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2화
“내 말 들려?”
청연은 무호의 호흡에 귀를 기울이며 물었다. 고른 숨소리가 새근거리며 들려왔다.
‘아직인가?’
그는 조금 더 아래로 내려가 무호의 왼쪽 가슴 부근에 귀를 가져다 댔다. 심장 박동 같은 건 느낄 수도 없었던 예전과 다르게 쿵쿵 뛰는 소리가 선명했다.
그 소리에 왠지 모를 안도감이 들었다. 청연은 그 자세 그대로 무호의 가슴 위에 엎드린 채 말했다.
“이제 눈만 뜨면 되겠는데….”
곧 깨어날 거라는 게 오늘이 아니었던가.
일 년 넘게 기다렸으니 며칠 더 기다리는 건 일도 아니겠지만, 그가 어서 깨어나기를 바랐다. 또다시 기약 없는 희망 고문을 견디기엔 지쳐 있었다.
“넌 나 없는 구 년을 대체 어떻게 견뎠어?”
청연은 그의 가슴을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리며 물었다.
“응? 무호야. 나는 고작 일 년도 이렇게 힘든데, 너는 구 년을 어떻게 버틴 거야?”
너도 나와 함께한 기억을 붙들고 살았을까. 내가 그랬던 것처럼.
“더 기다려야 한다면 기다릴게. 아무리 지쳤어도 참을 수 있어. 말했잖아. 나는 네 사람이라고.”
그래도 너무 늦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청연이 혼자서 중얼거리고 있을 때, 머리 위에서 낮게 잠긴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내 사람….”
“어?”
그 목소리에 퍼뜩 놀라 고개를 들어 올리려고 하자 강한 힘이 어깨를 짓눌렀다. 무호의 가슴 위에서 꼼짝 못 하게 된 청연은 벗어나기 위해 푸드덕거리며 외쳤다.
“뭐야? 일어났어? 정신이 들어?”
“…….”
“괜찮아? 이거 놔 봐. 얼굴 좀 보자!”
어깨를 꽉 끌어안은 그의 손이 청연을 놓아주지 않았다. 열심히 낑낑거리며 꿈틀대던 청연은 이내 몸의 힘을 빼고 물었다.
“아픈 데는?”
“…없어.”
무호는 느릿하게 답했다. 청연은 그가 완전히 정신을 차릴 때까지 기다리며 차분하게 숨을 골랐다. 빠르게 뛰는 심장과 놀란 마음이 좀처럼 가라앉지를 않았다.
잠시간 움직임을 멈추고 가만히 있자 어깨를 누르던 무호의 손이 스르르 풀렸다. 청연은 고개를 들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한 쌍의 검은 눈동자가 자신을 지그시 바라보고 있었다.
“진짜 깨어났네….”
청연은 눈으로 보면서도 믿을 수가 없었다. 기다리고 또 기다리던 일이 막상 일어나니 현실감이 없어, 그저 무호의 얼굴만 만지작거릴 뿐이었다.
“진짜야…. 일 년 만에….”
“일 년?”
가만히 누워서 청연의 손길을 받던 무호는 그 말에 인상을 찌푸렸다. 설명을 기다리는 눈치였지만, 청연은 설명할 여력 따위 없었다.
무호가 상체를 일으켰다. 떨리는 손으로 그를 도우려 했으나 도움 같은 건 필요 없어 보였다. 침상 머리맡에 등을 기댄 무호는 청연의 몸을 가까이 끌어당겨 앉히고는 물었다.
“내가 일 년이나 누워 있었다고?”
청연이 고개를 끄덕이자 무호는 무거운 한숨을 내뱉었다. 청연은 그의 눈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기다렸어.”
진심을 담아 또박또박 말하고 싶었으나 목소리가 떨렸다.
“다들 네가 깨어나기만을 기다렸어. 너희 교인들도, 그리고 나도….”
“…….”
“돌아온 걸 환영해.”
청연이 입꼬리를 끌어올리자 무호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는 손을 들어 올리더니 청연의 뺨을 조금씩 쓰다듬었다. 그 또한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는 모양이었다.
“죽은 줄 알았는데….”
무호의 손이 청연의 긴 머리칼을 쓸며 서서히 아래로 내려갔다. 그러더니 허리를 단단히 감아 더욱 가까이 끌어당겼다. 다시 그의 품속에 갇힌 청연은 작게 웃었다.
“너 없는 동안 네가 말한 거 다 해보려고 했어. 사천에 돌아가서 직원들이랑 어울리고, 좋아하는 장사도 하고…. 그런데 사과나무는 못 심겠더라.”
“…….”
“행복한 척은 해도 행복하지는 못하겠더라. 다 네가 없어서 그런 거야.”
청연은 말하며 무호의 목덜미에 양팔을 둘렀다. 오랜만에 느껴 보는 온기에 몸속 깊은 곳까지 따뜻해지는 기분이었다.
“나한테는 역시 네가 필요한가 봐. 그러니까 이제 멀리 가지 말고 꼭 내 옆에 있어.”
그동안 전하지 못했던 말들을 주절주절 늘어놓던 청연은 무호와 눈이 마주친 순간 뒤늦게 몰려오는 부끄러움을 느꼈다. 코앞에서 자신을 응시하는 검은 눈동자에 두 뺨이 홧홧하게 달아올랐다.
“아니, 부끄러운 얘기 하는데 그렇게 빤히 보면 어떡해.”
“그럼 어떻게 봐야 하는데.”
무호는 청연을 놀리듯이 집요하게 쳐다보았다. 그 눈길에 기분이 좋으면서도 민망해진 청연은 다급히 화제를 돌렸다.
“지난번에 만났던 의원님이 너 살려 주신 거야. 일 년 동안 고생하셨으니까 이따가 꼭 감사 인사드리고 보상도 두둑하게….”
“또 잔소리.”
“잔소리가 아니라 당연한 거야. 아, 그리고 사술이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니라서 가끔 폭력적인 성향이 튀어나올 수 있다더라. 그럴 땐 내가… 읍.”
말을 이어 가던 청연의 입이 한순간에 틀어 막혔다. 잔소리 같은 건 듣기 싫다는 듯, 무호가 입을 맞춘 탓이었다.
허리에 두른 손이 조금씩 올라와 청연의 목 뒤를 감싸 쥐었다. 눈을 질끈 감은 청연은 천천히 입술을 벌렸다. 가장 가까운 곳에서 느껴지는 뜨거운 호흡에 그제야 실감이 나는 것 같았다.
‘네가 살아 있구나.’
내 앞에서 숨 쉬고 있구나.
지난 일 년간 꿈에도 나왔던 입맞춤이었다. 꿈속의 무호는 숨을 쉬지 않았는데, 지금 청연에게 입을 맞추는 그는 누구보다도 뜨겁게 숨을 쉬고 있었다.
쪽 하는 소리와 함께 입술이 떨어지자 청연은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그에게서 조금도 멀어지지 않은 무호가 말했다.
“계속해 봐.”
“그럴 땐 내가 널 도와주겠다고. 그러니까 또 도망갈 생각 말고….”
이번에도 청연의 잔소리는 무호의 입술에 먹혀버렸다. 이럴 거면 왜 계속하라고 한 건지 모르겠지만, 청연은 그마저도 기분이 좋아 그의 목덜미를 꼭 끌어안았다.
그러자 순식간에 세상이 빙그르르 돌더니, 청연은 어느새 침상 위에 얌전히 눕혀져 있었다. 그 위에 올라탄 채 청연의 몸을 짓누르는 무호에게서 어마어마한 힘이 느껴졌다.
보통 그렇게 오랫동안 누워 있었으면 힘을 쓰기는커녕, 몸을 제대로 가누지도 못해야 맞는 거 아닌가. 그게 당연한 상식인데, 이 세계는 상식이라는 게 통하지 않는가 보다.
‘왜 더 강해진 것 같지….’
기분 탓인가. 청연은 무력한 먹잇감이 된 것처럼 두 눈을 깜빡였다. 자신을 내려다보는 무호의 눈빛이 흉흉했다.
“계속해 봐.”
그의 말에 청연은 마른침을 꿀꺽 삼키고 답했다.
“도망갈 생각 말고 옆에 붙어 있으라고. 아무 데도 못 가게 할 테니까….”
이번에는 입술이 아니라 목으로 내려간 무호의 숨결이 잔소리를 멈추게 했다. 목덜미를 간질간질하게 훑고 지나가는 감각에 바짝 얼어붙은 청연은 더듬거리며 말했다.
“자, 잠깐만…. 너무 이르잖아. 아직 대낮인 데다가 너 회복도 제대로 못 했는데….”
아닌가. 회복은 진즉에 끝났나.
무호는 얼어 있는 청연의 목덜미를 아프지 않게 살짝 깨물고 고개를 들더니 다시 한번 명령했다.
“계속해.”
곧 잡아먹을 것처럼 번들거리는 눈빛에 식은땀을 흘리던 청연은 그제야 그의 의도를 알아차렸다. 잔소리 같은 거 집어치우고 하던 말이나 계속하라는 거구나.
“알았어, 알았어. 하면 되잖아.”
내가 졌다. 두손 두발 다 든 청연은 붉게 달아오른 얼굴로 무호와 시선을 맞췄다. 그러고서는 또렷한 목소리를 내뱉었다.
“나도 네가 좋아.”
밀려드는 부끄러움 따위는 참을 수 있었다. 그가 원하는 말이라면 백번이고 천 번이고 들려줄 테니까.
“널 좋아해.”
청연이 어색하게 웃으며 말하자 그를 무섭게 내려다보던 무호의 입가에도 만족스러운 미소가 걸렸다. 서서히 다가오는 얼굴을 바라보던 청연은 눈을 감았다.
***
대전을 나서자 차가운 밤바람이 뺨을 쓸고 지나갔다. 무호는 시선을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까만 밤하늘에 별들이 총총히 박혀 있었다.
시간이 벌써 이렇게 흘렀나. 빨리 끝낸다고 끝냈는데.
장로들과의 회의는 지겹기 그지없었다. 안건은 매번 거기서 거기인지라 새로울 게 없었고, 자신의 한 마디면 모든 결정이 끝나는데도 시간을 제법 잡아먹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한참이나 이어지던 교인들의 호들갑이 끝났다는 거였다. 교주님의 귀환을 환영한다느니 어쩐다느니 하면서 떠들썩하게 잔치를 벌이고, 종일 대전 앞에서 기쁨의 눈물을 흘리던 이들이 사라지자 드디어 숨통이 트이는 기분이었다.
“바로 침소로 가십니까?”
뒤를 졸졸 따라온 지홍의 물음에 무호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럼 객잔으로 가십니까?”
지홍이 의미심장한 목소리로 물었다. 딱히 대답해야 할 필요를 느끼지 못한 무호는 곧장 걸음을 돌렸다. 성큼성큼 걸어가는 그의 발걸음에 더 이상 따분함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산을 내려가던 무호의 걸음이 멈춘 곳은 승리봉의 중턱, 얼마 전 새로 지은 이 층짜리 전각 앞이었다. 문틈 사이로 따뜻한 빛과 음식 냄새가 새어 나왔고, 왁자지껄한 사람들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리고 찾던 이의 기척 또한 그곳에 있었다.
무호는 문 위에 걸려 있는 현판을 힐끔 쳐다보았다. 청연객잔. 자신이 직접 적어 걸어 둔 현판이었다.
‘객잔 분점을 내야겠어.’
‘분점?’
‘응. 사천 본점은 해령이한테 맡기고 나는 조그맣게 이호점을 내서 다시 시작하는 거야. 그러다 잘 되면 삼호점도 내고, 사호점도 내고….’
분점을 내든 집을 짓고 살든, 청연이 원하는 거라면 뭐든지 들어줄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렇다고 여기 천산에 객잔을 차릴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지만 말이다.
‘여긴 외부인들이 드나드는 곳도 아니고, 교인들은 각자 처소가 있어서 객잔이 필요 없는데….’
‘필요하게 만들면 되지.’
청연은 자신만만하게 말하며 무호의 손에 돈까지 쥐여 주었다. 땅 주인에게 주는 토짓값이라나.
‘객실 가구들을 죄다 최고급으로 들여놓을 거야. 식당 공간도 사치스럽게 꾸밀 거고. 평범한 사람들도 여기 오는 날엔 벼락부자가 된 것처럼 호화롭게 쉬다 가게끔 만들 생각이야. 그러면 처소가 코앞에 있어도 자주 오고 싶어지겠지.’
무호는 그의 말에 반신반의하면서도 땅을 내어 주고, 현판까지 손수 만들어 주었다. 그러자 청연은 기뻐하며 한 가지 더 부탁했다.
‘네 이름 좀 빌리자.’
‘…내 이름?’
‘응. 오늘부터 여기는 천마 공인 모범 음식점이야. 별 다섯 개짜리.’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 건가 싶었는데 이렇게 장사가 잘된다니. 무호는 고개를 갸웃하며 객잔 문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