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0화
그는 자신이 남궁세가의 막내공자에게 납치당한 처지라고 설명했다. 청연이 듣기에는 납치라기보다는 도경의 언변에 넘어가 그를 따라온 것으로 보였지만 말이다.
“정파 된 도리에 대해 구구절절 늘어놓으며 곤륜을 도와야 한다고 설득하는데, 그걸 무시했다간 정말 비겁자로 낙인찍힐 것 같은 기분이었소. 사파 나부랭이만도 못한 취급을 받느니 친우의 꼬임에 한번 넘어가 주기로 한 거요.”
내가 친우를 잘못 사귀어서 그만, 하며 투덜거리던 그는 제하의 상처를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청연은 조급함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어떻습니까?”
“급한 대로 지혈과 간단한 처치 정도는 도울 수 있겠으나 그 이상은 어렵겠소.”
“어렵다는 건….”
“상처가 너무 깊고 이미 피를 많이 흘려 살아남기 힘들 거요.”
그의 입에서 나온 청천벽력 같은 소리에 청연은 시선을 올려 제하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핏기 없는 하얀 얼굴과 감긴 눈. 모든 게 거짓말 같았다.
“이, 이 아이의 스승님께서 오시면 괜찮을 겁니다. 죽어가는 사람도 살리시는 분이란 말입니다….”
청연은 덩달아 하얗게 질린 얼굴로 중얼거렸다. 늘 강하게만 보였던 제하가 살아남기 힘들 거라니 믿을 수 없었다.
“그때까지만 어떻게 좀….”
“할 수 있는 데까진 해보겠지만 장담은 못 하겠소. 상태를 보면 오래 버티기는 힘들 것 같으니.”
그가 처치를 이어 가는 동안 청연은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아 제하의 손을 잡았다. 손이 얼음장같이 차가웠다.
청연은 어린 제하가 제게 해주었듯이 그의 손에다 입김을 불고는 손바닥을 비볐다. 자신의 차가운 손을 따뜻하게 잡아 주었던 아이의 체온이 아직도 기억 속에 생생히 남아 있었다.
‘그럼 네가 잡아 줄래? 손 시리지 않게 잡고 걸으면 되잖아.’
‘네! 제가 잡아 드릴게요!’
금방이라도 씩씩한 목소리가 귓가에 들려올 것 같았다. 하지만 눈앞의 그는 여전히 의식을 잃고 축 늘어진 채였다.
“제하야.”
“…….”
“아가.”
실로 오랜만에 입 밖으로 뱉어보는 호칭이었다. 청연의 눈에 제하는 언제나 어린아이 같았지만, 이미 훌쩍 커버린 그가 기분 나빠할까 봐 더 이상 그렇게 부르지 않게 되었다.
그런데 오늘은 왠지 그를 아가라고 부르고 싶었다. 그렇게 부르면 제하가 당장이라도 입술을 삐죽이며 일어나 퉁명스럽게 대꾸할 것만 같았다.
‘아가 아닙니다!’
소용돌이치는 오래된 기억 속에 청연은 마른세수를 했다. 제하의 피가 얼굴에 묻어났지만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맞잡은 손을 통해 제하의 몸속으로 쉬지 않고 내력을 흘려 넣어 주었다.
그렇게 얼마간 시간이 흐른 후, 제하의 감겼던 눈이 살며시 뜨였다. 흐릿한 눈빛으로 청연을 올려다보던 그는 갈라진 입술을 열어 말했다.
“그만 하세요….”
“…뭐를?”
“이거요.”
제하는 한창 내력을 나누어 주던 청연의 손을 놓았다.
“객주님 안색이… 너무 안 좋잖아요….”
“난 괜찮아.”
그렇게 말하며 다시 제하의 손을 잡으려 했으나 그는 힘없이 손가락을 오므려 거부했다.
“아가.”
“…아가 아니라니까.”
제하는 청연을 안심시키려는 듯 억지로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걱정 마세요…. 저는 언제나… 운이 좋은 편이니….”
그가 괜찮은 척할수록 청연의 마음은 한 발짝씩 지옥을 향해 가고 있었다.
이내 쿨럭거리며 기침을 쏟아낸 제하의 입에서 끈적한 피가 잔뜩 흘러나왔다. 피가 잘못 넘어가 숨이 막히기라도 할까, 청연은 그의 얼굴을 옆으로 돌려 피를 뱉을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제하는 한참을 고통스러워하다가 청연의 손 위에 한쪽 뺨을 기댄 채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감긴 눈을 내려다보던 청연은 입술을 꾹 깨물었다.
“혹시 모르니 고개는 옆쪽을 향하게 두시오.”
당 공자의 말에 청연은 제하의 얼굴을 살며시 내려놓았다. 그리고 소맷자락으로 그의 입가에 묻은 피를 닦아 주었다.
“지금 그쪽 얼굴도 꼴이 말이 아닌데.”
“그런 건 상관없습니다. 상처는 좀 어떻습니까? 차도가 보입니까?”
“피도 멈췄고, 내가 할 수 있는 건 다 했소만….”
그는 또 혀를 쯧쯧 차더니 말했다.
“아무래도 힘들 것 같소.”
“…….”
청연은 참담하다 못해 화가 나려고 하는 걸 꾹 눌러 참았다. 이성적인 판단을 하기가 힘들어진 탓에, 누구에게 화가 나는 건지도 알 수 없었다.
희망이 없다는 말만 반복하는 저 공자인지, 제하를 이 일에 끌어들인 자신인지. 아니면 이 와중에 혼자 평온해 보이는 제하인지.
“더 이상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겁니까.”
“그렇다니까 거참. 내가 신의도 아니고, 이 정도 상처는 하늘에서 아주 귀한 영약이라도 뚝 떨어지지 않는 이상 못 고칠 거요.”
“하늘에서… 영약….”
헛웃음을 지으며 그의 말을 되풀이하던 순간, 청연의 머릿속에는 한 가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자신은 언제나 운이 좋다던 제하의 말. 그 말대로 제하는 어딜 가든 기연을 맞닥뜨리는 재주가 있었다. 소설을 읽으며 무공 비급과 영약이 길바닥에 굴러다니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들 정도였다.
그중에서도 유독 귀한 것을 손에 넣을 때가 있었는데, 바로 절벽에서 떨어질 때였다. 제하가 절벽에서 떨어진다는 건 그가 레벨업을 앞두고 있음을 의미했다. 예를 들면 교룡의 내단을 얻게 되었을 때가 그랬다.
그러니 이곳이 정말 무협 클리셰에 충실한 세계라면, 이번에도 무언가를 찾아야 마땅했다. 이 아래까지 떨어져야만 찾을 수 있는 어떤 것. 곤륜에 머물렀던 수많은 이들이 발견하지 못했을 만큼 은밀한 곳에 숨겨져 있는 것이어야 했다.
머리를 싸매고 생각을 이어 가던 청연은 떠올렸다. 얼마 전 객잔에서 민아와 나눴던 이야기를.
곤륜이 멸문당한 직후, 어느 마교도 손에 넘어갔다는 희대의 영약에 관한 이야기였다.
‘공청석유.’
***
‘최대한 빨리 돌아올 테니 그때까지만 부탁드립니다.’
제하를 당가 공자의 손에 맡겨 놓고 떠나온 청연은 험한 길을 계속해서 걸었다.
가만히 앉아서 소명이 도착하기를 기다리기에는 애가 탔고, 그렇다고 의식이 없는 제하를 업은 채 강시 떼를 뚫고 하산하기에는 너무 위험했다. 그러니 공청석유라는 희박한 가능성에라도 기대 볼 생각이었다.
청연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제하와 당 공자가 있던 곳으로부터 멀리까지 걸어왔더니 사방이 수풀로 우거져 길 하나 나 있지 않았다. 세화의 기억 속에도 없을 만큼 낯선 풍경이었다.
그도 그럴 게, 웬만한 제자들은 일부러 작정하지 않는 이상 이 아래까지 내려올 일이 많지 않았다. 곤륜산의 다른 곳보다는 지대가 낮았으나 마을로 내려가는 길과는 아주 멀리 떨어져 있었고, 햇볕이 잘 들지 않는 으스스한 분위기 탓에 요괴가 나온다는 괴담이 퍼져 있었기 때문이다.
당 공자가 자신과 제하를 발견하게 된 것도 길을 잘못 들어서일 가능성이 컸다. 곤륜산의 지형에 익숙하지 않은 그가 도경을 찾아 헤매다가 절벽이 무너져 내리는 소리를 듣고 따라왔을 거라고 짐작했다.
‘일단 동굴을 찾아야겠지.’
공청석유라면 동굴 깊은 곳에 숨겨져 있을 것이다. 청연은 다친 몸으로 힘겹게 발걸음을 내디디며 동굴을 찾아 헤매기 시작했다.
첫 번째 동굴이 나타난 건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커다란 바위 동굴 입구를 발견한 청연은 망설이지 않고 어둠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굵직한 나뭇가지에 불을 붙여 횃불을 만든 그는 동굴 바닥 이곳저곳을 비춰 보았다.
오래전 여기서 폐관수련을 한 사람이 있었는지, 이따금 바위벽 위에 무공 비급 비슷한 것이 새겨져 있기는 했지만 그런 것까지 살펴볼 여유는 없었다. 깊숙한 동굴의 끝에서 막다른 길을 마주한 청연은 한숨을 푹 내쉬며 발걸음을 돌렸다.
희대의 영약을 쉽게 찾을 수 있을 거라 기대하지는 않았지만 아무런 수확 없이 밖으로 나가려니 진이 빠졌다. 심지어 손에 들고 있던 횃불이 꺼져 시각을 제외한 다른 감각에 의존한 채 어둠 속을 걸어야 했다.
‘왜 이럴 때 하필 무호 생각이….’
어두컴컴한 동굴 속에서 자신의 손을 잡고 이끌어 주던 무호가 떠오르자 가슴이 욱신거렸다. 그에게 의지하지 않으려 애쓰던 당시와는 다르게, 지금은 의지하고 싶어도 그가 곁에 없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길을 혼자 걷던 청연은 왠지 쓸쓸해졌다. 몸이 약해지면 마음도 약해진다더니, 많이 다치고 지쳤기에 나도 모르게 누군가를 필요로 하는가 보다. 그렇게 생각하며 스스로를 달랠 뿐이었다.
‘약해지지 말자.’
위독한 사람의 목숨부터 살리고 보자. 청연은 무거운 발걸음을 억지로 재촉하며 생각했다.
그러나 두 번째 동굴에서도, 세 번째 동굴에서도 별다른 수확을 얻지 못했다. 얻은 거라곤 암반수에 푹 젖은 옷과 다친 다리 탓에 넘어져서 생긴 상처가 전부였다. 새하얗게 질린 제하의 얼굴을 생각할 때마다 마음이 급해졌으나 몸은 점점 지쳐만 갔다.
동굴에서 나와 험한 길을 오르내리던 청연은 잠시 멈춰 섰다. 이제 그만 포기하고 제하에게 돌아가 봐야 할까. 어디 있는 지도 모를 영약을 찾아 헤매느니 제하의 곁을 지키며 내력을 나눠 주는 게 나을까. 고민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아니야, 딱 한 군데만 더….’
포기하더라도 딱 한 군데만 더 보고 포기하자. 약해진 결심을 바로 세우며, 청연은 걸음을 옮겼다.
이윽고 그의 눈앞에 나타난 것은 한 사람만이 들어갈 수 있을 법한, 아주 조그마한 동굴 입구였다. 입구가 식물 줄기에 가려져 보일락 말락 했기에 하마터면 그냥 지나칠 뻔했다.
청연은 검으로 줄기들을 베어 낸 후 크게 심호흡했다. 그러고서는 좁은 입구에 몸을 밀어 넣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