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포제-21화 (21/122)

#21

다른 멤버들 또한 학생들과 팬들이 몰려 더 이상 그곳에 서 있을 수가 없었다. 매니저와 경호원의 보호를 받으며, 교무실로 갔고 그곳에서 다시 한번 오지영 인터뷰어와 만나 인터뷰를 진행했다. 교무실 안에 있는 선생님들도 그런 아포제의 사진을 찍고, 또 같이 사진을 찍기 위해 휴대폰을 들고 기다렸다. 인터뷰를 마치고 나온 아포제는 그런 선생님들과 모두 사진을 찍어 주었다. 그리고 다시 경호원들과 함께 교무실을 나와 차까지 움직였다.

“정우는 부모님이랑 시간 보내고 저녁에 갈 거야. 내가 정우 커버할 거니까 너희는 먼저 숙소 가서 있어.”

정우를 제외한 넷은 차에 올라 창밖을 바라보았다. 정우가 매니저의 연락을 받고 운동장까지 나온 부모님과 웃으며 사진을 찍는 게 보였다. 우르르 몰려나온 정우의 친구들도 모두 정우와 사진을 찍었다. 그 사이에서 웃고 있는 정우를 보는데 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하진은 제 옆에 놓인 꽃다발을 보다가 로드 매니저인 훈에게 얼른 외쳤다.

“형! 잠깐만요.”

“왜? 무슨 일이야?”

“꽃이요. 이거 정우 주려고 산 건데… 꽃만 주고 올게요.”

“내리면 안 될 텐데. 나중에 숙소에서 줘.”

“꽃만 딱 주고 올게요. 잠깐이면 돼요.”

꽃을 잊고 있었다. 이 꽃은 하진이 직접 주문한 것이었다. 유명한 꽃집에서 졸업 한참 전부터 주문을 해서 오늘 아침에 퀵으로 배달을 받았다. 그런데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어 꽃을 안고 가면 다 부서질 것 같다는 매니저 형의 말에 차에 두고 갔었다. 훈이 형의 말처럼 이따 숙소에서 줘도 되지만, 하진은 지금 이 졸업식장에서 정우에게 전해주고 싶었다.

그래서 하진은 꽃다발을 들고 차에서 내렸다. 그리고 정우에게 다가갔다. 하진이 나오는 것을 보고 여기저기에서 다시 비명 소리와 사진 찍는 소리가 마구 울렸다.

“정우야!”

정우는 갑자기 차에서 내린 하진을 놀란 얼굴로 바라보았다. 하진은 웃으며 꽃다발을 정우에게 내밀었다. 이 순간만큼은 정말 진심이었다. 그 어떤 것도 연기하지 않고, 진심만을 담아 졸업을 축하했다.

“이거… 주려고 했는데 아까 망가질까 봐 두고 내렸거든.”

“…….”

“졸업 축하해. 우리 막내.”

시간이 멈춘 것만 같았다. 소란한 주변이 싹 다 지워지고 저와 정우만 이곳에 존재하는 것 같았다. 하진은 꽃다발을 받아 안는 정우를 바라보며 다시 웃었다.

“그럼 이따 보자.”

어색하게 손을 흔들며 뒤로 한 걸음을 물러선 순간 정우가 한 걸음 크게 다가왔다. 정우에게 준 꽃다발이, 정우가 안고 있던 꽃다발이 저에게 가까이 확 다가왔다. 하진은 저를 가득 끌어안는 정우의 등을 천천히 마주 안았다. 감각이 사라질 만큼 차가운 바람이 얼굴을 할퀴어도, 코끝이 찡해지는 게 느껴졌다.

“고마워요, 형.”

“…….”

“형이 와 준 게, 또 형이 축하해 준 게 제일 좋아요.”

하진은 조금 더 머물렀다가는 울어버릴 것 같아 살짝 몸을 떼어냈다. 그리고 정우를 보고 웃었다.

“이따 보자.”

“네. 고마워요, 꽃. 예쁘다.”

“그치. 그거 그래도 되게 유명한 꽃집에 주문한…….”

“형처럼.”

웃어야 하는데, 바람이 너무 차가워서 자꾸만 입가가 굳었다. 이렇게 추운데, 심장은 왜 굳어지지 않는 걸까. 하진은 겨우 입술을 올려 웃었다. 하진에게로 다가온 정우의 부모님이 오랜만이라며 하진의 손을 잡고, 고맙다며 안아 주었다. 하진은 제 부모님처럼 따뜻한 정우의 부모님과 웃으며 인사하고는 얼른 차에 다시 올랐다. 하진의 팬들이 차까지 따라붙었지만, 차는 금세 운동장을 빠져나갔다.

“…….”

인규와 영우가 대화를 나누는 소리가 들렸다. 소리는 들리지만,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는 파악이 되지 않았다. 하진은 그만큼 정신이 나가 있었다.

「고마워요, 꽃. 예쁘다.」

살을 엘 것 같은 차가운 바람 사이로 흘러 들어온 너무나도 분명한 목소리였다. 기대할 수 없고, 기대해서는 안 되는데 왜 네 목소리는 그렇게 따뜻한 거지.

「형처럼.」

오랜 노력이 단 한마디로 물거품으로 변했다. 너무나도 허무하게 사라졌다. 잡으려고 손을 뻗을 필요도 없었다. 손을 뻗기도 전에 눈앞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

그러지 마. 꼭 너도 나를 좋아하는 것 같잖아. 어쩌면 너도 나를 조금은 좋아하게 된 게 아닐까. 이런 말도 안 되는 생각이 들어버리잖아. 아니라는 거 알면서도 내가 또 헛된 기대를 가지잖아.

“…….”

그럼 날 좋아해 줘. 예쁘면… 예뻐해 줘. 하진은 순간 제가 한 생각에 소스라치게 놀라며 살짝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었다. 정말 미쳤다. 어디 정신병원에 처박혀야 되는 게 아닐까. 어떻게 이런 생각을 할 수 있는 걸까. 정우의 부모님과 웃으며 인사까지 해놓고, 그 다정한 손길을, 웃음을 마주해 놓고, 도대체 어떻게.

하진은 지끈대기 시작한 머리에 눈을 감고 헤드레스트로 머리를 기대었다. 내리감은 눈꺼풀 안, 너무나도 또렷한 눈동자가 젖어 들었다.

***

정우는 해 질 무렵 숙소로 돌아왔다. 사진이야 아까 학교에서도 같이 찍었지만, 교복을 벗기 전 마지막으로 같이 인증 사진을 찍자며 해성과 영우가 장난스럽게 줄을 섰다. 장난스럽기는 하지만 동참할 의미가 있어 인규도 해성의 뒤로 섰다. 하진은 빨리 와서 서라는 영우의 손짓이 다가가 인규의 뒤에 섰다.

영우가 제일 먼저 정우의 옆으로 가서 섰다. 해성이 휴대폰을 들고 그런 둘을 화면 안에 담았다.

“두 분 안 친하신가 봐요. 조금 더 다정하게, 팔짱도 끼시고! 그렇죠. 아주 좋습니다. 한 장 더 찍을게요. 네, 아주 좋아요.”

“조해성 저건 뭘 해도 저 입으로 살아남았을 거야.”

“이제 아셨어요? 자, 그럼 저도 부탁드립니다.”

영우에게 휴대폰을 넘긴 해성이 얼른 정우의 옆으로 가서 섰다. 그리고 넉살이 좋게도 정우에게 찰싹 붙어 팔짱을 끼고 어깨에 머리를 기대었다. 영우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조해성 진짜 제정신 아냐.”

“야, 그것만 진지하게 말하지 마라.”

“자, 입 다무시고 다리 한쪽도 귀엽게 들어 주세요.”

“이렇게요?”

해성이 발을 뒤로 살짝 들어 올렸다. 웃지도 않고 천연덕스럽게 포즈를 취하는 것에 웃은 영우가 사진을 몇 장이나 찍어 주었다. 해성은 그제야 정우에게 공손히 인사했다.

“실례 많았습니다, 선생님.”

“뭘요. 영광입니다.”

“정우 쟤도 많이 늘었네.”

하진은 제 앞에 선 인규가 정우의 옆으로 가서 서는 것을 바라보았다. 해성과 영우가 뭘 어떻게 하라고 해도 옆에 가까이 서서 정직하게 사진을 찍는 인규를 보자 저절로 웃음이 났다. 인규의 팬들은 인규의 저런 면을 좋아했다. 하라 그런다고 다 하지 않고, 충분히 생각해서 결정하는 진지한 성격이 인규의 매력이었다.

“자, 이제 정우를 사랑으로 키우신 강하진 님 모시겠습니다.”

“키우긴요. 정우가 절 키웠죠.”

“우리가 다 알아. 하진이 너 정우한테 아주 끔찍하잖아.”

그리고 정우도 저를 점점 더 끔찍해할 거예요. 우리의 끔찍이 다른 의미라는 게 문제지만. 하진은 작게 웃으며 정우의 옆으로 가 섰다. 정우가 그런 하진의 팔을 감으며 몸을 붙여왔다.

“역시 차정우 차별한다, 차별해. 우리는 우리가 엉겨 붙었는데, 하진이 오니까 그냥 저거 좋아서 먼저 앵기는 거 봐라.”

찰칵대는 소리가 울렸다. 하진은 웃었지만, 제가 어떤 표정을 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기쁜 얼굴일까. 아니면 끔찍한 얼굴일까. 영우가 휴대폰을 내리자 하진은 먼저 정우의 팔을 풀고 떨어져 섰다. 정우가 그런 하진을 보다가 시선을 돌렸다.

“저 씻고 옷 좀 갈아입을게요. 교복 오랜만에 입었더니 은근 불편해요.”

“그래. 오늘 고생 진짜 많았다. 지창이 형이 너 졸업이라고 저녁에 먹고 싶은 거 다 시켜도 된다 그랬어. 형이 쏜다고. 칼로리 걱정 안 해도 되니까 뭐 먹고 싶은지 생각해 봐.”

“네. 씻으면서 생각해 볼게요.”

정우는 하진이 준 꽃을 들고 방으로 들어갔다. 무심결에 정우를 따라 방으로 들어가던 하진이 교복 재킷을 벗는 정우를 보며 멈추었다. 정우가 그런 하진을 보며 교복 넥타이를 느릿하게 풀어냈다.

“들어와요.”

“아니야. 옷 갈아입는데.”

“새삼스럽게.”

“…….”

정우는 풀어낸 넥타이까지만 침대 위로 놓고, 갈아입을 옷을 꺼내어 들었다.

“씻으러 갈 거니까 들어와요, 형.”

하진은 어쩐지 어색한 분위기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하진이 안으로 들어가 침대에 걸터앉자 정우가 그런 하진에게 꽃다발을 폭 안겨주었다. 얼떨결에 꽃다발을 안은 하진이 정우를 올려보았다. 정우가 휴대폰을 꺼내 그런 하진의 사진을 찍었다. 찰칵하는 소리에야 하진은 정신이 들어 얼굴을 가렸지만, 이미 정우는 휴대폰을 내려놓은 뒤였다.

“뭐, 뭐야. 사진은 왜 찍어…….”

“예뻐서요.”

“…꽃 같은 거 잘 모르는 내가 봐도 예쁘더라.”

“꽃 말고.”

“…….”

“난 형 얘기한 건데.”

또. 또다. 하진은 꽃다발을 옆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나 정우를 바라보았다.

“…예쁘다는 말 듣기 좀 그래.”

“왜요? 팬들도 다 그런 말 하잖아요.”

“그건 그거고, 멤버들한테 그런 말 듣는 거 좀 간지럽잖아. 우리끼리 뭐 그런 말… 하는 것도 이상하고.”

“내가 해서 싫은 건 아니구요?”

하진은 비어 있는 두 손을 저도 모르게 맞잡았다. 엄지손가락 끝을 누르고, 괜히 입술을 꾹꾹 깨물었다. 그냥 웃어넘기는 게 좋았을 뻔했다.

“글쎄. 형들은 나한테 그런 말 아무도 안 하니까.”

“나도 하지 말까요?”

“…아니야. 너 편할 대로 해. 그냥 들을 때마다 뭘 어떻게 해야 할지 전혀 모르겠는 말이기도 하고… 나는 내가 그렇다고 생각해 본 적도 없고 해서…. 얼른 씻어. 내가 괜히 오버했다.”

이 어색한 분위기를 피하기 위해 활짝 웃은 하진이 먼저 방을 나섰다. 그리고 괜히 냉장고 문을 열어 물을 한 병 꺼내 들었다. 몸속까지 전부 찬 기운이 도는 것 같아서 차가운 물 한 모금도 마시고 싶지 않았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하진은 제 뒤로 닿아오는 정우의 시선을 느끼며 차가운 물을 마구 들이켰다. 등 뒤에서 욕실 문 닫히는 소리가 난 뒤에야 식탁 의자에 주저앉았다. 최악이다, 정말.

“…….”

착각하지 말자. 희망 가지지 말자. 기대하지 말자. 흔들리지 말자. 멤버 이상의 감정을 가지지 말자.

“…….”

뭐 이렇게 하지 말아야 할 것만 많아. 하진은 그대로 식탁 위로 엎드렸다. 꽃다발을 한 번 끌어안았다고 생화의 싱그러운 향이 품에서 나는 것 같았다. 하진은 그대로 긴 숨을 내쉬었다. 오늘도 하지 말아야 할 일들을 전부 해버렸다.

착각했고, 희망을 가졌고, 기대도 했고, 흔들리기까지 했다. 멤버 이상의 감정은 문신처럼 자리 잡았고, 하지 말아야 할 오버까지 해버렸다. 하진은 머리와 분리된 것처럼 아프게 흔들리는 뇌를 느끼며 눈을 더 꽉 감았다. 정말이지 최악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