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
제가 정우를 밀어낼 수 있었을까. 하지 말라고 말할 수 있었을까. 아니, 하지 못했을 것이었다. 정우가 그곳에서 제 옷을 벗기고 몸을 만졌어도 매달렸을 것이었다. 하진은 실소를 터뜨렸다. 한심하고 어이가 없기는 한데, 어쩔 수가 없었다. 좋아하니까. 그렇게라도 닿고 싶으니까.
“…….”
어둠 속 마주 닿던 시선, 확 다가와 뒤섞이던 숨, 혀를 머금던 높은 체온과 제 몸을 만지던 손길. 먼저 다가간 것은 저였지만, 분명 뒤섞였었다.
꿈이 아니라는 것을 어쩌면 알고 있었는지도 몰랐다. 하지만 제 혀를 문지르고, 머금어 주는 정우가 현실일 리 없다고 생각했다. 말도 안 되지 않는가. 저의 불순한 그 행동들을 받아주고, 마주 끌어안는 정우를 어떻게 꿈이 아니라고 생각할 수가 있을까. 하진은 저에게 닿던 정우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체온이 높아지는 기분에 고개를 저었다.
그때 비밀번호 누르는 소리가 들렸다. 하진은 조금 놀란 얼굴로 현관을 바라보았다. 누가 온 걸까. 집에 간 멤버들이 점심때가 조금 지난 시간에 벌써 숙소에 올 리가 없었다. 세 명의 형들은 모두 자고 내일이나 모레 온다고 했고, 정우 역시 그럴 가능성이 컸다. 아니, 자고 오지는 않는다고 해도 벌써 올 리가 없었다. 매니저 형이 잠시 들른 건가 싶어 하진은 열리는 문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안으로 들어오는 정우를 바라보았다.
“…어?”
정우는 조금 젖어 있었다. 하진이 얼른 일어나 현관으로 나갔다. 흠뻑 젖은 것은 아니지만, 분명 비를 맞은 것처럼 모자와 입은 코트가 젖어 있었다. 하진은 얼른 욕실로 들어가 마른 수건을 가지고 나와 정우의 얼굴에 묻은 물기와 옷에 묻은 물기를 닦아주었다.
“집에 간 거 아니었어?”
“저 집에 간다고 안 했는데.”
“영우 형이 너도 간다고… 그랬는데.”
“그래요? 부모님 여행 가셔서 가 봤자 아무도 없어요.”
“…그럼 어디 갔다가 온 거야?”
“회사예요. 그때 연습 같이하던 백훈이 알죠.”
“어… 알지.”
“다른 데로 갈 모양인데, 뭐 조언 좀 해달라고 해서요.”
“아… 그랬구나.”
당연히 정우도 집에 갔을 거라고 생각했기에 조금은 당황스러웠다. 혼자인 건 아무렇지도 않지만, 이렇게 된 상황에 정우와 단둘이 숙소에 있어야 하는 게 무겁게 느껴졌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기에 하진은 살짝 젖은 수건을 들고 한쪽으로 비켜섰다. 정우가 신발을 벗고 안으로 들어와 쓰고 있던 모자를 벗었다. 그리고 살짝 젖은 머리칼을 아무렇게나 헝클였다.
“다들 갔어요?”
“…응.”
“불편하겠네, 우리 형.”
“…어?”
“나랑 단둘이 있으니까. 나 들어오는데 세상 무너진 것 같은 얼굴 했잖아요.”
“내가? 아니야. 놀라서, 정말 놀라서 그런 거야. 너 집에 간 줄 알았거든.”
“편하게 생각해요. 좋잖아. 아무렇지 않은 척 안 해도 되고. 그냥 편히 있어요. 형이 건드리지만 않으면, 아무 일도 없어요.”
농담인 것 같기도 하고, 또 건드리지 말라는 경고 같기도 해서 하진은 아무 대답도 할 수가 없었다.
“비 많이 오네요. 밖에 나가면 진짜 장난 아니에요.”
“…우산은?”
“아, 우산. 카페에 두고 왔어요. 택시 타고 숙소 거의 다 와서 알았어요. 다시 갈 수도 없고.”
하진은 카페에 우산을 두고 왔다는 정우의 말에 작게 웃었다. 숙소에 거의 다 올 때까지 두고 온 것도 알지 못했다는 게 귀여웠다.
“점심은 맛있는 거 먹었어?”
“그냥 카페에서 샌드위치 하나 먹었어요. 이백훈 관리 중이라고 해서.”
“배고프겠다. 뭐 해줄까?”
얼른 부엌으로 가 냉장고 안을 확인하고 먹을 것들이 있는 정리대 안도 확인한 하진이 방으로 가 반쯤 열린 문을 열었다.
“추웠을 텐데 뭐 따뜻한 거라도…… 아…. 미안.”
정우가 옷을 갈아입고 있었다. 젖은 티셔츠를 벗고 상체에 아무것도 걸치지 않고 선 정우를 본 하진이 놀라 뒤로 한 걸음을 물러섰다. 옷 갈아입는 것을 처음 보는 것도 아닌데 시선을 마주할 수가 없었다.
하진은 잡고 있는 문손잡이를 슬쩍 당겨 제가 연 문을 다시 반쯤 닫았다. 문을 닫는 하진을 본 정우가 그대로 몸을 돌려세워 손잡이를 확 잡아당겼다. 아직 손잡이를 잡고 있던 하진의 몸이 갑자기 열리는 문과 함께 안으로 기울어졌다. 하진은 정우의 앞에 가깝게 선 채 고개를 들었다. 미안하다고 할 일이 아니었는데 미안하다는 말이 저절로 튀어나와 상황이 조금 이상해진 것 같았다.
“미안하다고 할 게 아닌데… 아니, 내가 너무 갑자기 왔나 해서…….”
“미안하다고 한 걸 또 미안하다고 사과라도 하게요?”
“그런 건 아니고…. 어… 뭐 먹을래?”
“옷 찾아 입는 동안 형이 거기 그대로 서 있으면요.”
정우는 하진에게 주었던 시선을 느릿하게 다시 옮겼다. 그리고 서랍을 열어 옷을 뒤적였다. 하진은 여전히 문손잡이를 잡은 채 정우를 바라보았다. 먹든 말든 알아서 하라고, 그냥 한마디를 하고 나가면 그만인데 말도 할 수가 없고, 움직일 수도 없었다.
“…….”
벌서는 것처럼 손잡이만 쥔 채 서 있던 하진의 시선이 정우의 벌어진 어깨에 닿았다. 막힘없이 옆으로 확 벌어지다가 직각으로 뚝 떨어지는 정우의 어깨는 같은 남자가 봐도 정말 부럽고 멋있었다. 하진은 저도 모르게 손을 들어 정우의 어깨뼈를 살짝 만져보았다.
“…….”
“…….”
갑자기 어깨에 손길이 닿는 것에 놀란 정우가 고개를 돌렸다. 하진은 정우와 다시 눈이 마주친 뒤에야 지금 제가 무슨 짓을 했는지 알아차렸다. 아직도 정우의 어깨 위에 놓인 손을 본 하진이 놀라서 얼른 손을 거두었다.
“아, 아니… 너 어깨선이 너무 예뻐서. 어떻게 그렇게 딱 떨어지지. 그러니까 셔츠 입어도 예쁘고, 뭘 입어도 잘 어울리고…….”
“그래서 더 만지고 싶어요?”
“어? 아, 아니 그런 게 아니라…….”
하진은 횡설수설하며 문손잡이를 꽉 쥐었다가 놓는 것을 반복했다. 아니라고 말은 하지만 자꾸 숨이 가빠졌다. 다시는 정우와 그런 식으로 닿는 일이 없어야 한다는 것을 아는데, 또 닿고 싶었다. 하진은 고개를 저었다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입술만 꾹 깨물었다.
“형이 원하는 거 내가 해준다고 했잖아요. 그냥 한 말 아니에요.”
“…….”
“나랑 자고 싶으면, 자고 싶다고 말을 해요. 부탁하면 들어준다니까.”
정우는 일부러 노골적으로 말을 했다. 이렇게까지 수치스럽게 말을 하면, 하진의 자존심이 상할 것 같기 때문이었다. 미안하지만, 이렇게 말을 해서라도 하진의 그 감정을 누르고 싶었다. 저와 하진의 관계를 위해, 또 팀을 위해. 정우는 정말 자주기라도 할 것처럼 하진을 바라보았다.
“…….”
그런 정우의 시선에 하진은 문손잡이만 꽉 쥔 채 어쩔 줄을 몰랐다. 아니라고 하면 되는데, 그냥 그렇게 돌아서면 되는데 왜 이러고 있는 걸까. 하진은 멍하니 고개를 들어 정우를 바라보았다. 등 뒤에서 들리던 뉴스 앵커 목소리가 점점 흐릿해졌다.
“……너랑… 해보고 싶어…….”
“잘 안 들려요.”
입술 사이만 간질일 만큼 작은 목소리였다. 아니, 목소리라고 할 수도 없을 만큼 작았다. 하진은 다시 입술을 달싹였다.
“…하고…… 싶어.”
조금 전보다 소리가 더 나기는 했지만, 여전히 아주 작은 소리였다. 굳게 닫힌 창밖에서 내리는 거센 빗소리보다도 작아 전부 묻혀버렸다. 정우는 그런 하진을 바라보다가 다시 열린 서랍 쪽으로 몸을 돌렸다.
“말하지도 못할 거면, 건드리지도 말았어야죠.”
“…….”
정우는 안에 있는 티셔츠를 하나 꺼내 들었다. 그리고 입으려고 펼친 순간 하진이 정우의 팔을 잡아당겼다. 정우는 순순히 몸을 돌려주었다. 하진이 저를 향해 돌아서는 정우의 얼굴을 양손으로 감싸 쥐었다. 그리고 그대로 고개를 들어 먼저 입술을 부딪쳤다.
창밖에서 빛이 번쩍였다. 하진은 정우의 얼굴을 감싸 쥐었던 손을 펼치며 그대로 목을 끌어안았다. 닿고 싶어 미치겠는데 사실 닿는 방법을 잘 알지 못했다. 어디라도 닿고 싶어 돌 것 같다는 생각 외에는 아무것도 들지 않았다. 정우가 그런 하진을 느릿하게 떼어냈다. 하진은 그 힘에 밀려 떨어지며 고개를 저었다.
“…싫어.”
떨어지기 싫어. 나 밀어내지 마. 제발. 애원에 가까운 소리가 젖은 입술 위로 달라붙었다.
“말해요. 나랑 자고 싶다고. 그럼 해준다니까.”
하진은 정우의 목소리만으로도 헐떡였다. 방법이 없었다. 당장 어떻게라도 되고 싶었다. 애써 누르고, 미친 짓이었다고 돌려놨던 것들이 터져 나왔다. 누른다고 제대로 눌린 적도 없고, 미친 짓이라고 생각해도 전부 그때뿐이었다.
정우를 어떻게 언제부터 좋아하게 됐는지 잘 모르는 것처럼 정우를 더 이상 좋아하지 않는 방법도 전혀 알지 못했다. 지금 알고 있는 것은 정우와 자고 싶다는 것, 그것 하나뿐이었다. 조금 전까지 저를 붙들고 있던 창피함도 모두 사라져버렸다.
“…너랑 하고 싶어. 자고 싶어. 키스도… 하고 싶어. 네가 만져줬으면 좋겠어.”
“부탁이 많기는 한데, 일관성은 있네요.”
정우는 그대로 들고 있던 티셔츠를 아무렇게나 뒤로 던졌다. 그리고 고개를 하진의 얼굴 가까이 내렸다. 불이 켜진 거실은 밝고, 불이 켜지지 않은 방 안은 어두웠다. 거실의 빛이 희미하게 새어 들어오는 그 경계에서 정우는 어스름한 빛이 묻은 하진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입 벌려 봐요.”
하진은 빛이 반만 묻은 정우의 얼굴을 올려보았다. 그리고 홀린 듯 다물려 있던 입을 벌렸다.
“혀 내밀어야지.”
잊고 있던 수치심이 머리끝에서부터 온몸을 적시며 흘러내렸지만, 멈출 수가 없었다. 하진은 벌어진 입술 사이로 혀끝을 살짝 내밀었다. 숨고 싶을 만큼 창피해서인지, 이 혀에 닿을 정우가 기대되어서인지 턱이 다 벌벌 떨렸다.
“왜 이렇게 떨어요. 형이 좋아서 하는 거면서. 아, 너무 좋아서?”
입술만 움직여 작게 웃은 정우가 그대로 고개를 내려 입술 사이로 내밀어진 하진의 혀끝을 핥았다. 지극히 충동적인 움직임이었다. 혀끝이 문질린 그 순간 하진은 어깨를 움츠렸다. 살짝, 아주 살짝 문질렸을 뿐인데 바닥으로 주저앉을 것처럼 힘이 쭉 빠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