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포제-35화 (35/122)

#35

“아니, 그런데 정우는 왜 벌써 왔어? 아침에 온 거야?”

“아, 저 집에 안 갔어요. 부모님 어디 가셨거든요.”

“아, 그래? 집에 간 줄 알았는데. 그럼 둘이 있었겠네? 하진이 혼자 집 지킴이 하는 줄 알았는데.”

“네. 비 와서 나가지도 못하고 집에 있었어요.”

“아, 내 말이. 나도 집에 가다가 다 젖고, 내려서 젖고, 엄마도 젖고, 아빠도 젖고 난리도 아니었다니까. 뭔 비가 그렇게 많이 오냐. 그래도 너희 둘이 같이 있었다니까 다행이네. 너희는 둘만 있으면 그냥 행복하잖아. 서로 덕질하면서.”

팬들 사이에도 그렇고, 멤버들에게도 하진과 정우는 서로의 너무나도 열렬한 팬으로 알려져 있었다. 하진은 정우 덕질을 하려 아포제를 하고, 정우는 하진 덕질을 하려 아포제를 한다는 게 기정사실화가 되어 있을 정도였다. 나쁜 말도 아니기에 팬 미팅이나 팬 사인회 같은 곳에서 몇 번 그 말에 힘을 실어준 뒤로, 하진과 정우의 서로 덕질을 응원하는 팬들이 많아졌다.

“그래, 서로 덕질은 원 없이 했어? 너희는 둘이 있으면 뭐 하냐? 막 얼굴 빤히 바라보고 있어? 너무 잘생겼다, 아냐, 네가 더 잘생겼어. 형이 더 잘생겼거든요. 막 이래?”

해성의 말에 웃은 정우가 옆에 선 하진의 어깨에 팔을 두르며 끌어당겼다. 하진은 갑자기 닿아오는 정우의 팔에 잠시 숨을 멈추었다가 작게 내뱉었다. 어떤 표정, 어떤 말을 해야 할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말 안 해도 아니까요, 우리 형 잘생긴 거. 그냥 이러고 티비 보고, 라면 먹고 그랬어요. 하진이 형이 나랑 같은 공간에서 숨 쉬며 존재하는데 제가 뭘 더 바라겠어요.”

“강하진 좋다고 웃는다. 계 타셨어요.”

웃을 수밖에 없었다. 웃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다시는 손도 대지 않을 것처럼 굴던 정우가 아무렇지도 않게 평소에 하던 행동을 하고, 다정한 목소리를 내고 있는데 제가 어떤 말을 할 수 있겠는가. 그냥 웃으며 이 상황이 지나가기를 바랄 수밖에 없었다. 둘이 뭘 했는지 묻는 해성에게 단 하나도 솔직하게 말할 수 있는 게 없기 때문이었다.

뭘 말할 수 있을까. 정우를 좋아한다는 거? 그래서 먼저 정우를 건드려 결국 섹스까지 해버렸다는 거? 지금 형 앞에서 보이는 이 모습은 다 가짜라는 거?

“나 살쪘지. 집에 들어갔는데 진짜 상다리가 부러지게 먹을 게 있는 거야. 그래서 미친 듯 먹었지. 먹었는데 과일 네 종류에 떡, 빵, 식혜가 진짜 릴레이로 나와. 그래서 또 먹었지. 먹고 아, 진짜 배불러 죽겠다 하는데 저녁 먹으래. 진짜 한 2만 칼로리는 먹은 것 같은데. 경호 형이 들으면 진짜 기절하겠다.”

“어쩐지 택시에서 내리는데 누군지 모르겠더라.”

영우가 나오면서 장난스럽게 시비를 거는 것에 해성이 주먹을 꽉 쥐었다. 다가온 영우가 보자기를 내밀고 승자의 제스처를 취하자, 해성이 유치해 죽었다며 소파로 쓰러지듯 누워 몸을 푹 묻었다. 그런 해성을 보며 정우가 하진과 같이 옆으로 앉았다.

“조해성 죽었다. 가져다 버리자!”

축 늘어진 해성을 발로 툭툭 건드리며 웃은 영우가 그대로 하진의 옆에 앉았다. 네 명이 동시에 앉기에는 아무래도 좁아 하진의 몸이 옆으로 확 밀렸다. 평소라면 아무렇지도 않았겠지만, 지금은 상황이 조금 달랐다. 하진은 하체가 옆으로 확 밀리며 퍼지는 아픔에 숨을 탁 내뱉었다.

“아읏…….”

아픈 소리가 나자 영우와 늘어져 있던 해성 모두가 놀라 하진을 바라보았다. 하진은 얼른 자리에서 일어났다. 확 일어난 순간 허리와 다리 사이로 모두 고통이 퍼졌다. 하진은 애써 아무렇지도 않게 웃음을 지어 보였다.

“어제 잠을 잘못 잤는지 허리가 좀 아파서요.”

솔직하지 못한 이유가 입에서 툭 튀어나왔다. 제가 이렇게 잘 둘러댈 수 있는 사람이었는지 처음 알아버렸다. 하진은 저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정우를 바라보다가 다시 해성과 영우에게로 시선을 번갈아 옮겼다. 빤히 내막을 다 아는 사람 앞에서 거짓말을 한다는 그 자체가 너무나 고통이었다.

“조심해. 허리 아프면 춤출 때 힘들잖아. 디스크 될 수도 있어. 진짜 조심해.”

“네, 그 정도는 아니에요. 그냥 좀 쭈그리고 잤더니…….”

“그거 몸 살살 풀어줘야 되는데. 반신욕이라도 해 봐. 아니면 경호 형한테 톡 해줄까? 형이 잘 풀어주거든.”

“아, 그 정도는 진짜 아니에요. 계속 그러면 제가 경호 형한테 전화할게요.”

“그래, 그럼. 아, 나 그거 허리 찜질팩 붙이는 거 있는데 그거 붙이고 있어라.”

자리에서 얼른 일어난 해성이 방으로 들어갔다. 그냥 별거 아니라고 생각하면서 넘어가면 좋겠는데 그게 쉽지 않았다. 결국 하진은 해성이 들고 나온 손바닥만 한 온열팩을 바라보았다. 해성은 하진이 아니라 정우에게 그것을 넘겨주었다.

“뒤에 붙여야 돼서 혼자 붙이기 어려울 거야. 정우야, 네가 하진이 좀 붙여줘라. 이거 붙이고 자면 좀 나아.”

“그래, 점심 먹을 때 깨울게. 가서 붙이고 좀 쉬어.”

걱정스러운 얼굴로 바라보는 해성과 영우를 본 하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일어나 먼저 방으로 들어가는 정우를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되도록 해결이 될 때까지 마주칠 일은 만들고 싶지 않은데, 그게 쉽지 않았다.

“엎드려 봐요.”

“…내가 할게. 줘.”

“혼자 하기 힘들다고 그랬잖아요.”

“거울 보고 하면 돼.”

“엎드리라고.”

“…….”

“하잖아요.”

위압적인 목소리였다. 한 번에 말을 들으라는 듯, 짜증스럽게 들리기도 했다. 명령과도 같은 말에 입을 다물고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하진은 가만히 포장을 벗기는 정우를 보며 할 수 없이 제 침대 위로 올라가 벽 쪽을 보고 엎드렸다. 곧 정우가 옆으로 걸터앉는 느낌이 났다. 그 느낌 하나만으로도 숨소리도 내지 못할 만큼 긴장이 되어 견딜 수가 없었다.

“…….”

“…….”

아무 대화도 오고 가지 않았다. 밖에 형들이 있기는 하지만 이곳은 둘의 공간이었다. 가끔 멤버들이 깨우러 들어오거나 뭘 찾으러 자유롭게 드나들기는 해도 대부분 둘만 생활을 하는 곳이었다. 이곳에 둘이 있는 이상 더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연기를 할 필요가 없었다. 하진은 정우의 그림자가 진 벽을 바라보며 눈을 천천히 감았다가 떴다.

“…….”

허리를 덮고 있던 티셔츠가 위로 올라가는 느낌이 났다. 옷이 올라가며 드러난 피부 위가 조금 서늘하게 느껴졌다. 하진은 입술을 꾹 깨물었다. 곧 허리 위로 따뜻함이 내려앉았다. 그리고 그와 거의 동시에 정우의 두 손이 침대와 배 사이로 파고들었다.

하진은 입술을 더 꽉 깨물고 보이지 않게 시트를 움켜쥐었다. 온열팩이 움직이지 않도록 밴드를 당겨 배 위에서 잠그는 것 같았다. 그것을 알면서도 엎드린 몸 아래에 정우의 두 손이 들어왔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자꾸 숨이 가빠졌다.

“흐읏…….”

밴드의 끝을 확 당겨 조인 채 붙인 정우의 손이 빠져나가며 하진의 피부에 스친 순간, 꽉 다물린 입술 사이로 연약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하진은 서둘러 손을 들어 입을 틀어막았다. 하지만 이미 소리는 흘러나간 뒤였다.

“다른 형한테 해달라고 할 걸 그랬어요.”

“…….”

“그래도 형 이랬을까. 궁금하다. 다음에 기회 있으면 한 번 봐야겠어요.”

“…그게 무슨…….”

“아니 이상하잖아요. 내가 무슨 짓을 했다고 그렇게 숨도 못 쉬고 벌벌 떨어요. 형 진짜 발정 났어요?”

낮은 목소리가 엎드린 하진의 몸을 마구 찍어 눌렀다. 정우의 얼굴을 볼 수 없어 목소리는 더 크게 다가왔다. 태어나 처음 들어보는 말에 눈동자가 확 젖어 들었다. 마음이 다시 한번 바닥으로 확 처박혔다.

“…나가 줘. 쉬고 싶어.”

“그냥 가도 되겠어요? 내가 뭐 해줄 건 없고? 뭐 더 만져 줄까요?”

밑바닥보다 더 깊은 곳으로 마음이 떨어졌다. 마음속에 이렇게까지 깊은 낭떠러지가 있는 줄은 지금 처음 알았다. 하진은 흐르기 시작한 눈물을 애써 무시한 채 또렷하게 목소리를 냈다.

“…나가.”

“네.”

몸 위로 이불이 부드럽게 덮였다. 문이 열렸다가 작게 닫히는 소리까지 들린 후에야 하진은 하얗게 질리도록 깨물고 있던 입술을 놓아 주었다. 입술에서 퍼지던 아픔 뒤에 막혀 있던 감정들이 연약한 떨림과 함께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하진은 그대로 이불을 끌어 올려 머리끝까지 뒤집어썼다. 그리고 베개에 얼굴을 묻은 채 울었다. 마음도 아프고, 그런 말을 들은 게 화도 나는데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었다. 모두 다 저 때문이라 할 수 있는 말도, 행동도 없었다. 할 수 있는 일은 이렇게 몇 겹의 안에 숨어 소리를 죽인 채 우는 것뿐이었다.

「형 진짜 발정 났어요?」

하진의 몸이 점점 더 동그랗게 말렸다. 몸의 아픔 같은 것은 이제 아무렇지도 않았다. 정우에게 들은 말이 자꾸만 머리와 마음 안을 난도질 치며 돌아다녔다. 하진은 배 위에 맞물려 붙은 밴드를 풀어냈다. 그리고 헐렁해진 팩을 떼어내 아무렇게나 밀어버렸다. 그리고 또다시 베개 위로 얼굴을 깊게 파묻었다. 이 모든 게 꿈이면 얼마나 좋을까. 제가 정우를 좋아하는 것도 꿈, 정우가 알아버린 것도 꿈. 닿은 것도 또 정우에게 들은 모든 것도 그냥 차라리 다 꿈이기를 간절히 바라고 또 바랐다.

깨고 싶어. 제발 깨게 해 줘. 꿈이 아닌데 이럴 리가 없어. 숨이 확 막히면서 얼굴로 열이 올랐다. 하진은 죽어야 꿈에서 깰 것 같아 조금 더 깊게 얼굴을 파묻었다. 숨이 막혀 정말 더는 못 견디겠는 그 순간, 더는 버티지 못하고 파묻은 고개를 들어 올렸다.

“하아… 흐으…….”

쉬지 못하고 머물러 있던 숨들이 엉망으로 터져 나왔다. 하진은 헝클어진 머리칼과 젖은 눈, 그리고 숨과 침으로 젖은 입술을 하고 멍하니 앉아 고개를 돌렸다.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었다. 저는 여전히 꿈에서 깨지 못한 것이었다. 아니, 처음부터 꿈같은 건 없었다.

“…….”

벽 너머 거실에서 해성과 정우가 이야기를 나누는 소리가 멍하니 들려왔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누구인지는 구분할 수 있을 정도의 작고 흐릿한 소리였다. 하진은 눕는 것을 포기하고 그대로 벽에 등을 기대고 앉았다. 벽의 서늘한 기운이 등을 타고 몸으로 흘렀다. 그렇게 하진은 요란히 찾아온 고립 속, 벽 너머로 들리는 정우의 짙푸른 목소리를 들으며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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