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포제-39화 (39/122)

#39

“아, 이제 씻고 연습해야겠다.”

“이번 곡 진짜 좋아요. 몇 번 들었는데 벌써 저 중독됐어요. 후렴구 계속 생각나고, 랩도 진짜 좋고, 빨리 안무 배워서 멋있게 춰보고 싶을 정도예요.”

“나도. 그동안 곡도 다 좋았지만, 아까 호스티지 전주 딱 나오고 도입 듣는데 아, 이거다 싶었어. 아, 하진이 너 허리 아팠다며. 애들이 그러던데.”

“아… 잠을 이상하게 자서 그랬던 것 같은데… 이제 진짜 괜찮아요. 걱정 안 하셔도 돼요.”

“그럼 다행이고. 조금이라도 아프면 바로 병원 가고.”

“네!”

인규의 걱정스러운 얼굴을 보며 일부러 더 씩씩하게 대답한 하진이 컵과 포크를 씻어 올려두었다. 그리고 물 한 병을 들고, 방으로 들어갔다.

바닥에 아무렇게나 놓았던 가방 안에서 가사지를 꺼낸 하진이 침대에 앉았다. 벌써 침대에 앉아 한쪽에만 이어폰을 꽂고 곡을 듣고 있는 정우가 보였다. 정우는 늘 저렇게 저와 같이 있을 때면, 한쪽에만 이어폰을 꽂았다. 자기 전 음악을 들을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별것 아닐 수도 있지만, 같이 지낸다는 것을 늘 인지하고, 상대를 배려하고 있는 것 같아 좋았다.

“…….”

아, 이렇게 좋아하면 안 되는데. 멍하니 정우를 바라보다가 정신을 차린 하진이 고개를 휘휘 저었다. 그리고 저 역시 한쪽에만 이어폰을 꽂았다. 종일 들어 익숙해진 멜로디가 흘러나왔다. 하진은 아직 전부 숙지되지 않은 가사를 멜로디에 맞춰 작게 불러 보았다.

“같이할래요?”

같은 구간이 잘 안 풀려 반복하는 하진을 보며 정우가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하진은 살짝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어 정우를 바라보았다. 가까운 거리에 있는 정우의 얼굴과 마주하는 순간 불쑥 정돈되지 않은 감정들이 온 세포들을 뒤흔들기 시작했다.

“아… 같이해도 돼? 나야 좋지. 어, 그럼… 정우야. 후렴구에 사라진 긴 어둠 눈부신 밝은 빛 이 부분에서 어둠 다음에 눈부신 들어갈 때 살짝 밀리는 느낌 나지 않아? 가이드라 그런가? 아니면 그 부분을 일부러 그렇게 밀고 들어가는 건가?”

“아, 거기 저도 여러 번 들어봤는데 일부러 그렇게 가는 것 같아요. 정박으로도 불러 보고, 그렇게 밀면서도 불러 봤는데 정박보다 좀 끌고 가는 게 더 그 부분이 살더라구요.”

“그럼 그 부분 생각하면서 연습해야겠다. 이 후렴구 네가 부르면 진짜 멋있을 것 같아. 네 목소리랑 잘 어울려.”

“난 형이 더 잘 어울릴 것 같은데.”

서로를 향한 칭찬에 하진은 푸스스 웃었다. 꼭 정말 아무 문제도 없던 예전으로 돌아간 것 같았다. 서로를 칭찬하고, 좋은 부분은 더 크게 박수를 쳐주면서 반짝반짝 빛나게 해주던 그 순간으로.

정말 나만 달라지면 되는 거구나. 나만 너를 그렇게 사랑하지 않으면 되는 거였구나. 하진은 가사지에 주의해야 할 부분을 펜으로 체크하며 입술을 꾹꾹 깨물었다. 마음이 편한데, 자꾸만 무너졌다. 그냥 이렇게 다 무너져 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내일 아침이 되면, 그냥 예전으로 돌아가 있기를, 그래서 정우와 편히 마주 웃을 수 있기를.

그렇게 하진은 무너져 뽀얗게 흩날리는 가루들을 온몸으로 맞으며 가만히 머물렀다. 그럼에도 두근대는 마음을 애써 외면하며.

***

안무는 댄스 트레이너가 예고를 한 것처럼 정말 빈틈이 전혀 없는 구성이었다. 시선을 사로잡는 도입부터 포인트가 되는 후렴까지 전부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집중해야만 맞출 수 있는 안무였다.

소위 춤 구멍이라고 불리는 멤버들이 각 그룹마다 하나둘 있기 마련이지만, 아포제에는 그런 멤버가 없었다. 연습생 평가를 볼 때마다 다들 상위 등급을 받은 멤버들이기에 기본적으로 실력을 가지고 있었고, 각자 개성도 뚜렷해 인기가 많았다. 한 치도 흐트러지지 않는 칼 군무를 맞추면서도 개성이 살아 있어 아포제 멤버들의 개인 직캠이 올라올 때면 늘 동영상 사이트 상위에 랭크되고는 했다.

그런 멤버들에게도 이번 안무는 꽤 난이도가 높은 편이었다. 숨 한 번만 잘못 쉬어도 대형이 흐트러질 정도로 복잡하고, 이동 시간이 타이트했다.

“와, 형! 이걸 어떻게 해요? 안무 연습을 왜 이렇게 빨리 시작하나 했더니… 와…….”

몇 번 하지도 않았는데 땀범벅이 된 멤버들을 본 트레이너가 웃으며 멤버들 앞으로 섰다.

“그래도 내 예상보다 훨씬 빨리 익혔어. 에이스만 모인 팀이 다르기는 하네. 매번 느껴.”

“2절 후렴 가기 전에 자꾸 스텝이 꼬여요. 다섯 번 중에 세 번을 인규 형이랑 부딪쳤어요.”

영우의 말에 트레이너가 영우와 인규 둘만 세워놓고 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발을 어떻게 움직이고 두는 게 편한지 설명을 하는 트레이너를 본 하진이 그대로 상체를 숙여 숨을 깊게 내쉬었다. 힘들고 어려운 건 사실이지만, 그래도 다른 생각을 일절 할 수 없을 만큼 어려워서 좋았다.

벌써 며칠째 이어지는 안무 연습 동안에는 한 번도 정우에 대해 다른 생각을 한 적이 없었다. 이렇게 지내다 보면 나아지지 않을까. 그냥 자연스럽게 원래대로 돌아갈 수 있지 않을까.

“자자, 30분만 쉬고 다시 들어갈게. 쉬고 있어.”

설명을 마친 트레이너가 정우의 등을 다정히 두드려주고는 연습실을 나갔다. 하진은 그제야 멤버들과 바닥으로 주저앉았다. 그리고 제 허벅지 위에 머리를 대며 눕는 정우를 내려 보았다. 정우는 눈을 감은 채 가쁜 숨을 내쉬고 있었다.

“땀 봐.”

하진은 입고 있던 티셔츠 소매를 길게 늘여 정우의 이마에 난 땀을 살짝 닦아주었다. 정우가 그 느낌에 눈을 떠 하진을 바라보았다.

“더러워요.”

“…뭐가 더러워. 괜찮아.”

정우의 얼굴 위로 드리워진 제 얼굴의 그림자가 신경 쓰였다. 꼭 정우의 얼굴을 뒤덮고 있는 기분이었다. 이대로 고개를 내려 키스하고 싶다는 힘없는 충동도 두근거림과 뒤섞여 흔들렸다. 괜찮아진 것 같지만, 여전히 정우를 보면 가슴이 뛰고 이렇게 불쑥 손끝이 저릿할 정도로 설레었다.

“형 가운데 앉아서 시작하는 도입 그거 방송 나가면 진짜 난리 날 것 같아요.”

“도입 파트가 제일 어려워. 맞춰 들어가는 거 아직도 긴장되고 떨려.”

“한 번도 틀린 적 없잖아요. 괜히 도입 요정이에요?”

하진은 정우의 말에 으으 소리를 내며 고개를 저었다. 팬들이 좋게 봐주고, 또 별명을 붙여주는 건 참 좋은데, 멤버들에게 이런 말을 들으면 진짜 간지럽고 부끄러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하지 마, 진짜 못 듣겠어.”

“왜요. 강하진 치면 연관 검색어에 나와요. 도입 요정, 강다정, 강스윗…….”

“아아, 싫어. 안 들을래. 하지 마, 하지 마. 안 들린다, 하나도 안 들린다.”

손을 들어 귀에 댄 하진이 아아 소리를 내며 손으로 귀를 덮으며 두드렸다. 팬들이 쓴 걸 볼 때는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정우가 아무렇지도 않게 소리 내어 말하니 진짜 어디 연습실 구석에 가서 숨고 싶을 정도로 창피했다.

귀를 덮은 채 손바닥으로 두드리던 하진은 정우의 웃는 소리가 들리는 것에 감고 있던 눈을 떠 아래를 내려 보았다. 정말 정우가 웃고 있었다. 이렇게 웃는 정우를 보는 건 정말 오랜만이었다. 해성과 영우의 말이 재밌어 웃은 적은 있지만, 저와의 일이 있고 난 뒤, 정우는 이렇게 크게 웃은 적이 없었다. 하진은 멍하니 양 손바닥으로 귀를 덮은 채 웃는 정우를 바라보았다. 웃는 그 얼굴을 보니 어쩐지 눈물이 날 것 같았다.

“형 얼굴 빨개졌어요.”

“그러니까 그만 놀려…….”

“못 살아. 형 지금 귀 막고 말하는 거 알아요?”

웃으며 손을 올린 정우가 귀를 막고 있는 하진의 팔을 잡아 내려주었다. 그제야 먹먹하게 들리던 소리가 정확히 들려왔다.

“놀리는 게 아니라 있는 사실을 그대로 말한 거예요. 보여 줄까요?”

정우는 주머니에 달린 지퍼를 내리고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 강하진을 검색해 보여 주었다. 하진은 연관 검색어에 있는 말들을 몇 개 보다가 다시 고개를 저으며 눈을 꽉 감았다. 그런 하진을 본 정우가 다시 웃으며 손을 들어 올렸다.

“귀엽다니까.”

뺨으로 따뜻하고 부드러운 느낌이 살짝 스쳤다. 하진은 감고 있던 눈을 떠 제 뺨 근처에 있다가 내려가는 정우의 손을 바라보았다. 조금 전 뺨에 정우의 손이 닿았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확 조여들었다.

“거기 좋은 시간 보내는 분들 여기 보자.”

해성의 목소리에 하진이 고개를 돌렸다. 그대로 찰칵 소리와 함께 사진이 찍혔다.

“유미 누나가 그랬잖아. 우리 일상 화보집 낸다고. 너희도 부지런히 찍어라. 이거 잘 나왔다. 형, 우리도 같이 연출해서 찍어요.”

인규가 허벅지를 두드리자 해성이 벌러덩 드러누워 인규에게 휴대폰을 넘겨주었다. 그대로 폰을 받아 위로 번쩍 들어 올린 인규가 제 얼굴과 다리에 누운 해성의 얼굴이 잘 나오도록 사진을 찍었다. 그런 멤버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하진이 휴대폰을 보고 있는 정우를 내려 보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정우야, 우리도… 같이 사진 찍을래?”

정우의 얼굴을 가리고 있던 휴대폰이 옆으로 밀려났다. 하진은 살짝 긴장했다. 너무 사심이 담겼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고, 아직도 마음 정리를 못 한 게 티가 났을지도 몰랐다. 그걸 정우도 느꼈을 것 같아 입술이 바싹 마르고, 손끝이 저릿해졌다.

“아니… 사진 막 스무 장씩은 찍어서 달라고 하셨잖아. 셀카도 좋고, 그냥 자연스럽게 우리 찍으면 된다고 해서… 우리 둘이 같이 찍은 적도 없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니면 내가 너 찍어줄게.”

같이 사진 찍자는 말을 수습하기라도 하려는 것처럼 횡설수설하는 하진을 보던 정우가 한 번에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하진의 옆으로 와 몸을 가까이 붙였다. 팔이 맞닿고, 어깨가 문질리는 것에 하진은 쉬던 숨도 멈춘 채 움직이지 못했다.

“그게 뭐 어려운 일이라고 그렇게 변명을 해요.”

“…미안해.”

“그러고 보니까 형이랑 이렇게 같이 찍은 적이 없네. 음방 대기실에서 누가 찍어준 적은 있는 것 같은데.”

“…….”

정우는 그대로 하진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그리고 휴대폰을 앞으로 가져갔다. 기다란 화면 안에 하진과 정우의 얼굴이 담겼다.

“형 얼굴 잘리잖아요. 얼굴 이쪽으로 더 가까이. 더.”

“…으응.”

살짝 길게 늘어진 대답이 작게 흘렀다. 하진은 잔뜩 부풀어 오른 마음을 누른 채 정우의 얼굴 가까이로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찍을게요. 하나, 둘.”

셔터 소리가 짧게 울리는 순간 살짝 두 뺨이 닿았다가 떨어졌다. 정우와 닿았던 얼굴이 떨어지며, 귀 끝이 살짝 문질렸다. 하진은 큰 눈을 괜히 빠르게 깜빡이며 연습실 조명을 바라보았다. 사진을 확인한 정우가 다시 하진의 어깨에 팔을 두르며 확 가까이 당겼다.

“웃어요, 형.”

“아… 응. 셀카 어려워서…….”

“다시 찍을게요. 하나, 둘.”

하진은 휴대폰 화면 속 미소 짓는 정우를 보며 입술을 가볍게 끌어올렸다. 살짝이라고 말하기에는 너무나 또렷한 감각이 전해질 만큼 뺨이 마주 닿았다가 떨어졌다. 정우가 쓰는 향수 향과 어우러진 체향이 갑자기 확 느껴졌다. 하진은 이상하지 않을 만큼만 서둘러 몸을 떼었다.

“형 진짜 잘 나왔어요.”

정우는 하진의 얼굴을 보았지만, 하진은 화면 속 정우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잘 나왔다.”

다정하고 따뜻한 미소가 정우와 잘 어울렸다. 그 사진 위를 만지면 딱딱한 화면이 아니라 정우의 부드러운 웃음을 만질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하진은 한참이나 사진 속 정우의 눈을 맞추다가 고개를 들어 눈앞에 있는 진짜 정우를 바라보았다.

“나도 보내주라.”

“네.”

“나는 폰 가방에 있는데……. 가져올게.”

하진은 그대로 일어나 연습실 구석으로 달려가 쪼그려 앉았다. 백팩 앞에서 휴대폰을 꺼내자 ‘우리 정우’에게서 사진이 왔다는 알림이 보였다. 하진은 쪼그려 앉은 채 얼른 톡을 확인했다. 조금 전 같이 찍은 사진 두 장이 와 있었다.

웃고 있는 정우와 긴장한 것처럼 보이는 저. 그리고 같이 웃고 있는 두 사람의 사진. 그럴 일은 없지만, 혹시나 사라질까 싶어 얼른 사진을 저장했다. 한 번 하고도 안 된 것 같아 몇 번이고 저장 버튼을 눌렀다. 잘 저장이 됐나 갤러리에 가보니 같은 사진이 다섯 장도 넘게 저장되어 있었다. 그것을 보면서도 하진은 지우지 않고, 가장 마지막에 저장된 사진을 눌러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하진의 시선은 너무나도 당연히 정우에게만 향해 있었다.

“…….”

하진은 아주 소중한 것을 다루듯 조심스럽게 화면 속 정우의 얼굴을 살짝 손끝으로 만져 보았다. 그래도 여전히 웃고 있는 그 얼굴이 좋아서 하진은 작게 정우의 웃음을 따라 미소 지었다.

내가 좋아하는 잘생긴 얼굴, 따뜻한 눈빛. 또 너무나 좋아하는 다정한 미소.

내가 사랑하는 너.

“…….”

결국 또다시 원점이었다. 하진은 다시 돌아온 그 선에 멈춘 채 저의 흘러나온 마음을 더 깊은 곳으로 밀어 넣어 숨겼다. 그 어떤 경우에도 정우가 볼 수 없도록, 그렇게 꽁꽁.

그렇게 하진은 또다시 정우를 속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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