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하진은 한숨을 내쉬며 일어나 옷을 벗었다. 풍덩한 후드를 벗고, 안에 받쳐 입은 티셔츠도 벗었다.
뿌옇게 된 거울을 손으로 문지른 하진이 거울 안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피곤 때문인지 얼굴이 핼쑥해 보였다. 메이크업은 답답해서 클렌징 티슈로 대충 지우고 왔지만, 아침에 만진 머리는 중간중간 계속 스프레이를 뿌리며 고정을 해서 그런지 아직도 모양을 유지하고 남아 있었다. 하진은 괜히 그 머리를 헝클여 망가뜨렸다. 이런다고 요란한 마음이 해결되는 것도 아닌데, 그냥 괜히 머리에 화풀이를 해버렸다.
“…뭐 하는 거야.”
한심한 마음에 고개를 저은 하진이 바지까지 다 벗은 채 샤워 부스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온도를 맞추고 따뜻한 물을 틀었다. 머리 위를 적시며 떨어지는 물에 종일 몸에 들어가 있던 힘이 스르륵 빠져 수챗구멍으로 흘러 들어갔다.
“…….”
목덜미를 타고 흐르는 물줄기가 꼭 정우의 손길 같았다. 조금 전 목덜미에 문질린 코끝이 떠오르자 아랫배가 저릿해졌다. 뒤에서 끌어안고, 손가락을 꽉 맞물리게 잡은 정우의 단단한 팔과 손도 머리 안을 맴돌았다. 빠져나갈 수 없게 끌어안아 놓고, 머물지 말라고 재촉한다. 어떻게 하라는 거야. 나는 이제 이럴 수밖에 없어. 하진은 뒤로 한 걸음을 물러나 벽에 기대었다. 그리고 생각만으로 살짝 발기된 성기를 쥐었다. 쥐는 것만으로도 꼭 정우의 손길 같아 사정할 것 같았다.
“흐으…….”
자위에는 별 취미도 없고, 생각도 없던 제가 요즘 거의 날마다 씻으며 자위를 했다. 너무나도 분명하게 정우를 떠올렸다. 더 이상 그것에 대한 죄책감도 들지 않았다. 죄책감은 날마다 이 물줄기에 씻겨 희미해졌다. 수챗구멍을 열어보면 죄책감과 저의 뻔뻔함이 엉겨 붙어 있을 것이었다. 얼마나 끔찍한 악취가 날까.
“아… 하으, 읏…….”
그래도 정우야, 난 이제 멈출 수가 없어. 난, 난 네 손길만 닿아도 네가 만져주는 생각을 해. 지금도 네가 이 문을 박차고 들어와 나를 함부로 대해줬으면 좋겠어. 아프게라도 해줬으면 좋겠어. 해 본 적도 없는 섹스를 너로 상상해.
“…흐으… 으응…….”
하진은 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리고 소리를 내지 않으려 노력했다. 가느다랗고 예쁜 손이 발기한 성기를 쥐고 반복적으로 쓸어내렸다. 하진에게 자위란 고작 성기를 쥐고 기둥을 훑는 일이었다. 사소한 자극이지만, 머리 안에 든 절대 사소하지 않은 정우의 얼굴이, 그 목소리가, 그 손길과 체온이 하진의 성감을 불러일으켰다.
온 감각과 세포가 성기 끝으로 몰리는 그 순간 하진은 사정했다. 허리가 움찔대고, 젖혀진 고개에 눈물이 흘렀다. 가쁜 숨을 애써 눌러 내쉬며 눈물을 숨기기 위해 다시 쏟아지는 물줄기 아래로 들어갔다. 참담한 마음에 홀로 있음에도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물줄기가 젖은 하진의 몸 위로 새로 밴 땀을 씻어내고, 눈물을 숨겨주었다. 하지만 몇 번이나 거품을 내 몸을 씻고 또 씻어도 정우가 날마다 묻힌 체온은 씻어내지 못했다.
***
종일 연습실에서 연습을 하는데 프로듀서님에게 연락이 왔다. 이번 앨범에는 실리지 않았지만, 팬들을 위한 깜짝 선물로 나올 음원의 후렴 부분을 한 번 다시 들어보는 게 좋겠다는 연락이었다. 하진은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멤버들에게 말한 뒤 녹음실로 향했다.
녹음실 앞에서 노크를 하자 들어오라는 소리가 들렸다. 하진은 살짝 문을 열고 들어가 저를 보고 웃는 프로듀서를 향해 고개를 푹 숙여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아, 왔어? 바쁜데 불러서 미안해.”
“아니에요. 아니에요. 미안해하시지 않아도 되는데…….”
“아니, 다름이 아니고 자기가 부른 후렴구 한 번 다시 들어봤으면 좋겠어서. 난 지금도 좋은데, 여기 세주가 와서 듣더니 조금 더 발음을 막 강하게 해서 하는 게 좋을 것 같다는 거야. 뭐 그것도 일리가 있는 것 같아서 자기가 듣고 결정해 보라고 불렀어.”
“아…….”
세주라는 말에 하진은 고개를 돌렸다. 들어올 때 보지 못했는데 소파에 유세주 선배가 앉아 있었다. 유세주는 한영엔터테인먼트에서 두 번째로 나와서 난리가 났던 아이돌 그룹의 센터였다. 벌써 거의 10년이 다 된 때의 일이지만, 하진에게는 하늘 같은 선배이자 어려운 존재였다. 하진은 놀라 얼른 허리를 확 숙여 인사했다. 회사에 들어온 뒤로 한 번도 세주를 실물로 본 적이 없어 괜히 어색하고 더 어렵게 느껴졌다.
긴장해 굳은 하진의 얼굴을 보며 웃은 세주가 제 옆 빈자리를 손바닥으로 탁탁 두드렸다.
“뭘 그렇게 어렵게 굴어. 여기 와서 앉아.”
“아… 네.”
“네가 하진이 맞지? 강하진.”
“네.”
“네 얘기 들었어. 소문이 그냥 아주 다 났던데. 오 실장 픽으로 스무 살에 연습생 되더니 5개월 만에 데뷔 조 들어갔다며. 내가 6개월 만에 들어간 애는 본 적 있는데, 5개월은 처음 봤다. 대단해.”
“아… 고맙습니다.”
“얼굴 보니까 이유를 알 것 같기도 하고.”
“네?”
“예쁘다는 말이야. 아이돌은 남자도 끝내주게 잘생기거나 예뻐야 돼. 아직 스물하나라 그런지 뽀얗고 예쁘네.”
시선이 하진의 얼굴을 느릿하게 스캔하듯 훑었다. 그리고 목덜미를 바라보다가 그 아래로도 시선이 뚝 떨어졌다. 어쩐지 시선이 기분 나빴다. 그래도 뭐라 할 말도 없고, 상황도 어려워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웃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잘생겼다, 예쁘다 이런 말은 고맙게도 자주 듣지만, 이렇게 기분이 이상하고 칭찬처럼 느껴지지 않는 것은 또 처음이었다. 할 수만 있다면 당장 녹음실을 뛰쳐나가고 싶었다.
“술은 좀 해?”
“아, 잘은 못 마십니다.”
“어쨌든 마시긴 한다는 거네.”
“…네. 그냥 맥주 한 캔 정도만…….”
“처음에는 다 그래. 형네 집에 진짜 깨끗하고 좋은 술 있는데 올래? 형이 술 알려줄게. 형한테 배워.”
“아…….”
싫은데요, 라는 말을 할 분위기가 아니었다. 하늘 같은 선배고, 저보다 나이도 아홉 살이나 많은 사람이었다. 게다가 다른 일을 하고 있기는 하지만 프로듀서도 같이 있는 녹음실 안이었다. 트러블을 만들어 좋을 게 없다는 말이었다. 하진은 애매하게 그저 의례적으로 웃으며 대답을 대신했다.
“자, 번호.”
“…….”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네.”
하진은 세주가 내미는 휴대폰을 받아 제 번호를 입력했다. 그리고 두 손으로 휴대폰을 내밀었다. 세주가 휴대폰을 받아들며 하진의 손가락까지 잡았다가 놓았다. 하진은 굳으려는 표정을 겨우 관리했다. 마침 프로듀서가 고맙게도 준비가 다 되었다며 하진을 불렀다. 하진은 세주에게서 시선을 거두며 뒤돌았다.
녹음된 것은 아무 문제가 없었다. 너무 힘을 주어 부르는 것보다 부드럽게 부른 지금이 훨씬 더 어울린다는 생각이었다. 프로듀서의 기분이 상하지 않게 조심스럽게 지금 그대로 가고 싶다고 의견을 말했다. 프로듀서는 하진의 의견을 존중해 주었다.
일이 마무리된 이상 더 여기 머물 이유가 없었다. 하진은 프로듀서와 세주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저 그럼 먼저 가보겠습니다.”
“응, 그래. 다음에 전화할게.”
“아… 네.”
“아, 그리고 어디서 봤는데 너 샵 앞에 있는 애들한테도 휘둘린다며. 그렇게 원래 잘 휘둘려?”
“…기다리고 계셔서 죄송하기도 하고…….”
“걔네는 팬 아니야. 네 단점 찾아서 쌓아두는 애들이지. 그렇게 생각해. 하나씩 네 사생활에서 단점, 네 비밀 이런 거 찾아서 쌓아두고 있다가 탈덕하면서 빵! 터뜨린다니까. 잘해 줄 거 없어.”
“…네. 말씀 감사합니다. 그럼 먼저 가보겠습니다.”
하진은 꾸벅 다시 깊게 인사를 하고 얼른 녹음실을 나섰다. 유세주와 같은 공간에서 벗어나자 그제야 막혔던 숨이 탁 터져 나왔다. 정말 같은 공간에 있는 것만으로도 불쾌함이 강한 사람이었다.
세주는 아이돌 그룹 활동을 한 지 5년 차가 됐을 때, 음주운전을 시작으로 여러 사고를 쳤다. 두 번의 음주운전과 한 번의 폭행. 한 달에 한 번, 빠르면 일주일마다 여자 친구가 바뀌었고, 남자를 사귄다는 파파라치 사진이 올라온 적도 있었다.
머리가 짧은 여자였다고 해명을 했지만, 결국 팬들조차 유세주의 말을 믿지 않았다. 그 뒤로 멤버들과 가까이 서서 웃고만 있어도 사귄다는 말이 떠돌았고, 결국 세주의 그룹은 대중들에게 게이 그룹이라는 말을 들으며 무너졌다. 지금도 유세주를 치면 연관 검색어에 유세주 게이라는 말이 떠 있을 정도였다.
“…….”
지금 저에게 한 불쾌한 행동들 또한 그런 쪽인 것 같았다. 손가락을 잡았다가 놓고, 얼굴과 몸을 훑어보는 시선과 예쁘다는 말까지 전부 싫었다. 하진은 인상을 쓴 채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얼른 마음이 편한 연습실로 돌아가고 싶어 걸음을 서둘렀다. 문을 연 순간, 차에 지갑을 두고 와서 가지러 갔던 정우의 얼굴이 보였다. 하진은 그 얼굴을 보는 순간 더는 다가가지 못하고 그 자리에 멈추었다.
“…….”
정우도 불쾌함을 느끼는 걸까. 제가 유세주의 행동에 기분이 나쁘고, 불쾌했던 것처럼 정우도 저의 이 마음에 그런 불쾌함을 느끼는 건 아닐까 싶었다. 피하고 싶고, 뛰쳐나가고 싶고, 다시는 보고 싶지 않은 마음인데… 같은 팀이라서, 형이라서, 그동안 잘 지낸 정을 생각해서 참고 있는지도 몰랐다. 그 생각을 하니 또다시 그동안 애써 누르며 연기하던 죄책감이 고개를 불쑥 들며 올라왔다.
“형, 녹음실 갔다 왔다면서요.”
“…….”
“형? 무슨 일 있었어요?”
연습실로 들어와 가까이 오지 않고 멍하니 서서 생각에 빠진 하진에게 다가온 정우가 그 팔을 가볍게 쥐었다. 정우의 손이 닿는 순간 하진은 생각에서 빠져나왔다. 세주가 손가락을 잡을 때는 그렇게 기분이 나쁘더니, 정우가 제 팔을 잡는 것에는 마구 마음이 흔들렸다.
“정우야.”
아니었으면 좋겠어. 이기적인 거 알지만, 그래도 너는 나를 그렇게 혐오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내가 좋다고, 형으로 오래 가고 싶다고 말한 너의 그 말이 전부 다 진심이라고 믿어. 난 너에게 미움 받고 싶지 않아.
“이상하네. 무슨 일 있는 것 같은데? 뭔데요.”
“아니야, 일은 무슨. 지갑은 찾았어?”
“네. 지갑 찾은 기념으로 형들이 간식 쏘라고 해서 고르던 중이에요. 형은 뭐 먹을래요?”
하진은 다시 연기하기 시작했다. 그냥 녹음실에 다녀온 아포제의 멤버 강하진이 되었다. 답답한 마음과 살얼음판 위를 걷고 있는 사랑에 빠진 강하진이 빙빙 같은 곳을 원을 그리며 돌기 시작했다. 하진은 그런 제 모습을 피하며 멤버들을 보고 웃었다. 그래도 아직은 웃을 수 있어 다행인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