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9화
“미안해.”
청연은 무호의 입에서 나온 세 글자에 눈을 질끈 감았다. 그에게 듣고 싶은 말은 이런 게 아니었다. 이런 상황에 사용하라고 가르쳐 준 말도 아니었다.
대도가 박힌 그의 가슴에서 심장 뛰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가 점점 희미해지고 있었다.
“그래도….”
무호는 느릿하게 말하며 곤륜여신봉의 정상을 힐긋 바라보았다. 여운이 어디까지 갔을지 가늠해 보는 듯했다.
“마지막 인사할 시간은 벌었으니까.”
너의 옆에서 눈 감을 수 있으니 되었다, 말하는 무호에게 청연은 한 마디도 대꾸할 수 없었다. 그의 맥박이 느려짐과 함께 시간 또한 느리게 흐르는 것만 같았다.
교주의 명령을 이행하기 위해 달려온 마교의 무인들이 남은 혈교인들을 치느라 절벽 아래가 소란스러웠다. 그러나 청연의 귀에는 무호의 목소리를 제외하면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정리할 게 있어서 조금 늦었어.”
“…….”
“뿌리를 완전히 뽑았으니 이제 전쟁 같은 건 없을 거야.”
평화로운 세상에서 네 사람들과 살아. 무호의 말에 청연은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전쟁 같은 게 없다 한들 그게 다 무슨 소용인가. 그의 죽음이 평화로운 세상도 지옥처럼 느껴지게 만들 텐데.
“좋아하는 장사도 하고.”
“제발….”
“나무도 심고.”
머리칼을 쓰다듬는 손길에 힘이 없었다. 청연을 붙잡기 위해 마지막 기운까지 써버린 것인지, 그의 몸에서 서서히 힘이 풀리는 게 느껴졌다.
“그렇게 살아.”
“그만해….”
그만 말해.
청연은 금방이라도 떠날 사람처럼 읊조리는 그의 말을 더 이상 듣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아무리 귀를 막고 부정해도 꺼져가는 생명의 빛을 되살릴 수는 없었다.
머리카락 위에 놓여 있던 손이 툭 떨어진 건 한순간이었다. 무호의 얼굴 또한 청연의 어깨에 힘없이 묻혔다. 쓰러지려 하는 몸을 꽉 끌어안아 지탱한 청연은 덜덜 떨리는 입술을 열었다.
“무호….”
이름을 불러 보아도 답이 없었다. 심장 소리도, 숨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숨 막힐 듯 지독한 침묵 속에, 청연은 축 늘어진 몸을 조금씩 어루만져 보았다.
맥이 느껴지지 않았다.
“…….”
혹시 이것도 환영이 아닐까. 두려움이 만들어 낸 착각일 뿐이라면.
차라리 그렇게 믿고 싶었다. 청연은 여기저기 까지고 긁힌 자신의 손을 들여다보았다. 저도 모르는 사이에 또 가시가 박힌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환각을 보는 거라고.
존재하지 않는 가시를 찾아 헤매던 그의 뒤로 두 사람이 달려왔다. 소명이 무호의 몸을 잡아 청연에게서 떼어 냈고, 제하는 비틀거리는 청연을 부축했다.
“객주님.”
“제하야, 나 또 이상한 게 보여….”
“…….”
“가시가 박힌 것 같은데 못 찾겠어.”
청연이 손을 들어 보이며 중얼거리자 제하는 짧게 한숨을 내쉬며 시선을 돌렸다. 그러는 동안 소명은 무호의 가슴에 오랜 시간 박혀 있던 대도를 단번에 뽑아내고 그를 땅 위에 눕혔다. 호흡과 맥을 확인하는 모습이 흐릿하게 보였다.
“아니야….”
이건 현실이 아니다. 청연이 환각에서 깨어나기 위해 자신의 뺨을 세게 내리치자 제하가 화들짝 놀라며 그의 손목을 붙들었다.
“객주님, 잠시만…!”
“아니야….”
청연을 진정시키려는 듯 무어라 말하는 소명의 차분한 목소리가 웅웅 울렸다.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전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단어 하나하나가 낱낱이 분해되어 공중에 떠돌아다니는 것처럼 느껴졌다.
이윽고 산맥 전체가 크게 흔들렸다. 청연은 초점 없는 눈으로 곤륜여신봉의 정상을 올려다보았다. 온 세상을 집어삼킬 듯한 흰 빛이 번쩍이며 하늘 위에 무언가의 형상이 나타났다.
곤륜의 상징과도 같은 용의 형상이었다. 기세 좋게 하늘로 날아오르는 용이 적장의 죽음을 알리고 있었다.
끝나지 않을 것만 같았던 전투의 종결이었다.
***
여운이 혈마의 목을 치고 정상에서 내려와 첫 번째로 접한 소식은 마교가 혈교인들을 한 명도 남김없이 처리한 뒤 철수했다는 것이었다.
살아남은 정파의 무인들은 이 사실에 어리둥절해하고 있었다. 마교는 혈교와 연합했던 게 아니었나. 왜 갑자기 태세를 전환해 같은 편을 공격한 건지, 그 이유를 아는 이는 없었다.
그리고 두 번째로 접한 소식은 마교주의 숨이 끊어졌다는 것이었다. 현장에 있던 이들이 그가 목숨을 잃고 쓰러지는 모습을 보았다고 증언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시신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고 한다.
‘대체 뭐였을까.’
그자는 왜 내게 선천진기를 전부 넘겨주고 죽음을 택한 걸까. 아무리 고민해도 의문이 풀리지 않았다.
도관 앞에 서 있던 여운은 땅에 떨어진 나무판자 하나를 주워들었다. 흙먼지를 탈탈 털어 내자 그 위에 쓰인 글씨가 드러났다. 엉망이 되도록 짓밟힌 곤륜의 현판이었다.
‘새로 달아야겠다.’
망가진 현판은 버리지 않고 오래도록 보관할 것이다. 되찾은 곤륜의 신물과 함께.
현판뿐만이 아니라 산맥 전체가 엉망이었다. 여기저기 부서지고 불에 타 이전과 같은 모습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이번 일로 손실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가장 심각한 건 인력의 손실이었다. 침략을 막기 위해 가장 먼저 앞장섰던 윗대 도인들이 전멸했다. 일대제자들은 물론이고 장문인, 심지어 원로들까지. 이 청천벽력 같은 소식에 곤륜산에는 통곡이 끊이질 않았다.
이대제자의 절반, 그리고 어린 삼대제자들만이 살아남았다. 공교롭게도 입문 시기를 따지자면 여운이 이들 중 가장 선배인 셈이었다.
그는 정상에서 내려온 순간 자신을 바라보는 사제들의 눈빛이 이전과는 달라졌음을 알아차렸다. 오래전 기사멸조를 저지른 누군가를 향한 경멸의 눈빛이 아니었다. 그는 어느새 혈마의 목을 치고 침략을 막아 낸 진정한 곤륜의 제자가 되어 있었다.
그들은 여운에게 이 절망적인 상황을 타개할 방법을 갈구하며 매달렸다. 여운은 사숙조들의 피를 손에 묻혔다는 죄책감에 스스로 곤륜을 떠날 생각이었지만 차마 이들을 두고 갈 수 없었다. 그리하여 남은 이들을 책임지기로 결심했다.
아무리 많은 이들이 죽고 무너졌어도, 곤륜의 무공이 남아 있고 단 한 사람이라도 그것을 기억하는 한 끝이 아니었다. 그러니 최선을 다해 일으켜 세울 것이다. 떠난 이들을 위해서라도.
여운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시신이 하나하나 수습되고 있었다. 이 참담한 상황에 대부분은 침묵을 지키며 애도했지만, 반대로 분을 참지 못하고 들끓는 이들도 존재했다.
‘사형, 지금이라도 신강으로 쳐들어가야 하는 거 아닙니까? 복수하지 않고서는 분해서 도저히 안 되겠습니다. 그 미친 마교놈들이 우리 곤륜만 집중적으로 공격하는 걸 모두가 보았단 말입니다.’
‘맞습니다. 다른 문파는 건드리지도 않는 게, 무슨 개인적인 원한이라도 품은 게 아닌가 싶었습니다.’
‘마침 천마가 목숨을 잃었으니 아랫놈들도 갈피를 못 잡고 우왕좌왕하고 있을 겁니다. 당장 신강으로 가서 그놈들의 피를 봐야겠습니다. 이 깊은 원한은 똑같이 갚아 주어도 풀리지 않을 겁니다.’
그러나 여운은 고개를 저었다. 천마의 부재를 떠나서 마교의 전투력은 여전히 하늘을 찔렀다. 겨우 이 정도 인원을 끌고 갔다가는 말 그대로 떼죽음일 텐데, 복수를 하겠다고 모두를 사지로 몰아넣을 수 없었다.
무엇보다도 천마가 자신의 목숨을 살렸다는 사실이 마음에 걸렸다. 신물을 되찾고 혈마의 목을 벤 것도, 남은 혈교의 잔당들이 전멸한 것도 전부 그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어려서부터 마는 악한 것이고, 마인들은 악인이라는 인식이 머릿속에 뿌리 깊게 박혀 있었던 여운에게는 아주 혼란스러운 일이었다.
‘이제는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지도 모르겠다.’
여운은 고개를 들어 신강 방향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그가 지금 확신할 수 있는 건 단 하나였다. 지금부터 적어도 수십 년간은 곤륜의 역사상 가장 어려운 시기가 될 거라는 것.
하지만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곤륜이 다시 일어나 중원의 충실한 방벽이 될 때까지.
“사백! 여운 사백!”
생각에 잠긴 채 정처 없이 걷던 여운은 등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뒤를 돌아보자 삼대제자 아이들 몇 명이 쪼르르 달려왔다.
“사백,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말해보라는 듯 고개를 까딱이자 가운데 서 있던 여자아이가 입을 열었다.
“지금 사문 앞에 어떤 남자애 하나가 찾아왔는데요. 아니 세상에, 다짜고짜 제자로 받아달라는 겁니다. 다 무너져가는 게 보이지도 않는지 계속 고집을 부려 난처해 죽겠습니다.”
“…남자애?”
“예. 이 난장판을 보고도 꼭 입문하고 싶답니다. 겉보기에는 평범한데 정말 제정신이 아닌 것 같습니다.”
그때, 옆에 서 있던 조그마한 아이가 조심스레 끼어들었다.
“저, 사저…. 사실은 그분이 제게 큰 도움을 주셨습니다.”
“뭐?”
“제가 절벽에서 발을 헛디뎌 떨어졌을 때, 그분께서 저를 발견하시고서는 등에 업으시더니 맨손으로 절벽을 기어오르셨습니다.”
“그게 무슨 소리야. 그 높은 데를 평범한 애가 어떻게 맨손으로 기어올라?”
“저도 잘….”
잠자코 듣던 여운은 점점 길어지려고 하는 그들의 대화를 끊어놓았다.
“내가 만나볼 테니 너희들은 그만 가보거라.”
“만나보시겠다고요?”
“그래.”
여운은 어리둥절해하는 삼대제자들에게 짧게 답했다. 하필 이런 시기에 입문하겠다는 게 미심쩍기는 했지만, 손 하나하나가 귀한 상황에 제자를 가려 받는 것도 못 할 짓이었다.
그리고 오래전 함께했던 누군가가 떠올라 차마 무시할 수 없기도 했다. 여운은 씁쓸함을 삼키며 돌아섰다. 아이를 만나러 가기 전 잠시 들를 곳이 있었다.
이제는 주인을 잃은 장문인의 처소를 향해 가는 길이었다. 다들 슬픔에 빠져 차마 엄두 내지 못하고 있었지만, 누군가는 남은 물건을 정리해야만 했다.
그렇게 무거운 걸음을 옮기던 여운의 뒤로, 살금살금 숨을 죽인 채 그를 쫓는 낯선 기척이 있었다.
마치 장난치듯 가벼운 발걸음이 이곳의 분위기와 크게 어긋났다. 살기를 띠지는 않았지만 몰래 숨어들어 함부로 누군가의 뒤를 쫓는다는 것도 심히 거슬렸다.
사문 앞에 찾아왔다는 그 아이인가. 여운은 불쾌함을 꾹 누르며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그 자리에 멈춰 선 아이와 눈이 마주친 순간, 충격으로 온몸이 딱딱하게 굳었다.
“찾았다.”
장난스럽게 웃음 짓는 말간 얼굴에 여운의 시간은 그대로 정지했다. 멈춘 시간 속에 아이의 목소리만이 선명하게 울려 퍼졌다. 심장이 바닥까지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생김새가 달라졌어도 알아볼 수 있었다. 알아보지 못할 리가 없었다. 그를 마주한 순간 하늘과 땅이 알려 주고 있었으니까. 너의 친우가 여기에 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