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포제-22화 (22/122)

#22

아포제 데뷔 1주년 기념 팬 파티 <프롬 아포제>는 데뷔 당일 저녁 8시부터 시작되었다. 1주년 당일에 팬들과 만나 축하하고, 팬 미팅에 미니 콘서트까지 진행이 되는 의미 있고 알찬 행사라 한 달 전부터 팬들의 관심이 아주 뜨거웠다. 티켓의 불법 거래를 막기 위해 예매자 본인이 아니면 절대 입장할 수 없다는 엄포를 놓았지만, 그래도 티켓은 암암리에 높은 가격으로 거래되었다.

120분으로 구성된 팬 파티는 팬들의 요청과 아포제 멤버들의 열정으로 30분이나 더 이어졌다. 그동안 낸 미니앨범 세 장의 타이틀곡과 서브타이틀곡을 모두 팬들에게 보여주었다. 거기에 오늘을 위해 미공개로 준비한 이라는 곡도 공개되었다.

“나 아까 진짜 울컥했어. 프롬 부르다가 울 뻔.”

“저도요. 맨 앞에 앉은 분이 우시는 거예요. 절 보고 막 우는 거 보니까 진짜 눈물 날 것 같아서 참느라 힘들었어요.”

하진은 말을 하면서도 벅차오르는 감정에 심호흡했다. 팬들의 눈을 보면서 노래를 하고, 이야기를 하는 건 늘 아주 대단한 일이었다. 초롱초롱한 눈이 무대 위에 있는 자신들만을 바라보고, 작은 행동, 별것 아닌 말 하나에도 크게 반응을 해주는 게 아직도 신기했다. 진심이 가득한 그 눈을 보고 있으면, 정말 뭐든 더 잘하고 싶고, 더 많이 해주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팬들이랑도 파티했고, 2차로 우리도 멤버들끼리 파티해야지? 지창이 형 오늘 집에 가신다고, 우리끼리 숙소에서 파티하라고 하셨어.”

“아, 당연히 그래야죠. 우리 시상식에서 상 다 받고도 우리끼리 뒤풀이도 제대로 못 했는데. 오늘 아주 다 해요. 신인상 휩쓴 기념! 1주년 기념! 정규 1집 준비 기념!”

“정규 1집 얘기는 내일부터 하자. 어깨가 막 무거워져서 술 못 마실 것 같아.”

“못 들은 걸로 해주세요. 아, 이제 우리도 미자 없어서 술 다 마실 수 있겠다. 그동안 우리 애 망칠까 봐 우리가 이 형들이 맥주 한 캔 하고 싶어도 탄산수 마시고, 소주 한잔 하고 싶어도 탄산수 마시고… 얼마나 참았는지 우리 막내는 아나 몰라.”

영우의 말에 웃은 정우가 뒤를 돌아보았다. 정우가 앉은 앞자리로 몸을 기울인 영우가 장난스럽게 씩 웃었다.

“우리 정우 오늘 형들이 술 좀 알려줘야겠네. 이랬는데 벌써 말술이고 나보다 세고 그런 거 아니지? 술 마셔봤어?”

“저 정말 안 마셔봤어요. 마실 시간도 없었잖아요.”

“하긴 매일 연습실에 있고, 숙소에도 술 한 번 사다 둔 적이 없는데 마실 기회가 없긴 했네. 그렇다고 뭐 외출을 제대로 한 적도 없고.”

“아버지가 주량 대단하셔서 아마 저도 그렇지 않을까… 생각은 해 봤어요.”

“그래? 아, 오늘 기대되는데. 저렇게 말하는 애가 맥주 한 캔 마시고 쓰러지는 경우가 많아서 말이지.”

“거실에 버리지만 말아 주세요.”

“버려도 하진이가 주워 가겠지.”

밴 안으로 웃음이 흘렀다. 하진은 정우를 흘끔 바라보았다. 얼굴을 보면 아무리 꾸며놨어도 분명 소년 같은 분위기가 있었다. 이제 졸업을 하고, 스물이 되었으니 당연한 거지만, 소년 미가 남아 있어서 그런지 술이라는 말과 잘 매치가 되지 않았다.

“하진이는 술 잘 마셔?”

“저도 그렇게 잘 마신다, 못 마신다 할 정도로 마셔 본 기억이 없어서 잘 모르겠어요. 아시잖아요. 오티 날도 갑자기 오 실장님이랑 얘기하고 그러느라 술 제대로 못 마셨거든요.”

“와, 우리 애들은 어떻게 이렇게 다 건전해. 다른 애들은 중학생 때 양주병 든 사진 허세 부리면서 올리던데.”

“그랬으면 지금 여기 있지도 못하죠. 한영에서 데뷔 조 들어가기 전에 상담할 때 다 물어보잖아요. 애들 때린 적 있어? 술 마시거나 흡연한 적 있어? 있으면 그런 거 흔적 남긴 적 있어? 누구누구 알아? 이런 거 다 묻던데요. 저 진짜 놀랐어요.”

하진은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일이지만, 해성의 말처럼 아이돌로 데뷔를 한 뒤에 양주병을 들고 찍은 사진이나, 양쪽에 여자들을 앉히고 자랑스럽게 찍은 사진 같은 게 돌아서 곤혹을 치르는 그룹들이 있었다. 그것도 중학생, 고등학생 때 사진이라 더욱 문제가 되고는 했다. 소속사들은 바로 사과를 하기는 하지만, 사진은 일파만파 퍼져 내내 꼬리표가 되어 따라다녔다.

한영은 애초에 그런 일을 방지하기 위해 철저히 멤버들에게 묻고, 그 주변 조사까지 꼼꼼히 했다. 부모님 면담은 물론이고, 형제자매까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렇게 해서 털어 먼지 하나 안 나오겠다 싶은 사람이 최종적으로 데뷔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면 뭐하냐. 그렇게 착하던 애들이 연예계 들어가고 그렇게 망가지는데. 여긴 진짜 자기가 중심 잘 잡고 행동해야 돼. 휩쓸리기 쉽잖아.”

몇 년씩 활동을 한 선배들이 듣는다면 벌써 이런 말을 한다고 웃을지도 모르지만, 1년 동안 활동을 하면서도 참 느낀 점이 많았다. 잘나가기 시작하면 진심으로 응원을 하는 척하면서 뒤로는 어떻게든 흠집을 내려는 사람들이 생긴다는 것이 가장 큰 상처였다. 겉으로는 친하게 지내고 싶다고, 1등 한 거 축하한다고 하면서 뒤로는 인사를 했는데 받아주지 않았다면서 거짓말을 하기도 했다.

또 이상한 유혹도 굉장히 많았다. 하진 역시 더 편하게 연예계 생활을 하게 해주겠다는 연락을 받은 적이 있었다. 소속사에서는 절대 약속을 잡거나 혼자 행동하지 말라면서 선을 그었다. 이런 일이 있었다고 말을 하자 해성이 조심스럽게 아무래도 스폰서 제안인 것 같다는 말을 해주었다. 연습생 시절에도 데뷔시켜 줄 테니 만나자는 말을 하는 연락이 몇 번 온 적 있었다는 것이었다. 그만큼 이곳은 화려하고, 정신을 똑바로 차리지 않으면 원하든 원하지 않든 마구 휩쓸려 갈 수 있는 아주 흐름이 빠른 곳이었다.

“자, 내리자.”

주차장에 들어간 뒤에야 차는 멈춰 섰다. 하진은 정우를 따라 내려 얼른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자정이 다 된 시간이지만, 하도 새벽형 인간으로 살아 그런지 하나도 졸리지 않고, 별로 피곤하지도 않았다.

숙소로 들어가 씻고 나오니 벌써 여러 음식들이 와 있었다. 숙소로 오는 동안 영우가 주문 사이트에 들어가 여러 가지를 미리 주문한 덕분이었다. 치킨과 떡볶이, 피자, 감자튀김, 스테이크와 회까지 아주 식탁 위가 가득했다. 별로 배고프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었는데, 음식 냄새를 맡으니 갑자기 식욕이 돌았다. 하진은 식탁 옆에 서서 구경하다가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에 얼른 그쪽으로 가보았다.

“형! 그게 다 뭐예요?”

로드매니저인 훈이 술이 든 상자를 들고 들어오고 있었다. 하진은 얼른 그것을 받아 들었다. 그리고 얼른 식탁 옆 바닥으로 내려놓았다. 안에는 소주가 가득 차 있었다. 그게 끝이 아닌지 곧 훈이 맥주가 가득 든 상자도 들고 와 옆에 놓아주었다.

“냉장되어 있던 거 달라 그래서 가져온 거라 시원할 거야. 넣어두고 마시고, 난 약속 있어서 나가거든. 지창이 형님이 너희만 두고 가도 된다고 해서 특별히 가주는 거니까 절대 사고 치지 말고.”

“네, 걱정 마세요.”

“하진이 너야 걱정이 없지. 조해성, 이영우! 나와 봐.”

훈의 부름에 젖은 머리로 나온 해성과 영우가 바닥에 놓인 술들을 보고 헐 소리를 냈다.

“이거 다 마시라고 주는 거 아니야. 마시다가 모자라면 서운하니까 넉넉하게 사다 준 거지. 아까 들어보니 정우랑 하진이는 술 잘 마셔 본 적도 없는 것 같은데 작작 먹여. 술 때문에 신문 나고 이런 거 세주 형 하나로 족하다.”

“…웃으면 안 되는데 좀 웃겨요.”

“세주 형 인생은 하나도 안 웃기게 됐지. 술 때문에 망하기 싫으면 적당히 알았지? 믿는다, 영우랑 해성이.”

“네! 걱정 마세요. 저희 안 그래요.”

해성과 영우가 확실하게 대답을 하는 것에 훈이 숙소를 나섰다. 문이 닫히자 해성과 영우가 팔을 번쩍 들어 올려 하이파이브를 하고는 얼른 술들을 냉장고에 넣기 시작했다.

“이게 얼마 만에 우리끼리 지내보는 거야.”

“그러니까. 술을 마시고 안 마시고를 떠나서 우리끼리만 살아도 소원이 없겠다.”

영우와 해성이 술을 다 넣는 사이에 인규와 정우까지 모두 나와 식탁에 앉았다. 해성이 소주 두 병과 맥주 세 병을 꺼내어 마개를 열었다. 그리고 맥주부터 멤버들의 잔에 가득 따라주었다.

“일단 가볍게 우리 한잔하고 시작합시다! 자, 우리 최고 리더형이 한 말씀 해 주세요. 외쳐! 송인규! 송인규! 갓인규!”

제 이름을 연호하는 것에 웃은 인규가 작게 목을 가다듬었다.

“데뷔하고 1년 동안 아프지 않고, 다치지도 않고 무사히 이렇게 활동 잘 해줘서 너무 고맙다. 오래라면 오랜 시간 동안 연습생으로 있다가 이렇게 데뷔했는데, 내 옆에, 내가 하는 무대 위에 너희들이 있어서 정말 좋고, 행복하고, 영광이다. 앞으로도 지금처럼 잘해 나갔으면 좋겠어. 건배하자, 아포제 파이팅!”

“파이팅!”

하진은 멤버들과 건배한 뒤 맥주를 한 모금 마셨다. 정말 오랜만에 마시는 맥주라 첫맛이 썼지만, 시원한 것을 마시자 조금 답답했던 속이 확 뚫리는 것 같아 좋았다. 입안에 남는 씁쓸한 맛이 낯설어서 하진은 얼른 감자튀김을 하나 들어 입에 넣었다.

“이야, 차정우. 시작이 좋은데?”

감자튀김을 입에 문 하진이 정우를 바라보았다. 저와는 달리 꽤 담담한 표정으로 잔을 비운 정우가 보였다. 하진은 영우가 다시 정우의 잔을 채우는 것에 얼른 제 잔을 들어 비웠다.

“으… 써.”

“하진이 콜라 마실래?”

하진은 인규가 들어 올린 콜라를 바라보았다. 콜라가 100배는 더 맛있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상한 오기가 생겼다. 다들 술을 마시는데 혼자 콜라를 마시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고개를 젓고 다시 잔을 내밀었다. 인규가 웃으며 그 잔에 맥주를 다시 따라주었다.

“너무 무리하지는 말고.”

“하진아, 맥주가 쓰면 소주 좀 섞어줄까? 맥주는 쓰고, 소주는 알코올 향이 강하다 싶은 사람이 두 개 섞으면 또 잘 마시기도 하더라고.”

해성이 소주를 한 병 들어 마개를 돌려 열었다. 하진은 잠시 생각하다가 잔을 내밀었다. 해성이 그 잔 안에 소주를 소주잔으로 한 잔 정도 따라 주었다. 그리고 잘 섞이게 흔들어 하진의 앞에 놓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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