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화났어요?”
“…들어가서 얘기해.”
하진은 먼저 대기실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곧 정우에게 잡혀 대기실에서 조금 떨어진 빈 소품실 안으로 들어갔다. 차라리 다행이었다. 멤버들이나 매니저 형에게서 자유롭지 못한 곳보다는 여기가 나았다. 하진은 소품실 문을 닫는 정우를 바라보았다. 불을 켜자 여기저기 다양한 스튜디오 소품들이 놓인 게 보였다. 석고상들이 가장 먼저 보여서 조금 으스스하게 느껴졌다.
“왜 화가 난 거예요?”
“…정우 너도 알겠지만, 나… 노력하고 있어. 너한테 티 안 내려고,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만들려고 정말 노력하고 있어.”
“네. 알아요.”
안다고 너무나도 평온하게 말하는 정우의 목소리에 하진은 아랫입술을 한 번 꾹 감쳐물었다가 그 얼굴을 바라보았다.
“…알면 조금이라도 도와주면 안 될까?”
“뭘 도와주는데요?”
“…정리하고 있는데, 안 그러려고 하는데… 네가 자꾸 닿고, 그렇게 가까이 오고 그러면… 이런 말 하기 민망하고, 미안하지만… 마음 다잡기가 어려워. 마음 굳게 먹고 열 걸음을 앞으로 갔는데, 네가 닿으면 다시 출발점이야. 자꾸 그렇게 돼. 그러니까 정우야.”
타이를 완전히 풀어 한쪽을 잡고 완전히 목에서 빼낸 정우가 손에 타이를 느릿하게 감았다가 푸는 것을 반복했다.
“형한테 손도 대지 말라는 거예요?”
“…그 정도는 아니어도…….”
“제가 왜 그래야 돼요? 잘 모르겠어서 그래요.”
“…뭐?”
예상하지 못한 대답이었다. 그런 행동에 마음이 흔들리는 줄 몰랐다고, 이제부터 안 그러겠다고 그런 대답을 할 줄 알았는데 정우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은 그것과는 꽤 거리가 있는 말이었다. 하진은 멍하니 그 얼굴을 바라보았다. 백열등 아래 정우의 얼굴이 몹시 희고 차갑게 느껴졌다.
“달라진 건 내가 아니잖아요. 형이잖아.”
“…….”
“늘 이렇게 지냈잖아. 내가 뒤에서 안으면 형이 내 손 잡아서 더 앞으로 끌고 그랬던 거 기억 안 나요?”
“맞아. 그랬었어. 그런데 지금은 상황이… 좀 다르잖아.”
“그 상황 형이 해결한다고 했잖아요. 별거 아니라면서요.”
“…….”
정우가 하진에게 한 걸음 가까이 다가왔다. 하진은 저도 모르게 정우가 다가온 만큼 뒷걸음을 쳤다. 정우가 그런 하진을 보며 다시 한 걸음을 다가섰다. 그리고 하진의 턱을 잡아 쥐었다.
“…뭐 하는 거야.”
“형이 화날 짓.”
그대로 입술이 맞물렸다. 입술이 정확하게 맞물린 순간 하진은 있는 힘껏 정우를 밀어냈다. 정우는 순순히 뒤로 밀려나 주었다. 힘이 약해서가 아니라, 밀려나 주기로 마음을 먹고 밀려나 준 것이라는 걸 너무나도 잘 알 수 있었다. 하진은 축축해진 눈동자로 정우를 노려보았다. 정우가 손으로 입술을 한 번 세게 문질렀다.
“내 상황도 변하면 이렇게 지내야 되는데, 이게 더 좋아요?”
“차정우!”
“밖에 사람 다녀요.”
“…너, 너 이게 무슨 짓이야?”
“전 하던 대로 할 거예요. 달라진 건 내가 아니니까. 이상할 거 없잖아요. 전에는 늘 이렇게 지냈는데.”
“…….”
“달라지기를 기대하면 언제든 말해요. 난 형을 좋아하니까, 형이 원하는 거 해줄 수 있을지도 몰라요.”
하진의 축축한 눈동자에서 결국 눈물이 흘러내렸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정우에게 이런 말, 이런 일을 당할 줄은 정말 예상도 하지 못했기에 충격이 더 컸다. 늘 다정하던 정우가, 그렇게 따뜻하고 살갑던 정우가 지금 제 앞에서 조금도 따뜻하지 않은 말들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무슨 말을 그렇게 해. 내가 정우 너한테 바란 적 있어?”
“없어요.”
“그런데 왜 그래.”
“말로는 한 적 없지.”
“…뭐?”
“형 눈이요. 형 눈은 형 생각이랑 좀 달라요. 숨기지도 못하고, 내 손만 닿아도 벌벌.”
“…너랑 더는 이런 얘기 하고 싶지 않아. 내 노력이 부족했던 모양이다. 그래, 나 혼자 가진 감정이니까 나 혼자 알아서 정리할게. 부담스럽게 해서 미안해. 못 들은 걸로 해줘.”
정우는 대답 대신 손을 들어 하진의 어깨를 한 번 꽉 쥐었다가 놓았다. 그리고 누그러진 평소와 같은 목소리를 냈다.
“가요. 형들이 기다리겠다.”
“…먼저 가. 오 분만 있다가 갈게.”
“알았어요.”
정우가 다시 한번 하진의 어깨를 부드럽게 쥐었다가 놓고 소품실을 나섰다. 하진은 그렇게 문이 닫히는 소리를 들은 뒤에야 긴 숨을 내쉬었다.
“…….”
처음 보는 정우의 표정이었다. 그렇게 차가울 수 있는 정우에게 미움이라도 받는다면 어떻게 될까. 견딜 수 있을까. 이제 정말 확실해졌다. 어떻게 해서든 정우의 좋은 형으로 돌아가야 했다. 정우가 좋아하는 강하진으로 빨리 무슨 수를 써서라도 돌아가야 했다.
“…….”
하지만 그 차가운 모습에 가라앉았어야 할 마음이 전혀 가라앉지 않았다. 미친 듯 뛰고, 그 어느 때보다도 뜨겁게 헐떡였다. 하진은 강하게 누르고 있던 마음에서 손을 떼었다. 그 순간 깨달아버렸다.
저의 그 마음은 정우의 다정함과 따뜻함을 먹고 자라는 게 아니었다. 다정하지도 따뜻하지도 않았는데, 한 번 맞물려 닿았던 입술 하나만으로 억눌렀던 모든 감정들이 이리저리 터져 나왔다. 하진은 아직도 정우의 체온이 엉망으로 묻은 입술을 손바닥으로 꾹 눌렀다. 입술이 맞물렸던 그 찰나의 느낌이 너무나도 생생해 몸이 다 저릿했다.
“…….”
이제 정말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강하진이 차정우를 미친 듯 욕망하고 있음을. 하진은 견고하지 못하게 쌓아 올려진 둑이 무너지며 흘러내리는 감정을 다시 안으로 넣고 또 넣었다. 두 손이 차정우로 흠뻑 젖어버렸다. 그것을 닦아낼 수 없어 하진은 기꺼이 그 손바닥 위로 혀끝을 대었다. 그리고 혀끝에 묻은 정우를 삼켰다. 하진은 어렴풋이 짐작했다. 이제 정말 돌이킬 수 없음을.
***
하진은 연기하기 시작했다. 머릿속이 전부 차정우였다. 입술이 맞물렸던 그 순간이 늘 꿈에 나왔다. 꿈에서는 정우가 혀로 입술을 가르며 들어왔다. 정신없이 혀끝을 머금고, 서로의 몸을 매만졌다. 아침에 눈을 뜨면 자주 몸이 달아올라 있었다.
죄책감이 들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꿈을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것도 아니고, 하루아침에 정우를 향한 마음을 접을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하진은 정우를 원했다. 정우의 큰 손을 보면 그 손이 몸을 만져 주는 생각을 하고, 베개에 몰래 정우의 향수를 한 번 뿌리기도 했다. 그렇게 멈출 수 없으면서도 하진은 정우의 앞에서 연기했다. 괜찮은 척, 나아지고 있는 척, 네 손이 닿아도 발정하지 않는 척.
“오늘 뮤직비디오 촬영 끝나고 인터뷰 있는 거 알지? 중요한 연예 프로그램이니까 힘들어도 잘 해내자.”
하진은 전처럼 자주 웃으려고 노력했다. 정우를 잊고 예전으로 사이를 돌리기 위한 노력을 모두 연기하는 것에 쏟아부었다.
“아, 조명 진짜 세다. 조명 때문에 땀이 줄줄 나.”
“저도요. 그런데 아까 찍힌 거 보니 조명 때문에 진짜 멋있어 보이던데요?”
“그러니까 참고 있다. 역시 돈은 거짓말 안 해. 들인 만큼 티가 나지.”
해성이 땀을 티슈로 꾹 눌러 닦으며 모니터를 하기 위해 움직였다. 평소 땀이 많이 나는 편이 아닌 하진도 더워 이마에 땀이 맺혔다. 살짝 티슈로 닦아낸 하진이 해성의 옆에 딱 붙어 섰다.
“와, 형 오늘 화면 진짜 더 잘 받네요. 헤어랑 의상 그냥 딱 형 거예요.”
늘 그러는 것처럼 정우가 뒤로 다가와 하진을 끌어안았다. 정우의 두 팔이 허리로 감기고, 저보다 마디가 굵고 긴 손가락이 배 위에서 단단히 맞물리는 순간 하진은 아랫배가 당기는 느낌을 받았지만, 전혀 티 내지 않았다. 오히려 아주 예전에 그랬던 것처럼 제 배 위에 맞물린 정우의 손 위를 덮고 만지작거렸다. 정우의 손가락 위를 문지르고, 덮는 느낌이 꽤 야릇했다.
하진은 장난치듯 그 손가락을 하나 펴 잡고 앞으로 쭉 당겼다. 몸이 더 밀착되고, 목덜미와 뺨으로 정우의 웃음소리와 목소리가 닿아왔다. 하진은 도저히 화면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오, 차정우!”
정우가 준비된 스포츠카에 앉아 노래하는 장면이 나오자 해성과 영우가 환호했다. 누가 봐도 좋을 수밖에 없는 모습이었다. 비현실적으로 잘생긴 얼굴과 단단하게 벌어져 직각으로 떨어지는 어깨와 시선을 내려도 끝이 없는 다리 길이에 홀릴 수밖에 없었다. 정우가 운전석에서 내려 보닛 위로 한 번에 뛰어 올라가 섰고, 카메라가 정우의 날렵하고 윤이 나는 구두부터 비추며 위로 올라갔다.
“이야, 아직도 다리야. 끝이 없다, 끝이 없어. 노래 끝날 때까지 얼굴 나오는 거 맞지?”
영우의 과장된 호들갑에 정우가 작게 소리 내어 웃었다. 하진은 귓가에 닿아 체온과 함께 스며드는 정우의 목소리에 입술을 꾹 감쳐물었다. 정우가 닿은 목덜미가 후끈거렸다. 아랫배가 팽팽히 당기고, 허리가 움찔거렸다. 정우가 웃거나 움직이며 몸이 비벼질 때마다 자꾸 자위하고 싶은 기분에 휩싸였다.
“아포제 오늘 고생 많았어. 기대 이상이야. 왜 나오자마자 그 난리인지 딱 알겠네. 수고했어.”
뮤직비디오 감독이 멤버들 한 명 한 명과 모두 인사를 나누었다. 아침에 이 세트장 안으로 들어와서 지금은 밤이었다. 이제 인터뷰 촬영만 하고 나면 집에 갈 수 있었다. 가서 좀 씻고 침대와 한 몸이 되어 자고 싶었다.
“자, 지체 없이 인터뷰 바로 갈게요. 피곤하시니까 한 시간 안에 끝내겠습니다.”
아포제가 막바지 촬영을 하는 동안 한쪽에 이미 인터뷰 세팅을 전부 해놓고 있던 방송사 조연출이 매니저와 이야기를 나누고 촬영 시작을 알렸다. 하진은 정우와 같이 의자 여섯 개가 놓인 쪽으로 가 앉았다. 곧 베테랑 인터뷰어로 유명한 오지영이 나와 멤버들과 각각 인사를 나누었다. 화면에서 보던 것처럼 굉장히 발랄하고 톡톡 튀는 느낌이 그대로 나서 신기했다.
“대본은 다 보셨죠? 질문 내용이랑요.”
“네, 숙지했습니다.”
“고맙습니다. 오늘 종일 촬영하시느라 피곤하실 텐데 한 번에 빨리 끝내는 걸로 하겠습니다.”
“오래 대기하셨을 텐데 최대한 저희도 빨리 잘 하도록 하겠습니다.”
“저는 너무 좋았어요. 대기하면서 곡도 듣고, 촬영하는 것도 보고. 아, 물론 비밀은 지키겠습니다.”
피곤하지만 기분 좋은 웃음이 촬영장 안으로 퍼졌다. 화기애애해진 분위기를 놓치지 않고 바로 촬영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