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4화
“나 알아보겠어?”
망설이던 청연은 조심히 고른 말을 내뱉었다.
“너 항상 나는 잘 알아봤잖아. 내 얼굴 잊은 적 없는 거 알아.”
청연을 가만히 내려다보는 눈빛이 차갑기만 했다. 이토록 붉은 빛이 차게 느껴질 수 있다는 건 처음 알았다. 떨리는 손끝으로 무호의 손을 살며시 잡자 그의 표정이 묘하게 구겨졌다.
“모르겠어? 이렇게 하는 거 좋아했으면서.”
청연은 무호의 손을 자신의 뺨으로 가져갔다. 뜨거운 손바닥을 뺨 위에 올려놓은 그는 쿵쿵 뛰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말했다.
“나 잘 때도 이렇게 쓰다듬고….”
“…….”
“내가 비 쫄딱 맞고 아팠을 때도….”
무호의 기억을 일깨워 주기 위해 지나간 일들을 되짚어 보던 청연은 말했다.
“그때 약 기운에 취했다고 네 마음대로 접문한 거 평생 모를 줄 알았지?”
“…….”
“나중에 기억났는데 그냥 모르는 척한 거야. 다 지난 일 뒤늦게 따지기도 애매해서.”
네 말처럼 반지값 갚은 걸로 치지 뭐. 청연은 쓰게 웃었다. 이렇게 하다 보면 무호가 저를 알아보지 않을까 해서 꺼낸 이야기였는데, 무호가 아니라 오히려 자신이 기억 속에서 헤매게 된 기분이었다.
“너한테 네 속 얘기 안 털어놓는다고 잔소리했지만, 사실 나도 감추는 거 많아. 이전에 요리하다가 손에 기름 흘려서 다쳤다고 했던 것도 거짓말이야. 넌 이미 눈치챘겠지.”
“…….”
“그리고 지난번 사흘 동안 아무 일도 없었다고 한 거. 그것도 거짓말이었어. 그때 내가… 음… 널 좀 도와줬거든. 어떻게 도와줬는지는 묻지 말고.”
“…….”
“흠, 아무튼 책임질 일 없었던 건 확실하니까 걱정하지 마. 이렇게 말해도 너는 걱정하겠지만. 아니, 얘기가 왜 여기까지 왔냐.”
혼자서 주절주절 떠들다 민망해진 청연은 지홍의 눈치를 살폈다. 그는 아무것도 안 들린다는 듯이 먼 산만 보고 있었다.
청연은 목을 가다듬고는 자신을 뚫어져라 응시하는 무호와 시선을 맞췄다. 뺨 위에 놓인 그의 엄지손가락이 어느새 얼굴을 슬슬 어루만지고 있었다. 역시 나를 알아보는구나, 하며 희망이 생긴 청연은 그를 향해 미소 지었다.
“여기서 이러지 말고 나랑 내려가자. 내가 옆에 있어 줄게. 어리광 부리는 것도 다 받아 주고 접문도… 음… 어… 받아 줄게. 그러니까 너는 딱 한 마디 명령만 내리면 돼. 공격을 멈추라고.”
그 한마디면 멈출 수 있다. 무호의 명령이 떨어지는 순간 마교는 하던 일을 그만두고 원위치로 돌아갈 테니까.
혈교가 존재하는 이상 일이 완전히 해결되는 건 아니겠지만, 그래도 당장은 그들이 마교의 도움 없이 전쟁을 치르기 힘들 거라고 예상했다. 그러니 급한 불이라도 끄고 싶었다.
“이제 그만두라고 하자, 응? 부탁할게. 나는 사람들끼리 저렇게 싸우는 거 못 보겠어.”
청연은 이전에 터득한 방법대로 어린아이 달래듯 무호를 설득했다.
“부탁 들어줄래?”
무호는 아직도 말이 없었다. 청연의 뺨을 만지작거리던 손길이 목덜미까지 내려갔지만 그게 다였다. 표정은 여전히 화난 듯했고, 천천히 목을 쥐어 오는 손끝이 거칠었다.
‘설마….’
순간 등골이 오싹해진 청연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설마 여태 날 못 알아본 건가.’
그러기 무섭게 목에 무지막지한 압박감이 가해졌다. 순식간에 숨통을 조여 온 그의 손이 청연의 몸을 가뿐히 들어 올렸다. 허공에 붕 뜬 채 발버둥 치던 청연은 황급히 물었다.
“나, 진짜… 모르, 겠어?”
그마저도 목이 졸려 목소리가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벌게진 얼굴로 그의 손을 풀어내려 애썼지만 단단한 손아귀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벗어나길 포기한 청연은 그의 눈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또, 똑바로… 봐….”
네가 지금 누구한테 이런 짓을 하는 건지 제대로 봐.
목을 조르는 압박감이 점점 심해졌다. 무호가 손을 조금만 틀어쥐어도 뼈가 꺾여 죽을 것만 같았다. 안절부절못하던 지홍이 다가오려는 걸 발견한 청연은 필사적으로 고개를 흔들었다.
‘가까이 오면 저 사람이 먼저 죽는다.’
청연은 손을 파닥거리며 더 이상 다가오지 말라고 신호했다. 시선은 무호에게 붙박은 채였다.
“이, 이러다가….”
이러다가 정말 죽겠다고 말하려 했지만 청연의 입에서는 쌕쌕거리는 소리만 새어 나왔다. 부족한 호흡과 희미해져 가는 의식 속에 확신할 수 있는 건 단 한 가지였다.
‘무호가 혼란스러워하고 있다.’
그에게 사람을 죽이는 건 벌레 한 마리 잡는 것만큼 쉬운 일이었다. 만약 청연을 전혀 알아보지 못했다면 이렇게 목을 조르는 게 아니라 바로 숨을 끊어놓았을 터였다.
그러니 제발 눈을 똑똑히 뜨고 봐라. 지금 네 손에 죽어 가고 있는 게 누구인지 제대로 보고 기억해 내라.
숨이 막혀 눈앞이 새하얘졌고 생리적인 눈물까지 줄줄 흘렀지만 청연은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그럴수록 무호의 표정은 더욱 딱딱하게 굳어 갔다.
“주군!”
참다못한 지홍이 소리쳤으나 무호는 돌아보지 않았다. 그는 정신을 잃기 직전인 청연만을 바라보며 시뻘건 눈을 빛냈다.
“안 됩니다!”
다급한 외침이 청연의 귓가에 웅웅 울렸다. 청연은 힘겹게 눈을 깜빡였다. 고여 있던 눈물이 흘러내리기 무섭게 시야가 다시 뿌옇게 차올랐다. 턱선을 타고 내려간 물방울들은 무호의 손등 위로 툭툭 떨어져 내렸다.
그 순간 청연은 막혀 있던 숨통이 단번에 트이는 것을 느꼈다. 본능적으로 숨을 크게 들이마시자 공기가 폐 속으로 밀려 들어왔다. 그러나 호흡을 제대로 이어 가기도 전에 휙 날아간 그의 몸통이 벽에 부딪혔다.
상황을 파악하기도 전에 벌어진 일이었다. 벽에 금이 갈 정도로 세게 내동댕이쳐진 청연은 쿵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그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바닥에 엎어져 밭은 숨을 쉬었다.
무호는 그런 청연의 몸을 억지로 돌려 눕혔다. 붉은 눈동자 한 쌍이 핏발을 잔뜩 세운 채 청연을 내려다보았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청연은 남은 힘을 다해 목소리를 쥐어짰다.
“나는 기억해야 할 거 아니야….”
“…….”
“어떻게 짐짝처럼 내던질 수가 있어….”
아픈 몸도 몸이지만 마음이 비참했다. 분명 설득을 하러 온 건데 설득은커녕 자신을 알아보지도 못하는 무호의 모습에 서러워졌다.
“나는… 널 얼마나 걱정했는데….”
여기까지 찾아오는 동안 얼마나 마음 졸였는데.
“대답이라도 좀 해 봐….”
청연은 길게 한숨을 내쉬며 눈을 감았다. 이전에 동굴 속에서 다친 머리가 찡하게 울렸다. 그때 터졌던 곳에서 다시 피가 흐르는 것 같았다.
“이 미친놈아….”
입 속말로 중얼거리던 청연은 서서히 의식을 놓았다. 이대로 정신을 잃으면 정말 답이 없다는 걸 알면서도 견디기 힘들었다.
그때, 꺼져가는 그의 의식을 붙잡는 목소리가 있었다.
“…청연?”
그 작은 목소리에 눈꺼풀을 들어보니 무호의 놀란 얼굴이 보였다. 눈동자는 여전히 붉었고 온몸에서 마기를 흘렸지만, 조금 전과 비교하면 꽤 유순하다고 할 만한 얼굴이었다.
그의 손이 청연의 이마에서 흐르는 피를 허겁지겁 닦아 주었다. 그러자 청연의 머릿속에는 자연히 동굴에서 보았던 환영이 재생되기 시작했다.
피를 닦아 주던 무호. 그리고 머지않아 목에서 피를 쏟던 무호.
‘혹시 이것도 환각인가.’
머리가 어지러워서인지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청연은 멍하니 무호를 올려다보았다. 이러다가 또 그의 죽음을 목격하게 될까 두려웠다.
“진짜 너 맞아?”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무호는 무어라 답하려다가 말고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그의 표정에 혼란스러움이 묻어났다.
“무호….”
손을 뻗어 그의 어깨를 더듬어본 청연은 깨달았다. 환각이 아니었다 지금 제 눈앞에 있는 사람은 무호가 맞았다. 그가 자신을 알아보고 있었다.
‘미친놈이라는 말에 정신이 든 거야?’
청연은 놀라 그의 안색을 살피며 물었다.
“괜찮아? 머리 아파?”
무호의 낯빛은 계속해서 달라졌다. 청연을 앞에 두고 혼란스러워하다가, 머리가 깨질 듯한 두통에 아파하다가, 또다시 붉은 눈을 번쩍이며 위협하길 반복했다. 마치 두 개의 자아가 번갈아 몸을 차지하려고 경쟁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는 이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 상태로 사라져 버리기라도 할까, 청연은 그를 따라 후다닥 일어나려고 했다. 그러나 몸을 반도 일으키지 못하고 힘없이 쓰러졌다. 놀라서 다친 것조차 잊고 있었다.
“어디 가!”
청연의 외침에도 불구하고 무호는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그가 멈춰 선 곳은 자신의 대도가 비스듬히 놓여 있는 한쪽 벽이었다. 망설임 없이 대도를 집어 든 그가 무얼 하려는 건지는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잠깐, 무호야, 잠깐만!”
청연은 꾸역꾸역 몸을 일으키며 소리쳤다. 지홍에게 도움의 눈길을 보냈으나 그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착잡한 얼굴로 고개를 숙일 뿐이었다.
커다란 칼날이 번쩍하고 빛남과 동시에 무호의 가슴을 꿰뚫었다. 몸을 완전히 관통해 등을 뚫고 나온 칼날에서 피가 뚝뚝 떨어졌다. 칼자루를 잡은 채 털썩 무릎을 꿇고 주저앉은 무호는 자신의 가슴을 내려다보며 거친 숨을 내뱉었다.
청연은 새하얘진 얼굴로 엉금엉금 다가가 그의 앞에 앉았다. 심장과 가장 가까운 곳에 박힌 무시무시한 칼날에 말문이 막혔다. 동굴 속에서의 환각이 반복 재생되는 것만 같아 몸이 벌벌 떨렸다.
반면에 무호는 이런 일이 지나치게 익숙해 보였다. 힘줄이 바짝 선 손으로 칼자루를 꾹 쥐고 고통을 참는 모습에 청연의 마음은 바닥까지 무너져 내렸다.
그동안 혼자서 이런 일을 얼마나 많이 반복했을지 예상할 수 있었다. 그러나 단순히 알고 있는 것과 실제로 보는 것은 천지 차이였다.
“빠, 빨리… 이거 빼….”
청연은 칼자루를 쥔 무호의 손을 더듬으며 애원했다. 가슴의 상처에서 피가 울컥울컥 새어 나와 함부로 건드릴 수 없었다.
“됐으니까 빨리 빼고… 나랑 여기서 떠나자. 철수 명령 내리고 가서 치료부터….”
그러나 무호는 대도를 빼낼 생각이 없는 듯했다. 대신 그는 자루를 놓고 손을 뻗어 청연을 끌어안았다. 청연의 머리를 제 오른쪽 어깨에 기대게 하며 서툴게 등을 토닥이는 손길이 환각 속의 그것과 닮아 있었다.
“이제 이걸로는 얼마 못 버텨.”
무호의 목소리가 귓가에 낮게 울렸다.
“지금부터는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어서 가.”
호연. 칼날 위에 선명하게 새겨진 그 이름이 온통 피로 물든 것을 바라보던 청연은 정신이 아득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