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포제-5화 (5/122)

#05

“오랜만에 보네. 와서 앉아.”

테이블 위에는 이미 차가 준비되어 있었다. 오 실장은 하진에게 앉으라고 권한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오늘 인터넷 봤어?”

“아, 네. 봤습니다.”

“내년에 보이그룹 데뷔시킨다는 말도 봤겠네. 연습실 난리지.”

“네, 계속 검색어에도 떠 있고 해서요.”

“하진이 너는 어떻게 생각해? 너 이대로 데뷔해도 될 것 같아?”

갑자기 닿아 온 돌리지 않은 질문에 하진은 잠시 할 말을 찾지 못했다. 하지만 곧 솔직한 마음을 말하기로 마음먹었다. 모든 것은 때가 있는 법이었다. 겸손도 필요한 자리가 있고, 필요하지 않은 자리가 있었다. 지금은 기회를 위해 겸손할 때가 아니라 솔직할 때였다.

“열심히 했고, 데뷔해도 잘할 자신 있습니다. 데뷔해도 될 만큼 성장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 주별 테스트, 월말 테스트, 개인 테스트 등급표를 봤는데, 아주 대단해. F등급에서 한 달 뒤에 본 테스트가 C등급. 그 뒤는 B, 두 달 전부터는 계속 A네. 자신 있을 만해.”

“…고맙습니다.”

오 실장은 손에 들고 있는 하진의 평가표를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하진은 그 평가표에 그려진 급격히 상승하는 그래프를 바라보았다.

“그럼 해 보자, 데뷔.”

“…네?”

“데뷔 조 마지막 멤버로 널 뽑았어. 내 개인적인 생각 당연히 아니고, 트레이너들, 사장님까지 전부 동의한 일이야. 너만 동의하면 돼. 잘할 수 있겠어?”

5개월. 단 5개월 만이었다. 하진은 지금 대답을 빨리 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아 서둘러 고개를 끄덕였다.

“네! 잘할 수 있습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좋아. 기대할게. 데뷔 조 들었으니까 이제 지하 벗어나야지. 3층 데뷔 조 연습실로 가면 돼. 가면 애들 다 있을 거야.”

“저기… 실장님.”

“응?”

“정우도… 데뷔하는 거 맞죠?”

이런 질문을 받을 거라고 예상이라도 미리 한 것처럼 오 실장이 소리 내어 웃었다. 그리고 소파 뒤로 몸을 기대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까 정우도 묻던데. 너도 뽑힌 거냐고.”

“어, 그럼…….”

“정우 제일 먼저 뽑혀서 3층 가 있어. 빨리 가 봐.”

“네! 고맙습니다!”

하진은 일어나 몇 번이고 오 실장에게 인사했다. 그리고 서둘러 실장실을 나섰다. 엘리베이터에 타서 3층으로 내려가는 시간도 굉장히 길게 느껴졌다.

5개월 만의 데뷔라니. 그리고 정우와 함께 데뷔를 할 수 있다니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하진은 5층쯤 내려왔을 때, 정말 믿을 수가 없어 뺨을 세게 꼬집어 보았다. 아픈 소리가 확 튀어나올 만큼 정말 아팠다. 꿈이 아니라는 것을 안 하진은 그대로 문이 열림과 동시에 달려 나갔다. 그리고 왼쪽으로 보이는 연습실 문을 활짝 열었다.

미리 와 있던 네 명의 시선이 달라붙었다. 하진은 저에게 다가와 확 끌어안는 정우를 가득 끌어안았다.

“아, 진짜 다행이다. 형 와서 진짜 다행이에요.”

“나도 너랑 데뷔해서 너무 좋아.”

꽉 맞물렸던 몸이 떨어졌다. 정우는 하진의 얼굴을 보다가 고개를 조금 기울였다. 그리고 하진의 오른쪽 뺨을 문질렀다.

“형 여기 왜 이렇게 빨개요?”

“응? 아… 거짓말 같아서 꼬집었거든.”

“얼마나 세게 꼬집었으면 이렇게 빨개졌어요. 못 살아.”

“몰라. 그런 거 하나도 몰라. 나 너무 좋아!”

하진은 밝게 웃으며 정우와 눈을 맞춘 뒤, 몸을 돌렸다. 그리고 인사할 차례를 기다리고 있는 익숙한 얼굴들을 바라보았다. 저에게 닿는 웃음들과 인사에 심장이 마구 뛰기 시작했다.

송인규, 이영우, 조해성, 차정우 그리고 강하진. 그렇게 데뷔 조의 데뷔 카운트다운이 시작되었다.

***

최종적으로 정해진 그룹명은 Apogée, 아포제였다. 최고점, 절정이라는 의미로 가요계는 물론이고 모든 분야에서 최고가 되라는 모든 그룹들이 가지고 있을 흔한 의미가 담겨 있기도 하고, 원지점, 달이 지구에서 가장 멀리 떨어지는 지점이라는 또 하나의 뜻을 가지고 있었다. 지구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궤도의 그 지점에서 누구보다도 밝은 음악과 퍼포먼스의 빛으로 지구를 비춘다는 의미였다. 멤버들은 프랑스어로 적은 Apogée라는 세련된 팀명과 그 안에 담긴 멋진 의미를 모두 마음에 들어 했다.

그룹명이 정해지고, 본격적으로 앨범 작업에 들어가며 한영엔터테인먼트의 새로운 보이그룹을 위한 유명 작곡, 작사가들의 곡들이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했다. 많은 곡들을 받아 다 함께 듣고 또 들으며 곡들을 추렸고, 최종적으로 가장 좋은 평을 받은 열 곡을 선정했다. 하지만 데뷔 미니앨범에는 단 네 곡만이 실리기 때문에 그 안에서도 곡을 추려야 했다. 멤버들은 자신들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곡을 정하기 위해 열 곡을 모두 다 녹음했다.

가이드를 받고, 노래를 익히는 것은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었다. 매주 그렇게 테스트를 했음에도 실전은 조금 더 타이트하고 디테일하게 진행되었다. 거기에 잘해야 한다는 강박과 긴장까지 더해져 멤버들은 단 한 순간도 편히 쉴 수 없었다. 다이어트를 굳이 하지 않아도 살이 쭉쭉 빠지고, 머리만 대면 1초 만에 잠이 들고는 했지만, 그래도 피곤한 얼굴을 하고 전부 웃었다. 힘들어도 정말 너무나 좋기 때문이었다.

“다들 오늘도 고생 많았다. 그래도 내일은 점심 먹고 시작할 거니까, 간만에 늦잠들 좀 자.”

새벽 세 시가 넘어서야 합숙하는 숙소에 도착한 멤버들은 데뷔 조 매니저인 지창의 말을 들으면서도 제대로 눈을 뜨지 못했다. 이 시간까지 연습을 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지만, 문제는 날마다 반복이 되다 보니 체력이 점점 떨어진다는 것이었다. 건강과 면역력에 좋다는 영양제를 몇 개씩 먹고, 하루 두 끼 먹는 식사도 잘 하려고 노력은 하지만, 체력이 떨어지는 속도를 따라잡지는 못했다.

“형, 우리 빨리 들어가서 자요. 아, 너무 졸려.”

하진은 뒤에서 제 어깨 위로 얼굴을 묻는 정우를 슬쩍 돌아보았다. 그리고 손을 들어 정우의 머리칼을 헝클였다.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같은 방으로 들어간 두 사람은 침대 옆으로 간 뒤에야 양옆으로 움직였다. 하진은 쓰러지듯 침대에 누워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저처럼 침대에 쓰러지듯 누운 정우가 보였다.

“잘 자, 오늘 고생 많았어.”

“형도 고생했어요.”

어둠 속 마주친 시선과 함께 작은 목소리가 잠결처럼 울렸다. 하진과 정우는 피곤함 속에서도 서로를 향한 인사를 챙겼다. 그리고 그대로 고단한 하루를 마감했다.

아포제 데뷔 D-100일의 새벽이었다.

***

데뷔가 100일 앞으로 다가오며, 데뷔까지의 준비 과정을 전부 촬영하기 시작했다. 데뷔를 한 뒤에 바로 방송이 될 리얼리티를 위한 준비였다. 팬들이 궁금해할 연습 과정과 멤버들 사이에 나누는 이야기 같은 것들이 리얼하게 카메라에 담겼다.

활동을 하는 내내 카메라가 따라다닌다는 것은 신기하기도 했지만, 꽤 긴장이 되는 일이었다. 평소 욕을 하지도 않고, 비속어를 즐겨 쓰지 않는 하진은 그리 주의할 필요가 없었지만, 신조어 쓰는 것을 좋아하는 영우와 해성은 꽤 많은 노력을 해야 했다.

단순히 연습생이기만 할 때와는 모든 게 달라졌다. 소속사 사람들은 아포제로 데뷔할 다섯 명을 더 이상 단순 연습생으로 보지 않았다. 별다른 사건 사고, 그러니까 갑자기 돌연 탈퇴를 선언하거나, 폭력, 음주운전, 욕설 같은 사고를 치지 않는 이상 당연히 데뷔를 할 멤버들이었다. 이제 다섯 명은 한영엔터의 연습생이 아니라 아티스트였다. 당연히 아티스트의 대우를 받았고, 그런 대우를 받는 만큼 책임감은 더 무거워졌다.

“아, 카메라 없으니까 살 것 같아.”

“저도요. 힘든 거네요. 카메라 앞에서 신경 안 쓰는 척하면서 말하고, 연습하고 하는 거.”

“나만 카메라 신경 쓰이는 거 아니지? 지금 일주일은 된 것 같은데 나 아직도 카메라 앞에 서면 막 울렁거려.”

해성이 일부러 벌벌 떨며 오버해서 말하자 물병을 가지고 온 인규가 옆에 앉으며 웃었다.

“알고 보니까 조해성 무대 공포증 있고 그런 거 아냐?”

“에이, 아니에요. 형. 아시잖아요. 조해성 그때 초이스 콘서트에서 대타로 선 주제에 무대 씹어 먹은 거.”

영우가 끼어들어 말하는 것에 해성이 턱을 치켜들었다. 하진이 그런 둘을 보며 재밌다는 듯 웃었다. 영우와 해성은 동갑이고 또 같은 해, 같은 달에 입사를 한 절친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둘은 같이 있으면 늘 에너지가 넘쳤다.

“아, 하진아. 정우 어디 갔어?”

“야, 정우 어디 갔는지 왜 하진이한테 물어?”

“하진이는 다 알아.”

해성의 말처럼 하진은 정우가 어디 갔는지 알고 있었다. 어제 녹음을 한 부분 중에서 한 부분이 아쉬워 다시 녹음을 하러 간다고 했었다. 아마 지금 녹음실에 있을 것이었다.

“녹음실에 갔어요.”

“거 봐, 알잖아. 그런데 녹음은 왜 다시 해? 어제 막 박수 받았는데.”

“후렴 한 부분이 마음에 안 든다고 다시 하고 싶다고 해서요.”

“걘 진짜 프로야. 대단해. 그 얼굴로 거저 살아도 될 텐데, 제일 열심히 하잖아.”

정우를 칭찬하는 멤버들의 말에 맞장구를 치던 하진은 괜히 닫힌 문을 돌아보았다. 이제 올 시간이 됐는데, 안 오는 걸 보면 녹음이 길어지는 모양이었다. 하진은 괜히 걱정이 되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연습실 문을 열고 바깥으로 나갔다.

데뷔 조의 모든 일들은 대부분 극비로 진행됐다. 다른 기획사에 새 그룹에 대한 정보나 콘셉트, 타이틀곡 같은 주요 정보들이 흘러 들어가면 안 되기 때문이었다. 누군가의 부주의로 열심히 준비한 것들이 한순간에 물거품이 될 수도 있었다. 그래서 데뷔 조를 전담하는 사람들을 따로 정해 은밀하게 준비했다. 그게 이 데뷔 조 연습실 층에는 사람들이 잘 오가지 않는 이유였다. 가끔 전담 매니저나 트레이너들이 오갈 뿐, 대부분 이렇게 조용하게 유지되었다.

“올 때가 됐는데…….”

엘리베이터가 3층을 그냥 지나치는 것에 코너를 돌아 휴게실로 들어간 하진이 이온 음료를 한 병 꺼내 마셨다. 이것도 병인가 싶었다. 분리 불안이라는 말을 이럴 때 쓰는 건 아닐까. 정우와 온종일 붙어 있으면서도 이렇게 잠시 떨어지면 궁금해 가만히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중증인데, 정말. 차가운 이온 음료를 한 모금 더 마신 하진이 다시 휴게실을 나서 코너를 돈 바로 그 순간.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