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
다른 멤버들에게는 달콤했을지 모르지만, 하진에게는 내내 무거웠던 휴가가 끝났다. 수없이 많은 날을 연습하고, 단 며칠을 쉬었을 뿐인데 몸이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해성과 영우는 허리가 옆으로 잘 안 돌아간다며 죽는소리를 했고, 인규는 그런 둘을 보며 웃었다. 하진은 정우에게서 조금 떨어진 곳에 서서 거울을 보며 몸을 풀었다.
“너희 정말 제대로 놀았구나. 며칠 만에 이렇게 몸이 굳었어? 내일부터 바로 안무 연습 들어갈 건데 몸 다 풀어놔. 이번 안무 장난 아니라는 것만 알아두고.”
“늘 장난 아니었어요. 진짜 숨 쉴 틈이 없었는데.”
“영우야. 그건 장난이었고, 이번이 역대급이야. 너희 정규 앨범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지? 미니 아무리 잘 돼도 정규 삐끗하면 그거 살려내기 힘들어. 있는 팬들이 많으니까 그 팬들로만 쭉 가도 계속 성공할 것 같지? 팬 붙는 것도 쉽지만, 떨어지는 건 더 쉬워. 이번에 빡세게 들어갈 거니까 오늘 몸 다 원래대로 풀어놓고, 준비 다 해놔.”
피곤해서 조금 늘어진 채로 서 있던 멤버들의 몸에 힘이 확 들어갔다. 한 번씩 이렇게 냉정한 현실에 대해 트레이너가 말을 할 때마다 긴장이 밀려들었다. 이 바닥에서 일단은 주목을 받는 것에 성공했지만, 많은 주목을 단시간에 받은 만큼 대중을 만족시키지 못하면 또 그대로 추락하기 쉽다는 것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너희 망하라고 이러는 거 아니고, 잘되라고 내가 하는 말이야. 빨리 높이 올라간 만큼, 내려오는 건 더 빠르다는 거 잊지 말고, 우리 잘하자. 지금까지도 정말 잘했는데, 이번에는 더 잘하자. 아포제.”
멤버들의 어깨를 한 번씩 두드리며 격려한 트레이너가 연습실을 나섰다. 허리를 숙여 나가는 트레이너에게 인사한 멤버들이 한숨을 쉬며 거울 앞에 섰다. 이런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어깨가 무거워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자자, 연습 시작하자. 안무 나온 곡들 순서대로 쭉 한 번 돌고, 랜덤으로 돌자. 몸 그냥 푸는 것보다 대형 맞추고, 안무 맞추는 게 더 낫더라.”
“네, 형.”
인규의 말에 다들 빠르게 움직여 자신의 자리로 가 섰다. 인규가 리모컨을 눌러 음악을 틀자 데뷔 앨범의 타이틀곡 전주가 흘러나왔다. 그 소리에 몸이 먼저 반응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언제 늘어져 있었냐는 듯,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안무를 맞추기 시작했다.
여섯 곡을 한 번도 쉬지 않고 연달아 추자 땀이 나고 숨이 가빠지기 시작했다. 마지막 곡의 후렴구가 끝나고 노래가 끝나는 순간 멋지게 엔딩포즈를 취한 멤버들이 그대로 주저앉았다. 연습을 실전보다 더 타이트하고, 하드하게 한다지만, 며칠 쉰 뒤라 그런지 더 힘들게 느껴졌다.
하진은 다른 멤버들처럼 확 주저앉지 못하고 천천히 몸을 내려 앉았다. 좀 나아지기는 했지만, 아직 확 주저앉을 만큼 괜찮아지지는 않았기 때문이었다.
“형, 물 마셔요.”
하진의 옆으로 와서 앉은 정우가 물병을 내밀었다. 하진은 그 물병을 받아 고개를 뒤로 젖혔다. 목이 다 아플 만큼 힘들었는데 그래도 물을 몇 모금 마시니 좀 살 것 같았다.
“아, 힘들다.”
“…….”
정우가 그대로 하진의 허벅지에 머리를 대고 길게 누웠다. 그동안 연습을 하며 흔히 있었던 일이라 놀랄 일은 아니지만, 상황이 달라진 지금은 충분히 의식할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하진은 눈을 감은 채 숨을 고르는 정우를 물끄러미 내려 보았다.
“여섯 곡은 원래 괜찮게 하는데 우리 안무가 진짜 쉬는 데가 없어서 힘들어요. 진짜 내일 안무 궁금하다. 이것보다 더 역대급이라니.”
바닥에 대자로 뻗은 영우가 천장에 달린 조명을 바라보다가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남은 물을 들어 벌컥벌컥 단숨에 비웠다. 그런 영우의 다리에 머리를 대고 누워 있던 해성이 뭔가 생각난 듯 몸을 세워 앉았다.
“하진이 너는 허리 괜찮아?”
“아, 네. 괜찮아요. 이제 안 아파요.”
“그거 온열팩 좋지? 나도 춤추다가 가끔 삐끗하면 며칠 붙이고 다니는데 꽤 좋더라고.”
“네, 형 덕분에 빨리 좋아졌어요. 고마워요, 형.”
“우리 사이에 뭘 또 그렇게까지.”
떨어져 앉은 하진을 향해 입술을 내밀어 뽀뽀하는 시늉을 한 해성이 씩 웃었다. 하진이 그런 해성을 보며 활짝 웃었다.
“거짓말.”
그때 정우의 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진은 웃음을 거둔 얼굴로 정우를 내려 보았다. 다른 형들에게는 들리지 않을 작은 목소리였지만, 하진에게 닿기에는 충분한 소리였다. 하진은 제 다리에 누운 채 빤히 저를 올려보는 정우와 눈을 맞췄다.
“안 하고 풀어버렸던데. 형 침대 구석에 처박힌 거 봤어요.”
“…….”
“내 말이 그렇게 화났어요?”
“…….”
“아니면 뭐 다른 거라도 했어요? 방해돼서 푼 건가.”
“…무슨 소리야.”
“형 흥분했었잖아요.”
정우가 흔들렸다. 아니, 제 눈동자가 흔들리고 있는 것 같았다.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물끄러미 올려보던 정우가 다시 입술을 열었다.
“표정 풀어요. 다른 형들이 보잖아요.”
그대로 몸을 한 번에 일으킨 정우가 빈 물병을 집어 들고 연습실을 나섰다. 그런 정우를 바라보던 하진이 그제야 작게 숨을 뱉었다. 도대체 지금 제가 무슨 말을 들은 건가 싶었다.
“…….”
얼마 후,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들어온 정우가 웃으며 하진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몸이 딱딱하게 굳어 손끝 하나도 마음대로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래도 하진은 웃어야 했다. 멤버들이 보고 있기 때문이었다.
“자, 한 번 더 돌자. 그래도 아까보다 몸이 풀린 기분 나지 않아? 오후에는 회의 들어가야 되니까 할 수 있을 때 열심히 하자. 자자, 일어나.”
그제야 정우가 하진의 어깨에 둘렀던 팔을 내렸다. 하진은 자리로 가서 서는 정우를 거울 안으로 바라보았다. 마주친 시선을 먼저 피한 것은 정우였다. 하진은 정우의 온도 차에 적응할 수가 없었다. 처음이라 그런 걸까? 내내 따뜻한 정우에게 익숙해져 있어서?
“자, 시작할게.”
다시 데뷔곡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하진은 정우에게서 시선을 거둔 채 익숙한 스텝을 밟으며 몸을 움직였다. 빨리 숨이 턱 끝까지 차올라 저의 이 모든 생각들을 엉망으로 만들기를 바라며.
***
회의는 첫 번째 정규앨범의 컨셉을 주제로 해서 진행이 되었다. 총 세 개의 타이틀곡 후보가 회의실 안에 계속 울려 퍼졌고, 미리 촬영을 해둔 안무 영상과도 같이 재생이 되었다.
세 곡 모두 중독성이 강하고, 파워풀한 곡이었다. 다만 파워풀하다는 공통적인 주제에서 조금씩 그 분위기가 달랐다. 첫 번째 곡은 파워풀하면서도 섹시한 느낌이 강했고, 두 번째 곡은 그야말로 강하고 또 강한 힘이 돋보이는 곡이었다. 그리고 마지막 곡은 힘과 부드러움이 적절히 섞여 꼭 무대를 보는 사람을 쥐락펴락하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자, 충분히 본 것 같은데 멤버들 의견 한 명씩 들어볼까? 자, 오늘은 막내부터 들어보자.”
회의실 안에 모인 사람들의 시선이 정우에게 향했다. 하진은 앞에 놓인 종이컵을 만지작대며 정우를 조심스럽게 바라보았다.
“전 첫 번째 곡이 제일 마음에 들어요. 중독성이 제일 강하기도 하고, 안무 도입 부분도 참신하고, 후렴구에서 멤버들이 다 모였다가 흩어지는 그 안무가 정말 마음에 들어요. 마지막으로 가면서 다섯 명이 일렬로 서서 차례대로 모션 취하는 그 부분도 각자 개성을 잘 살릴 수 있을 것 같아요. 무엇보다도 첫 번째 곡이 제일 대중성이 있는 것 같아서 전 첫 번째 곡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정우의 말에 멤버들과 아포제 정규 앨범을 준비하는 팀원들이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모두의 시선에 하진에게 닿았다.
“저도 첫 번째 곡이 좋았어요. 다른 곡도 다 좋은데, 여러 번 듣고 지금 계속 머릿속에 떠오르는 곡이 첫 번째 곡이라 대중들도 이 곡을 들으면 저절로 떠올릴 수밖에 없을 것 같아요. 그리고 정우가 말했던 것처럼 안무에 여러 포인트가 있는데, 그 포인트를 저희가 잘 살리기만 한다면… 보는 사람들을 압도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뒤에 나온 의견들도 거의 비슷했다. 해성과 인규도 첫 번째 곡이 가장 마음에 든다는 의견을 말했고, 세 번째 곡이 가장 좋다고 말한 영우도 첫 번째 곡이랑 사실 우열을 가리기가 힘들다는 의견이었다.
“그럼 멤버들 의견은 첫 번째 곡으로 정해진 거네. 첫 번째 곡 제목은 호스티지야. 뜻은 알지? 인질이란 뜻이고, 어때. 제목 듣고 나니까 안무가 좀 더 와 닿아?”
“아, 그럼 중간에 모였다가 흩어지는 다섯 명이 인질로 잡혔다가 탈출하는 그런 의미네요?”
“맞아. 정확해. 첫 정규는 절대 망하면 안 되고 무조건 잘 돼야 하기 때문에 대중성 강한 곡을 하는 게 좋다고 생각해. 그래서 우리 아포제 정규 팀원들 의견도 호스티지가 압도적으로 많았어. 이렇게 멤버들이랑 의견이 일치하니 좋네요. 그런데 알겠지만 가이드로 듣는 거랑 불러서 듣는 거랑 또 느낌이 달라. 한 번 불러보는 게 좋을 것 같아. 사흘 뒤에, 그러니까 금요일에 가녹음 한 번 해볼게요.”
그렇게 네 시간이나 이어진 첫 번째 회의가 끝났다. 멤버들은 단체 톡으로 전송된 호스티지 가이드 버전과 MR을 받아 각자 휴대폰에 저장했다. 그리고 가사를 받아 자세히 읽어 보았다.
“가사 대박이네. 느낌 오는데? 랩 쪼개진 거 봐. 진짜 여기서 그냥 확 몰아치겠다.”
“안무 진짜 좋아요. 이렇게 확 모였다가 팔 풀어지면서 흩어지는 거 진짜 멋있어요.”
“그치. 도입도 진짜 좋지 않아? 한 명만 의자에 앉아 있고, 그 주변에 넷이 앉아 있다가 일어나는 거. 딱 봐도 강하진 아니면 차정우 센터 각인데 원샷 잡히면 진짜 볼만하겠다. 아, 벌써 막 미치겠어.”
하진과 영우 쪽으로 다가온 정우가 그대로 하진의 허리를 뒤에서 끌어안고 어깨 위에 턱을 올렸다. 수도 없이 본 장면이라 영우는 이상하게 생각하지도 않고 자연스럽게 정우를 바라보았다.
“우리 둘 중에 한다 그러면 당연히 우리 형이 해야죠. 하진이 형 원샷 클로즈업 잡히면 그냥 무대 끝인데.”
“하긴. 우리 춤추는 거 하나도 안 잡고 그냥 하진이 얼굴만 클로즈업 얼빡으로 3분 20초 잡고 있어도 화제 1위, 시청률 1위. 카메라 감독님 포상 휴가 가실 듯.”
평소라면 그냥 웃고 끝낼 수 있는 농담이지만, 지금은 평소처럼 웃음이 잘 나오지 않았다. 하진은 자연스럽게 제 허리를 끌어안은 정우의 팔을 풀려고 애썼다. 하지만 정우는 쉽게 풀어주지 않았다. 늘 그랬던 것처럼 내내 그 자세로 영우와 이야기를 나누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