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
“감기 걸려요.”
그때 반쯤 열려 있던 창이 닫혔다. 귓가로 세게 닿아오던 빗소리가 차단되었다. 하진은 놀라 옆을 바라보았다. 정우가 다용도실 그 문가에 기댄 채 하진을 보고 있었다. 저도 작은 키는 아니지만, 거의 190cm에 육박하는 정우의 키와 넓은 어깨가 오늘따라 위협적으로 느껴졌다. 정우가 비켜 주지 않는 이상 절대 이곳을 나갈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좀 춥긴 하다. 비까지 와서… 막 뼛속까지 차가워지는 것 같아.”
“급하게 옷을 꺼내니까 그런 반팔을 꺼내죠.”
“어? 아……. 후드 입어야지.”
정우의 말이 다 맞았다. 빨리 아무거나 들고 씻으러 가기 위해 꺼낸 옷이 하필이면 이 얇은 반팔이었다. 평소 숙소가 따뜻해서 반팔만 입고 잘 돌아다니기는 하지만, 그래도 요즘 날씨가 이 반팔만 입고 다용도실에 나와 한참을 있고 할 정도는 아니었다. 1월의 맹렬한 추위는 가셨다지만, 어쩐지 그때보다 더 추운 것 같았다.
하진은 갑자기 확 파고드는 습한 추위에 몸을 움츠렸다. 그리고 안으로 들어가려고 걸음을 떼었다. 제가 움직이면 당연히 정우도 비켜 줄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정우는 여전히 그곳에 그대로 서 있었다.
“…….”
“추워요?”
“…응.”
춥다는 하진의 대답에 정우는 손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하진의 드러난 팔을 따라 손을 움직였다. 차가운 팔 위로 정우의 따뜻한 손이 닿아 올라갈 때마다 한 박자씩 늦게 감각이 피어올랐다. 하진은 헐렁한 반팔 소매 안으로 들어오는 정우의 손가락에 놀라 얼른 그 손을 잡아 저지했다. 정우가 그런 하진의 얼굴을 보며 손을 내렸다.
“정말 이제 안 숨기네.”
“…….”
“형 지금 얼굴이 어떤 줄 알아요?”
“…….”
“여기서 문 닫고 내가 해대도 좋아할 것 같은 그런 얼굴이에요. 물론 그럴 일은 없겠지만. 감기 걸리면 안 되잖아요.”
싱긋 웃은 정우가 뒤로 한 걸음을 물러섰다. 하진은 그런 정우의 얼굴을 바라보지도 못한 채 얼른 안으로 들어가 거실로 향했다. 티격태격 장난을 치다가 어느새 사이좋게 영화를 보고 있는 영우와 해성을 본 하진이 그대로 방에 들어가 침대에 벽을 보고 누웠다. 그리고 이불을 끌어 머리끝까지 뒤집어썼다. 여전히 거센 빗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정우가 들어오는 소리가 났다.
“…….”
그 기척에 잔뜩 힘이 들어간 몸이 움츠러들었다. 다행히 정우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소리로 파악하기에 정우가 침대에 누웠다는 것만 알 수 있었다. 하진은 한참이 지나도 정우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에 그제야 몸에 잔뜩 들어간 힘을 풀었다. 얼마나 긴장했는지 제대로 쉬지 못한 숨이 힘없이 흘러나왔다. 몸이 꼭 제 몸이 아닌 것처럼 늘어졌다. 하진은 그렇게 까무룩 잠이 들었다. 여전히 비가 오는 그 어둠 속에서.
***
입맛이 없어 점심도 저녁도 대충 시리얼과 과일 같은 것으로 대신했다. 쉬는 동안에는 먹고 싶은 것을 마음대로 먹어도 된다고 했지만, 딱히 떠오르는 것도 없고, 뭔가 먹고 싶은 마음 자체가 없었다. 하진은 눅눅해진 시리얼을 대충 입에 욱여넣고 일어나 싱크대에 남은 우유를 부어버렸다.
아직도 비가 내리고 있었다. 비가 오지 않아 걱정이라고 말하던 뉴스에서는 이제 종일 내리는 비가 가져올 피해를 걱정하고 있었다.
“또 자게?”
“네…. 비가 와서 그런지 계속 자고 또 자도 졸려요.”
“하긴 나도 아까 영화 보다가 두 시간을 잤어. 시작하는 거 보다가 잤는데, 깼더니 엔딩 크레디트 나오더라. 낮잠을 그렇게 잤는데 또 졸리긴 하다. 아, 피곤해. 얼른 들어가서 자. 아, 하진이 너는 내일 집에 안 가?”
“아… 네. 부모님 미국에 계신 할머니 댁 가셨거든요. 저 쉬는 날이랑 겹칠 줄 몰랐다고 서운해 하시는데 어쩔 수 없죠, 뭐.”
“오, 그럼 이틀이나 숙소 지킴이 하겠네. 우리 다 집에 가거든. 정우도 간다던데. 매니저 형들도 갈 거고.”
“이참에 숙소 제가 가져야겠어요.”
“나한테만 암호 보내. 조해성한테는 절대 알려 주지 마.”
영우와 농담을 나누며 웃은 하진이 얼른 들어가서 자라는 영우에게 손을 흔들었다. 고작 방에 가는 것뿐인데 손까지 흔들며 인사를 한 하진이 침대에 누웠다. 계속 잠이 왔다. 시리얼을 먹으면서도 또 양치질을 하는 동안에도 그냥 계속 눈이 감겼다.
아침에 정우와 그 일이 있고 나서 정말 내내 자고 또 잤다. 자다가 눈을 떠도 여전히 빗소리가 들리고, 방이 어두워 또다시 눈이 감겼다. 그렇게 잠이 잠을 부르고, 아무 꿈도 꾸지 않는 새하얗고 또 새카만 잠에 갇혀버렸다.
그래도 정우와 마주하며 긴장할 일이 없고, 또 죄책감을 느끼지 않아도 돼서 마음이 편했다. 결국은 계속 자며 현실을 부정하고 있는 것이었다. 하진은 부드러운 이불을 끌어 올리며 다시 눈을 감았다. 아침까지 한 번도 깨지 않고 잠들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마지막이었다. 하진은 그렇게 다시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
아침에 눈을 떴을 때에도 날은 어두웠다. 하진은 침대에 앉아 너무하다 싶을 정도로 내리는 비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리고 빈 정우의 침대로 시선을 옮겼다.
“…….”
닫힌 문 바깥에서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다들 집에 간다고 했던 게 떠올라 하진은 방을 나섰다. 예상했던 것처럼 숙소가 텅 비어 있었다. 하진은 냉장고에 붙은 메모를 떼었다.
<무슨 일 있으면 바로 연락하고 푹 쉬고 있어! 밥 잘 먹고! 안 깨우고 간다. -형1, 형2, 형3->
하진은 옆에 쓰인 형1, 형2, 형3이라는 글자를 보며 웃었다. 진짜 멤버들 하나는 잘 만났다. 아마 몇 번을 다시 태어나도 이렇게 좋은 사람들을 한 번에 여럿이나 만나기는 힘들 것이었다. 하진은 메모가 구겨지지 않게 식탁 위에 잘 놓고는, 컵을 들어 정수기에서 차가운 물 한 번과 따뜻한 물 두 번을 따랐다. 그리고 적당히 따뜻한 물을 한 잔 가득 마셨다. 혼자 남고 나니 이제야 마음이 조금 놓였다.
“…….”
일단 좀 씻고 싶었다. 씻어도 자꾸만 또 씻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하진은 방으로 들어가 갈아입을 편한 니트와 바지를 꺼내 들고 욕실로 향했다. 양치질을 하고 따뜻한 물로 몸을 씻어냈다. 익숙한 바디 워시 향과 샴푸 향이 샤워 부스 안으로 가득 차자 조금 어지러운 느낌이 들었다. 너무 내내 잠만 자서 그런 걸까. 하진은 눈을 깊게 감았다가 떴다. 그리고 빗줄기처럼 쏟아지는 물을 잠갔다.
옷을 갈아입고 나온 하진은 빨래를 통에 넣고 나와 냉장고 안에 있는 우유를 꺼내 시리얼에 부었다. 그냥 달달한 게 먹고 싶어서 초콜릿 시리얼만 잔뜩 담았다. 하진은 시리얼 볼을 들고 거실 소파에 앉아 TV를 틀었다. 뉴스 속보로 침수가 된 지역 소식이 나왔다. 하진은 창밖을 바라보았다. 아직도 하늘이 새카맸다.
“…….”
정우는 이렇게 비가 오는데 집에 잘 갔을까. 어제 다용도실에서 그렇게 마주한 뒤로 잠들 때까지 단 한마디도 나누지 않았다. 대충 점심을 먹고 저녁을 먹는 동안에도 엇갈려 이야기를 할 시간 자체가 없었다. 자면서 피해버린 건 너무 비겁했던 걸까. 하진은 하얀 우유가 초콜릿 우유 색으로 변하는 것을 보며 얼른 크게 한 숟가락을 떠 입에 넣었다. 달콤함이 입안으로 퍼지자 내내 물먹은 것처럼 축 늘어져 있던 기분이 조금은 나아졌다.
뭘 해야 할까 생각하며 음악 프로그램을 보기도 하고, 그냥 한 번도 본 적은 없지만, 이야기는 들어본 적 있던 드라마 재방송을 보기도 하던 하진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설거지를 하고, 청소기를 돌렸다. 하진은 몸을 움직이는 것을 좋아했다. 앉아서 공부를 해야 할 때는 했지만, 움직일 수 있는 시간에는 친구들과 배드민턴도 치고, 농구, 축구 뭐든 하며 몸을 푸는 것을 좋아했다. 워낙 몸이 가볍고 빨라서 하진은 그 어떤 스포츠도 기본 이상은 해냈다.
연습생이 된 뒤에는 매일 춤을 배우고, 연습하면서 몸을 움직였었다. 땀을 잔뜩 흘리고 나면 몸 안에 쌓인 스트레스 같은 것들이 전부 사라지는 것 같아 좋았다. 복잡한 일이 있거나 스트레스 받는 일이 있으면 늘 그렇게 몸을 움직였었다.
하진은 소매를 걷고, 숙소를 청소하기 시작했다. 비가 오기도 하고, 또 어느 정도 얼굴이 알려져 바깥을 자유롭게 돌아다니기가 어려워 나가기가 그랬다. 또 아직 신인이라 외출이 자유롭지 못하기도 했다. 혼자 나갔다가 의도치 않은 사고라도 생기면 팀에게 민폐를 끼치기 되는 일이라 허락도 없이 나갈 수가 없었다. 그래서 하진은 방 구석구석까지 청소기를 돌리고, 물걸레까지 만들어 밀대를 밀며 꼼꼼하게 닦았다.
“아, 깨끗하네.”
그렇게 한 시간이 넘도록 청소를 하고 나니 기분이 좀 나아졌다. 역시 가만히 앉아서 뭔가를 보고 하는 것보다는 이렇게 몸을 움직이는 게 더 체질에 맞았다.
“…….”
해야 할 일들을 다 하고 다시 소파에 앉으니 머리 안으로 정우가 떠올랐다. 떠올리려고 한 것도 아닌데 저절로 머리 안을 가득 채워버렸다. 하진은 쿠션 하나를 들어 끌어안은 채 억지로 TV 프로그램에 집중하려 애썼다. 하지만 눈만 닿아 있을 뿐, 전혀 그 내용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정말 이제 안 숨기네.」
저를 막아선 채 하던 그 말이 자꾸만 머리 안을 두드렸다. 다행이라는 듯, 아니 숨기지 말란다고 정말 숨기지 않는 저에게 질렸다는 듯 알 수 없는 의미의 말이라 더 그랬다.
「형 지금 얼굴이 어떤 줄 알아요?」
나긋한 목소리. 아니, 한심해하는 목소리. 아니… 낮고 무서운 목소리.
「여기서 문 닫고 내가 해대도 좋아할 것 같은 그런 얼굴이에요. 물론 그럴 일은 없겠지만. 감기 걸리면 안 되잖아요.」
가볍게 웃음을 지으며 뒤로 물러나던 그 순간의 정우를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그때의 표정, 가벼운 움직임, 입고 있던 옷과 지나칠 때 나던 향. 그 무엇 하나도 흐릿한 것이 없었다.
“…….”
정우가 비키지 않고, 정말 그 말처럼 굴었다면 저는 어떻게 했을까. 정우가 안으로 들어오고 문이 닫혔다면, 그 문을 열 수 있었을까. 그곳은 창이 있다뿐이지 높은 곳에 있어 얼굴 아래로는 잘 보이지 않는 밀실과도 같은 곳이었다. 한쪽은 창, 그리고 다른 한쪽은 완전히 그 어디도 뚫리지 않은 벽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