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포제-15화 (15/122)

#15

“이진 씨 연락처예요. 정우 씨 마음에 든다고 한번 식사나 부담스러우면 커피라도 한잔하고 싶다고 하더라구요.”

“저 미성년자라 만나도 소문 별로 안 좋게 날 것 같은데요.”

“스물 안 넘었어요?”

“네. 열아홉이에요.”

잠시 침묵이 흘렀다. 정우는 바깥에서 매니저가 부르는 소리에 그쪽을 한 번 보고 다시 디자이너를 바라보았다.

“주신 거니까 받기는 할게요. 그냥 좋게 봐 주셔서 감사하다고 전해주세요.”

“아… 그럴게요. 미안해요.”

디자이너에게 묵례한 정우가 고개를 들어 그 뒤에 선 하진을 바라보았다. 괜히 민망해진 디자이너가 서둘러 자리를 떠났고, 정우는 손에 든 종이를 확 구기며 하진에게 가까이 다가가 팔을 잡았다.

“빨리 나오래요. 팬들 몰렸다고.”

“…응.”

하진은 정우의 손에 들린 구겨진 종이를 바라보았다. 연락처가 구겨져서 좋았다. 거기까지 생각한 하진이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진짜 어디까지 바닥을 보일 건지 궁금했다.

“머리 가리고.”

정우는 그렇게 멍하니 선 하진을 앞에 세우고 후드 모자를 씌워주었다. 그리고 앞에 줄을 가볍게 당겨 조였다. 하진의 작고 하얀 얼굴 속 이목구비만을 남겨둔 채 머리가 후드 모자 안으로 숨었다. 그제야 만족했다는 듯 정우가 웃으며 다시 하진을 데리고 샵을 나섰다.

샵을 완전히 나서는 입구에는 매니저가 다른 멤버들과 함께 서 있었다. 전부 나오면 한 번에 차로 가서 올라야 하기 때문이었다. 정우와 하진이 오자 지창과 차를 몰고 온 또 다른 매니저가 양쪽에서 멤버들을 감싸고, 다가오는 팬들을 막았다.

“빨리 타자, 빨리!”

그사이에 정보 공유가 된 건지 팬들이 열 배는 더 늘어나 있었다. 그 많은 숫자가 우르르 가까이 다가오자 피하기가 어려웠다. 하진은 매니저 형이 막아주는 것에 밀리며 걸음을 옮겼다. 팬들 중 한 명이 손을 뻗어 하진의 팔을 잡았고, 자꾸만 밀려 그쪽으로 몸이 기울었다. 정우가 그런 하진의 어깨를 팔로 감싸 확 자신의 쪽으로 당겼다. 그리고 품에 안듯 보호하며 차 안으로 타는 것을 도와주었다.

“와, 장난 아니다. 아까는 저 정도 아니었는데. 하진이 괜찮아?”

“네, 괜찮아요.”

하진은 정우를 바라보았다. 정우가 갑자기 손을 뻗어 하진의 손을 잡아들었다. 놀란 하진이 반사적으로 손을 빼내려 뒤로 움직였지만, 정우는 놓아주지 않았다.

“긁혔네.”

“응?”

그제야 손톱에 긁혀 살짝 부어오른 게 보였다. 하진은 심각하게 보는 정우를 보다가 슬쩍 손을 빼냈다. 열감이 살짝 느껴지기는 하지만 뭐 이 정도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별거 아닌데 뭐. 하나도 안 아파.”

“형은 앞으로 무조건 나랑 같이 다녀요. 안 되겠어.”

“아까는 밀려서 그런 거야. 나도 힘세거든. 그리고 내가 팔을 확 빼면 그 팬분도 넘어질 것 같아서.”

“그래도 안 돼요. 내가 형 데리고 다녀야지. 차에 제일 먼저 태우고 그래야 마음이 놓이겠어.”

“내가 우리 막내 챙겨야지.”

뒤에서 대화를 듣던 해성이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그리고 하진에게 소곤소곤 거리는 것처럼 손을 들어 모션을 취했다. 하지만 목소리는 밴 안에 있는 누구에게도 들릴 만큼 컸다.

“원래 막내 말 잘 들어야 팀 오래가는 거야. 그리고 키 큰 사람이 형이다. 안 그래요, 인규 형?”

“맞아. 하진아. 우리 큰형 말씀 잘 들어.”

인규의 맞장구로 웃음이 번졌다. 하진은 이 분위기를 이렇게 장난스럽게 넘어갈 수 있어 다행이라 생각하며 네, 대답했다. 그리고 조여진 후드 끈을 느슨하게 만들고 모자를 벗었다. 살짝 눌린 머리를 손으로 아무렇게나 털자 금세 다시 예쁘게 자리 잡았다.

하진은 자연스럽게 웃음을 거두며 창밖으로 시선을 옮겼다. 창밖의 모든 것들이 눈에 제대로 담기도 전에 스쳐 지났다. 이렇게 스쳐 지날 수 있는 감정이면 얼마나 좋을까. 결국 모든 생각은 정우로 이어졌다.

“…….”

현이진. 하진 역시 현이진을 알고 있었다. 요즘 가장 핫한 배우고, 캐스팅이 잘 되는 배우였다. 외모며 연기력이며 무엇 하나 빠지지 않아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었다. 아마 나이는 저랑 동갑이거나 한두 살 많을 것이었다. 그런 유명한 배우가 정우에게 바로 관심을 보이는 게 신기하기도 하고, 또…….

“…….”

싫었다. 어떻게 포장을 해보려고 해도 포장이 되지를 않았다. 싫다. 싫다는 말 외에는 표현할 말이 없었다. 자꾸 연락처를 주던 디자이너와 그 연락처를 받은 정우가 떠올랐다. 손에서 종이가 구겨지기는 했지만, 그래도 아직 그건 정우에게 있었다.

“…….”

사실 현이진의 문제도, 또 그 종이를 받은 정우의 문제도 아니었다. 지금 가장 문제는 그 구겨진 종이 하나에 감정을 이입하는 저였다.

연애를 하지 말라는 회사의 당부나 조항은 없지만, 그래도 이제 막 시작한 신인이 연애에 열을 올릴 필요는 없었다. 지금 가장 중요한 것은 팀이었다. 개인이 팀에게 해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걸 알고 있었다. 한 명이 침몰하면, 결국 팀도 같이 침몰하게 된다. 이제껏 봐 온 많은 아이돌들이 그랬었다. 말실수 한 번으로, 순간의 화를 참지 못해서, 사생활 관리를 하지 못해 수도 없이 세상에 알려지고, 무너졌다.

“…….”

그래, 현이진의 문제가 아니었다. 결국 또다시 모든 것은 저만의 문제였다. 하진은 창에 머리를 기댄 채 한숨지었다. 제가 정우를 좋아하는 것을 지금은 정우만 알지만, 만일 다른 누군가가 알게 된다면 정말 끝이었다. 저 하나 때문에 팀이 흔들리는 것은 물론이고, 다시 붙일 수도 없게 조각나 버릴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진은 밀려드는 괴로움에 아플 만큼 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냥 형이 예뻐서 봤어요.」

하지만 정우의 다정함이 그 괴로움보다, 아픔보다 더 컸다. 오늘도 아니라고 부정하고, 이제 더는 안 그런다고 외면해 보지만, 하진의 마음은 정우의 따뜻함을 먹고 자라났다. 고개를 돌려도 보이고, 눈을 감아도 닿아올 만큼 그렇게 아주 가득 커졌다. 그래서 하진은 정우가 다정하지 않기를 바랐다. 다정하지 않은 정우를 보는 건 아주 힘들겠지만, 그래도 마음을 정리할 수는 있지 않을까.

두근대는 마음과 괴로운 마음이 공존했다. 하진은 그 두근대는 괴로움을 끌어안은 채 다시 눈을 감았다. 앞으로 나아가는데, 뒤로 끌려간다. 결국은 또다시 정우의 근처였다.

***

오전 이른 시간부터 촬영이 있었다. 새벽부터 샵에 가서 어제 한 머리를 감고, 예쁘게 스타일링했다. 짙지 않은 메이크업을 하고, 촬영이 있는 스튜디오로 이동했다. 두 번째 미니앨범 재킷과 속지 사진을 찍는 날이라 저녁도 굶고, 얼굴이 붓지 않도록 신경 썼다. 그 덕분에 배는 고프지만, 스태프들의 반응은 아주 좋았다.

분위기가 전혀 다른 세 개의 스튜디오에서 각각 다섯 벌의 의상을 갈아입으며 종일 촬영을 해야 했다. 의상에 따라 헤어를 바꾸고, 렌즈나 메이크업도 조금씩 수정했다. 하진은 완전히 이마를 덮은 스타일로 촬영을 하다가 자연스럽게 반을 올려 이마를 반쯤 드러낸 채 촬영했다.

“아포제는 이거 뭐 B컷이 없어. A컷 골라서 앨범에 넣고, 나머지는 포토북 제작한다던데 이거 분량 엄청나겠네. 사진 고르려면 소속사에서 고생 좀 하겠어요. B컷이 정확하게 있어 줘야 고르기가 쉬운데. 자, 좋습니다. 하진 씨 수고했어요. 자, 마지막으로 우리 막내.”

다른 멤버들은 이미 촬영을 마치고 녹다운이 되어 대기실에 있었다. 아까 분명 팬들이 보내준 맛있는 도시락을 점심으로 먹었는데도, 또다시 배가 고팠다. 옷을 갈아입고, 계속 이런 조명 아래에서 사진을 찍고, 영상 촬영을 하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힘이 드는 게 신기할 정도였다.

하진은 배고픔이 느껴지는 배를 한 번 문지르고, 대기실에 가려다가 멈추었다. 그리고 모니터를 보고 있는 촬영감독 옆에 섰다. 앞에서는 포토그래퍼가 정우를 여러 각도에서 담고 있었다.

“내가 아이돌, 배우 이런 촬영 수도 없이 하며 살지만, 이렇게 보정 필요 없는 그룹은 처음이네. 저것 좀 봐요. 무슨 저 나이에 이런 분위기가 나와.”

하진은 창가 아래 테이블 옆으로 앉아 벽에 기대어 눈을 감은 정우를 바라보았다. 자연스럽게 만진 스타일과 입고 있는 짙은 색의 슈트가 아주 잘 어울렸다. 외국 명품 브랜드라 팔다리가 더 길게 나온 슈트라는데 하나도 수선을 할 필요가 없었다. 아까 대기실에서 스타일리스트 누나들이 너무 잘 어울린다며 기뻐했던 게 떠올랐다.

“자, 이제 테이블에 걸터앉아 볼까요?”

포토그래퍼의 지시대로 정우는 움직였다. 테이블 끝에 걸터앉아 창을 보기도 하고, 카메라를 정면으로 응시하기도 했다. 하진은 멍하니 그런 정우를 바라보았다. 늘 느끼는 거지만, 태어나 저렇게 잘생긴 얼굴을 본 적이 없었다. 날마다 내내 보는데도 볼 때마다 정말 대단한 얼굴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수고하셨습니다. 아, 진짜 잘생겼다. 카메라가 오늘 호강했네요. 고생 많았어요.”

하진은 멍하니 이쪽으로 성큼성큼 다가오는 정우를 바라보았다. 거리를 두고 있던 정우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하진은 가까워지는 정우에 얼른 옆으로 자리를 비켜 주었다. 그런 하진을 본 정우가 다시 하진을 당겨 제 앞에 세웠다. 그리고 늘 하던 것처럼 뒤에서 끌어안고 어깨 위로 얼굴을 내렸다. 정우가 쓰는 향수 향이 확 끼쳤다.

“자, 결과물 좀 봐요. 와, 분위기 좋고, 마스크, 피지컬 뭐 두말할 것도 없이 좋고. 이건 뭐 A컷, B컷 이렇게 나누는 의미가 전혀 없는데.”

정우가 하진을 안은 채 얼굴을 앞으로 더 가까이 가져갔다. 하진은 등 뒤로 완전히 밀착된 정우에 숨도 제대로 쉬지 못했다. 사람들도 많고, 괜히 그 눈이 의식되어 배 위에 단단히 맞물린 정우의 손을 풀려고 했지만, 정우는 놓아주지 않았다.

“잘 찍어주신 덕분이에요. 고맙습니다. 고생 많으셨어요.”

“모델들이 워낙 좋아서 오늘 빨리 끝났어요. 수고들 했습니다. 앨범 대박 나기를 바랄게요.”

“고맙습니다.”

정우는 그제야 하진을 놓아주었다. 하진은 정우를 돌아보았다. 목이 갑갑했는지 타이를 느슨하게 풀던 정우가 화난 것 같은 하진의 표정에 고개를 기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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