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1화
좁은 통로를 무릎걸음으로 엉금엉금 걸었다. 손이 닿는 곳마다 차갑고 축축했다. 동굴 안쪽에도 널려 있는 식물 줄기가 자꾸만 옷에 엉겨 붙었다.
청연은 대충 옷을 털었다. 그러던 중 손바닥이 따끔해 살펴보니 조그마한 가시가 박혀 있었다. 식물 줄기에서 옮겨 온 것처럼 보였다.
가시를 뽑아낸 그는 손을 탈탈 털고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갔다. 이번이 정말 마지막이다, 이번에도 영약을 발견하지 못한다면 바로 돌아가 제하의 곁을 지킬 것이다, 생각하면서.
입구가 좁았던 만큼 작은 동굴일 거라고 추측했는데, 생각보다 길게 이어지는 듯했다. 깊숙한 곳을 향해 들어갈수록 기온은 싸늘하게 떨어졌다.
청연이 옷깃을 단단히 여미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등 뒤에서 이상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동굴 안쪽이 아닌, 이미 지나온 바깥쪽으로부터 들려오는 소리였다. 짐승 울음소리 같기도, 요괴 울음소리 같기도 한 음울한 음성에 손발이 절로 차가워졌다.
청연은 속도를 높였다.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 한 손에는 검을 단단히 쥐었지만, 몸이 성치 않으니 저것과의 충돌은 가능한 피하고 싶었다.
그러나 동굴 안쪽으로 향할수록 정체를 알 수 없는 그것의 기척은 점점 가까워졌다. 청연은 움직임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자신을 제외하면 살아 있는 것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지만, 마치 누군가가 등 뒤에서 쫓아오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이제는 돌아가고 싶어도 돌아갈 수 없었다. 저것이 추격을 포기하고 사라질 때까지 입을 닫고 앞으로 나아가는 수밖에.
청연은 최대한 빠르게 몸을 움직였다. 그 와중에 무언가가 머리 위쪽으로 휙휙 지나가는 것 같았지만 확인해볼 여력이 없었다. 어느새 등 뒤로 바짝 다가온 어떤 것에 신경이 완전히 쏠린 탓이었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 계속 도망쳐 봤자 금방 잡힐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마른침을 삼킨 청연은 검을 고쳐 잡으며 잽싸게 몸을 돌렸다.
그가 반대 방향으로 돌아섬과 동시에 검이 허공을 갈랐다. 청연은 몸을 조금 더 뒤로 물리며 자신을 위협하는 것의 정체를 확인하기 위해 눈을 부릅떴다.
“…어?”
청연은 식은땀을 흘리며 눈을 비볐다. 흉측한 무언가와 마주칠 거라는 추측과 다르게, 그의 앞은 텅 비어 있었다. 자신의 거친 숨소리를 제외하면 동굴 속은 고요했다. 물방울이 천장에서 똑똑 떨어지는 소리만이 귓가에 울렸다.
“분명 뭔가….”
뭔가 바짝 쫓아왔는데.
혼잣말을 중얼거리던 청연은 이마에서 흐른 땀을 닦았다. 요란하게 뛰는 심장을 달래면서 지나온 길을 몇 번이고 확인해 보았지만, 그곳에는 여전히 아무도 없었다.
“내가 헛걸 들었나….”
한숨을 푹 내쉰 청연은 검을 검집에 넣었다. 앞으로 할 일이 태산인데 이따위 허상에 기력을 빼앗길 수는 없었다. 그는 손바닥으로 바닥을 짚으며 다시 몸을 돌렸다.
그리고 앞으로 한 걸음을 내디딘 순간, 무릎 아래가 텅 비어 있음을 느꼈다. 그제야 시선을 깔아 아래를 내려다보니 그곳은 또 다른 낭떠러지였다.
“이런 씨….”
욕을 내뱉을 틈새도 없이 고꾸라진 청연은 끝도 없는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
“제하야, 이러다 내가 죽겠다….”
끙 소리를 내며 상체를 일으킨 청연은 머리에서 흐르는 끈적한 액체를 닦았다. 출혈이 심하지는 않았지만 바위에 머리를 박은 탓에 온 세상이 빙글 돌았다.
축축한 바닥을 짚어보던 그는 고개를 들고 위를 올려다보았다. 더 이상 좁다란 굴속이 아니었다. 거대한 구덩이라고 부르는 게 더 나아 보였다.
까마득한 바위벽 위쪽에는 구멍 하나가 뻥 뚫려 있었다. 아마도 그곳에서 떨어진 모양이었다. 다행히 벽의 표면이 매끄럽지 않아서 손으로 잡고 기어오를 수 있을 듯했다.
청연은 옆에 있는 바위를 짚으며 힘겹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의도한 건 아니었으나 어쨌든 여기까지 떨어졌으니 조금 살펴보고 떠나자 하는 생각이었다.
그때, 등 뒤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청연.”
동굴 속에 울리는 낮은 목소리. 그 소리에 움찔한 청연은 천천히 몸을 돌려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자신의 이름을 부른 사람의 얼굴을 확인한 순간, 울컥하고 올라온 감정을 간신히 삼켰다.
“너… 너….”
청연은 떨리는 발걸음을 떼어 그에게로 조심히 다가갔다. 내가 아는 무호가 맞나. 그가 정말 여기에 있는 게 맞나. 마음 한편에 의심이 고개를 들었지만, 그보다는 반가움과 안도감이 목 끝까지 차올랐다.
“너 왜 여깄어…. 내가 너 찾으려고 얼마나….”
차마 말을 이을 수 없었던 청연은 무호의 얼굴을 가만히 올려다보았다. 눈동자가 붉지도 않았고, 다친 곳도 없어 보였다.
“몸은 괜찮아?”
“…….”
무호는 말없이 손을 들어 청연의 머리에서 흘러내린 피를 닦아 주었다. 그 따뜻한 손길에 청연은 왠지 그대로 주저앉고 싶어졌다.
널 찾으러 여기에 온 이후로 한시도 마음이 편한 적 없었다, 많이 다치고 지쳤다, 지금도 머리가 아파 죽을 것 같다. 아이처럼 칭얼거리며 솔직하게 털어놓고 싶었다.
널 많이 걱정했고, 옆에 없어 불안했고, 다시는 못 보게 될까 봐 무서웠다. 힘들었고, 긴장됐고, 애가 탔다. 나는 생각보다 네게 많이 의지하고 있었나 보다.
하고 싶은 말은 많았지만 정리가 되지 않았다. 청연은 입 밖으로 튀어나오려 하는 말들을 꾹꾹 누르며 무호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그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자 등을 토닥이는 서툰 손길이 느껴졌다. 청연은 떨리는 입술을 열었다.
“나… 나 빨리 가야 해. 지금 제하가 위독하거든. 같이 여기서 나가자.”
“…….”
“저 위쪽에서 자꾸 이상한 소리가 들리고 누가 날 쫓아오는 것 같았어. 다시 돌아가야 하는데 무서워서 혼자는 못 견딜 것 같아. 그러니까 내 옆에 있어 줘, 응?”
한참을 기다려도 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청연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 무호를 올려다보았다.
그 순간 충격을 받은 청연은 무호를 안고 있던 팔을 툭 떨어뜨렸다.
“너….”
그는 눈앞에 펼쳐진 장면을 믿을 수 없어 고개를 저으며 뒷걸음질 쳤다.
“너 왜 그래….”
무호의 목에서 피가 흐르고 있었다. 누군가 그의 목을 검으로 베기라도 한 것처럼, 깊게 벌어진 상처에서 피가 미친 듯이 흘러나왔다.
“무호….”
이름을 제대로 부르기도 전에, 그의 몸이 옆으로 쿵 소리를 내며 무너져 내렸다. 콸콸 쏟아져 나온 피가 검은 장포를 적시다 못해 청연의 발치까지 흘러왔다.
“아니야….”
아니다. 그럴 리가 없다. 청연은 퀭한 눈으로 자신의 신발을 붉게 물들이는 핏물을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당장 달려가 그의 상태를 확인해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그럴 엄두가 나지 않았다. 손끝 하나 움직일 수 없었다. 이미 그의 숨이 끊어졌음을 확인하게 될까 봐 두려웠다.
“아니야….”
넋이 나간 청연은 비틀거리며 뒤로 한 걸음을 물렸다. 그러나 힘없는 다리가 몸을 지탱하지 못한 탓에 그대로 넘어지고 말았다.
그는 주저앉은 채로 무호의 얼굴만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자신을 응시하는 한 쌍의 눈이 똑똑히 뜨인 채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피가 흘러나옴과 동시에 목 위의 상처가 점점 크게 벌어져, 잘못 건드렸다가는 머리와 몸이 분리될 것만 같았다.
신발을 물들이던 피는 어느새 바닥을 가득 채워 발목까지 차오르고 있었다. 멍하니 앉아 있던 것도 잠시, 찰랑이는 핏물 속에 잠긴 손바닥이 쓰라렸다.
청연은 푹 젖은 손을 꺼내 살펴보았다. 조금 전 가시가 박혔던 상처에 핏물이 닿아 따끔거렸다.
“하….”
가만히 손바닥을 쳐다보던 청연은 헛웃음을 내뱉었다. 뒤통수를 강하게 내리치는 듯한 깨달음에 허탈함인지 안도감인지 모를 감정이 밀려왔다. 나오는 건 웃음뿐이었다.
“아니구나….”
진짜가 아니구나. 지금까지 내가 보고 들은 건 전부 허상이었구나.
사람이 환영을 보게 만든다는 식물에 관해 들어본 기억이 있었다. 기운이 빠진 청연은 들여다보던 손을 바닥에 떨궜다. 그러자 손등에 닿은 건 찰랑거리는 핏물이 아니라 단단한 땅의 질감이었다.
눈을 꼭 감았다 뜨니 붉은 피로 가득 찼던 바닥은 원래대로 돌아와 있었고, 피를 쏟던 무호의 몸도 감쪽같이 사라진 뒤였다. 그가 쓰러져 있던 자리에는 우윳빛을 띠는 액체 몇 방울만이 고여 있었다.
“…….”
텅 빈 눈으로 액체를 응시하던 청연은 주섬주섬 챙겨 온 수통을 꺼냈다. 그의 얼굴에는 더 이상 어떠한 표정도 남아 있지 않았다.
***
참을 수 없는 고통에 정신을 잃고, 또 깨어나길 반복하던 제하는 어느 순간 통증이 씻은 듯이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동시에 너무나도 듣고 싶었던 목소리가 귓가에 어렴풋이 들려왔다.
“한 방울은 상처에 떨어뜨렸고, 나머지는 먹이면 된다고 하셨습니까?”
평소보다 가라앉은 목소리였지만 청연의 것임이 확실했다. 이내 입속으로 흘러 들어온 액체를 꿀꺽 삼킨 제하는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객주님.”
반가운 청연의 얼굴이 보였다. 시선이 마주치자 그는 제하의 머리를 살살 쓰다듬으며 말했다.
“운기 해, 제하야.”
“그동안 무슨 일이….”
“어서. 나는 저쪽에 가 있을게.”
청연은 그렇게 말하며 일어나 자리를 옮겼다. 제하는 어리둥절했으나 그의 말대로 몸을 일으켰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죽어 가던 몸에 생기가 돌았다. 제하는 그제야 깨달았다. 내 입에 들어온 게 평범한 물이 아니었구나.
그는 바로 정좌한 뒤 운기를 시작했다. 몸속에 흐르는 기운이 여느 때보다도 맑고 깨끗했다. 손끝, 발끝까지 구석구석 기를 흘려보내던 제하는 생전 처음 느껴 보는 강력한 힘에 크게 놀랐다.
운기를 끝냈을 때는 몸이 날아갈 것처럼 가벼웠다. 내상은 완전히 회복된 지 오래였고, 심각했던 외상 또한 거의 다 나아 상처가 아물어 가는 것을 육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심지어 단전에 내공까지 엄청나게 쌓여 있었다.
“객주님!”
제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외쳤다. 저 멀리 앉아 있는 청연에게 뛰어가며 기쁜 목소리로 말했다.
“그동안 다양한 영약을 접해 보았지만 이토록 신묘한 건 처음입니다! 객주님께서 절 살리신 겁니다!”
“…….”
“전부 객주님 덕분입니다! 대체 이런 영약을 어디서 어떻게 구하셨….”
신나게 말하던 제하는 가만히 앉아 있는 청연의 안색을 본 순간 당황하여 입을 다물었다. 그러고 보니 청연의 상태가 말이 아니었다. 머리에 말라붙은 핏자국과 엉망이 된 두 손, 여기저기 긁힌 상처까지.
제하는 조심스럽게 그의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물었다.
“괜찮으세요?”
그러자 청연은 바닥을 향해 있던 시선을 들어 제하와 눈을 맞췄다. 그의 입꼬리가 살며시 위로 올라갔다.
“응. 늦지 않아서 다행이다….”
다시금 제하의 머리를 쓰다듬는 손이 숨길 수 없을 만큼 덜덜 떨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