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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객잔 정상 영업합니다 (144)화(완결) (132/145)

144화 (완결)

약방 내부에는 씁쓰름한 약재의 향기가 맴돌았다. 바닥에 앉아 약재를 손질하던 소년은 문이 열리는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의원님 오셨어요?”

흰옷을 입은 남자가 문을 열고 약방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평범한 이가 보기에도 범상치 않은 분위기의 남자는 고개를 까딱하더니 문간에 멈춰 섰다.

“지난번에 말씀하신 거 챙겨놨어요. 잠시만요.”

소년은 자리를 털고 일어나 미리 준비해 둔 보따리를 가져왔다. 남자에게 보따리를 건네자 그가 품속에서 전낭을 꺼내 약값을 치렀다. 그러고서는 곧장 걸음을 돌려 약방을 떠나려 했다.

“의원님!”

손바닥 위에 놓인 돈을 바라보던 소년은 급히 그를 불러 세웠다. 저를 돌아보는 의원의 무표정한 얼굴에 약간 흠칫했지만, 그에게 꼭 전하고 싶은 말이 있었다.

“저, 감사합니다.”

“…무엇이 말이냐.”

“의원님께서 직접 말씀하지는 않으셨지만, 소문으로 들어 대단하신 분이라는 걸 익히 알고 있습니다. 호북에 머무르시는 요 며칠 동안 사람들에게 돈을 받지 않고 무료로 진찰을 해 주셨다는 것도요.”

덕분에 거리를 떠도는 가난한 이들도 치료를 받을 수 있었다고 들었다.

“친히 이곳에 방문해 주시고, 또 아량을 베풀어 주셔서 정말 감사하다는 말씀드리고 싶었어요.”

소년은 꾸벅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그리고 들고 있던 돈을 다시 의원의 손에 쥐여 주었다.

“약값은 받지 않겠습니다. 의원님은 물론이고 의원님의 가족분들이나 제자분들께서 오셔도 마찬가지입니다.”

의원의 차분한 두 눈이 소년을 훑어보았다. 그는 옆에 있는 약함 위에 돈을 도로 내려놓으며 입을 열었다.

“물건을 팔았으면 값을 받는 건 당연한 일이다. 그리고 나는 가족도, 제자도 없는 몸이니 그런 것까지 신경 쓸 필요 없다.”

일이 뜻대로 돌아가지 않자 소년은 조금 시무룩해졌다. 최소한의 감사 표시가 거절당했다. 심지어 가족도, 제자도 없이 홀로 떠돌아다니며 사람들을 돕는 의원이라니 왠지 마음이 쓰였다.

“가족은 어쩔 수 없다 치더라도, 제자를 받지 않는 이유가 있으십니까?”

소년은 다소 뜬금없는 질문을 던졌다.

“이토록 훌륭하신 분께서 제자를 양성하지 않으신다는 건 먼 미래를 내다보았을 때 큰 손실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아, 주제넘었다면 죄송합니다.”

소년이 황급히 머리를 조아리자 그를 가만히 지켜보던 의원은 짧게 답했다.

“필요하지 않다.”

“하지만 지식은 널리 퍼뜨릴수록 좋은 것이라 배웠습니다. 의원님의 의술이 후대에 길이 남는다면 아픈 사람이 훨씬 줄어들지 않을까 하여….”

“…….”

“게다가 함께 다닐 길동무 하나 생긴다면 의원님께서도 적적함이 덜 하지 않을까…요?”

소년은 의원의 눈치를 살피며 말끝을 흐렸다. 제 오지랖이 얼마나 넓은지 스스로도 알고 있는 터라 주제넘은 소리는 여기서 그만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튼 감사했습니다! 오늘 마을을 떠나신다고 들었는데 가시는 길에 복이 가득하기를 빌겠습니다.”

의원은 작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약방을 나섰다. 그의 뒷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보던 소년은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 약재 손질을 이어 갔다.

그렇게 두 시진쯤 흘렀을까. 손질을 마친 소년은 자리에서 일어나 뻐근한 허리를 쭉 폈다.

그는 문간으로 걸어가 대문을 활짝 열고 밖을 내다보았다. 어느새 해가 저물어가고 있었다.

‘내일은 약초를 캐러 가야겠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저 멀리서 쭈뼛거리는 작은 그림자 하나가 눈에 띄었다. 너무 작아서 사람들 틈에 끼어있으면 아무도 발견하지 못할 만한 그런 존재였다.

어린아이, 그것도 새까만 머리칼에 꼬질꼬질한 얼굴을 하고 넝마를 걸친 아이가 소년을 바라보았다. 소년은 가까이 다가오지 못하고 멀찍이서 서성거리기만 하는 아이에게 손을 흔들었다.

‘이리 와.’

소년이 입 모양으로 말하자 아이는 조금씩 다가오기 시작했다. 작은 보폭에 망설임이 가득했다. 소년은 그런 그를 보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오랜만에 왔네.”

몇 달 전, 산에 약초를 캐러 올라갔다가 마주친 아이였다. 약초꾼들만 다니는 험한 산에서 웬 어린애가 길을 잃고 헤매길래 도와준 것이 인연이 되었다.

알고 보니 아이의 어머니는 심한 병을 앓고 있었고, 약값을 할 돈이 없어 조그마한 아이가 직접 약초를 구하기 위해 산을 올랐다는 사연이었다. 자초지종을 알게 된 소년은 그의 손에 약초를 들려주며 신신당부했다.

‘이제부터는 혼자 산에 오르지 말고 우리 약방으로 와. 알겠어?’

그 뒤로 아이는 종종 약방에 찾아왔다. 그럴 때마다 소년은 그의 양손에 약재를 잔뜩 쥐여 돌려보냈다.

‘덕분에 아버지한테 여러 번 혼나긴 했지만.’

소년은 어느새 가까이 다가온 아이에게 웃으며 인사를 건네고는 물었다.

“어머니는 좀 어떠셔?”

아이는 고개를 저었다. 딱히 차도가 없는 모양이었다.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불과 몇 시진 전에 중원에서 제일간다는 의원이 이 자리에 있었다. 아이가 조금만 더 일찍 왔다면 그에게 도움을 받을 수 있었을 텐데.

어머니는 앓아누웠고 아들은 너무 어리니 마을에 의원이 왔다는 소문을 전해 듣지 못했을 것이다. 소년도 아이의 집이 정확히 어디에 있는지 몰랐기에 그가 먼저 찾아오지 않는 한 소식을 전해 줄 수 없었다.

“자, 여기.”

소년은 작은 손에 약재를 건네주며 말했다.

“있잖아, 괜찮으면 내가 너희 집에 가 봐도 될까? 약 달이는 것도 도와주고, 어머니 상태도 한번 살펴볼게.”

그 말에 아이는 뒤로 한 걸음 물러서며 도리질했다. 까만 두 눈동자에 ‘절대 안 돼’라는 네 글자가 적혀 있는 것만 같았다.

그러더니 그는 몸을 휙 돌려 달아났다. 먹은 게 없어 깡마른 몸에 뛸 기운이 남아 있다는 게 신기했다.

‘매번 이런 식이네….’

아이에게 도움을 주려고 시도할 때마다 거절당한다. 혹시 다 쓰러져가는 살림살이를 남에게 보이고 싶지 않아서인가. 그런 이유라면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홀로 남은 소년이 그 자리에 가만히 서서 저물어가는 노을빛을 구경하고 있을 때였다. 약방 안쪽에서 아버지의 걸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신우야, 와서 일 좀 도와다오!”

“예, 갑니다.”

간신히 하늘에서 시선을 떼어 낸 소년은 문고리를 잡았다. 다음에 아이가 찾아오면 몰래 뒤를 밟아서라도 그가 사는 곳을 알아내야겠다고 생각하면서.

걸음을 옮기는 소년의 뒤로 누군가의 온화한 목소리가 깃털처럼 내려앉았다.

‘이거 하나만 기억하거라, 아해야. 떠난 이들은 반드시 돌아온단다.’

***

잠에서 깨어난 청연은 떨리는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그는 정신이 채 들기도 전에 등 뒤에서 들려오는 숨소리부터 확인했다.

고르고 안정적인 호흡, 등에 맞닿은 피부에서 전해져 오는 따뜻한 체온. 청연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반대편으로 돌아누웠다. 이미 깨어나 눈을 뜬 무호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잘 잤어?”

청연은 잠긴 목소리로 물으며 그의 품속으로 파고들었다. 그러자 벗은 가슴 위로 쿵쿵 뛰는 심장 소리가 들려왔다. 청연은 규칙적인 심장 박동에 귀를 기울이며 마음의 안정을 찾았다.

이 일련의 과정은 매일 아침 반복되었다. 눈을 뜨기 무섭게 무호의 생사부터 확인하는 이상한 습관이 생긴 건 그를 잃었던 일 년의 시간이 만들어 낸 불안 때문이었다.

무호의 손이 청연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고 어깨를 토닥였다. 자신은 여기 살아 있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말해 주는 듯했다.

“꿈을 꾼 것 같아.”

청연은 눈을 감고 중얼거렸다.

“그런데 너무 희미해서 기억이 안 나.”

뭔가 중요한 꿈이었던 것 같은데.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보아도 떠오르는 건 없었다. 청연은 이내 포기하고 무거운 눈을 깜빡거렸다. 창틈으로 새어 들어오는 빛과 새소리가 아침을 알리고 있었다.

정신을 차린 청연은 이불을 살짝 들추고는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았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몸에 어젯밤의 흔적이 잔뜩 남아 있었다.

‘무슨 자국이 이렇게 많이….’

온몸을 가득 채운 열꽃을 보자 잠이 다 달아나는 기분이었다. 청연은 무호를 흘겨보며 말했다.

“이러면 종일 조심해야 하잖아. 요리할 때 소매도 못 걷고 머리도 높게 못 묶는단 말이야.”

하지만 무호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다. 오히려 청연이 다른 사람들 앞에 몸을 드러낼 일이 없다는 사실에 만족해하는 눈치였다. 그 반응에 못마땅해진 청연은 과장을 조금 섞어 투덜거렸다.

“나 아파. 팔다리도 아프고 허리도 아파. 배도 좀 아픈 것 같아.”

완전히 거짓말은 아니었다. 어젯밤은 정말 힘에 부쳤으니까. 아무리 사정하고 애원해도 계속해서 밀어붙이던 저놈에게 밤이 새도록 시달렸다.

‘가만. 그러고 보니 가끔 폭력적인 성향이 드러날 수도 있다고 했는데. 정신 멀쩡할 때 이 정도면 주술이 발작할 땐 도대체 어떻게 되는 거야?’

문득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 생각에 청연은 등골이 오싹해졌다.

‘에이 설마.’

설마 어젯밤보다 더 하겠어? 청연은 애써 부정하며 불길한 예감을 휘휘 날려버렸다.

“…아파?”

무호는 그제야 청연의 눈치를 살피며 물었다.

“응, 아파. 여기도, 저기도…. 여기는 그냥 박살 난 느낌이야.”

엄살을 늘어놓던 청연은 왠지 응석쟁이가 된 것 같은 기분에 휩싸였다. 한참 어린놈한테 이래도 되는 건가 싶었지만, 안절부절못하며 팔다리를 주물러 주는 그의 손길이 싫지 않았다.

아니, 사실은 좋았다. 남들에게는 두려움의 대상이라는 마교주가 자신의 앞에서만 헐렁해지는 이런 순간들이 무엇보다도 소중했다.

‘귀여워.’

청연은 웃음을 삼키며 침상 위에 가만히 누워 안마를 즐겼다.

“아프면 오늘은 일 쉬어.”

“개업 초기는 중요한 시기라서 나가봐야 해. 그리고 일을 쉴 만큼 아프지는 않아.”

“…박살 났다며.”

“다시 붙었어.”

“…….”

천마표 마사지를 충분히 누린 청연은 한층 개운해진 몸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옷을 입고 단장을 하는 동안에도 무호의 시선은 끈질기게 청연의 뒤만 따라다녔다.

“안 갔으면 좋겠어?”

청연은 미련 가득한 무호의 얼굴을 바라보며 물었다.

“오늘은 나도 어쩔 수 없어. 주방 직원들한테 사천요리 가르쳐 주기로 했거든.”

“…….”

“대신 이따가 저녁 먹으러 와. 특별석 비워둘게.”

청연은 무호가 객잔에 자주 찾아오지 않는 이유를 알고 있었다. 자신의 등장으로 인해 영업이 방해받는 걸 내켜 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이 층에 무호를 위한 특별석을 만들었다. 일 층 전경이 훤히 내려다보이면서도 편하게 식사할 수 있는 명당이었다.

“그럼 이따 봐.”

청연은 가볍게 손을 흔들며 상쾌한 기분으로 침소를 나섰다.

객잔에 도착한 그는 직원 교육에 여념이 없었다. 신강을 제외하면 활동 반경이 그리 넓지 않은 교인들을 위해 객잔에서 사천요리를 팔기로 했으니, 숙수들에게 요리를 가르쳐 주는 것도 그의 몫이었다.

그 외에도 객실 가구 배치를 고민하고, 새로운 사업을 구상하다 보니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어느새 저녁 식사를 하러 온 손님들이 일 층 식당 공간에 가득 들어찼다.

‘무호는 언제 오지?’

무호가 오기만을 기다리며 서성거리던 청연은 이 층에 준비된 특별석을 힐끔 올려다보았다.

“어…?”

순간 동그래진 눈이 익숙한 사람의 모습을 발견했다. 이미 도착해 자리에 앉은 무호가 턱을 괸 채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놀란 것도 잠시, 청연은 환하게 웃으며 계단을 올랐다.

“뭐야, 왔으면 기별을 해야지.”

탁자 위에는 술병 하나와 잔 두 개가 놓여 있었다. 청연은 술병의 정체를 알아보았다. 자신이 지난번 신강에 방문했을 때, 무호에게 선물했던 술이었다.

“안 마시고 있었네. 같이 마시려고?”

청연이 묻자 무호는 말없이 술을 따랐다. 두 개의 잔이 찰랑이는 액체로 가득 채워지고, 달큰한 향이 코끝에 맴돌았다. 두 사람의 손에 들린 잔이 허공에서 짠하고 부딪쳤다.

단숨에 잔을 비운 청연은 입 안 가득한 단맛을 음미했다. 그러기 무섭게 입술을 부딪쳐오는 무호의 행동에 배시시 웃음이 나왔다. 그 또한 달았다.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마음껏 접문을 나눈 뒤, 두 사람은 아래층을 내려다보았다. 시끌벅적한 분위기가 이곳에서는 멀게만 느껴졌다.

“어때? 자리 좋지? 손님들 구경하기에도 좋고.”

“좋네.”

“주인장 구경하기에도 좋고.”

“좋지.”

청연은 미소 지으며 말했다.

“나도 여기가 마음에 들어. 나를 기다리는 사람이 있어서 좋고, 내가 기다릴 사람이 있어서 좋아. 아침에 헤어져도 저녁에 다시 만날 사람이 있다는 게 이렇게 좋은 건지 몰랐어.”

이 행복이 영원토록 끝나지 않을 거라는 사실이 내 가슴을 뛰게 해.

“나는 여기서 보내는 내일이 기대돼. 네가 나를 기대하게 만들어.”

술기운에 솔직한 마음을 털어놓던 청연은 뒤늦게 몰려오는 민망함에 얼굴을 붉혔다. 부끄러운 소리를 조잘거리는 데 나름대로 익숙해졌다고 생각했건만, 아직 멀었는가 보다.

목덜미까지 붉게 물들인 청연이 술잔을 홀짝이는 동안, 무호는 그를 가만히 쳐다보았다. 이윽고 가까이 다가온 무호의 입술이 청연의 귓가에 무언가를 속삭였다.

“응?”

그 말에 청연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는 놀란 눈으로 무호를 바라보다가 입 속에 머금고 있던 술을 꿀꺽 삼켰다. 좀처럼 시선을 피하지 않는 무호의 검은 눈동자에 옭아매지는 기분이었다.

머뭇거리던 청연은 느릿하게 입술을 열어 답했다.

“나도….”

서툴고 부끄러울지 몰라도 가감 없는 진심이었다.

“나도 사랑해.”

두 사람을 둘러싼 시간이 잠시 느려진 것과 달리, 객잔은 여전히 바쁘게 돌아가고 있었다. 사람들의 웃음소리와 달콤한 술의 향기가 공기 중에 기쁜 춤을 추었다.

그 춤의 한복판에서 연인의 눈을 들여다보던 청연은 문득 알게 되었다. 이것이 제가 써 내려간 이야기의 마지막 장이었으며, 지금부터 써 내려갈 이야기의 첫째 장이었다. 고대하던 결말이자 새로운 발단이었다.

영원히 끝나지 않을 행복한 이야기의 시작이었다.

<‘우리 객잔 정상영업합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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