 안 되는 말을 듣고 있는데, 마음도 정신도 무너지지 않았다. 그저 멈춰 있을 뿐이었다. 하진은 느릿하게 접히는 정우의 손가락을 바라보았다.
“형 진짜 겁대가리가 없어.”
“…….”
“소리를 참으려면 제대로 참았어야죠. 애매하게 내는데 나도 흥분할 뻔했어요.”
“……무슨 말이야?”
하진의 입술 사이로 힘을 잃은 목소리가 숨처럼 흘러나왔다. 정우는 삐딱한 시선으로 하진을 보며 고개를 기울였다. 그리고 손을 뻗어 이제는 거의 다 마른 하진의 티셔츠 끝자락을 잡아 올렸다.
“내가 무슨 말 하는지 몰라요? 그럼 형은 뭘 아는데.”
티셔츠 끝자락이 위로 더 올라와 입술에 닿은 순간 하진은 두 눈을 꽉 감았다.
“이거?”
아니라고, 잘못 들은 거라고 변명을 할 힘도 남아 있지 않았다. 빠져나갈 틈이 전혀 없었다.
“아니면… 형은 시간을 주면 안 되는 사람이라는 거?”
쥐고 있던 하진의 티셔츠를 꽉 쥐어 신경질적으로 확 놓은 정우가 화가 묻은 숨을 내쉬었다. 손끝이 차가워지고, 몸이 막 떨리기 시작했다. 하진은 겨우 눈을 떠 감정을 억누르고 있는 정우를 바라보았다.
“내 이름도 불러서 하마터면 대답할 뻔했어요.”
“…정우야.”
“이래도 발정 난 게 아니라고?”
“…….”
“연습하다가 가서 그런 짓을 하는데?”
“…미안해.”
“아, 지겨워. 듣기 싫어요. 그냥 부탁을 하지 그랬어요. 그럼 박아줬을 텐데. 잘하겠다는 말이나 하지 말든가.”
하진에게만 들릴 정도로 낮고 작은 목소리가 위협적으로 울렸다. 하진은 저에게 한 걸음 다가와 그대로 몸을 거울 쪽으로 돌려세우는 정우를 바라보았다. 거울 안에서 눈이 마주친 순간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도대체 어디서 흥분한 거지.”
“…….”
정우의 팔이 그대로 뒤에서 하진의 허리를 확 끌어안았다. 아까 연습 때와 같은 움직임이었다.
“여기?”
“…….”
“아니면 여기서?”
큰 손이 두 눈을 단숨에 뒤덮었다. 시야가 새카맣게 변한 순간 알 수 없는 두려움이 밀려들었다. 하진은 정우의 팔과 손에서 벗어나려 몸을 마구 움직였지만,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그대로 하진의 몸을 부수어 버리기라도 할 것처럼 정우가 더 꽉 그 허리를 잡아 가뒀다. 그리고 하진의 귓가에 입술을 뭉개듯 가져다 대며 속삭였다.
“얼마나 좋아 미치면, 사람이 들어가도 모르고, 그렇게 물을 세게 틀어도 몰라요?”
“제발, 제발 정우야… 형들, 형들이 보면…….”
“형도 그런 걸 걱정은 하는구나. 몰랐지, 난.”
“…….”
“같이 올라갈까요? 형이 원하는 거 다 해줄게요. 기회를 다시 한번 줬으면 사람이 바뀌는 게 있어야지.”
“저, 정우야, 제발, 제발…….”
“왜요. 또 흥분했어?”
고개를 저은 하진이 정우의 팔을 잡았다. 내려야 하는데, 어떻게든 떼어내야 하는데 아주 미약한 힘도 손에 들어가지 않았다.
“정우야…….”
“조용히 해요. 여기서 박아버리기 전에.”
“…….”
“강하진은 그래도 좋아할 거야. 안 된다고 하면서 그만하라고는 안 하겠지. 형은 그런 사람이에요.”
하진은 고개를 저었다.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 조금 떨어져 있기는 해도 멤버들이 다 있는 곳에서 울면 금방 알아차릴 것이었다. 하진은 필사적으로 눈물을 참아냈다. 하지만 또다시 다 들켜버린 이 상황과 다시는 저를 봐주지 않을 것 같은 정우의 낮고 날카로운 목소리에 견딜 수가 없었다.
“왜 울어요.”
“……미안해.”
“누가 보면 내가 괴롭힌 줄 알겠네.”
정우는 그대로 하진의 눈을 가리고 있던 손을 확 떼어냈다. 손바닥에는 눈물이 묻어 있었다.
“울지 말아요. 형은 울면 안 되잖아.”
“…….”
“형은 이제 울 자격이 없어요. 그러니까 울지 마.”
턱이, 아니 몸이 마구 떨리기 시작했다. 하진은 정우의 이름을 부르고 미안하다는 말을 하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머리 안이 새하얗게 변해 그 무엇도 떠오르지가 않았다. 빛이 가늘게 들어오던 작은 틈마저 사라진 기분이었다.
“둘이 뭔 연습을 그렇게 열정적으로 해?”
“도입이라 아무래도 신경이 쓰여서요.”
“정우야. 내가 그랬잖아. 하진이 얼굴만 딱 얼빡으로 잡으면 끝난다니까. 강하진이! 무려 눈을 가렸어! 그리고 그걸 차정우가 벗겨줘! 끝난 거 아냐?”
“전 형들 랩 파트가 더 기대돼요. 진짜 좋아요, 거기.”
정우의 칭찬에 씩 웃은 해성이 그대로 정우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역시 막내 안목 타고났어. 존잘이 존잘을 알아보는 거지.”
“아니, 정말 이번에 랩 장난 아니에요. 그 부분 퍼포도 그렇고. 그런데 지금 어디 가는 거예요?”
“아, 너랑 하진이 없었구나. 아까 너희 화장실 갔을 때 연락 왔는데 우리 아포제 라이프 다음 시즌 할 건가 봐. 그거 때문에 뭐 물어볼 게 있다고 올라오래.”
“아, 리얼리티 하는구나.”
“팬들이 리얼리티 진짜 좋아하잖아. 재미도 있고. 가자.”
하진은 정우가 해성과 함께 연습실 문 쪽으로 먼저 나가는 것을 바라보았다. 말을 들었는데 금세 머리 안에서 휘발되어 버렸다. 어디로 가야 하는 건지 왜 가야 하는 건지 하나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렇게 우두커니 선 하진의 옆으로 온 인규가 그 등을 부드럽게 두드렸다.
“하진아. 왜 그래?”
“…….”
“하진아? 어디 안 좋아?”
“…네? 아, 형.”
불러도 어딘가를 멍하니 바라만 볼 뿐 반응이 없던 하진이 또 너무 놀라며 바라보는 것에 인규가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어디 아파? 무슨 일 있어?”
“아니에요! 그냥 잠깐 다른 생각 좀 하느라 그랬어요. 그런데 지금… 다들 어디 가는 거예요?”
인규가 조금 놀란 눈으로 하진을 바라보았다. 조금 전 해성이 하진을 돌아보면서까지 리얼리티 때문에 회의를 하러 간다고 말을 전했기 때문이었다. 분명 듣고 고개를 끄덕이는 것도 봤는데, 전혀 모르겠다는 듯 묻는 하진을 본 인규가 다시 그 등을 부드럽게 두드려주었다.
“우리 리얼리티 다음 시즌 준비할 건가 봐. 그래서 어떤 식으로 어디서 하는 게 좋을지 멤버들 의견도 들어보고 싶다고 하셔서.”
“아……. 리얼리티…. 네….”
“진짜 괜찮은 거 맞아? 지창이 형한테 말해줄까? 숙소 가서 좀 쉴래?”
“아니에요. 괜찮아요, 형. 저 우리 팀에서 제일 튼튼하잖아요. 안 쉬어도 돼요. 진짜 그냥 잠깐 다른 생각 해서 그런 거예요. 가요!”
“그래, 그럼. 대신 힘들면 참지 말고 말해. 알았지? 정우한테라도 얘기 꼭 해. 그래도 넌 정우가 제일 편할 거 아냐.”
정우가 제일 편할 거라는 인규의 말에 하진은 쉽게 답하지 못하고 그저 웃음으로 대신했다. 30분 전만 됐어도 너무나 당연하게 네, 대답하고 끝냈을 말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 짧고 쉬운 대답 하나도 할 수가 없었다.
미팅 룸으로 들어서자 지창이 웃으며 반겨주었다. 하진은 늘 그랬던 것처럼 정우 옆 빈자리에 앉았다. 그렇게 멤버들이 다 모이자 지창이 옆에 앉은 익숙한 얼굴의 리얼리티 메인 작가를 소개해 주었다. 하진은 일어나 웃으며 인사하는 작가에게 고개 숙여 인사했다.
“이렇게 우리 아포제 멤버들 다시 만나게 되어 너무 기뻐요. 저만 기쁜 게 아니었으면 좋겠는데 어떠세요?”
대화하기 좋은 분위기를 만드는 리얼리티 작가의 목소리에 부드러운 웃음이 여기저기에서 흘러나왔다. 하진은 도통 그 대화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머릿속에 다른 말이 들어올 자리가 없기 때문이었다. 연습실에서 정우가 했던 그 가라앉은 말들이 머릿속에 가득 차 여기저기를 찔러댔다.
“첫 시즌 때는 우리 아포제가 데뷔를 하고, 그 과정을 보여주면서 팬들에게 소개를 하고, 앞으로 잘 부탁한다고 인사를 하는 그런 의미가 강했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그 뒤로 우리 아포제 정말 난리가 났잖아요? 그야말로 침체된 아이돌 시장을 일으켜 세웠어요.”
거침없는 칭찬에 인규가 과찬이라며 두 손을 저었다. 그런 인규를 보며 겸손하기까지 하다고 또다시 칭찬을 한 작가가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래서 이번에는 소개를 했으니까 아포제 안으로 들어가서 팬들이 궁금해하는 것들을 집중 조명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무대 위는 자주 보니까, 무대 뒤의 모습 또 숙소 생활, 멤버들끼리 취미 생활을 같이하는 걸 보여줘도 좋고, 먹방, 요리 이런 걸 보여줘도 좋을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하세요?”
“먹방 완전 좋아요. 공식적으로 먹을 수 있는 거잖아요.”
해성의 대답에 미팅 룸 가득 웃음소리가 울렸다. 하진은 작게 웃는 정우를 바라보았다. 이 안에서 웃을 수 없는 것은 저 하나뿐이었다.
「형 진짜 겁대가리가 없어.」
겁 없는 행동이었다. 숙소 욕실 문을 잠그고 해댄 것으로도 모자라 회사 건물 화장실에서까지 해버렸다. 나름 머리를 쓴다고 빈 층으로 올라갔는데 오히려 그게 더 일을 키운 것 같았다.
“…….”
비상구는 복도 끝에 있고, 제가 거기까지 가는 동안 정우가 연습실 문으로 다가와 열었다면, 비상구로 들어가는 저를 볼 수 있었을 것이었다. 아니, 그냥 우연히 알게 된 거라고 해도 달라질 건 없었다. 정우가 어떻게 그걸 알고 거기까지 왔는지는 이제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이래도 발정 난 게 아니라고?」
정말 인간 이하가 된 것 같았다. 정우의 말이 맞았다. 발정이라는 말에 수치심을 느낄 자격도 없었다. 연습을 하면서 그 체온에 또 그 손길에 흥분해 버렸다.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아포제는 쉬는 동안 주로 뭐 해요? 아니다, 쉴 시간이 사실 많이 없을 테니까… 질문을 바꿔볼게요. 시간이 생긴다면 뭘 하고 싶어요? 긴 시간 아니더라도 그냥 온전히 쉴 수 있는 짧은 휴식 시간. 정우 씨부터 대답해 줄래요?”
“저는 심야 영화 보고 싶어요. 영화 보는 걸 좋아하는데 통 볼 시간도 없고, 아직 외출이 자유롭지 못해서 영화관 가고 그럴 수가 없거든요.”
“아, 심야 영화 좋죠. 그럼 리얼리티 찍을 때, 영화 취향 맞는 멤버랑 심야 영화 보러 가고 그래도 좋을 것 같아요. 의견 고맙습니다. 하진 씨는 휴식 시간 생기면 뭘 하고 싶어요?”
모두의 시선이 하진에게 몰렸지만, 하진은 전혀 그 사실을 알지 못했다. 그저 시선을 내리깐 채 고요히 존재할 뿐이었다. 그런 하진을 본 지창이 손을 뻗어 데스크 위를 두드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