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눈 떠요.”
“…….”
“화내려는 거 아니에요.”
온기가 멀어졌다. 하진은 그제야 눈을 떴다. 하진의 위에서 몸을 거두어 침대로 걸터앉은 정우가 그대로 하진의 팔을 잡아 일으켰다. 움직이지 않던 몸이 정우의 손길 하나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형이랑 어색해지고 싶지 않아요. 불편해지기도 싫어요.”
“…….”
“변하지 않았다면, 이렇게 말 안 했을 거예요. 말해서 좋을 게 없으니까.”
“…….”
“그런데 형이 날 피하잖아.”
정우의 마지막 말에 바닥으로 떨어진 심장이 움찔거렸다. 하진은 고개를 들어 정우를 바라보았다. 그 진지하고 짙은 눈동자가 저에게 닿는 이 순간에도 두려움과 동시에 심장이 뛰었다.
“눈도 잘 안 보고, 말도 하다 말고, 손만 대도 밀어내고.”
“…미안해.”
“내가 뭐 잘못한 게 있나 생각도 해봤는데, 생각할수록 형의 그 행동들은 내가 뭘 잘못해서 나오는 게 아닌 것 같더라구요.”
“…….”
“그럼 뭘까. 피곤해서? 너무 힘들어서? 나한테 서운한 게 있어서?”
“…….”
“좋아해서?”
정우의 입에서 나온 아주 정확한 이유에 하진은 다시 고개를 푹 숙이고 눈을 감았다. 건조한 손이 하진의 얼굴을 뒤덮었다. 손바닥 안으로 숨어 이대로 사라지고 싶었다. 아니, 사라질 수 없다면 돌아가고 싶었다. 정우가 모르던 그때로, 제가 더 조심할 수 있는 그 예전으로. 비겁해도 어쩔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 비겁한 마음보다 우스운 것은 이 순간에도 정우를 좋아하기 전으로 돌아가고 싶지는 않다는 것이었다.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말이 안 되잖아요. 나도 형 좋아하는데, 난 형 안 피하잖아요. 날 좋아하는데 왜 나를 피하겠어요. 좋아하는 건 피해야 되는 일이 아닌데.”
다르니까. 네가 나를 좋아하는 것과 내가 너를 좋아하는 감정의 시작 자체가 다르니까. 하진은 괴로움에 입술을 꽉 깨물었다. 이런 식으로 마주하게 될 줄은 몰랐다. 아니, 저의 이 어색한 행동이 결국 사달을 낼 거라는 것은 어렴풋이 짐작했지만, 그게 지금일 줄은 몰랐다. 너무 갑작스러운 일이라 자꾸만 모든 감정들이 발밑으로 곤두박질쳤다.
“나랑 눈이 마주치면 전에는 웃고 다가오고, 장난치고 그러던 형이 어느 날부터는 눈을 피하고, 마주치지 않은 척을 하고, 잘 웃지를 않는 거예요.”
“…….”
“어제도 그랬죠. 땀 닦아 주는데 깜짝 놀라고, 사과하고.”
“…….”
“그리고 조금 전에도 그랬잖아요. 졸리지도 않으면서 대화 끝내려고 눈 감고.”
“…….”
“날 피하지만 않았어도 이렇게 얘기하지는 않았을 거예요.”
정우의 말은 하나도 틀린 게 없었다. 제가 정우에게 보인 행동 그대로를 아주 정확하게 캐치하고 있었다. 어색해진 부분이 뭔지,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도 다 잘 알고 있어서 변명을 할 수도 없고, 아니라고 발뺌을 할 수도 없었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고, 장난은 이쯤 하라고, 재미없다고 그렇게 화를 내는 게 맞을까. 아니면 웃으면서 네가 오해할 만했다고 미안하다고, 그런데 다른 이유가 있었던 거라고 둘러대는 게 맞을까. 아직도 이 상황을 빠져나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부질없는 생각들이 하진을 물고 늘어졌다.
“…미안해.”
그 모든 생각들 끝에 결국 하진이 소리 낼 수 있는 말은 단 하나였다. 미안해. 너를 그런 마음으로 좋아해서 미안해. 그런 걸로 신경 쓰이게 만들어서 미안해. 이런 상황까지 질질 끌고 와서 미안해. 결국 들킬 만큼 어색하게 굴어서 미안해. 이런 순간에도 너를 좋아하고 있어서 미안해. 그 미안해 안에는 아주 많은 말들이 묻어 있었다.
“형.”
“…….”
“하진이 형.”
부드러운 목소리. 단호함이 완전히 빠진 나긋한 정우의 목소리가 위축된 하진의 마음을 두드렸다. 이렇게 겁을 집어먹고 무서워하면서도 마음은 사라질 줄을 몰랐다. 한심하게도, 어이없게도 그랬다. 이 순간에도 정우의 다정함을 먹고 자라고 있었다.
“나 봐요.”
“…….”
볼 자신이 없지만 봐야 했다. 이제 데뷔한 지 6주였다. 6주 만에 제 감정 하나 때문에 모든 것을 망칠 수는 없지 않은가. 하진은 정우를 바라보았다. 다시 돌아갈 수 있는 마지막 기회였다. 지금이 아니면 정리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저를 바라보는 그 다정한 눈빛에 자꾸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너를 좋아하지 않았던 그때가 잘 기억이 나지를 않아. 마음이 꽉 조이며 아파왔다.
“형을 좋아해요.”
“…….”
“멤버로.”
“…….”
“사람으로.”
“…….”
“내 형으로.”
하진은 정우가 긋는 선을 바라보았다. 멤버, 사람, 형. 정우가 용납할 수 있는 관계들이었다. 강하진과 차정우는 멤버의 관계, 또 사람과 사람의 관계, 형과 동생의 관계로 지낼 수 있었다. 딱 거기까지였다. 정우는 제가 그것을 잊었다고 생각한 걸까. 하진은 흔들림이 없는 정우의 눈을 바라보았다.
“형이랑 오래 활동하고 싶고, 노래도 하고 싶고, 같이 있고 싶어요.”
“…….”
“형은 어때요?”
“…….”
“형은…….”
정우의 손이 느릿하게 올라와 하진의 뺨을 감싸 쥐었다. 하진은 그 따뜻함에 시선을 피했다. 어디에 둬야 할지 모를 시선이 이리저리 흔들렸다.
“나랑 다른 걸 하고 싶어요?”
“…그게 무슨…….”
“나랑 키스하고 싶어요?”
“…뭐?”
생각하지도 못한 말이 들려옴에 하진은 정우를 바라보았다. 커진 눈동자가 가득 정우를 담아냈다. 놀란 하진과는 달리 정우는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
“자고 싶은 적도 있었어요?”
“정우야, 그런 거, 그런 거 아니야. 나는 그저…….”
안 그래도 하얀 하진의 얼굴이 더 새하얗게 질렸다. 정우는 그런 하진을 보며 싱긋 웃었다. 그리고 하진의 뺨을 감싸고 있던 손을 내렸다.
“농담이에요. 분위기가 너무 무거우니까.”
“…노, 농담이 너무… 심하잖아.”
“그랬나. 미안해요. 놀라게 해서.”
“…아니야. 사과할 것까지는 없어. 내가, 내가 다 미안해.”
정우는 농담이라고 상황을 정리했지만, 그 얼굴은 전혀 농담처럼 보이지가 않았다. 이제 제가 정우의 저 말을 완전히 틀린 말로 만들어야 했다. 어디에서부터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떠올리고 또 떠올렸다. 그 시작을, 과정을 말할 필요는 없었다. 정우가 알아야 할 일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사달이 났으면, 수습을 하면 그만이었다. 정우가 먼저 말을 꺼냈으니, 이제 제가 수습을 하면 될 것이었다. 그래, 그러면 아무 문제도 없이 넘어갈 수 있었다.
“…아는 사람도 없고 한데 네 친절 받고 하니까… 내가 너무 많이 의지했었나 봐. 그러다 보니 이게 뭔가 싶은 감정이 됐어. 미안해.”
“이해 못 하는 건 아니에요.”
“그래도 네가 말한 것처럼… 그런 생각 하고 그런 거 아니야. 정말 아니야.”
거짓말. 하진은 스스로에게 토기가 치밀었다. 살아 보겠다고, 정우와 완전히 멀어지지 않겠다고 이 순간까지 거짓말로 위기를 모면하고 있는 자신이 한심하고 비겁해 견딜 수가 없었다.
“…조심할게.”
“조심한다고 해결될 일은 아닌 것 같아요.”
들켰다. 어물쩍 넘어가려다가 또다시 정곡을 찔려버렸다. 하진은 입술을 꽉 깨물며 정신을 차리려 애썼다.
“…안 그러려고 노력하는 중이야. 심각한 건 아니고, 네가 잘해주니까, 너랑 이렇게 오래 같이 있었고, 제일 친하고 하니까… 말했던 것처럼 너무 심하게 의지했어. 너무 오래 기대고, 깊게 기대다 보니까… 착각한 것 같아. 그래, 그런 것 같아….”
“우리 다시 전으로 돌아가요, 형.”
“…응. 그래야지.”
정우가 하진의 등을 부드럽게 쓸었다. 달래 주는 그 손길에 머리 안이 부드럽게 흔들리고 또다시 마음이 울렁였다. 이러면 안 된다는 생각조차도 나약히 흔들려 하진을 괴롭혔다.
“우리 이제 데뷔했잖아요.”
“…응.”
“이런 일로 형이랑 불편해지는 거 싫어요.”
“…….”
“팀을 위해서도 그렇지만, 우리를 위해서도… 부탁할게요.”
“…응. 미안해, 정우야. 이제 신경 쓰이는 일 없을 거야.”
“네. 형이 심각한 거 아니라고 했으니까.”
아무렇지 않은 것처럼, 말해놓고 나니까 정말 그냥 지나가는 착각이었던 것처럼 하진은 정우를 바라보고 미소 지었다. 등을 쓸어주는 따뜻한 손길에 울렁이는 마음도, 누르면 누를수록 넘쳐흐르는 감정도 전부 외면하기로 했다. 해야 할 일을 하는 것뿐이었다. 팀을 위해, 그리고 정우와 자신을 위해.
“배고프다. 형들 늦게 일어날 텐데 우리 먼저 아침 먹을까요?”
“…응.”
“팬케이크 만들어 줄게요. 형 내가 만드는 거 좋아하잖아.”
“…고마워.”
“만들고 있을게요. 천천히 나와요.”
여전히 미소가 묻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인 하진이 방을 나가는 정우를 바라보았다. 기다란 그 뒷모습이 멀어졌다. 그리고 열린 문이 다시 닫혔다.
“…….”
문이 닫히는 순간 하진은 무너졌다. 온몸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다. 아니, 몸이 무너지면 차라리 나을 것이었다. 머리끝까지 쌓인 감정들이 전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무너졌다. 그 쏟아져 내리는 것을 피하지도 못한 채 전부 뒤집어썼다. 강한 충격이 몇 번이고 하진의 머리를 치고 지났다. 하진은 그대로 고꾸라지듯 바닥으로 넘어졌다. 무릎을 꿇고 두 손으로 바닥을 짚은 채 숨을 헐떡였다. 정우와 이야기하는 동안 내내 숨을 참고 있던 것처럼 숨이 찼다.
「형은 나랑 키스하고 싶어요?」
너랑 키스하는 꿈을 꿔. 네가 온몸으로 나를 누르고 꼼짝도 못 하게 만드는 그런 꿈을. 나는 너를 밀어내지 않고 가득 끌어안는 그런 상상을 해.
「자고 싶은 적도 있었어요?」
네가 나를 결박하고, 일어나지 못한 그 순간에도 이게 꿈이 아닐까 생각했어. 꿈속에서처럼 네가 나를 누른 채 안아주는 건 아닐까. 너도 어쩌면 나를 좋아하는 게 아닐까. 두려움에 휩쓸려 흘러나오지는 못했지만, 나는 분명 그 순간에도 너를 욕망했어.
하진은 괴로움에 숨을 마구 쏟아냈다. 너무 놀라서, 무서워서 나오지도 않던 눈물이 이제야 마구 흘렀다. 이제 정말 현실을 직시해야 할 때였다. 더는 피할 곳도, 숨을 곳도 없었다.
“…….”
차정우가 알아버렸다. 불순하고 새빨간 강하진의 마음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