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포제-11화 (11/122)

#11

저 입술이 닿으면 어떤 느낌일까. 꿈속에서 뒤엉켰던 것처럼 뜨거울까. 정우는 어떤 키스를 할까. 키스 한 번 해 본 적 없는 제가 이런 생각을 한다는 자체가 우습지만,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며 하진을 곤란하게 만들었다.

“놀랐어요?”

“아……. 어, 조금.”

하진은 얼른 뒤로 한 걸음을 물러섰다. 입술이 진짜 닿은 것도 아니고 그저 혼자 생각만 했을 뿐인데 큰 죄를 지은 것 같았다. 그래서 정우의 얼굴을 제대로 볼 수가 없었다.

“우리 형 대견해요. 내려오면 막 울 줄 알았는데.”

“나… 쇼케이스 시작할 때부터 울고 싶었어. 그런데 참고 있는 거야. 나까지 울면 안 될 것 같아서.”

“나 형 울게 할 수 있는데.”

“응?”

하진이 뒤로 간 만큼 다시 한 걸음 앞으로 다가온 정우가 그대로 손을 들어 하진의 눈가를 톡 건드렸다. 하진은 이 상황을 기억하고 있었다. 전에 연습실에서도 이런 적이 있었다. 말도 안 되는 말들에 울고 싶었던 그때도 정우가 이렇게 제 눈가를 두드렸다.

“이런다고 내가…….”

눈동자가 뿌옇게 흐려지며 눈물이 넘쳤다. 참을 수 있었는데, 엄마 아빠를 봐도 참고 웃었는데, 이 두드림 한 번에 참을 수가 없었다.

“거 봐, 울잖아요.”

“…왜 울려.”

“우리 형 안아 주려고.”

하진은 뿌옇게 흐려졌다가 맑아지는 눈동자로 팔을 벌리는 정우를 바라보았다. 성큼 다가온 정우가 그대로 하진을 끌어안았다. 이러면 내가 자꾸 흔들리잖아. 너에게는 별것 아닌 일일 뿐인데 나 혼자 자꾸 오해하게 되잖아. 정우 탓을 할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자꾸 이랬다. 다정할 뿐인데, 그저 너는 따뜻할 뿐인데.

“고생 많았어요. 진짜 고생했어, 우리 형.”

“…….”

그동안 정신적으로 또 육체적으로 힘들었던 모든 것들이 머리 안을 스쳐 지났다. 끝이 아니라 또 다른 시작이지만, 그래도 지금은 이렇게 만족하고 싶었다. 숨이 차도 멈추지 않고, 햇볕이 너무 뜨거워도 달리고 또 달려 결국 첫 번째 목표점에 도착했으니까, 그냥 오늘은 나무 그늘 안에서 잠시 쉬고 싶었다.

“…고마워.”

그리고 미안해. 이렇게 다정하고 따뜻한 너를 그런 시선으로 봐서 미안해. 마음이 멈춰지지가 않아. 이 마음은 너의 따뜻함을 먹고 자라는 걸까. 그렇다면 나 평생 멈출 수 없을 텐데 어쩌지.

하진은 그렇게 정우의 품에서 한참이나 울고 또 울었다. 그럼에도 달라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

아포제가 정상에 오르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데뷔 미니앨범 가 신인임에도 음반판매량 50만 장을 기록했고, 한 달 동안 타이틀곡 <루프탑>은 1위를 굳건히 지켰다. 데뷔와 동시에 압도적인 음원 점수와 음반 판매 점수, 시청자 투표 점수를 받아 음악방송에서 1위를 차지했고, 트로피를 받았다.

믿기지가 않고, 꿈만 같은 일에 인규와 해성, 영우는 또다시 엉엉 울었고, 하진은 흐르는 눈물을 연신 닦아냈다. 그 옆에 서서 하진을 달래주는 다정한 정우의 모습은 기사화가 되었고, 큰 화제가 되었다. 모든 커뮤니티에서 울던 멤버 위로해 주던 걔는 누구냐며 궁금해했고, 압도적인 비주얼의 정우를 검색했다. 정우는 그 장면 하나로 모두의 다정한 연하남이 되었다.

그렇게 3주 동안 제대로 쉴 시간도 없이 풀로 스케줄을 다녔다. 예능에서도 섭외 전화가 빗발쳤지만, 신비주의를 위해 멤버들을 전부 보이고 소개해야 하는 예능은 모두 후일을 도모하며 거절했다. 대신 리얼리티와 음악 방송에 매진하며, 모든 관심을 끌어 모았다.

아포제의 리얼리티 방송인 <아포제 라이프>는 케이블 심야 시간에 방송이 되었음에도 1.8%라는 높은 시청률을 기록했다. 그 인기와 함께 아포제는 화제성 1위를 차지했고, 아포제의 노래는 전국 모든 번화가에서 울려 퍼졌다. 아포제를 향한 대중들의 압도적 관심에 한영엔터테인먼트의 주가 또한 하루가 다르게 올라갔다.

타이틀곡으로 한 달, 그리고 서브타이틀곡으로 팬서비스 차원에서 2주 정도를 더 활동했다. 데뷔 미니앨범 활동은 그렇게 메가 히트를 기록하며 막을 내렸다.

하진은 정신없이 몰아치는 활동이 좋았다. 잘 시간이 없어 밴에서 쪽잠을 자고, 사전녹화를 하러 새벽 세 시에 샵에 가 머리를 만져도 좋았다. 다른 생각을 할 틈이 없기 때문이었다.

“벌써 일어났어요?”

“늦잠 자는 것도 힘드네. 세 시간 자고 나니까 눈이 저절로 막 떠지는 거야. 일어나서 준비하려다가 아, 활동 끝났지… 하고 더 잤는데도 이 시간인 거 있지.”

“형도 그랬구나. 저도 그랬어요. 세 시에 한 번 깨고, 다섯 시에 한 번 깨고, 실컷 잤는데 일곱 시예요.”

그동안은 그랬었다. 6주 정도는 휘몰아치는 스케줄과 밀려드는 피로에 죄책감을 가질 여력이 없었다. 신인이라 늘 긴장을 하고 있어야 했고, 어디를 가든 선배들뿐이라 늘 주변을 살펴야 했다. 스케줄이 끝나면, 연습실로 가 연습을 하고 또 했다. 힘들었다. 분명 힘들지만, 그래도 하진은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을 만큼 힘든 그 시간이 좋았다.

“…….”

이렇게 시간이라는 게 생기면 어김없이 정우를 떠올리기 때문이었다. 바빠서 일에 집중하다 보면 달라지지 않을까 그런 생각도 했었다. 하지만 달라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역시 저의 이 마음은 정우의 다정과 따뜻함을 먹고 자라는 모양이었다.

하진은 어스름 밝아진 방 안에서 저를 보고 누운 정우를 바라보았다. 이렇게 가만히 누워 정우의 얼굴을 보는 것도 굉장히 오랜만이었다. 미니앨범 활동을 하는 내내 한 번도 자는 얼굴을 본 기억이 없었다. 정말 어디든 머리가 닿는 순간 잠이 들었었다. 잠이 부족해 몹시 힘들었는데, 지금은 그때가 그립기까지 했다. 정우와 이렇게 마주 보고 있는 게 더 힘들기 때문이었다.

“아… 갑자기 또 졸리네. 좀 더 자야겠다.”

이렇게 얼굴을 보고 있는 게 어색했다. 어색할 일이 아닌데, 어색하면 안 되는데 그럴 수가 없었다. 하진은 얼른 이불을 위로 더 끌어올리며 눈을 감았다. 눈을 감는 것과 동시에 시야가 차단되었다. 하지만 감기 전과 마찬가지로 저에게 닿는 정우의 시선이 느껴졌다. 궁금하지만 다시 눈을 떠 정우의 얼굴을 볼 자신이 없었다.

“…….”

알아버린 건 아닐까. 정우는 바보가 아니다. 눈치가 빠르고 똑똑한 애였다. 사람과 사람의 관계 중 한 명이 미묘하게 변해버린 것을 눈치채지 못할 리가 없었다.

알고도 묻지 않는 걸까. 자연스러운 변화라고 생각하는 걸까? 피곤해서 예민해진 탓이라고 생각하면 좋겠는데. 하진은 저에게 유리한 쪽으로 자꾸만 생각을 몰아갔다.

“형.”

갑자기 파고드는 정우의 목소리에 하진은 생각을 멈추었다. 마지막 생각이 아슬아슬하게 걸쳤다. 조금만 기울어도 바닥으로 떨어져 깨질 것만 같았다.

“눈 떠요.”

“…….”

“안 자잖아.”

쌓여가는 생각이 와르르 무너졌다. 이리저리 흩어져 깨진 생각의 파편들이 하진의 심장을 아프게 찔렀다. 정우의 목소리에 놀라 하진은 스스로를 제어할 틈도 없이 눈을 떴다. 여전히 저를 바라보고 있는 정우와 눈이 마주쳤다.

“…….”

“피하려면 연기나 잘하든가.”

“…그, 그게 무슨 말이야.”

“티 나요.”

“…뭐?”

“지금도.”

무슨 말을 하는 걸까. 하진은 지금 정우가 하는 말을 하나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아니, 너무 정확하게 알아버려서 피하고 싶었다. 피할 수밖에 없었다. 절대로, 절대로 지금 이 말을 알아들어서는 안 되니까 피하는 방법밖에 없었다.

농담하지 말라고, 자려는 사람한테 괜히 왜 그러냐고 한마디를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으면 그만이었다. 벽으로 몸을 돌려 눕고 그냥 그대로 잠들면 해결될 수 있었다. 하지만 깨어 있는데도 가위에 눌린 것처럼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하진은 여전히 정우를 보며 모로 누운 채, 몸을 일으키는 정우를 바라보았다.

“모른 척하려고 했어요.”

“…….”

“내가 알아서 좋을 게 없으니까.”

“…무슨 말 하는 건지 난…….”

“모르겠으면 그냥 들어요, 형. 알아도 그냥 듣고.”

하진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굳었다. 함께 데뷔 준비를 하고, 또 6주간의 활동을 하면서 굉장히 이성적이고, 냉철한 시선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 적은 있지만, 이렇게 단호한 말을 하는 것은 처음이라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하진은 일어날 생각도 하지 못한 채 멍하니 이 상황을 호도할 방법을 떠올리려 애썼다.

“언제부터였는지는 저도 잘 몰라요. 형이 말해줘야 알겠죠, 그건.”

“난… 나는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아직도 모르겠어요?”

뒷머리가 베개에 닿았다. 하진은 모로 누워 있던 몸이 바로 펴지는 느낌과 동시에 제 얼굴 위로 드리워진 정우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정우의 다리 사이에 제 몸이 있었다. 하진은 정우가 제 몸 위로 올라탔다는 것을 안 순간 몸을 일으키려 상체를 들어 올렸다. 하지만 일어날 수 없었다. 정우가 두 손으로 너무나도 가볍게 어깨를 눌러버렸기 때문이었다.

“…자, 장난치기는… 얼른 일어나야겠다. 커피, 그래! 커피 마실래?”

한 번 더 가벼움으로 넘어가기 위해 하진은 웃었다. 웃음이 나오지 않고 몸이 다 덜덜 떨리지만 그래도 웃었다.

“언제까지 피할 건데요.”

하지만 정우는 웃지 않았다. 진지했고 장난이 아니었다. 하진은 다시 손을 들어 제 어깨를 누른 정우의 손을 치우려 애썼다. 하지만 정우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왜 그래? 무섭잖아.”

“이 상황에서도 피하네.”

“…차정우.”

정우는 그대로 하진의 어깨를 누른 채 고개를 내렸다. 하진은 제 얼굴 위로 드리워진 정우의 그늘이 점점 짙어지고, 가까워지는 것에 어쩔 줄을 몰랐다. 단순히 떠보고 있는 걸까. 아니면 정말 다 알아버린 걸까.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

“…….”

코끝이 살짝 닿을 거리까지 내려온 뒤에야 정우는 움직임을 멈추었다. 하진은 꽉 감았던 눈을 천천히 떴다. 눈동자 가득 담기는 정우의 얼굴에 심장이 덜컹였다. 도대체 몇 번이나 깨졌다가 붙는 걸까. 제 심장을 보면 너덜너덜할 것이었다.

“…….”

동공이 확장되고, 정우가 닿은 모든 곳, 그리고 정우를 담은 모든 곳에 열이 오르기 시작했다. 그러지 않으려고 해도 그럴 수가 없었다. 막을 수도 없고, 멈출 수도 없다. 하진은 천천히 몸이 덥혀지는 느낌에 절망적으로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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