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하진은 작곡가 뒤 소파에 앉은 네 명의 멤버들을 바라보았다. 인규가 잘하라는 듯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고, 해성과 영우가 손을 합쳐 장난스럽게 하트를 만들었다. 그 하트를 보고 웃은 하진이 들려오기 시작하는 정우 파트에 집중했다.
“…….”
정우가 녹음하는 것을 보면서도 내내 느낀 거지만, 정말 목소리가 좋았다. 목소리가 흘러 들어가 닿는 모든 곳이 녹아버릴 만큼 부드러우면서도 힘이 있었다. 중저음의 그 목소리는 자꾸만 눈을 감고 싶게 만들었다.
그렇게 자신의 빈 곳에 노래를 하려던 하진은 순간 정우와 마주친 눈에 박자를 놓쳐버렸다. 정우가 저를 보고 있었다. 거리가 있는데, 꼭 바로 앞에서 보고 있는 것처럼 시선이 강하게 닿아 왔다. 하진은 아무 소리도 내뱉지 못했다.
“…죄송합니다.”
“자, 다시 한번 할게.”
다시 앞으로 돌아가 정우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하진은 정우를 보지 않고 앞에 놓인 마이크만을 바라보았다. 한동안 괜찮다고 생각한 심장이 빠르게 두근대기 시작했다.
정우와 더는 눈을 맞추지 않았고, 하진은 전부 한 번에 녹음을 마쳤다. 메인보컬이라 파트가 많았다. 그것도 대부분 킬링 파트라 불리는 중독성이 강하고, 귀에 쏙쏙 박히는 파트가 많아 녹음을 할 때 신경을 써야 했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을 한 번에 완벽하게 마친 것이었다.
“하진이 덕분에 우리 오늘 두 시간은 빨리 끝났다. 목 상태도 좋고, 고음 좋고, 애드리브 좋고, 뭐 하나 다시 할 게 없네. 자, 수고들 했어.”
프로듀서가 일어나 박수를 치는 것에 멤버들도 모두 고개를 꾸벅 숙여 인사했다. 그리고 긴장 가득해서 들어왔던 것과는 달리 가벼운 표정으로 녹음실을 나섰다. 큰 산을 하나 넘어 정말 다행이었다.
“아, 이제 샵 가죠? 아, 염색하는 동안 자야지.”
“샵에 자러 가는 사람은 영우 너밖에 없을 거야.”
“에이, 형. 조해성 저번에 샴푸 하다가 딥슬립해서 119 부를 뻔한 거 기억 안 나세요? 전 그 정도는 아니에요.”
영우의 말에 복도 가득 웃음이 터졌다. 해성이 그대로 영우의 뒤에서 팔로 목을 걸었다. 그리 세게 하지도 않았는데도 영우는 죽어가는 사람처럼 소리를 냈다. 하진은 그런 둘을 보며 소리 내어 웃었다. 아마 영우와 해성이 없었더라면, 팀은 무척 조용했을 것이었다. 두 형들이 있어서 심각한 와중에도 한 번씩 웃을 수 있어 좋았다.
샵으로 가는 동안 밴에서 모두가 잠들었다. 하진은 차에 타자마자 눈을 감고 잠을 청했다. 그래도 요즘은 자려고 마음을 먹으면 어느 정도 잠들 수 있었다. 자려고 아무리 노력을 해도 잘 수 없던 얼마 전과는 분명 달라졌다. 하진은 이 작은 변화들을 붙잡고 위태롭게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형, 하진이 형.”
익숙한 목소리, 제가 좋아하는 목소리가 귓가로 흘러들어왔다. 하진은 꿈과 현실의 경계가 흔들림을 느끼며 눈을 떴다. 고개를 돌리자 가까운 곳까지 와 있는 정우의 얼굴에 하진의 눈이 확 커졌다.
“다 왔어요.”
“…어? 아… 어.”
놀란 것을 애써 감추며 하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정우가 먼저 차에서 내려 아직 차에 탄 하진을 바라보았다. 하진은 얼른 정우가 앉았던 곳을 손으로 짚은 채 움직여 차에서 내렸다. 자다 바로 깨기도 했고, 또 정우의 얼굴과 가까이 마주한 충격에 순간 다리에 힘이 잘 들어가지 않았다. 하진의 몸이 기울었다. 분명 바닥을 발로 디뎠는데, 다리가 사라진 것처럼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정우가 얼른 기울어지는 하진의 몸을 단단히 잡았다. 헤어샵 앞에 서 있던 팬들이 그 상황을 보며 여기저기에서 환호를 하기도 하고, 사진을 찍기도 했다. 하진은 놀라 얼른 그런 정우에게서 몸을 떼어냈다. 몸이 떨어졌는데도, 아직 그 품에 닿아 있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미안해. 다리에 힘이 빠져서.”
“뭐가 미안해요. 이제 괜찮아요?”
“…응. 괜찮아. 잠이 덜 깼나 봐.”
어색하지 않으려고 웃은 하진이 제 이름을 부르는 팬들을 돌아보았다. 팬들 정보력이 정말 좋다는 말은 선배들에게 많이 들었지만, 정말 어디 알려지지도 않은 헤어샵 앞에까지 알고 와 있을 줄은 몰랐기에 조금 놀란 게 사실이었다.
하진은 웃으며 양쪽으로 손을 흔들었다. 여기저기에서 잘생겼어요, 예뻐요, 하진 오빠 같은 말들이 동시다발적으로 터져 나왔다.
하진이 워낙 다정하게 굴자 팬들이 하나둘 가까이로 다가왔다. 정우가 얼른 하진을 잡아 샵 안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비명 같은 소리들이 닫히는 문 뒤로 들려왔다. 하진은 뒤를 한 번 돌아보고 다시 정우를 바라보았다.
“지창이 형이 그랬잖아요. 이런 비공개 일정에 오는 팬들한테 노출 많이 되지 말라고.”
“그래도… 보러 와 준 분들인데…….”
“그러다 다치면 어쩌려고 그래요.”
“팬들이 왜 나를 다치게 하겠어.”
“못 살아. 사람들 많이 몰리면 넘어지거나 다칠 수도 있잖아요. 형은 너무 착해서 문제야.”
이런 나를 다 알면서도 아무렇지 않게 받아주는 네가 더 착하지. 하진은 고개를 기울여 저를 바라보는 정우를 향해 작게 웃음 지었다.
“…….”
정우와 닿았던 몸이, 또 정우가 잡은 팔이 아직도 화끈거렸다. 괜찮았었는데 또 이런다. 하진은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반갑게 인사하는 샵 대표님에게 고개 숙여 인사했다. 그리고 안내를 받으며 2층으로 올라갔다.
1층은 일반인의 예약을 받아 운영을 하고, 연예인들은 2층을 이용했다. 아무래도 스타일이 바뀌는 것 하나도 강력한 스포일러가 될 수 있기에 조금 더 프라이빗한 2층을 사용하는 것이었다. 하진은 2층으로 올라가 대표가 권하는 자리에 앉았다. 옆에서 네 명의 멤버들이 쭈르륵 일렬로 자리에 앉는 것을 보니 뭔가 귀여워 웃음이 나왔다.
“하진 씨는 오늘 탈색 두 번 정도 하고, 부드러운 컬러 쪽으로 입힐게요. 얼굴이 하얗고 이목구비가 예뻐서 음, 부드러운 오렌지 컬러 너무 잘 받을 것 같아요. 그렇다고 진짜 주황색으로 한다는 건 아니고, 오렌지빛 나는 자연스러운 브라운이라고 생각하면 돼요. 이번 컨셉이랑도 딱 어울리고 너무 예쁘겠다. 아, 커피 줄까요? 커피도 있고, 녹차, 아이스티에 탄산음료도 다 있고.”
“아, 저 커피 마실게요. 차가운 걸로요.”
“알았어요. 금방 준비해 줄게요.”
대표가 이곳에서 가장 뛰어난 헤어와 메이크업 아티스트이다 보니 직접 모든 것을 총괄해 디자인했다. 한 명씩 돌아가면서 콘셉트를 설명해 주고, 원하는 음료와 푸드까지 꼼꼼하게 체크했다. 더 대단한 것은 다섯 명이 다 다른 것을 말했는데도 하나 틀리지 않고 어시에게 전달하는 것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어시가 아이스 아메리카노와 가볍게 곁들일 수 있는 비스킷 같은 것들을 전해 주었다. 하진은 얼른 커피를 한 모금 가득 빨아들였다. 아침에 커피를 마시기는 했는데, 워낙 바쁜 하루를 보내 그런지 카페인이 너무 맛있게 느껴졌다. 그리고 같이 준 초콜릿 맛 캐러멜과 커피 맛 비스킷도 너무 맛있어서 막 행복해질 정도였다.
“형.”
“응?”
세 개씩 놓아준 비스킷을 전부 먹고, 캐러멜을 오물오물 먹던 하진은 옆에서 정우가 부르는 것에 얼른 고개를 돌렸다. 그런 하진을 본 정우가 웃었다. 그리고 손을 내밀었다. 하진은 정우가 내미는 것을 받아들었다. 지금 제가 숨도 안 쉬고 먹은 비스킷과 캐러멜이었다.
“너 먹지.”
“형이 먹는 게 더 행복할 것 같아요.”
“내가 너무 숨도 안 쉬고 먹었지.”
“그렇게 맛있어요?”
“응! 너도 먹어 봐. 맛있어.”
“형 먹는 거 볼래요. 먹는 것만 봐도 배부르다는 게 이런 거구나. 형 먹는 것만 봐도 내가 다 행복하네.”
하진은 웃는 정우를 보며 비스킷을 하나 더 뜯었다. 그리고 커피 향이 가득한 것을 한입 베어 물었다. 군것질 너무 많이 한다고 매니저 형이 보면 혼낼 것 같지만, 그래도 지금은 멈출 수가 없었다. 소리도 크게 내지 않고 오독오독 비스킷을 먹은 하진이 캐러멜을 들어 포장을 벗겼다. 그리고 정우에게 내밀었다.
“형 먹어요.”
“너도 하나 먹어. 그래야 나도 너 보고 행복해지지.”
“…….”
저를 가만히 보는 정우의 시선에 하진은 제가 뭔가 말실수를 한 건 아닌가 싶어 입술을 꾹꾹 깨물었다. 저에게 형, 멤버 외의 마음이 없는 정우는 몰라도, 정우에게 다른 마음이 있는 제가 할 말은 아닌 것 같기도 했다. 보고 행복해진다는 그 말이 다른 의미로 전달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마음이 급해졌다.
“다른 의미가 있는 게 아니라…….”
“알아요. 그냥 형이 예뻐서 봤어요.”
“…어?”
“말 그대론데.”
정우가 그대로 몸을 기울여 하진의 손끝에 들린 캐러멜을 먹었다. 손으로 받아서 먹을 줄 알았던 하진은 정우의 입술이 다가오는 것에 놀라 그대로 굳었다. 손끝에 아주 살짝이지만, 정우의 입술이 스쳤다. 괜찮다고 애써 생각했던 모든 것들이 통째로 흔들리고, 전혀 괜찮지 않다고, 너는 다시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고 말하고 있었다.
하진은 얼른 손을 가져와 괜히 비스킷 껍질만 만지작댔다. 미끈한 비닐을 만져도 손끝은 이미 정우의 체온으로 휩싸여 있었다. 그 온기를, 그 온기에서부터 뻗어가는 모든 감정을 떨쳐낼 수가 없었다.
“…….”
탈색을 하러 디자이너가 와서 뒤에 선 뒤에야 하진은 통째로 흔들리는 스스로를 붙들 수 있었다. 정우의 시선이 거둬지고, 짙은 색의 머리칼에서 색이 빠져나가는 동안 하진은 원래의 시작점이 아니라, 정우에게 가까운 지점으로 돌아가려는 마음을 꽉 붙드느라 커피 한 모금도, 그렇게 맛있던 비스킷 한 조각도 더 먹을 수 없었다.
***
머리 색과 스타일을 바꿨을 뿐인데 분위기가 확 달라졌다. 하진은 달라진 멤버들을 한 명씩 보며 감탄했다. 다섯 명 중에 제 머리색이 가장 밝아서 조금 부끄럽기도 했지만, 멤버들은 물론이고 샵 안에 스태프들도 모두 너무 잘 어울린다고 말해줘서 정말 다행이었다.
하진은 아직 낯선 거울 속 머리색을 보다가 멤버들을 따라 1층으로 내려갔다. 그때 정우를 따라 내려온 디자이너 한 명이 은밀하게 정우를 붙잡는 게 보였다. 하진은 가장 마지막으로 계단에서 내려가다가 걸음을 멈추었다.
“정우 씨, 배우 현이진 씨 알죠. 아역부터 한. 얼마 전에 주말드라마도 대박쳤는데. 요즘 제일 잘 나가잖아요.”
“아… 네. 알아요.”
“이진 씨가 우리 샵 다니거든요. 아포제도 우리 샵 다닌다고 얘기가 나왔는데, 이거 정우 씨한테 좀 전해달라고 하더라구요.”
디자이너가 정우에게 무언가 종이를 내밀었다. 엿듣고 이렇게 보려고 한 건 아닌데 타이밍이 참 이상하게 되어 버렸다. 하진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입술만 꾹꾹 깨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