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8화
‘세화야….’
이 세상을 떠날 때 너는 어떤 기분이었을까.
여운은 피가 묻은 검으로 몸을 지탱했다. 검날에 묻은 것은 적의 피가 아닌 동문의 피였다. 이 검으로 직접 사숙조를 찔렀다는 죄책감이 목 끝까지 차올랐다.
단전을 잃은 세화를 발견했을 때만큼 커다란 충격이었다. 우왕좌왕하는 삼대제자 아이들을 챙기러 다녀온 사이 사형제들이 돌변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윗세대들 또한 당하고 말았다.
언제나 생사를 함께해야 하는 동문들끼리 싸우고 죽이는 광경이 마치 지옥 같았다. 여운은 아무리 목숨을 위협당한다 해도 차마 제 손으로 그들을 벨 수 없었다. 차라리 천 명의 적을 상대하는 편이 훨씬 쉬웠을 것이다.
그래도 혈교의 수장이라는 자를 해치운다면 모두 제정신으로 돌아올 거라 믿었다. 곤륜을 지킬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혼자서라도 적들을 뚫고 곤륜여신봉을 향해 가는 길이었는데.
빠져나갈 틈도 없이 사숙조들에게 둘러싸인 순간 그가 느낀 감정은 절망이었다. 저들에게 목숨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절망이 아닌, 제 손으로 저들을 물리쳐야 한다는 절망. 곤륜이 정말 이대로 무너지고야 말겠다는 절망이었다.
‘나는 사형만 믿을게.’
그렇게 말하며 밝게 웃던 세화의 얼굴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곤륜의 미래는 네게 달려 있다, 네가 세상을 구할 것이다 하며 여운을 한없이 치켜세우던 그였다.
‘나는 그렇게 큰 사람이 되지 못했어, 세화야.’
끝까지 너의 바람을 들어주지 못해 미안하다. 그 말을 하늘 위로 올려보내며, 여운은 널브러진 시신들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이내 땅바닥에 털썩 무릎을 꿇고 앉았다.
내 검에 목숨을 잃은 이들이 몇인가. 나는 몇 명의 목숨을 빚처럼 짊어지고 살아가야 하나. 하나둘 수를 세어보던 여운은 눈가를 문질렀다.
어쩌면 그럴 필요 없을지도 모르겠다. 나도 곧 저들을 따라가게 될 것 같으니.
기나긴 시간 끊이지 않고 지속된 싸움에 내력이 바닥난 지 오래였다. 심지어 선천진기까지 사용했다. 급한 마음에 있는 대로 힘을 끌어다 썼지만, 이렇게 해서는 앞으로 얼마 버티지 못할 거란 사실을 알고 있었다.
땅이 진동하고 머리가 울렸다. 사숙조들의 피를 털어내기 무섭게 적들이 몰려오고 있었다.
저건 또 몇 명이지. 이백? 삼백?
남은 선천진기를 모두 사용한다면 저놈들까진 어떻게 해볼 수 있지 않을까. 그렇게라도 동문의 목숨을 앗아 간 죗값을 치르고 곤륜산 위에서 눈을 감는다면.
여운은 정신을 차리기 위해 고개를 흔들었다. 흐릿한 눈앞에 다가오는 혈교인들이 보였다.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으나 다리에 힘이 제대로 들어가지 않았다. 검에 무게를 실어 몸을 일으키려던 그는 아래에서 쩌적 하고 들려온 소리에 시선을 빼앗겼다.
검날에 금이 가 있었다. 금방이라도 부러질 것처럼 아슬아슬한 검을 보며 여운은 허탈한 숨을 내쉬었다. 이런 것도 눈치채지 못할 만큼 정신이 없었던가.
설운. 세화의 검인 설화와 쌍둥이 검이었는데, 마지막 순간까지도 그를 떠올리게 만드는구나.
‘세화….’
금방 따라갈 테니 조금만 더 기다려. 여운은 생각하며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그때, 어디선가 원인 모를 강풍이 불어 닥쳤다. 거센 바람에 눈을 뜨기도 힘들 지경이었다. 휘날리는 모래바람 속에 여운은 눈가를 손으로 가린 채 정면을 바라보았다.
‘이게 무슨….’
그는 믿을 수 없는 광경에 제 눈을 의심했다. 기세등등하게 달려오던 적들이 바람을 맞고 하나둘 쓰러지기 시작한 것이다. 마치 날카로운 바람에 베이기라도 하는 것처럼, 그들의 옷과 살이 찢겨 나갔다.
절벽 위는 비명으로 가득했다. 누군가는 목이 잘렸고, 또 누군가는 상반신과 하반신이 분리되었다. 죽어 가는 자들의 절규가 귀를 찔렀다.
그렇게 멍하니 앉아 있기를 잠시, 바람이 멈춤과 함께 끔찍했던 비명도 잦아들었다. 아직 공중에 흩날리는 모래와 흙으로 시야가 온통 뿌옇게 뒤덮였으나 주변은 쥐 죽은 듯이 고요했다. 한 명도 살아남지 못한 모양이었다.
여운은 모래가 가라앉기를 기다렸다. 시간이 흘러 마침내 시야가 트였을 때는, 저 멀리서 걸어오고 있는 누군가의 모습이 보였다.
망설임 따위 없는 큰 보폭, 뿌연 공기 중에도 존재감을 자랑하는 새까만 옷자락, 그리고 혼자 있어도 수백의 무인들보다 거대한 위압감.
마치 죽음이 다가오는 것처럼 보였다.
‘천마.’
저 사람의 눈에 띈 순간 자신은 이미 죽은 목숨이었다. 끝까지 싸워보려 했으나 이제는 그마저도 어렵게 되었다. 희망을 잃은 여운은 쿨럭거리며 기침을 토했다.
그러는 동안 무호는 코앞까지 다가왔다. 그의 걸음이 멈추고, 커다란 손이 여운의 어깨 위에 내려앉았다.
“뭐 하는… 짓이야.”
맞닿은 곳을 통해 기가 전해져 들어오고 있었다. 주화입마라도 오게 만들 작정인가. 여운은 본능적으로 그의 손을 쳐내고서는 힘이 없어 비틀거렸다.
그러자 무호가 여운의 뒷덜미를 잡아 억지로 일으켜 세웠다. 낮은 목소리가 귓가에 경고하듯 읊조렸다.
“정신 똑바로 차려.”
거부할 수 없을 만큼 강한 힘으로 여운의 어깨를 꽉 움켜쥔 그는 계속해서 기를 넣어주었다. 그에게서 벗어나지도 못하고 숨을 헐떡이던 중, 여운은 한 가지 이상한 점을 감지했다.
지금 제 몸으로 들어오고 있는 것은 단순한 내력이 아니었다. 그보다 훨씬 강렬하고 정순한 무언가….
놀란 여운의 눈이 크게 뜨였다. 그는 경악하며 무호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미친 거야?’
미친 게 아니고서야 제게 선천진기를 나누어 주고 있을 리 없었다. 선천진기라는 건 수명과도 같은 것 아닌가. 정말 벼랑 끝까지 몰린 위급한 상황에서나 조금씩 사용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는 지금 목숨에 미련이 없는 사람처럼 힘을 쏟아 내고 있었다. 몸속을 가득 채우는 폭발적인 기운이 버거울 정도였다. 이렇게 많은 양을 남에게 준다는 건 자살행위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만, 그만.”
여운은 그의 손을 떼어 내려 했다. 이토록 강력한 힘은 처음 느껴 보는지라 몸을 마음대로 통제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무호는 굳건히 그 자리에 서서 하던 일을 이어 갔다. 시간이 지나 그가 어깨에서 손을 떼었을 땐 마치 새로 태어난 듯한 기분이 들 만큼 강한 기운이 혈도에서 꿈틀거리고 있었다.
“나의 선천진기를 가졌으니 놈에게 쉬이 조종당하지 않을 것이다.”
무호가 말하며 바닥에 무언가를 툭 던졌다. 번쩍이는 그것을 본 순간 여운의 눈이 흔들렸다.
고풍스러운 은제 검집과 검 자루에 박힌 푸른 보석. 오래된 그림 속에서나 보았던 전설의 검. 잃어버린 곤륜 개파조사의 신물이었다.
“가서 죽여.”
무심하게 내뱉는 무호의 말이 여운의 귀에는 조금 다르게 들렸다.
‘가서 지켜.’
***
“안 돼.”
절벽을 향해 미친 듯이 달려가던 청연은 넋이 나가 중얼거렸다. 무호가 나타난 순간 그가 무얼 하려는 건지 알아차린 탓이었다.
“안 돼….”
여운이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의 손에는 번쩍거리는 검이 들려 있었다.
“가면 안 돼….”
청연은 제게 달려드는 적들은 안중에도 없이 앞만 보고 내달렸다. 여운이 혈마를 죽이도록 내버려 둘 수 없었다. 이제야 사술을 해결할 방법을 찾았다는데, 이럴 수는 없는 거였다.
“객주님!”
제하의 다급한 외침이 들려왔다. 그는 바쁘게 뒤를 쫓으면서도 청연을 공격하려 하는 혈교인들을 쓰러뜨리느라 조금씩 뒤처지고 있었다.
청연에게는 뒤를 돌아볼 시간이 없었다. 검을 단단히 쥔 채 떠나가는 여운의 뒷모습이 보였고, 절벽 위에 가만히 서서 자신을 응시하는 무호의 얼굴이 보였다.
“안 돼!”
청연은 제가 할 수 있는 한 가장 빠른 속도로 달렸다. 마침내 절벽 위에 다다랐을 땐 여운이 자리를 뜬 뒤였다. 곧장 그를 쫓아가려고 하자 무호가 청연을 붙잡았다.
“놔!”
그러나 무호는 청연의 몸을 꼭 끌어안고 꼼짝할 수 없게 만들었다. 그의 가슴에는 여전히 커다란 대도가 박힌 채였다.
“이거 놓으라고!”
버둥거리던 청연의 눈에 눈물이 차올랐다. 무호가 자신을 절대 놓아주지 않으리란 걸 깨달은 그는 움직임을 멈추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찾았대…. 사술을 해결할 방법을 찾았대. 너 살 수 있다고….”
“…….”
“그러니까 빨리 이거 놔…. 못 가게 해, 응? 제발….”
청연은 애원하며 무호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청연.”
“…제발. 방법이 있다잖아. 살 수 있다잖아.”
“늦었어.”
무호는 담담하게 말했다. 고개를 젓는 그의 혈색이 좋지 않았다. 청연은 심장이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선천진기… 얼마나 썼어?”
그는 답이 없었다. 조용히 손을 들어 청연의 눈가에 흘러내린 눈물을 닦아 줄 뿐이었다.
“아니지? 너 진짜… 진짜 그렇게 가려는 거 아니지?”
무호에게서 벗어나려던 청연은 어느새 그를 꼭 붙든 채 매달리고 있었다.
“어떻게 그래? 너한테 마음 다 가게 만들어 놓고 어떻게….”
원망을 해야 할까, 설득을 해야 할까. 청연은 알 수 없었다. 그저 무호의 어깨에 얼굴을 묻고 마음을 쏟아 내는 게 그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가지 마. 나한테는 네가 필요해. 네가 없으면 안 되겠어. 너 없는 세상은 잔인하고 외로워. 쉴 새 없이 중얼거리는 동안 무호는 말없이 청연의 등을 토닥여 주었다.
무호와 떨어져 있는 동안 깨달은 사실을 모두 말해 주고 싶었다. 청연은 여느 때보다 강하게 그를 끌어안은 채 한 자 한 자 힘주어 내뱉었다.
“난 이제 네 사람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