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8화
제하도 청연과 같은 생각을 하는 눈치였다. 그는 검을 잡은 손에 힘을 주며 청연을 자신의 등 뒤로 슬쩍 숨겼다.
“으, 뻐근해.”
소년은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이 팔을 쭉 뻗더니 여유롭게 기지개를 켰다. 그러면서도 곁눈질로는 청연을 조금씩 훔쳐보고 있었다.
“여긴 꼬맹이들 노는 데가 아니야. 다른 데 가서 놀아.”
제하는 그를 떠보려는 듯 무시하는 말을 내뱉었다. 그러자 그가 주먹을 불끈 쥐며 눈을 흘겼다.
“…꼬맹이?”
“그래, 꼬맹이. 어서 내려가. 부모님 걱정하시겠다.”
“…….”
꼬맹이라는 말에 발끈한 소년을 지켜보던 청연은 제하의 등을 톡톡 두드린 뒤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
제하는 청연의 눈빛을 읽고서는 못마땅한 얼굴로 물러섰다. 그래 봤자 청연의 몸을 반 정도는 가리고 있었지만 말이다.
청연은 고개를 내밀어 소년을 다시 한번 살폈다. 아직 덜 자란 키에 앳된 얼굴, 높게 올려 묶은 머리와 인상을 찌푸려도 얼굴에 묻어나는 타고난 장난기. 생전 처음 보는 아이였다.
미심쩍고 이상했지만 절벽에서 떨어진 아이를 구해 준 걸 보면 악인은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청연은 그에게 넌지시 물었다.
“곤륜산에는 무슨 일로 찾아온 거야? 볼 일이라도 있어?”
그는 불만이 가득한 눈으로 청연을 힐끗 볼 뿐 답이 없었다.
‘왠지 날 아는 것 같은데….’
어쨌든 찾던 아이도 무사히 돌아갔고, 더 이상 낭비할 시간이 없으니 서둘러 떠나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청연은 제하를 끌고 뒤로 물러나며 말했다.
“아무튼 여긴 위험하니까 얼른 내려가. 우린 이만 가볼게.”
“허….”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지은 소년은 끝까지 날카로운 눈초리로 청연을 훑어보았다. 그러던 그의 눈길이 한 군데에 고정되었다.
그는 청연의 검에 시선을 붙박은 채 눈을 반짝 빛냈다. 그 눈빛을 느낀 청연은 왠지 몸에 소름이 돋았다.
그다음 일은 눈 깜짝할 새에 벌어졌다. 재빠르게 발을 내디딘 소년이 청연의 검을 향해 손을 뻗으며 달려들었고, 제하가 그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청연을 막아섰다.
제하의 손이 소년의 어깨를 홱 밀쳐 내자 그는 뒤로 주르륵 밀려나다가 벼랑 끝에서 떨어지기 직전에 멈춰 섰다. 어깨를 손으로 감싼 채 씩씩거리는 그에게 제하가 외쳤다.
“무슨 짓이야!”
“…그 검.”
그는 여전히 청연의 검만 뚫어져라 노려보고 있었다.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그의 입에서 새어 나왔다.
“내놔.”
검을 내놓으라고?
청연은 눈썹을 치켜올렸다. 그러기 무섭게 소년이 또 한 번 달려들었다.
“어딜 감히.”
이번에도 역시 제하의 손에 저지당한 그는 뒤로 넘어져 엉덩방아를 찧었다. 그러면서도 검을 향한 집착은 버리지 못한 듯, 손을 쭉 뻗으며 매달리려 했다.
그때, 수풀 쪽에서 전해져온 음침한 기척에 세 사람은 약속이라도 한 듯이 움직임을 멈췄다. 뒤로 돌아서서 흔들리는 풀잎을 바라보던 청연은 중얼거렸다.
“강시….”
그 말에 제하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수풀 쪽으로 천천히 나아갔다. 놈이 가까이 오기 전에 먼저 처리할 요량인 듯했다.
나뭇잎이 흔들리는 소리가 점점 가까워졌고, 예상대로 수풀 속에서는 강시가 튀어나왔다. 제하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그것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그리고 빗나갔다.
“…어?”
청연의 입이 떡 벌어졌다. 제하의 검에 목이 썰릴 것이라 예상했던 강시가 날렵한 몸놀림으로 검을 피하더니 어느새 제하의 등 뒤에 서 있었다.
제하 역시 당황한 얼굴로 돌아섰다. 지금까지 수십구의 목을 베면서도 그의 검을 이토록 간단히 피한 놈은 처음이었다. 제하가 심기일전해 다시 목을 베려 하자 그것은 양손을 들어 올렸다.
시체답게 뻣뻣하던 다른 강시들과 달리 두 손이 유연하게 움직였다. 청연은 불길한 예감에 휩싸였다. 지금 저 손짓은 단순한 시체의 움직임이 아니라, 하나의 완성된 초식처럼 보였다.
“조심해!”
청연이 외치기 무섭게 힘줄이 파랗게 선 주먹이 제하의 급소를 향했다. 제하는 잽싸게 주먹을 피함과 동시에 그것의 팔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팔을 쓰지 못하도록 아예 잘라 버릴 생각인 듯했다.
그러나 살을 찢고 들어간 검날은 뼈를 자르지 못한 채 그대로 단단히 박혀버렸다. 제하는 오만상을 쓰며 있는 힘껏 박힌 검을 빼냈다. 이런 건 태어나서 처음 본다는 표정이었다.
이건 평범한 시체로 만든 강시가 아니었다. 생전에 무공을 익혔던 고수의 시체를 강시로 만드는 경우가 있다더니, 그게 사실이었던 모양이다. 아니면 살아 있는 고수를 잡아다가 만들었거나.
초조하게 지켜보던 청연은 생각했다.
‘저런 놈들이 몇이나 더 있을까.’
설마 도관을 덮쳤던 놈들만큼 어마어마한 수라면….
그러면 정말 불리해지겠다.
이제 제하는 상대와 한바탕 비무를 벌이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기를 두른 검날이 지나갈 때마다 나뭇잎이 우수수 떨어졌고, 강시의 권법이 빗나갈 때마다 바위가 산산이 조각났다. 청연은 잠시 고민을 접어 둔 채 제하를 돕기 위해 앞으로 나서려고 했다.
그 순간, 옆에서 넋을 놓고 있던 소년이 눈을 빛내더니 또다시 청연의 검을 향해 달려들었다. 소년의 존재를 잠시 잊고 있었던 청연은 정신을 차리고 그의 손이 검집에 닿기 전에 손목을 낚아챘다.
붙잡힌 그는 인상을 구기며 손목을 빼내려 했으나 청연은 그를 호락호락하게 놓아주지 않았다.
“너 누구야.”
눈을 똑바로 들여다보며 말하자 지지 않고 마주 보는 앳된 얼굴에 오기가 서려 있었다.
“나 알아?”
청연은 자신을 똑똑히 알아보는 듯한 그에게 물었다. 그러자 그는 입꼬리를 삐딱하게 끌어올리며 또박또박한 발음으로 대꾸했다.
“그럼 모르겠어?”
그 말에 청연의 눈이 커졌다.
“대체 누구….”
그때였다. 제하의 다급한 외침이 두 사람의 신경전을 끊어놓았다.
“객주님!”
그와 동시에 청연은 자신이 딛고 선 땅이 쿵쿵 울리고 있음을 깨달았다. 마치 짐승 떼가 우르르 몰려오는 것만 같은 진동에 절벽이 통째로 흔들렸다.
청연은 고개를 퍼뜩 들고 산 위쪽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험한 경사로를 뒤덮은 시커먼 것들을 발견한 순간 심장이 쿵 내려앉는 것만 같았다. 또 다른 강시 떼였다.
“저게 다 무슨….”
도관을 덮친 놈들과는 차원이 달랐다. 커다란 바위들을 오르내리면서도 훨씬 민첩한 움직임, 손이 닿는 것마다 족족 부숴버리는 파괴력. 게다가 어떤 놈들은 호신강기까지 두르고 있었다.
저건 못 이긴다. 아무리 제하라도 불가능하다. 우리 둘이, 아니, 셋이 싸우더라도 저 많은 숫자는 못 당한다.
청연은 곧장 제하에게 소리쳤다.
“그만하고 이리 와!”
강시와 싸우느라 절벽에서 약간 멀어진 제하는 새로 나타난 강시 떼와 훨씬 가까이에 있었다. 그는 청연의 목소리가 들리기 무섭게 발걸음을 돌려 절벽을 향해 뛰었다.
그러나 제하의 앞길은 곧 막히고 말았다. 펄쩍 뛰어올라 그의 앞을 막아선 놈들이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냈다. 제하는 몸을 낮춰 빈틈을 노리면서도 청연에게 신신당부했다.
“절대 가까이 오지 마세요! 거기 가만히 계세요!”
“혼자 뭘 어쩌려고!”
가만히 있으란다고 정말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청연이 달려가려고 하자 제하는 오지 말라고 외치면서도 검을 크게 휘둘렀다.
순간 번쩍하는 빛에 눈이 부셔 멈춰 선 청연은 멀어 버릴 뻔한 눈을 끔뻑거렸다. 뿌옜던 시야에 초점이 돌아온 뒤 보인 것은 절벽 위를 데굴 구르는 머리통이었다.
한 번에 두 놈의 목을 베어 낸 제하가 뒤를 돌아보았다. 어느새 바짝 다가온 시커먼 무리가 그를 위협하고 있었다.
“…안 되겠다.”
낮게 읊조린 제하는 청연을 향해 돌아서서 눈짓했다. 그의 의도를 알아차린 청연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뒷걸음질 쳐 절벽 끝까지 물러났다.
“뭐 하는 거야?”
가만히 사태를 관망하던 소년이 물었다. 청연은 말없이 손을 뻗어 그를 끌어안았다.
“…놔!”
소년은 얼굴을 잔뜩 구기며 발버둥 쳐 불쾌감을 표출했다. 청연은 그를 놓아주지 않으려 단단히 안은 채 기다렸다. 이대로 뛰어내릴 수도 있겠지만 제하를 혼자 두고 갈 수는 없었다.
강시 둘의 목을 베어 낸 게 무색하게도, 제하는 다시 그것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모두 죽이지 않는 이상 벗어날 틈은 없어 보였다.
제하는 검 끝을 아래로 향하게 한 뒤, 두 손으로 검을 높게 들어 올렸다.
“빨리….”
청연이 입을 열기 무섭게, 그가 검 끝에 힘을 실어 바닥을 내리찍었다. 쾅 하는 요란한 소리와 함께 땅이 무섭게 진동했다. 검이 박힌 곳으로부터 쩌적쩌적 금이 번져 가고 있었다.
이윽고 절벽이 통째로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마치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굉음이 울려 퍼졌다. 침을 꿀꺽 삼킨 청연은 품속의 아이를 안은 팔에 힘을 주며 떨어질 준비를 마쳤다.
발이 허공에 붕 뜬 순간, 청연은 강시들 사이에서 벗어나 아래로 추락하는 제하의 모습을 확인한 뒤에야 눈을 감았다.
***
“으….”
주변이 온통 흙먼지였다. 바닥을 뒹굴던 청연은 입에 들어간 흙을 뱉으며 기침을 쏟아 냈다.
젠장. 아프지 않은 곳이 하나도 없다.
떨어지는 충격을 최대한 줄여보려고 했는데, 두 팔이 자유롭지 않으니 그마저도 마음대로 안 됐다. 그래도 뼈가 부러진 것 같지는 않아 다행이었다.
“이봐.”
“…….”
“이봐!”
누군가의 목소리에 힘겹게 고개를 들어 보니 조금 전의 그 소년이 청연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의 몸에 가해져야 했을 충격까지 청연이 모두 흡수한 덕분에 그는 아주 멀쩡한 모습이었다.
“미치겠네.”
소년은 골치가 아프다는 표정으로 머리를 헝클였다.
“아니, 누가 몸을 그따위로….”
“…안 다쳤어?”
“…….”
청연의 물음에 한숨을 푹 내쉰 그는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러더니 걸음을 옮겨 바닥에 떨어진 검을 주워들었다. 조금 전까지 빼앗으려고 애쓰던 청연의 검이었다.
검을 빤히 응시하는 눈동자에 여전히 미련이 묻어 있었다. 그는 검집을 손끝으로 살짝 쓸어보다가, 이내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에이씨….”
그러고서는 쓰러져 있는 청연에게 검을 휙 던졌다. 간신히 손을 뻗어 검을 받아 든 청연은 어리둥절해져 그를 쳐다보았다.
“그거 잘 가지고 있어요.”
소년이 말했다.
“나중에 찾으러 갈 거니까.”
“어?”
“나는 지금 찾아야 할 사람이 있어서 이만.”
말을 끝마친 그는 미련을 털어버린 듯 걸음을 돌렸다. 어딘가로 바쁘게 향하는 그의 뒷모습을 멍하니 보던 청연의 머릿속에는 물음표만 잔뜩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