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포제-17화 (17/122)

#17

“여러분! 드디어 기다리시고 기다리시던 그분들을 저 오지영이 만났습니다! 제가 오늘 성덕이 되었습니다. 성덕 아시죠? 성공한 덕후! 나오자마자 저를 비롯한 수많은 분들을 사로잡은 아포제 여러분들 모셨습니다! 안녕하세요!”

하진은 지영이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말을 하는 것에 감탄했다. 여러 프로그램에서 진짜 인터뷰를 잘하고, 분위기를 좋게 해주는 분이라는 것을 봐서 알고 있었지만, 실제로 보니 정말 더 대단했다.

인사와 함께 개인의 소개가 이어졌다. 그리고 지금 이곳이 새로운 미니앨범 뮤직비디오 촬영 현장이며 어떤 분위기의 곡을 어떤 콘셉트로 촬영했는지에 대한 설명이 이어졌다. 인규가 떨지도 않고 리더답게 정확히 표현해 말하는 것에 다른 멤버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아니, 요즘 아포제 인기가 진짜 장난이 아니에요. 루프탑 노래 너무 신나고 좋아서 제가 오늘도 커피 사러 갔다가 두 번이나 듣고, 어디 가기만 하면 나와요. 이번 타이틀곡 오버테이크도 제가 촬영하는 것을 성덕이 되어 먼저 들어봤는데 정말 너무 좋습니다.”

“아, 정말 고맙습니다.”

“그럼 여기서 이렇게 인기 많은 우리 아포제에게 돌발질문 안 드릴 수가 없겠죠? 릴레이로 갑니다. 답은 멤버 이름으로 해주시면 됩니다. 인규 씨가 해성 씨를 지목하시면, 해성 씨가 다음 질문을 받으시면 됩니다. 자, 갑니다. 우리 잘생긴, 보기만 해도 눈물이 나는 우리 막내 정우 씨부터 갑니다. 닉네임 정우들숨재력날숨명예님께서 해주신 질문입니다. 와, 진정한 팬분이에요.”

질문한 팬의 재밌는 닉네임에 웃음이 터졌다. 멤버들과 같이 즐겁게 웃은 지영이 정우를 바라보고 질문을 이어갔다.

“오빠들 다들 같이 숙소생활 하시는 걸로 알아요. 1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같이 살면서 봤을 때, 내가 여자였다면 이 멤버랑 결혼하고 싶다! 하는 멤버는 누구인가요? 자, 첫 질문부터 서로 나라고 지금 정우 씨를 향한 해성 씨와 영우 씨의 구애 상당합니다. 자, 정우 씨, 하나 둘 셋!”

“하진이 형이요.”

“네! 주저 없이 나왔습니다! 우리 하진 씨 생각 안 들어볼 수 없죠. 자, 하진 씨는 내가 여자라면 이 멤버와 결혼하고 싶다. 과연 두 분의 마음이 통할지 기대됩니다. 하나, 둘, 셋!”

답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여자였다면, 결혼 이런 말들을 모두 빼도 언제나 늘 이런 질문의 답은 정우일 수밖에 없었다. 팬들도 저와 정우가 서로를 가장 잘 챙기며 친하다는 것을 알고 있고, 친한 티를 내주는 것을 좋아했다. 팬들을 위해서도 또 사심을 담아도 결국은 모든 답이 정우였다. 하지만 정우가 제 이름을 말한 직후라 자꾸 마음이 울렁였다. 정우 또한 저와 같은 생각을 했을 것이었다.

팬들이 원하는 대답. 그래, 그게 전부였다. 하진은 다시 연기했다. 공과 사를 아주 구분 잘 하는 그런 연기를.

“당연히 정우랑 해야죠. 정우도 저랑 하고 싶다니까 좋네요.”

멤버들의 환호와 야유가 뒤섞이고, 지영의 좋아 죽겠다는 웃음이 울려 퍼졌다. 하진은 지금 이 분위기와 아주 잘 어울리는 예쁜 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정우를 바라보았다. 정우도 저를 보고 웃고 있었다. 그래, 웃을 수 있다면 됐다. 속이야 이미 예전에 무너졌고, 폐허가 되어 있었다. 이미 폐허로 변해버린 그곳에 모래바람이 한 번 더 불어오고, 돌이 굴러떨어져서 무언가를 더 부순다고 해도 달라질 것은 없었다. 폐허는 폐허일 뿐이었다.

인터뷰는 신인 그룹을 배려하는 오지영의 하드캐리로 무사히 끝날 수 있었다. 이런 인터뷰에 익숙하지 않아 잠시 흐름이 깨질 때에도 지영이 분위기를 이끌어 주고, 재밌는 장면을 뽑을 수 있게 도와주었다. 굉장히 긴장되고 피곤할 줄 알았는데, 많이 웃고 떠들어서 꽤 즐거운 촬영이었다.

지영과 사진을 찍고, 새 앨범이 나오면 꼭 드리겠다는 말을 한 뒤에야 촬영이 완전히 끝났다. 하진은 멤버들과 대기실에 가서 촬영용 옷을 벗고 편한 후드로 갈아입었다. 멋있기는 하지만, 불편한 옷을 벗고 나니 이제야 좀 살 것 같았다.

지창을 따라 세트장 뒷문에 대기된 차에 오른 하진은 시트로 몸을 푹 기대었다. 종일 몸을 써서 힘들기도 하고, 또 연기까지 하느라 더 힘들었다. 정우가 닿아올 때마다 아무렇지도 않은 척, 이제 정말 전처럼 돌아간 척을 하며 더 가까이 닿을 때마다 엄청난 에너지가 소모되었다. 빨리 가서 씻고 자고 싶었다. 그냥 오늘은 너무 힘들었다.

숙소 앞에도 팬들이 몰려 있었지만, 소리를 지르거나 하면 주민들에게 방해가 되고, 그렇게 되면 아포제가 이사를 가야 한다는 것을 알기에 최대한 조용히 아포제에게 다가왔다. 매니저가 여기는 오지 말라고 당부를 했지만, 말을 듣지 않았다. 하진은 저에게 편지와 작은 쇼핑백을 주는 팬에게 고맙다고 인사했다. 그 인사가 뭐라고 울먹이는 얼굴을 보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가요, 형.”

하진이 더 오래 머물지 않도록 정우가 그 상황을 정리했다. 하진은 정우를 따라 숙소로 올라갔다. 인규와 해성 그리고 영우가 발을 질질 끌며 방으로 향했다. 잘 자라고 손을 흔드는 형들에게 쉬라고 말한 하진이 저와 정우의 방으로 들어섰다.

“형 먼저 씻을래요?”

“…너 먼저 씻어. 꼼짝도 못 하겠다.”

“네. 그럼 저 먼저 씻을게요. 좀 쉬어요.”

“…응.”

하진은 주먹을 말아 뻐근한 어깨 위를 두드렸다. 침대에 눕고 싶은데 종일 땀도 흘리고, 먼지도 많은 밖에 있어 씻지도 않고 눕기가 좀 그랬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 방에서는 정우 향이 났다. 정우의 침대, 그리고 몰래 향수를 뿌려 저의 침대에서도 정우의 향이 났다. 숨을 쉴 때마다 차정우의 향이 몸속을 가득 채웠다. 이대로 자위라도 해버릴 것 같아 하진은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망설임 없이 방을 나섰다. 그리고 거실로 나가 소파에 무너지듯 주저앉았다.

뒤로 고개를 젖히고 편히 기대어 눈을 감았다. 그래도 내일은 오후에 나가 안무 연습을 하고, 회의를 하는 정도의 스케줄이라 다행이었다. 곧 곡이 나오고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하면, 지금 이런 여유도 부리지 못할 것이었다. 하진은 잠과 피로가 묻어 무거운 눈꺼풀을 내리감았다. 욕실에서 샤워기 물소리가 들려왔다.

“…….”

어디에 머물러도 결국 모든 생각의 끝은 정우였다. 하진은 포기했다. 포기라고밖에 설명할 길이 없었다. 정우를 향한 마음을 포기할 수 없으니, 접으려는 노력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정우가 원하는 길은 아니지만, 정우만 모르게 하면 된다는 생각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오늘처럼 연기해야 했다. 정우가 안아오면 그 팔을 잡아 더 앞으로 당기고, 어깨 위에 턱을 올리면 머리를 쓰다듬어주고, 제 눈을 바라보면 그 시선을 맞추며 대화를 하고, 그 어떤 경우에도 정우에게 ‘좋은 형’이어야 했다.

“…하아…….”

하진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조용한 거실로 한숨 소리가 흐트러졌다가 다시 다가와 하진에게 묻었다. 씻어내고 싶었다. 따뜻한 물 아래에서 오래 머물면서 오늘 저에게 묻은 피로와 먼지, 땀과 한숨 그리고 정우의 손길까지 전부 씻어내고 싶었다. 하지만 결국 정우의 손길은 씻어내지 못할 것도 알고 있었다. 하진은 실소했다. 울고 싶은 기분인데 너무 피곤해서 눈물도 나지 않았다.

잠깐이라도 잠들고 싶었는데 결국 잠들 수 없었다. 하진은 문이 열리는 소리에 뒤로 젖혔던 고개를 바로 들었다.

“왜 나와 있어요?”

저 방에서 네 향이 나서 내가 아주 돌아버릴 것 같아서. 분명한 이유가 존재하지만, 하진은 단 한마디도 소리 내지 않았다. 그저 좋은 멤버 형처럼 웃을 뿐이었다.

“침대에 있으니까 안 씻고 자고 싶어지잖아.”

“너무 피곤하면 그래도 되지, 뭐. 형 땀도 잘 안 나잖아요.”

“에이, 그래도 종일 먼지에 땀에 난리도 아니었는데 씻고 자야지.”

하진은 여전히 소파에 기댄 채 정우를 바라보았다. 기왕 이렇게 연기를 한 거 조금 더 오버를 해볼까 싶었다. 정말 예전으로 돌아간 것처럼. 하진은 정우를 향해 손을 하나 뻗었다.

“못 일어나겠어. 우리 막내 형 좀 일으켜 줘.”

머리에서 떨어지는 물을 수건으로 아무렇게나 닦은 정우가 웃으며 다가왔다. 머리가 젖어 저렇게 헝클어졌는데도 꼭 일부러 저런 스타일을 한 것처럼 멋있었다. 하진은 제 앞으로 다가와 머뭇대지 않고 손을 잡는 정우를 바라보았다. 정우는 하진의 손을 힘주어 당기지 않고 그대로 몸을 숙였다.

“…….”

생각하지 못한 일이었다. 상체를 숙인 정우의 그림자가 얼굴 위로 내려앉았다. 하진은 그대로 저를 뒤덮는 그늘에 어깨를 움츠렸다. 정우가 목덜미 근처로 얼굴을 대었다.

“안 나는데, 땀 냄새.”

“…무, 무슨. 나도 아까 땀 흘렸는데. 빨리 씻어야겠다.”

“진짜 안 나요.”

하진이 몸을 세우자 정우의 코끝이 하진의 목덜미에 부드럽게 문질렸다. 순간 신음 같은 소리가 입속으로 흘러들었다. 하진은 소리 내지 않으려 필사적으로 참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욕실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

소리 내지 않아 다행이었다. 그 자리에서 야릇한 소리라도 내버렸으면 정말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 되었을 것이었다. 하진은 정우가 머물고 나간 습기로 가득한 욕실 바닥으로 아무렇게나 주저앉았다. 갈아입을 옷을 가지고 들어오지 않았다. 이대로 나가 옷을 가지고 오는 것도 이상해 보일 것 같았다. 벗고 나갈 수도 없는 노릇이고, 찝찝하게 입었던 옷을 다시 입고 나가기도 싫었다.

“형.”

그때 문밖에서 정우의 목소리가 들렸다. 하진은 문에 기대어 주저앉은 채 귀를 기울였다.

“옷 밖에 둘게요.”

“…….”

다 알고 있다. 제가 갈아입을 옷을 들고 들어가지 않은 것도, 그래서 곤란해하는 것도. 정우는 어디까지 아는 걸까. 연기를 하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을까. 미친놈처럼 보는 건 아닐까. 어디까지 연기할 수 있는지 테스트라도 하는 걸까? 그래서 더 가까이 다가오고, 더 닿아오는 걸까. 궁금한 게 너무나도 많은데, 단 하나도 정우에게 물어볼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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