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포제-23화 (23/122)

#23

“마셔 봐.”

하진은 얼른 그것을 들어 한 모금을 삼켰다. 정말 맥주보다는 덜 쓰고, 소주의 강한 알코올 향도 나지 않았다.

“어? 훨씬 맛있어요!”

“와… 강하진이 진짜였네. 소맥파구나. 조심해. 맛있다고 막 마시다가 훅 간다. 정우도 섞어서 한잔 마셔 볼래?”

정우의 빈 술잔 안으로 술이 찰랑이며 차올랐다. 하진은 술이 차오르는 것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치킨을 한 조각 입에 넣었다. 맛있는 것을 먹기는 하지만 이렇게 자극적이고 맛있는 것들은 자주 먹을 수 있는 게 아니라 그런지 정말 너무 맛있었다.

“맛있다……. 아, 너무 좋아요.”

“강하진 벌써 좀 혀 꼬인 것 같은데?”

“아니에요! 한 잔 마셨는데… 취할 리가 없잖아요.”

“그래그래, 아니야. 많이 먹어.”

하진은 홀짝 앞에 놓인 술을 다시 몇 모금 더 들이켰다. 그리고 정우를 바라보았다. 정우는 여전히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술을 마시고 있었다. 너무 노골적으로 본 걸까. 눈이 마주치는 것에 하진은 살짝 웃음 지었다.

“괜찮아?”

“네. 아무렇지도 않아요. 형은요? 취할 거 같으면 딱 멈춰요.”

“에이… 술을 취하려고 마시지. 취할 거 같을 때 딱 멈추면 그게 뭐야.”

“그래도 적당히 마시는 게 좋잖아요.”

“그래야지. 우리 막내! 형이 한 잔 줘도 돼?”

“그럼요.”

정우는 또다시 빈 잔을 내밀었다. 하진은 식탁 위에 놓인 술병을 들어 정우의 잔에 따라주었다. 뭘 얼마나 섞어야 하는지 잘 모르지만, 형들이 했던 것처럼 비슷하게 따라 섞어 주었다. 정우가 잔을 잘 흔들어 단숨에 한 잔을 비웠다. 회를 집어 먹던 영우와 해성이 감탄하며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와, 우리 막내 진짜 잘 마신다. 얘는 진짜 못 하는 게 뭐야. 얼굴 쩔지, 피지컬 죽이지, 노래 잘해, 음색 죽여, 춤 잘 추지, 머리 좋아, 거기에 술까지 잘해? 대박 아니야?”

“팬들이 정우보고 사기캐라잖아. 단점이 없다고.”

“진짜 인정. 존경한다, 우리 막내. 그런 의미로 형이 한 잔 줄게.”

또다시 정우의 잔이 채워졌다. 하진은 한 모금 정도 남은 술을 얼른 비우고, 잔을 내밀었다. 영우가 그런 하진의 잔을 가득 채워 주었다. 하진은 머리 안이 몽롱해지고, 눈앞이 살짝 흐릿해짐을 느꼈다. 뭐지, 이게. 취한 건가? 눈을 꾹 감았다가 뜬 하진은 열심히 앞에 놓인 감자튀김을 집어 먹었다.

“그것만 먹지 말고, 이것도 먹어요. 아-.”

너무 앞에 놓인 감자튀김만 먹고 있는 게 신경 쓰였는지, 정우가 떡볶이를 하나 들어 하진의 입 앞에 대주었다. 하진이 아- 입을 벌려 그것을 받아먹었다. 입술에 살짝 묻은 소스를 슥 핥은 하진이 오물오물 입술을 움직였다.

“맛있다! 또 먹을래. 아-.”

“하진이 취했다. 첫 번째 탈락자 발생. 근데 쟤는 뭐 취해도 귀엽냐. 입 벌린 거 봐. 정우야 빨리 줘라.”

정우는 얼른 떡을 하나 더 들어 손으로 받친 채, 하진의 입에 넣어 주었다. 또 잘 받아 오물오물 먹은 하진이 매운지 술잔을 들어 술을 비워냈다. 그리고 캬아, 소리를 내고 다시 잔을 내밀었다.

“형, 이제 그만 마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왜애… 다들 마시는데 왜 나만 벌써 그만 마시래…. 한 잔만 더. 우리 막내가 딱 한 잔만 주라. 응?”

“…그럼 이게 마지막 잔이에요.”

“응, 알았어.”

하진은 정우가 술병을 드는 것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분명 똑바로 바라보고 있는데 정우의 얼굴이 이리저리 흔들렸다. 눈을 꾹 감았다가 떠 봐도, 뜨고 난 직후에만 또렷하고 또다시 마구 흔들리기 시작했다. 나 벌써 취한 건가. 생각은 잘 되는데, 입만 열면 생각처럼 말이 잘 나오지 않았다. 하진은 기다란 감자튀김을 하나 더 입에 물었다.

“자, 우리 강하진 정신 있을 때 짠 하자.”

“네! 짠!”

하진은 잔을 들어 멤버들과 건배했다. 그리고 술을 마시는 멤버들을 보며 얼른 반 잔을 비워냈다. 시원하고 너무너무 맛있어서 자꾸 마시고 싶었다. 이래서 술들을 그렇게 마시는구나 싶기도 하고, 뭔가 붕 뜬 기분에 자꾸 웃음이 났다. 그동안은 웃고 싶지 않아도 그 상황을 피하기 위해서 웃고 지냈는데, 지금은 그냥 기분이 너무 좋았다.

“…눈앞이 막…….”

“형 괜찮아요?”

“정우야… 네가 막 세 명…….”

잔을 다 비우고 놓는 순간 하진은 눈앞이 핑핑 도는 것에 어쩔 줄을 몰랐다. 정우가 세 명이 있는 것 같았다. 그 와중에도 세 명이나 있으면 그래도 저 중의 한 명은 저를 좋아해 주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차정우들은 다 나를 형으로만 생각할까? 그 와중에도 이런 생각을 하는 제가 너무 어이없었다. 하진은 핑그르르 도는 정면을 바라보다가 그대로 잠들었다.

“천천히 마시지. 맛있다고 빨리 마실 때 알아봤다. 눕혀야겠다.”

“제가 형 눕혀주고 올게요.”

“그래, 그럼. 도와줄까?”

“아니에요.”

정우는 그대로 저에게 기대어 잠든 하진을 부축하며 일어났다. 한 팔로 단단히 몸을 감싸 안고, 저에게 기대게 한 뒤에 방으로 데려갔다. 그리고 하진을 천천히 침대에 눕혀 주었다. 그 몇 잔에 취해서는 세상모르고 잠든 하진을 본 정우가 작게 웃었다.

얼마 전 부드러운 색으로 염색한 머리칼이 감긴 눈 위로 흐트러져 있었다. 정우는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하진의 흐트러진 머리칼들을 잘 정리해 주었다. 그게 간지러운지 하진이 잠결에 눈을 찡긋거렸다. 숨과 함께 작게 웃음을 터뜨린 정우가 그런 하진의 몸 위로 이불을 덮어주었다.

원래도 귀여운 건 알고 있었지만, 취하니까 더 귀여웠다. 본인은 애교가 없다고 말하지만, 정우의 눈에 하진은 애교가 많았다. 애교를 부려야지, 하고 부리는 그런 애교가 아니라 사랑을 많이 받고 자라서 저절로 몸에 스며들어 있는 그런 것이었다.

사랑스러운 사람. 하진을 한마디로 표현하라고 하면 딱 떠오르는 말이었다. 팬들도 다정하고 사랑스러운 하진을 늘 그렇게 표현했다. 사랑이 뭉쳐 만들어진 사람, 사랑과 다정과 예쁨이 만나 생긴 사람.

「맛있다! 또 먹을래. 아-.」

한 번 먹여줬더니 또 달라고 입을 벌리던 하진이 떠올라 정우는 가만히 미소 지었다. 술의 힘 덕분이기는 하지만 간만에 정말 기분이 좋은 하진을 봐서 좋았다. 하진은 제가 정말 좋아하고, 오래 가고 싶은 사람이었다. 그 어떤 경우에도 멀어지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하진과의 관계가 흐트러지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잘 자요, 형. 좋은 꿈 꿔요.”

정우는 깊게 잠이 든 하진의 머리칼을 다시 한번 부드럽게 쓰다듬고 방을 나섰다. 잘 자고 있는 것을 봤는데도, 문을 닫기 전 한 번 다시 하진이 그 자리에 있나 돌아보게 되었다. 하진은 그런 사람이었다. 봐도 자꾸만 또 보게 되는 사람. 정우는 어둠 속 고른 숨소리가 울리는 것을 들으며 조용히 문을 닫았다.

***

정우와 다른 멤버들의 술자리는 조금 더 길게 이어졌다. 처음에는 괜찮은지 계속 묻던 멤버들도 정우가 아무렇지도 않게 잔을 비우는 것에 안심했다. 서로 편한 마음으로 술잔을 주고받으며 한참이나 수다를 떨었다. 새벽 4시가 넘어 식탁 위에 빈 술병이 가득하고, 먹다 지쳐 남은 음식들이 전부 식어버린 뒤에야 술자리는 끝이 났다.

술이 세다는 평을 받기는 했지만, 그래도 처음 술을 마시는 거고, 꽤 많이 마셨기에 취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정우는 머리 안이 붕 뜨고, 빙빙 도는 것을 느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감은 눈으로 양치질을 하고 방으로 들어갔다. 앉아 있을 때는 분명 괜찮다고 느꼈는데 일어나서 걸으니 전혀 괜찮지 않았다.

이게 취한 거구나. 정우는 방으로 들어가 어둠 속 벽 쪽으로 완전히 붙어 잠든 하진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대로 하진의 침대로 가 누웠다.

“아…… 머리야.”

하진이 옆에서 자고 있으니, 그 옆 침대가 저의 자리라고 판단했다. 그래서 하진이 누운 옆으로 누운 것이었다. 정우는 제대로 된 사고를 하지 못했다. 제가 하진의 침대에 누웠다는 것도 알지 못하고 그대로 눈을 감았다. 감은 눈 속 어둠이 빙글빙글 돌았다. 술을 마시면 이런 거구나. 그 생각이 끝나기도 전에 잠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

자꾸만 벽으로 붙던 하진은 다리까지 흘러내린 이불에 추워 몸을 웅크렸다. 반쯤 잠이 깬 채 손을 아래로 내려 이불 끄트머리를 잡은 하진이 힘없이 허리까지 끌어올렸다. 그리고 반대로 돌아누웠다. 돌아눕는 순간 어쩐지 훨씬 따뜻함이 밀려들었다. 진작 이럴걸. 희미한 생각이 스쳤다. 하진은 조금 더 따뜻함이 머무는 곳으로 몸을 움직였다. 그리고 다리에 뭔가가 닿는 느낌에 움직임을 멈추었다.

“…….”

뭐지? 순간 잠이 깼지만, 눈은 뜰 수 없었다. 뭘까. 침대에 뭔가가 있었다. 인형? 아니, 인형이라기엔 너무 크고, 단단했다. 그리고 인형은 머리맡에 있어서 이렇게 다리까지 내려올 일이 없었다.

“…….”

하진은 조심스럽게 살짝 눈을 떴다. 블라인드가 쳐지지 않은 방으로 어스름한 빛이 들어오고 있었다. 깜깜하지도 않고, 또 아주 밝지도 않았다. 하진은 눈을 뜨자마자 보이는 정우의 얼굴에 놀라 크게 양쪽 눈을 다 떴다. 너무 놀라 숨도 쉴 수가 없었다.

가장 먼저 드는 생각은 왜 정우가 여기 있는지 모르겠다는 것이었다. 멤버들과 술을 마셨고, 소주와 맥주를 섞어서 막 마셨던 게 떠올랐다. 취해서 제가 정우의 침대에 들어와 잔 걸까. 하진은 눈을 깊게 감으며 얼굴을 찡그렸다. 정우가 깨기 전에 얼른 자신의 침대로 가야겠다고 생각하고 살짝 고개를 든 순간, 침대 옆에 멀쩡히 비어 있는 정우의 침대가 보였다.

“…….”

제가 아니었다. 여기는 저의 침대가 맞았다. 그렇다면 잘못 온 사람은 정우였다. 정우가 침대를 착각하고 여기 누워 자고 있는 것이었다. 하진은 갑자기 고개를 들어 아픈 머리에 힘없이 베개 위로 다시 얼굴을 파묻었다. 제가 베개를 베고 있어, 정우는 조금 낮은 쿠션 위에 한쪽 팔을 베개 삼아 구부려 벤 채 자고 있었다.

“…….”

하진은 가만히 잠이 든 정우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술을 마셨고, 머리가 핑글핑글 돌던 생각이 났다. 딱 거기까지였다. 어떻게 방에 와서 잤는지, 정우가 왜 여기 있는지 그 뒤 상황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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