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포제-33화 (33/122)

#33

“귀찮은데 안 먹으면 안 되나.”

“안 되거든. 나 혼자 먹으라고?”

“같이 먹어요. 형 또 혼자 먹는 건 싫으니까.”

“착하다, 우리 막내.”

평소와 다름이 없는 말과 행동이었지만, 그 사이사이 묘한 어색함과 침묵이 따라붙었다. 하진은 그 어색함을 견딜 수가 없어 계속 무언가 말을 하고, 행동을 했다. 정우의 팔을 잡아끌고, 방에서 나온 뒤에도 얼른 부엌으로 가서 서랍을 열고, 냉장고를 열어 먹을 것들을 찾았다.

“라면도 있고, 우동도 있고, 아주머니가 해주고 가신 반찬도 많은데… 밥해서 먹을까? 아니면 그냥 귀찮으니까 라면 먹을까?”

하진이 라면 두 봉지를 양손에 들고 돌아보는 것에 정우가 다가가 하진의 손에 들린 라면을 받아들었다.

“내가 할게.”

“형이 이런 걸 왜 해요. 내가 있는데.”

“나이 어리다고 무조건 다 해야 하는 것도 아니잖아.”

“어려서 하는 게 아니라 내가 하고 싶어서 하는 거예요.”

“그래도…….”

“거기 앉아 있어요. 금방 하니까.”

하진은 정우의 말대로 식탁 의자에 앉아 능숙하게 라면을 끓이는 정우를 바라보았다. 같이 숙소 생활을 하면서 이렇게 둘이 라면을 끓여 먹었던 적이 꽤 많았다. 과하게 연습을 하고 와서 너무 배가 고파 몰래 끓여 먹다가 들킨 적도 있고, 너무 졸려서 라면을 먹다가 둘 다 잠이 든 적도 있었다. 하진은 머릿속으로 스치는 지난 시간들을 떠올리며 작게 웃었다. 곧 맛있는 냄새가 식탁까지 퍼졌다.

라면이 이렇게까지 맛있어도 되는 걸까. 한 젓가락씩 먹을 때마다 진짜 맛있다는 말이 저절로 나올 정도로 맛있었다. 하진은 금세 한 그릇을 비우고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정우가 그런 하진을 보며 고개를 기울였다.

“형 그렇게 잘 먹는 거 오랜만에 보네요.”

“진짜 태어나서 내가 먹은 라면 중에 오늘이 제일 맛있었어. 나 엄청 배고팠나 봐. 그리고 정우 네가 라면을 잘 끓이기도 하고. 형들도 네가 해준 게 제일 맛있다고 했잖아.”

“별로 특별할 건 없는데. 뭐 형이 잘 먹는 거 보니까 좋네요.”

하진은 다 먹은 제 그릇들을 싱크대로 옮겼다. 그리고 설거지를 하기 위해 팔을 걷는 순간 정우에게 잡혀 다시 뒤로 밀려났다.

“설거지는 내가 할게. 몇 개 안 되는데.”

“몇 개 안 되니까 제가 할게요.”

“…미안하잖아.”

정우는 미안한 얼굴의 하진을 보며 냉장고를 열었다. 그리고 안에 있는 초코 우유를 하나 꺼내 빨대를 꽂아 하진의 입에 물려주었다. 얼결에 빨대를 입에 물고 한 모금 빨아들인 하진이 설거지를 하기 시작하는 정우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정말 아무 일도 없던 아주 평범한 어느 날처럼 느껴졌다.

“…….”

평소와 다른 게 하나도 없었다. 정우는 늘 저에게 이런 일들을 시키지 않았다. 아니, 자진해서 하려고 해도 하게 놔두지 않았다. 청소기를 돌리는 것도, 침대 시트를 갈고, 설거지를 하는 것도 늘 하지 못하게 막았다. 그런 정우를 보며 미안해서 옆을 맴돌면, 지금처럼 냉장고에 있는 이런 우유나 주스 같은 것을 꺼내 입에 물려주고는 했다.

하진은 평소와 다를 게 없는 정우의 모습에 어쩐지 마음이 조금 놓였다. 아까의 섹스가 저에게만 좋았던 것은 아니라는 생각도 들었다. 정말 싫었다면, 별로였다면 이렇게 평소처럼 대해주지 않을 것 같기 때문이었다.

“비 이제 안 오겠지? 이렇게 많이 오는 거 처음 봤어.”

“이제 그친 것 같던데요. 아까 택시에서 내려서 진짜 바로 문까지만 뛰어온 건데 그 몇 초 사이에 확 젖더라구요.”

설거지할 게 별로 없어 금세 마치고 거실로 온 정우가 소파에 앉았다. 창가에 서서 비가 그친 바깥을 보던 하진이 그런 정우에게 다가와 살짝 틈을 둔 채 옆으로 앉았다. 정우와 단둘이 있다고 해서 어색할 일이 전혀 없었는데, 지금은 정말 미치도록 어색했다.

정우의 행동이 평소와 다르지 않아 안도가 되면서도, 어쩐지 조금은 가라앉은 분위기에 긴장이 되어 두근두근거렸다.

친형제도 이렇게 지내지는 못 할 거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잘 지낸 사이였다. 그런데 그 사이에서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을 저질러 버렸다. 발화점인 줄 알면서도 멈추지 못했던 것은 저였다. 정우가 밀어내지 않아 좋았고, 결국 끝까지 해버렸다. 어색함이 없을 수가 없는 상황이라는 말이었다.

이 어색함을 어떻게 없애야 할까. 하진은 의미 없이 TV 화면에 눈을 맞추며 생각하고 또 생각했지만, 뭘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이어지는 침묵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어색함은 깊어질 것임을 알기에 무슨 말이라도 하고 싶은데, 딱히 꺼낼 말이 없었다. 하진은 입에만 대고 더는 마시지 못하던 초코 우유를 슬쩍 소파 앞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형들은 내일 온다고 했나?”

“네. 점심 전에 온다고 했던 것 같아요.”

“아……. 그렇구나.”

대화를 이어 가야 하는데 길게 이어 갈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하진은 다른 말을 꺼내려고 입을 열었다가 닫고, 또 열었다가 닫기를 반복했다. 옆에서 그런 노력을 하는 하진을 흘끗 본 정우가 다시 화면으로 시선을 무심히 돌리며 먼저 입을 열었다.

“형. 그냥 어색하면 어색하게 있어요. 그게 더 어울리는 상황 같은데.”

“…어?”

갑작스럽게 파고드는 정우의 낮고 예민한 목소리에 하진은 놀라 그 얼굴을 바라보았다. 정우의 눈동자는 여전히 정면에 있는 TV 화면에 닿아 있었다.

“난 처음이라 잘 몰라서 묻는 건데, 형은 알 것 같으니까 물어볼게요.”

“…뭔데?”

무심히 화면에 닿아 있던 정우의 고개가 느릿하게 돌아 하진의 앞에 멈추었다. 평소 늘 보던 다정한 눈빛이 아니었다. 하진은 심장이 아래로 쑥 꺼지는 느낌에 손가락을 오므렸다.

“원래 남자랑 섹스하고 나면 분위기가 이래요? 여자랑 해도 이런가. 해본 적이 없어서요.”

“…….”

“아, 서로 좋아하는 사이가 아니라 그런가.”

“…….”

“형은 어떻게 생각해요?”

보호할 시간이 없었다. 갑자기 다가온 뾰족한 말들이 하진의 마음을 여기저기 마구 찌르기 시작했다. 막으려고 손을 들 수도 없고, 하지 말라는 말이 나오지도 않았다. 하진은 높낮이가 별로 없는 톤으로 아무 일도 아닌 것처럼 말하는 정우를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바라보았다.

“또 상처 받은 거야?”

“…정우야.”

“형 설마 혼자 나랑 연애해요? 그거 한 번 잤다고?”

“…….”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하나 더 늘었다는 말을 잘 알아들은 줄 알았는데, 아닌 모양이네.”

“…….”

“내 앞에서까지 연기하면서 형 감정 숨길 필요 없다고 한 그 말을 오해한 건가.”

차라리 화가 난 목소리거나, 경멸하는 시선 같은 것이 묻어 있다면 더 나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런 게 하나도 없었다. 감정이 묻어 있지 않은 무감각한 눈동자와 어이가 없다는 듯 낮은 목소리가 더 아프게 닿아 왔다.

“내 앞에서 감정 숨기지 않아도 된다는 그 말이 내가 이제 형 마음 다 알았으니까, 마음 놓고 나 좋아해도 된다는 말이 아니잖아요.”

“…….”

“내 앞에서는 아닌 척, 정리하는 척 굴어놓고 뒤에서는 다른 생각하지 말고, 그냥 대놓고 하라는 거예요. 형 이제 편하게 나 좋아하라는 배려가 아니라 이중적으로 굴지 말라고 좋게 말한 거잖아요. 그래도 내가 아직은 형을 인간적으로 좋아해서.”

정우의 말이 매듭을 지은 후에야 하진은 겨우 숨을 내쉴 수 있었다. 입술을 벌려 호흡한 뒤에야 멍했던 머리 안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너한테 피해 주고 싶지 않아서 그랬어. 그래서 숨겼어. 피해를 주려고 그런 게 아니었어.”

하진의 말에 정우가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아예 고개를 돌려 하진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TV 화면에 닿아 있던 무심한 시선보다 더 짙고, 짜증이 묻은 눈이었다.

“만약에 영우 형이 형을 좋아한다고 생각해 봐요. 말은 안 하는데 형 눈에 다 보이는 거지. 형은 평소대로 먹을 거 챙겨주고, 좋아서 같이 있고, 기대고, 손대고 하는데 그럴 때마다 성적인 터치로 느끼는 건지 어쩔 줄을 모르는 거예요. 그게 다 보이는 거야. 형은 안 불편하겠어요?”

“…….”

“그래서 형이 영우 형을 좋아하게 되면 상관이 없어요. 해피엔딩이지. 그런데 형은 남자를 안 좋아해. 생각도 해 본 적이 없어요. 저 사람이 날 그런 눈으로 볼 가능성이 있다는 걸 미리 알았으면, 그렇게 친해지지도 않았을 거야.”

예를 들고 있지만, 그것은 결국 다 저에게 하는 말이었다. 제가 너무 감상에 빠져 있었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너무나도 직접적으로 닿아 와 아프기는 하지만, 정우의 말은 그 어느 하나 틀린 부분이 없었다.

“피해주려고 한 행동이 아닌데 결과가 이래요. 형이랑 나 잤다구요. 섹스했다고. 팀 활동 전처럼 할 수 있겠어요? 아무렇지도 않게 대하고, 평소에 하던 행동 그대로 할 수 있어요? 하려고 해도 머리 안에 이미 다른 생각이 있는데, 똑같이 한다고 해서 그게 전과 완전히 똑같은 게 되는 건 아니잖아요.”

“…….”

“형이랑 할 수 있는 게 하나 더 늘었을 뿐이라는 말, 그거 그냥 형 달래려고 한 말 아니에요. 진심이고, 이미 한 가지 더 했잖아요.”

“…….”

“난 형이랑 노래를 할 수도 있고, 고민을 들어 줄 수도 있고, 추울 때 안아 줄 수도 있고, 위로해 줄 수도 있어요. 그리고 이제 섹스할 수도 있게 된 것뿐이에요.”

잔잔하지 않은 말들이 잔잔하게 흘렀다. 하진은 정우의 눈을 더 이상 바라보지 못했다. 정우를 좋아하게 된 저의 마음이 정우에게 피해를 주고, 불편을 준다는 것을 정확하게 알아버렸다. 마주하고 싶지 않았던 사실을 마주한 순간은 언제나 괴로운 법이었다.

“형이랑 할 수 있는 그 하나에 연애, 사랑 그런 건 없어요. 형이 진짜 죽어도 못 참겠을 때, 한 번씩 자 줄 수 있다는 말이에요. 연애해 준다는 게 아니라 자 준다구요. 난 좋게 말해도 형이 잘 알아들을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 봐요.”

“…….”

“잘 지내려는 노력은 일할 때만 해요. 둘이 있는데 굳이 전처럼 지낼 필요 없잖아요, 이제. 전이랑 상황이 달라졌는데.”

“…….”

짜증이 묻은 목소리로 말한 정우가 그대로 시선을 거두며 확 일어났다. 하진은 그런 정우를 따라 고개를 올릴 힘도 없어 그저 멍하니 있을 뿐이었다. 그런 하진의 머리 위로 정우의 목소리가 다시 쏟아졌다.

“안 그래도 힘들 텐데 나랑 있을 때는 편하게 있어요, 형. 앞으로 편하지 않을 시간이 더 많을 텐데 미리 힘 뺄 필요 없잖아.”

정우의 뒷모습이 멀어졌다. 하진은 굳이 보려고 하지 않아도 눈에 보이는 길고 마른 정우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거침없이 멀어지고, 당연하게 사라졌다. 눈을 몇 번이나 감았다가 떠도 달라지는 건 없었다. 하진은 홀로 거실에 남은 채 마른 입술을 달싹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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