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
「말해요. 나랑 자고 싶다고. 그럼 해준다니까.」
비가 많이 오던 그날 홀린 듯 다가가 뒤엉키던 순간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창피한 줄도 모르고 먼저 손을 대고, 애원했었다. 지금도 할 수만 있다면 그러고 싶었다. 만져 줘. 제발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해 줘. 미쳤다고 해도 좋아. 제발 정우야 나 좀 만져 줘.
「입 벌려 봐요.」
거스를 수 없던 목소리였다. 평생 그 목소리를, 그 순간을 잊을 수 있을까. 하진은 머릿속에서 명령하는 정우의 목소리를 따라 입술을 벌렸다. 물려 있던 젖은 티셔츠 자락이 그대로 힘없이 흘러내렸다.
「혀 내밀어야지.」
문지르고 싶었다. 미친 듯 빨리고 싶기도 했다. 괜찮아진 줄 알았는데, 다시는 정우를 상대로 그런 생각 같은 건 안 하려고 했는데, 이제 그럴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결국 다 착각이었다. 하진의 살짝 벌어진 입술 사이로 젖은 혀끝이 움직였다.
“흐읏!”
아랫배가 확 당기며 팽팽해졌다. 살짝 뒤로 젖혀진 허리가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움찔대었다. 휴지로 감싸 쥔 성기 끝에서 평소보다 진한 액이 마구 터져 나왔다. 한동안 이런 쪽으로는 전혀 생각도 하지 않으려 애썼었다. 샤워를 하러 들어가도 다른 생각이 나지 않도록 바로 거품을 내 씻고 나왔다. 자위조차 내내 하지 않아 그런 걸까. 갑자기 찾아온 쾌감은 하진을 완전히 무너뜨렸다.
“하아… 흐으, 흐……. 아, 정우야…….”
쾌감은 너무나도 크고 달콤했다. 죄책감으로 어쩔 줄 모르겠는 그 안에서도 허리가 움찔대고, 납작한 아랫배가 당겨졌다. 머리끝까지 저릿할 정도로 좋으면서도 한편 더 큰 쾌감을 느끼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
정우가 제 뒤를 뚫고 들어오던 아픔을 기억하고 있었다. 분명 무척이나 고통스러웠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그 고통조차도 쾌감처럼 느껴졌다. 손가락이 들어오고, 제 안을 부드럽지 않게 헤집던 그 느낌을 떠올리기만 해도 숨이 찼다. 비교할 수도 없던 크고 굵은 성기가 몸을 꿰뚫고, 깊은 곳을 요령 없이 퍽퍽 죽을 만큼 찔러주던 것도 떠올랐다. 하진은 허리를 비틀며 정우를 상상했다. 뭐가 되어도 좋으니 정우와 또 하고 싶었다.
그 손이 제 몸 여기저기를 만지고, 혀가 입술 위를, 뺨을, 목덜미와 유두를 집요하게 문질러 주기를 원했다. 잔뜩 쏟아낸 성기가 다시 열기를 머금기 시작했다. 하진은 눈을 감은 채 제 몸을 만지는 정우를 떠올렸다. 사정하고 힘이 없는 성기를 쥐고, 문지르는 그 손길을 경멸하는 시선으로 바라보면서도 허리 짓을 멈추지 않던 그 얼굴을.
“하으…….”
뜨거운 숨이 입술 사이를 덥히며 맴돌았다. 하진은 다시 열이 오르는 성기를 쥔 채 손을 움직였다. 젖은 휴지가 문지르며 지나갈 때마다 고개가 젖혀졌다. 그 사이사이 손바닥과 성기가 슬쩍 스칠 때마다 소리 없는 뜨거운 숨이 엉망으로 흩어졌다.
길고 촘촘한 속눈썹 사이로 눈물이 엉겨 붙었다가 이내 눈가를 흠뻑 적셨다. 하진은 성기를 쥐고 있던 손을 깊은 곳으로 움직여 손가락을 뻗었다. 열이 오른 손끝이 더 깊은 곳의 입구를 어설피 건드린 그 순간.
“으응!”
요란히 비가 쏟아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날처럼 아주 요란한 비였다. 쏴아, 거센 물줄기가 쏟아져 내리는 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꼭 진짜 같은 소리에 허리가 비틀렸다. 결국 애처로울 정도로 신음을 참기 위해 꽉 다물린 입술 사이로 숨과 뒤섞인 소리가 흘렀다. 하진은 그렇게 또다시 사정했다.
“…하아…….”
자위하면서 이렇게 연달아 사정한 것은 처음이었다. 다리가 후들후들 떨리고, 머리가 핑 돌아 서 있기도 힘들었다. 하진은 흠뻑 젖은 휴지를 변기 안으로 넣고, 새 휴지를 길게 뜯어 묻은 것들을 정리했다. 그리고 벽에 붙은 방향제를 뿌리며 변기 캡을 닫았다. 요란한 소리를 내며 물이 내려가는 소리가 닫힌 캡 안에서 웅웅거렸다.
“…….”
긴 숨을 내쉬며 속옷과 바지를 끌어 올린 하진이 닫힌 캡 위로 주저앉았다. 인조적인 과일 향이 가득 퍼지는 것에 머리가 지끈거렸다. 분명 몸에 남은 쾌감과는 어울리지 않는 향이었다.
그렇게 한참이나 지끈대는 머리에 고개를 숙인 채 있던 하진은 더 이상 숨이 엉망으로 터져 나오지 않을 때가 되어서야 문을 열고 나갔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힘이 빠져 힘들었다. 어디라도 누워 잠들고 싶은 그런 몽롱한 기분이었다.
“…….”
연습할 게 아직 산더미처럼 남아 있는데 자진해서 힘이 빠지는 짓을 하다니, 정말 할 말이 없었다. 하진은 한숨을 쉬며 세면대 앞에 섰다. 그리고 거울 안에 보이는 희끄무레한 제 얼굴을 바라보다가 시선을 뚝 떨어뜨렸다. 젖은 세면대가 보였다.
“…….”
머릿속에 뿌옇게 맴돌고 있던 몽롱한 기운이 확 사라졌다. 제가 잘못 본 건 아닐까 싶어 하진은 창백한 손끝을 내려 세면대에 튀어 있는 물방울을 만져 보았다. 혹시 물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했지만, 손끝에 묻은 것은 분명 물이었다. 하진은 놀란 눈으로 양옆 세면대를 확인했다. 다른 세면대는 쓴 지 아주 오래된 것처럼 메말라 있었다. 사람 자체가 들어온 지 오래된 공간처럼 잔 먼지가 내려앉아 있기도 했다.
“…아닌데.”
못 들었는데. 누가 들어왔다면 아무리 제가 자위에 미쳐 있었다고 해도 그 기척을 듣지 못할 리가 없었다. 이렇게 물까지 틀었는데, 모른다는 건 말이 되지 않았다.
제가 들어오기 전에 누군가가 이곳에 와서 손을 씻고 간 건 아닐까. 그래, 그럴 가능성이 가장 컸다. 4월부터 공사를 한다고 했으니 이 층을 보러 온 관계자들이 있을지도 몰랐다. 그래,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만약 제가 저 안에 있을 때 진짜 누가 들어온 거라면 분명… 소리를 들었을 것이었다. 어떻게 쾌감에 미쳐 사람이 들어오는 소리도 듣지 못할 수가 있단 말인가. 그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그래, 그럴 리가 없지. 하진은 서둘러 차가운 물로 몇 번이나 거품을 내어 손을 씻었다. 그리고 도망치듯 화장실을 나섰다.
다시 계단을 내려가 연습실로 간 하진은 문을 열자 저에게 달라붙는 멤버들의 시선에 미소 지었다. 다행히 어디를 그렇게 오래 갔다 온 거냐고 아무도 묻지 않았다. 정우를 보니 스멀스멀 자책감이 피어올랐지만, 하진은 애써 그것을 외면한 채 멤버들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형.”
“…응?”
하진이 다가오자 정우가 몸을 느릿하게 돌려 마주했다. 잘못한 게 있어 그런지 몸에 힘이 잔뜩 들어갔다. 하진은 정우의 시선이 아래로 뚝 떨어지는 것에 괜히 애꿎은 손끝만 꽉 쥐며 괴롭혔다.
“젖었네요.”
“…어?”
생각하지도 못한 말이었다. 머릿속에 별생각이 다 들었다. 제가 미처 정리하지 못한 게 묻어 있는 걸까. 하진은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하얗게 질린 채 정우를 바라보았다. 정우가 그런 하진의 얼굴을 물끄러미 보며 손을 내렸다. 그리고 하진의 티셔츠 끝자락을 가볍게 잡아 들어 올렸다.
“여기.”
“아…….”
새어 나오는 신음을 막기 위해 입에 물었던 게 떠올랐다. 전에도 몇 번 숙소에서 그런 식으로 물고 소리를 막은 적이 있어서 저도 모르게 한 행동이었다. 하진은 어떤 말을 해야 할지 쉽게 떠올리지 못했다. 꼭 정우가 다 알고 있는 것만 같아 초조하고, 몸에서 피가 싹 다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또 세면대에서 물 제일 세게 틀었죠. 그러니까 이렇게 옷에 튀지.”
“어? 아… 그러게. 살살 틀어야지 하면서도 매번… 확 올려버려서…….”
“설거지할 때도 세게 틀어서 얼굴로 물 튀고, 옷도 젖고 그러잖아요.”
“…고쳐야 되는데 습관인가 봐.”
“고치기까지 할 건 아니고, 그냥 귀여워서 그래요.”
하진은 괜히 내려온 티셔츠의 젖은 부분을 만지작거렸다. 평소에도 제가 레버를 끝까지 확 올려서 설거지를 하거나, 손을 씻을 때 얼굴과 옷에 물이 튄 적이 많아 그래도 다행이었다. 하진은 작게 안도의 숨을 내쉬며 다가오는 해성을 바라보았다.
“하진이 아.”
갑자기 아, 입을 벌리라는 해성의 말에 입을 벌리자 젤리 하나가 입으로 들어왔다. 하진은 부드럽지 않고 조금 단단한 젤리를 깨물었다. 단 콜라 맛이 금세 입안으로 가득 찼다.
“젤리가 있었어요?”
“내가 숙소에서 몰래 가져왔어.”
“지창이 형한테 저번에 압수당했잖아요.”
“그때 몇 개 베개 커버 안에 넣어놨거든. 아, 그리고 젤리 몇 개 먹는다고 살찌냐.”
해성은 잘도 받아먹는 하진을 귀여워하며 젤리를 몇 개 더 입에 넣어주었다. 주는 대로 다 받아 입에 넣은 하진은 전부 다 제대로 씹지 못해 볼록해진 볼을 열심히 움직여야 했다.
“아, 정우야. 혹시 너 화장실 갔을 때 세면대에 내 안경 케이스 있는 거 못 봤어?”
“못 봤어요. 있었는데 못 봤을 수도 있구요.”
“아, 거기 두고 온 것 같은데. 가봐야겠다.”
다 먹은 젤리 봉지를 구기며 연습실을 나가는 해성을 본 하진이 정우를 돌아보았다. 정우가 화장실에 갔었던 모양이었다. 물론 누가 화장실에 간다고 해서 그걸 이상하게 여길 건 전혀 아니지만, 제가 자리를 비웠을 때 정우도 연습실 바깥에 있었다는 것이 어쩐지 마음에 조금 걸렸다.
“아직도 못 삼켰어요?”
“너무 많아서 잘 안 씹어져.”
아직도 젤리를 오물오물 거리느라 부정확한 발음을 하는 하진을 본 정우가 작게 웃었다. 그리고 하진의 어깨 너머로 안경 케이스를 들고 들어오는 해성을 바라보았다.
“세면대에 있던데?”
“아, 그래요? 못 봤는데.”
“정우 너 내 안경 케이스한테 너무 무심한 거 아냐?”
“앞으로 많은 관심 쏟을게요.”
“그래야지. 아니, 그런데 하진아. 아직도 먹고 있어? 으이구, 네가 막내 해라. 귀여워서는.”
젤리를 오물대는 하진을 보고 웃은 해성이 꼭 애완동물에게 하는 것처럼 하진의 턱을 간질이고는 락커로 향했다. 하진은 그제야 입에 있던 젤리를 전부 삼킬 수 있었다.
“…….”
해성의 안경 케이스는 팬이 선물을 해준 디자인이라 꽤 화려했다. 빨간 벨벳 케이스에 흩날리듯 해성의 이름이 수놓아져 있고, 또 치렁치렁한 키링까지 달려서 꽤 눈에 뜨이는 디자인이었다. 멤버 모두가 알고 있는 저 케이스를 세면대에서 보지 못했다는 게 조금 이상했다.
“나도 그럴 때 있어. 눈앞에 뭐 있는데도 안 보여서 막 계속 찾고……. 전에는 폰 손에 들고도 한참 찾았잖아.”
“맞아요. 그럴 때 있죠. 근데 난 좀 다른 케이스예요.”
“…응?”
어깨 너머로 정우의 시선이 닿는 것에 하진이 얼른 뒤를 돌아보았다. 조금 거리가 있는 곳에 해성과 영우, 인규가 앉아 음악을 들으면서 안무 이야기를 시작한 게 보였다. 하진은 멤버들을 눈에 담다가 다시 정우를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