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포제-27화 (27/122)

#27

“흐읏…!”

너무 갑작스럽고 전혀 생각하지도 못한 일에 하진은 놀라 정우를 밀어냈다. 단단한 몸은 전혀 뒤로 밀리지 않았다. 정우는 제 어깨를 미는 하진의 손목을 확 잡아 내렸다. 그리고 그 입안으로 혀를 넣어 하진의 혀끝을 놀리듯 건드렸다. 금세 허물어지는 게 느껴졌다. 고분고분해진 느낌도 나쁘지 않았다.

정우는 그 혀끝을 한 번 더 빨아주며 입술을 떼어냈다. 하진이 급히 젖은 입술을 손으로 덮고 몸을 확 뒤로 떼어냈다. 도망친다고 고작 침대 헤드 쪽으로 몸을 붙이고 앉은 하진을 본 정우가 작게 숨을 뱉어냈다.

“왜 그렇게 봐요? 싫었어요? 좋아하는 것 같던데.”

“…무슨 짓이야.”

“무슨 짓? 그럼 나도 형한테 그렇게 물을게요. 무슨 짓이에요?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거예요. 나한테.”

“…….”

“그리고 내가 형한테 무슨 짓을 하게 만든 거예요?”

그 어떤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정우의 물음에 단 한마디도 소리 낼 수 없어 괴로웠다. 정우를 노려보던 눈에서 힘이 빠졌다. 젖은 입술을 누르고 있던 손도 힘없이 미끄러져 내렸다.

“이렇게 된 거 솔직하게 말해 봐요.”

“…….”

단호하고 무섭게 낮던 목소리가 다정하게 변해 있었다. 달래는 것 같기도 하고, 괜찮다고 어깨를 감싸 안아주는 것 같기도 했다.

“여기까지 와서 아니라고, 실수라고, 착각이라고 숨길 필요 없잖아요.”

“…….”

정우의 손이 다가왔다. 하진은 정우의 손이 제 머리칼을 부드럽게 쓸고, 뺨을 매만지는 것에 어깨를 움츠렸다. 어느새 가까이 다가와 앉은 정우의 얼굴 위로 부드러운 빛이 닿아 있었다.

빛을 받은 눈동자는 안이 다 보일 정도로 투명해져 있었다. 짙은 색의 눈동자, 그 안의 더 짙은 점이 저를 바라보고 있었다. 제가 아는 정우였다. 따뜻하고 다정한, 이렇게 빛과 아주 잘 어울리는 그런 사람. 하진은 정우의 부드러운 손길에 울먹였다.

“…그만하려고 했는데 잘 안 됐어.”

“그랬구나.”

“……좋아해서 미안해.”

“아니에요. 내가 미안하지. 형도 이렇게까지 되려고 시작한 건 아닐 거 아냐. 내가 너무 다그쳤나 봐요. 그냥 형 마음 편하게 해줄걸.”

“…이해해 주는 거야?”

“그럼요. 난 늘 형 이해해요. 내가 형을 이해 못 하면 여기 이렇게 같이 있지도 않지.”

“…고마워. 정말 고마워.”

“그런데 형.”

방 안으로 쏟아져 들어오던 빛이 일순 사라졌다. 정우의 얼굴 위를 뒤덮던 빛이 사라진 순간, 눈동자가 더욱 짙어졌다. 빛이 거두어진 조금은 선득한 방 안으로 정우의 낮은 목소리가 울렸다.

“이해와 사랑은 다르잖아요.”

“…….”

“이해한다고 해서 내가 형을 사랑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말이에요.”

방 안이 점점 어두워졌다. 오늘 날이 흐리다고 했던가. 짧게 정우의 얼굴을 비추었던 빛은 이제 다시 떠오르지 않았다. 어둑해진 주변에 다시 해가 져버린 것만 같았다.

“대신 가끔 이렇게 형이 원할 때마다 만져는 줄게요. 눈이 도니까 못 할 일도 아니던데요.”

“…….”

“내 앞에서는 이제 힘들게 연기할 필요 없어요. 나랑 자고 싶으면 자고 싶다고 말해도 돼요. 내가 형 밑바닥 다 보고 지금 거기 서서 말하는데, 이제 우리 숨길 필요 없잖아요.”

밑바닥. 하진은 태어나 가장 낮은 곳으로 떨어진 제 마음을 바라보았다. 바닥에 떨어져서도 정우의 말에 펄떡였다. 피가 전부 빠져나가도 정우의 말 한마디에 그것을 양분 삼아 끝까지 살아남고, 또 살아남을 것 같았다. 필요 없다고, 비참하게 만들지 말라고, 너한테 그런 걸 바라는 게 아니라고, 마지막 자존심이라도 세우고 싶은데 그럴 수가 없었다.

“…….”

그렇게 해서라도 정우랑 같이 있고 싶었으니까. 비참해도 좋았다. 훤히 드러난 제 밑바닥을 보아도 좋았다. 정우의 발자국이 남은 저의 밑바닥마저 좋았다. 등 뒤로 요란한 빗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정우의 시선이 하진의 얼굴을 떠나 창밖으로 잠시 닿았다. 하진은 정우의 눈동자에 비친 창을 바라보았다. 요란한 것은 빗줄기만이 아니었다. 그 빗줄기를 담은, 닮은 정우의 눈을 보면서 저도 요란히 뛰었다. 몸 자체가 하나의 큰 심장이 된 것 같았다.

“형이 대답만 하면 돼요.”

“…….”

“우리 둘이 할 수 있는 게 하나 더 늘어났을 뿐이야.”

“…….”

“그렇게 생각해요. 나도 마음 편하게 그렇게 생각할 테니까.”

하진은 제 눈을 바라보며 고개를 느릿하게 끄덕이는 정우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움직임을 따라 고개를 끄덕였다.

아포제를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다른 멤버들처럼 어릴 때부터 간절히 가수라는 직업을 원했던 것은 아니지만, 이제야 알게 된 제가 잘하는 것들, 하면서 행복한 일들을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만약 저 혼자만의 일이었다면 책임을 지겠지만, 이건 팀의 문제였다. 저 하나의 행동으로 팀이 완전히 망가질 수도 있다는 말이었다. 하진은 팀을 지키고 싶었다. 그리고 정우와도 멀어지고 싶지 않았다.

“…그래. 알았어.”

“똑똑해서 더 좋다니까. 우리 형.”

빛이 사라진 방 안에서 정우가 미소 지었다. 하진은 이 어둠과 어울리지 않는 부드러운 손길로 제 머리칼을 쓸어주는 정우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지금 저의 이 대답을 후회하게 될지도 몰랐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것은 아무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차라리 마음이 편했다. 적어도 정우 앞에서는 더 이상 연기하지 않아도 되어 좋았다.

“생각보다 비가 많이 오네요. 소나긴가.”

정우가 다시 하진을 넘어 창밖을 바라보았다. 귓가에 달라붙던 빗소리가 멀어지고 정우의 목소리가 그 자리를 대신했다. 그렇게 하진의 밑바닥으로 빗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

하진은 따뜻한 물로 아주 오랫동안 몸을 씻었다. 평소와 다르게 자위는 하지 않았다. 더 이상 그럴 필요가 없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정우의 손에 사정을 해서 그런지 전혀 욕구가 들지 않았다.

제 정액이 묻은 니트도 대충 그것이 보이지 않을 만큼 문질러 빨았다. 니트를 이렇게 빨면 안 될 것 같지만, 버리게 된다고 해도 이 흔적을 없앨 수밖에 없었다. 하진은 젖은 니트의 물기를 짜내고 수건에 감싸 욕실을 나섰다. 거실에 환히 불이 켜져 있었다. 커튼이 활짝 열린 밖은 여전히 어둡고 세찬 비가 내리고 있었다. 소나기가 아닌 모양이었다.

“우리 공연하고 뭐 하는 날에는 비가 온다고 했다가도 안 와서 팬들이 좋아하는데 그거 은근 신기하지 않아? 어제도 그렇게 날씨 좋더니, 오늘 이렇게 미친 듯이 비 오는 것 봐.”

“내일까지 온다던데? 아, 내일 집에 가기로 했는데.”

“너도? 나도. 내일 인규 형도 간다던데.”

1주년 팬 미팅을 마치고 주어진 일주일간의 휴가였다. 딱 일주일을 쉬고, 바로 정규 1집 준비를 시작하기로 했다. 미니앨범으로 충분히 인지도를 쌓고, 인기도 쌓았으니 이제 본격적으로 정규앨범을 발매하고 조금 긴 활동을 하기로 한 것이었다.

“하진아, 괜찮아?”

“네?”

갑자기 괜찮냐고 묻는 영우의 말에 하진은 놀라 영우를 바라보았다. 영우가 수건을 든 채 깜짝 놀라는 하진을 보며 웃었다.

“뭘 그렇게 놀라? 너 어제 소맥 마시다가 기절했잖아. 속 괜찮냐고.”

“아……. 네. 괜찮아요. 그리고 죄송해요. 저 술 잘 마실 줄 알았는데 아니었어요.”

“처음에는 다 그래. 그렇게 몇 번 마시다 보면 한 잔 더 늘고, 또 한 잔 더 늘고 하는 거지. 그러다가 또 바빠서 술 못 마시면 한 잔 줄고, 주량 또 한 잔 줄고 그러는 거야. 술에 답 없다. 그리고 술 많이 마셔서 좋을 게 뭐야. 너 정도면 딱 적당해. 천천히만 마시면 돼.”

“다음에는 조절 잘 할게요. 더 오래 놀고 싶었는데.”

“그래도 강하진 성덕 우리 막내 있어서 마음이 놓이더라. 그냥 한 팔로 척 잡더니 방으로 데려가 눕히던데.”

“…정우가요? 제가 혼자 간 게 아니구요? 저 혼자 간 줄 알았는데.”

혼자 간 줄 알았다는 하진을 보며 해성과 영우가 웃었다. 그리고 검지를 펴 느릿하게 저으며 완전히 그 상황을 부정했다.

“너 기절했다니까. 그거 뭐였지. 회였나. 정우가 하나 먹여줬더니 맛있다고 또 아- 하다가 먹고 자던데.”

“떡볶이 아니야?”

“그랬나?”

하진은 형들이 하는 이야기를 이해할 수, 아니 믿을 수 없었다. 제가 취해서 먹여 달라고 입을 벌리고 했다는 걸 어떻게 한 번에 믿을 수 있겠는가.

“에이… 놀리지 마세요.”

“와, 억울해. 진짜야. 당사자 부르면 알겠지. 정우야! 막내야! 잠깐 나와 주라! 형 억울해 죽어 가신다!”

해성이 크게 정우를 불렀다. 하진은 그냥 대충 그랬냐며 믿고 넘어갈 걸 그랬다고 후회했지만, 이미 정우가 거실로 나온 뒤였다. 하진은 젖은 니트를 감춘 수건이 축축하게 젖어가는 것을 느끼며 입술만 꾹꾹 깨물었다.

“정우야. 어제 하진이 취해서 너한테 막 뭐 먹여 달라고 했어, 안 했어. 입 벌리고 막 그랬잖아.”

“아, 네. 했죠. 그건 왜요?”

“하진이가 내 말을 믿지를 않잖아. 내 말이 맞지?”

하진은 저에게 몰린 시선에 어색하게 웃었다. 해성과 영우는 웃고 있는데 정우는 웃고 있지 않았다. 제대로 연기를 하라고 말하고 있는 것만 같아서 하진은 평소처럼 더 활짝 웃었다.

“와, 저 진짜 술 끊어야겠어요. 형들이랑 정우한테 진짜 못 볼 꼴 보였구나.”

“뭐 나름 귀여웠어. 역시 비주얼이 중요하기는 하더라. 이영우가 그랬으면 바로… 아오, 말을 말아야지. 상상했어. 아, 미친.”

오버하는 해성과 그런 해성을 발로 찬 영우가 장난으로 막 티격태격하는 것을 본 하진이 웃으며 뒤돌았다. 그리고 세탁실로 가 빨래가 모여 있는 곳에 젖은 수건과 니트를 내려놓았다. 다용도실 한 면을 가득 채운 창들이 전부 울고 있었다. 하진은 그 앞에 서서 창을 조금 열었다. 두꺼운 창에 막혀 있던 빗소리가 세차게 하진의 마음을 뒤흔들었다.

“…….”

겨우내 비가 하도 오지 않아서 걱정이라는 뉴스를 들은 적 있었다. 이렇게 한꺼번에 많이 쏟아지려고 그동안 내리지 않은 걸까. 꼭 내내 숨기다가 오늘 걷잡을 수 없이 터져버린 제 마음 같았다. 멈추려고 해도 멈출 수가 없고, 온통 어둡게 만들어 버리는 게 이 비와 똑같았다.

하진은 눅눅하고 비릿한 비 냄새를 맡았다. 숨을 크게 들이마셔도 시원하지가 않았다. 차갑고 무거운 공기였다. 그것은 몸속 여기저기에 달라붙어 마음을 더 무겁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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