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1화
청연과 제하는 길을 떠나며 서로의 근황을 나누었다. 제하가 중원 전역을 유람하는 동안 보고 느낀 것들에 대해 잠자코 듣던 중, 그의 한 마디에 청연의 귀가 트였다.
“일 년이 지났는데도 다들 마교 이야기를 하느라 바쁩니다.”
“…….”
“마교주가 세상을 뜬 지 오래인데 차기 교주가 나타날 기미는 없고, 남은 마교인들도 이렇다 할 움직임을 보이지 않으니 궁금할 수밖에요.”
교주의 죽음을 둘러싼 의혹도 아직 풀리지 않았고요. 제하는 덧붙이며 청연의 눈치를 힐끔 살폈다.
“응. 손님들 오며 가며 하는 얘기 들었어.”
청연은 최대한 담담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천마가 죽었으니 이틈에 정파에서 먼저 쳐야 한다는 의견이 많더라.”
“그러지 못할 겁니다.”
“알아. 교주가 없어도 마교는 여전히 강하니까, 그쪽에서 먼저 움직이지 않는 이상 함부로 공격하기 어렵겠지.”
그러자 제하는 고개를 저었다.
“제 말은 그게 아니라….”
청연이 제하를 올려다보자 그는 굳은 얼굴로 말했다.
“천마가 살아 있다는 소문이 슬슬 퍼지고 있는 모양입니다.”
“…그래?”
“예. 그자가 정말 죽었다면 진작 새로운 이를 차기 교주로 내세웠을 거 아니냐는 겁니다. 천마씩이나 되는 자가 그리 허무하게 목숨을 잃었을 리 없다고 생각하는 이들도 많고요.”
“음… 그런 소문이 돌면 확실히 정파에서도 공격하기 힘들겠네.”
제하는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한번 청연의 눈치를 살폈다.
“객주님께서는 괜찮으세요?”
“괜찮아. 저번에도 말했잖아. 오늘은 좋은 소식도 들었고.”
“당시 객주님께서 얼마나 힘들어하셨는지 아니까 묻는 겁니다.”
그는 못마땅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지금도 마음 같아서는 못 가시게 하고 싶습니다. 객주님께서 신강에 머무르시는 석 달 동안 제가 다 조마조마했다고요. 혹시 그자를 따라나서겠다고 하실까 봐 두려운 마음으로 객주님 곁을 지켰습니다.”
“…고마워.”
“물론 객주님께서 그리 바보 같은 선택을 하시지 않을 거라고 굳게 믿고 있었지만요.”
곤륜산에서의 일이 있고 난 뒤, 청연이 신강에서 보낸 석 달은 정말이지 지옥 같았다. 온몸에 남은 부상을 회복할 틈도 없이 매일을 후회와 고통 속에 살았다.
왜 진작 무호의 마음을 전부 헤아리지 못했나. 왜 마지막 순간까지 가서야 그를 향한 자신의 마음을 깨달았나. 스스로 질문을 던지고 자책하길 수백 번, 결국에는 제 발로 신강을 떠나기에 이르렀다.
신강을 떠난 이유는 첫째, 더 이상 그곳에 머물 염치가 없어서였고 둘째, 무호의 마지막 말이 떠올라서였다. 평화로운 세상에서 너의 사람들과 살며 좋아하는 장사도 하고 나무도 심으라던 그의 말이 귓가에 맴돌았다.
그래서 그렇게 살아보기로 결심한 것이다. 슬픔에 잠겨 아무것도 못 하는 것보단 억지로라도 열심히 살아가는 편이 무호가 바라는 길이겠거니 생각했다.
‘결국 나무는 못 심었지만….’
청연이 곰곰이 생각하던 중, 제하는 진지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저도 유람을 떠난 동안 고심해 보았습니다.”
“뭐를?”
“어떻게 하면 객주님을 다시 행복하게 해드릴 수 있을까 하는걸요. 객주님께서 보내신 고통의 시간은 제게도 참을 수 없는 고통이었으니까요.”
“…….”
“원하던 대로 객주님의 과거를 전부 알게 되었으니 대신 복수를 해드릴까. 그러기엔 그들이 이미 마교에 당해 쓸려가 버렸는데. 아니면 객잔 일을 도와드릴까. 겨우 그런 걸로는 충분하지 않은 것 같은데.”
제하의 얼굴에 씁쓸한 기색이 스쳤다.
“아무리 고민해 봐도 모르겠더라고요. 객주님을 행복하게 해드리려면 그자가 살아 돌아오도록 만드는 길밖에 없을 것 같은데, 그건 제 능력 밖의 일이니….”
“제하야.”
“제게는 방법이 없더라고요.”
청연이 제하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자 그는 애써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말했다.
“스승님께서 늘 말씀하셨습니다. 진심으로 연모한다면 상대의 결정을 존중하고 행복을 빌어 주어야 한다고요.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저는 객주님의 마음을 얻을 수 없음에 여전히 화가 나고,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만….”
“…….”
“객주님께서 그리 힘들어하시는 모습을 다시 보느니 차라리 한발 물러서 행복해하시는 모습을 보는 게 낫겠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러니 노력해 보겠습니다.”
제하는 눈만 살짝 움직여 청연을 보고서는 다시 시선을 돌렸다.
“더군다나 그자가 생각했던 것만큼 나쁜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어 반대할 명분조차 사라져 버렸지 뭡니까.”
그 말을 마지막으로 두 사람은 입을 다물고 걸음을 재촉했다.
신강에 가까워질수록 청연의 가슴은 요란하게 뛰었다. 제하를 만난 뒤 꾹꾹 눌러 놓았던 긴장감이 꿈틀거리며 올라와 금방이라도 토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천산에 도착하자 마교인들이 익숙한 듯 그들에게 길을 터주었다. 청연은 자연히 무호의 처소를 향해 걸음을 옮기며 널뛰는 마음을 진정시켰다.
“스승님!”
저 멀리 흰옷을 입은 채 서성거리는 의원의 모습이 보였다. 제하는 반가운 목소리로 외치며 걸음을 빨리했다.
“제자가 돌아왔습니다, 스승님!”
“그리 방정맞게 말하지 않아도 안다.”
소명은 무심하게 답했다. 그러면서도 눈으로는 제하의 머리부터 발끝까지를 훑어보았다. 떠나 있었던 시간 동안 건강에 이상이 생기지는 않았는지 확인해보는 듯했다.
“대인.”
청연은 떨리는 주먹을 꼭 쥐며 깍듯하게 예를 갖췄다. 그러자 소명이 어서 들어가 보라는 듯이 눈짓했다.
“곧 깨어날 겁니다.”
청연이 망설이는 기색을 보이자 그가 덧붙였다. 청연은 크게 심호흡을 한 뒤 무거운 걸음을 떼었다.
“저도 객주님과 같이…!”
“네놈은 이리 오거라.”
소명은 청연의 뒤를 따라 침소로 들어가려는 제하를 빠르게 잡아챘다. 스승님 손에 질질 끌려가는 제하를 뒤로 한 채, 청연은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처소 안쪽은 쥐 죽은 것처럼 고요했다. 작은 발소리도 크게 울리는 듯해 절로 숨을 죽이게 되었다. 청연은 천천히 침상 쪽으로 다가갔다. 침상 위에 누워 있는 사람이 놀라기라도 할까, 아주 느릿한 속도였다.
마침내 침상에 다다른 청연은 그토록 그리워했던 얼굴을 두 눈 가득 담았다. 여전히 잠든 것처럼 굳게 감긴 눈과 이전보다 약간 창백해진 안색에 저도 모르게 울컥하는 마음이 들었다.
“무호야.”
청연은 소리 내 이름을 부르며 침상 위에 살며시 걸터앉았다. 그리고 손을 뻗어 그의 얼굴을 조금씩 어루만졌다.
“나 왔어…. 너무 오랜만이지.”
혼잣말하듯이 중얼거리던 청연은 무호의 얼굴에서 한 가지 달라진 점을 알아차렸다. 붉었던 눈가의 흉터가 하얗게 흐려져, 금방이라도 사라질 것처럼 보였다.
“보고 싶었어.”
그날, 무호의 죽음을 눈앞에 두고 넋을 놓은 청연에게 소명이 들려준 이야기는 좀처럼 이해하기 힘든 것이었다.
‘객주님 말씀대로 여러 가지 사술이 복합적으로 사용되었습니다. 그중에 가장 큰 문제는 시전자와 피시전자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어, 시전자가 죽으면 다른 한쪽도 죽게 된다는 점인데….’
청연은 멍하니 눈을 깜빡이며 그를 바라보았다.
‘사실 이 주술의 해주법은 간단합니다. 피시전자의 생명이 끊어지는 순간, 시전자와의 연결 또한 끊어지게 됩니다.’
돌아가지 않는 머리를 열심히 굴리며, 청연은 그의 말을 이해해 보려고 노력했다. 그렇다면 결국엔 무호가 죽어야 한다는 거 아닌가. 그 정도는 청연도 서책에서 읽었기에 알고 있었다.
‘그리하여 우선은 이자의 선천진기를 몸에서 전부 빼내, 시전자와의 연결 먼저 끊어놓자는 말씀을 드리려 했습니다. 그런데 일이 벌써 이렇게 되어 버린지라….’
소명은 쓰러진 무호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두 사람의 연결이 완전히 끊겼을 겁니다. 더 이상 시전자의 생사 여부에 영향을 받지 않으니 그 부분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하지만… 하지만 선천진기를 다 쓰고 죽은 사람을 어떻게….’
더듬더듬 말하던 청연은 스스로가 내뱉은 말에 놀라 입을 다물었다.
‘몸에 남은 사술을 역이용하는 겁니다.’
소명은 개의치 않고 설명했다. 자라난 사술의 힘이 온몸 구석구석까지 번져 있으니, 그것을 선천진기로 전환해 사용할 방법을 찾겠다는 거였다.
선천진기를 전부 빼낸 뒤 몸에 남은 사술로 빈자리를 채운다니, 예전의 청연이었으면 펄쩍 뛰며 반대할 일이었다. 그러나 무호는 이미 선천진기를 모두 사용했고, 벌어진 일은 되돌릴 수 없었다. 소명이 제안한 방법에 희망을 걸고 매달리는 수밖에.
‘사술이 선천진기로 대체될 뿐, 완전히 사라지는 것은 아니기에 때때로 폭력적인 성향이 드러날 수 있습니다. 시전자와의 연결이 끊겼으니 이전만큼 심하지는 않겠지만 이 점 감안하셔야 합니다.’
그의 경고에도 청연은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폭력적이든 아니든 살아만 있으면 된다. 살아나기만 한다면 무호가 자신을 통제할 수 있도록 책임지고 도울 생각이었다.
소명은 무호의 숨이 끊어지기 직전, 마지막 가느다란 숨 한 줄기를 길게 연장해 놓았다. 선천진기가 없으니 빈사 상태나 마찬가지였지만, 적어도 그가 생각해낸 방법을 시도해 볼 시간은 번 셈이었다.
한 가지 문제는 소명도 결과를 장담할 수 없다는 거였다. 그 누구도 감히 시도해본 적 없는 방법으로 과연 무호를 살려낼 수 있을지, 가능하다면 몇 년이 걸릴지 아무도 확신하지 못했다.
기약 없는 기다림과 불안감 속에 청연은 점점 초조해져 갔다. 차라리 무호가 정말 죽었다고 여겼으면 이보다는 마음이 편했을까. 매일매일 살얼음판 같은 희망고문의 연속이었다.
좀처럼 차도를 보이지 않는 무호의 곁에서 석 달을 지내고, 사천으로 돌아간 뒤에도 초조함과 그리움으로 하루하루를 흘려보냈다. 그러던 중 오늘 아침에 소명에게서 연락을 받은 것이다. 무호의 맥이 정상적으로 돌아왔다는 소식에 청연의 맥은 비정상적으로 빨라졌다.
“그동안 네 옆에 없었다고 화내면 안 돼. 깨어났을 때 나 망가진 모습 보면 속상해할까 봐 억지로라도 열심히 산 거니까.”
청연은 흐릿한 흉터 위를 손가락으로 슬슬 쓸며 말했다.
“빨리 일어나. 너한테 하고 싶은 말 많단 말이야.”
일어나. 청연이 조용히 읊조리자 무호의 속눈썹이 움찔 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