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7화
청연과 제하는 걸음을 재촉했다. 제하의 말대로 산 위쪽에서 내려오는 강시가 몇 있었지만 그 수가 많지는 않아 간단히 처리할 수 있었다.
문제는 따로 있었다. 그들이 이날을 위해 준비한 게 고작 강시뿐인 건 아닐 터였다. 수천, 수만이나 되는 강시를 만든 건 곤륜 제자들의 주의를 분산시키거나 본격적인 전투에 앞서 힘을 빼놓기 위함일 가능성이 컸다.
심지어 무호가 마교의 출군을 명했다지 않은가. 아직 마교인으로 추정되는 사람은 보이지 않았지만 그들도 근처에 있을 게 분명했다.
점점 도관에 가까워질 때, 제하가 청연에게 물었다.
“객주님의 과거에 대해 직접 들은 적은 없지만 추측해보자면 곤륜과 인연이 있으셨던 것 같은데, 맞습니까?”
“응, 맞아….”
“여운 도장과 그리 각별해 보이시던 것도, 곤륜산의 지리를 전부 꿰고 계신 것도 그 때문이겠지요.”
제하는 시무룩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는 늘 이렇게 혼자서 추측해야만 합니다. 객주님께서 알려 주시지 않으니까요.”
“…….”
“제가 모르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객주님께서 편히 말씀해 주실 때까지 얼마든지 기다릴 수 있습니다. 다만 저를 제외한 다른 이들은 전부 알고 있는 것 같아서 화가 납니다.”
난감해진 청연은 끙 소리를 냈다.
‘너를 제외한 다른 이들도 내가 말해 줘서 알게 된 건 아니란다….’
그래도 혼자서 누군가를 짝사랑하는 심경이 어떤지 모르지 않는 터라, 제하에게는 늘 미안한 마음뿐이었다.
“이 일이 끝나고 나면 말해 줄게. 네가 원하는 거 전부 다.”
“정말요?”
“그래….”
청연은 어색하게 웃으며 답했다.
이 난리 통에서 무사히 살아 돌아갈 수만 있다면 과거 정도야 얼마든지 알려 줄 수 있었다. 곤륜에서 파문당한 이유도 전부 누명인 마당에 제하에게 과거를 숨길 이유는 없었다.
“약속하신 겁니다?”
제하는 한층 사기가 오른 듯한 눈치였다. 평생을 함께하기로 약속한 것도 아니고, 그저 과거 이야기를 해 주겠다고 약속한 것뿐인데도 기분이 좋아진 모양이었다.
‘나에 대해 그렇게 알고 싶을까….’
나도 제하처럼 누군가에 대해 궁금해했던 적이 있던가, 하고 생각하던 청연은 문득 얼마 전 자신의 모습을 떠올렸다. 무호가 숨기고 있는 비밀을 알아내고자 수치심도 잊고 알몸으로 탕에 들어가던 기억을 회상하니 할 말이 없어졌다.
‘그래도 그건 경우가 다르지 않나.’
무호는 그렇게 캐묻지 않으면 자기 얘기를 통 안 하니까 궁금했던 거다. 게다가 자꾸만 정신을 놓고 달려드는데 도대체 왜 그러는지 알고 싶은 게 당연하지 않은가.
고민하던 청연은 고개를 저었다. 그 당시 자신의 마음을 되짚어 보면 궁금증도 컸지만, 무호를 걱정하는 마음이 더 컸던 것 같다.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무호는 괜찮을까, 또 헛된 생각을 하는 건 아닐까. 걱정이 끊이질 않았다.
“객주님, 들리세요?”
제하의 말에 퍼뜩 정신을 차린 청연은 그가 가리킨 곳을 바라보았다. 그곳에서 사람들의 목소리가 선명하게 들려오고 있었다. 빨리 놈들을 처리해야 한다는 둥, 차라리 전부 태워 버리자는 둥 하는 외침이었다.
청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저쪽이 도관이야.”
두 사람은 약속이라도 한 듯이 뛰어 소리가 들려오는 곳으로 향했다. 방해가 되는 수풀을 검으로 전부 베어 내며 산을 오르던 청연은 평지에 다다른 순간 멈춰 섰다. 그의 옆에 있던 제하도 잠시 넋을 놓고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바라보았다.
“진짜 난리 났네….”
청연은 입술을 짓씹으며 말했다. 곤륜의 도관이 위치한 그곳은 말 그대로 아수라장이었다.
조금 전 만났던 어린 제자의 말이 사실이었다. 시커멓게 몰려온 강시들이 사방에 널려 있어 빈 곳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흰 도복을 입은 도사들이 검을 휘두르거나 장을 날릴 때마다 무더기로 쓰러졌지만, 그에 상응하는 수의 강시들이 또 어디선가 나타나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날붙이를 휘두르는 소리는 담장 너머에서도 들려왔다. 담장 안쪽까지 놈들이 침투해 싸움을 벌이고 있는 모양이었다. 시체를 태우는 듯 커다란 불길이 치솟는 곳도 있었다.
“여기서 어느 쪽으로 가야 합니까?”
“지금 우리가 서 있는 곳이 도관의 동쪽이고 곤륜여신봉은 서쪽으로 가야 하니까… 여길 가로질러 가는 게 제일 빨라.”
“…그럼 갈까요?”
청연이 고개를 끄덕이자 제하는 움직임이 불편하지 않을 정도의 틈만 남겨 놓은 채 청연의 옆으로 바짝 붙었다. 절대로 청연을 다치게 하지 않겠다는 의지가 엿보였다.
“조심하세요.”
“너도.”
제하를 고생시키는 것 같아 마음이 불편하면서도, 그가 옆에 있어 이 아수라장이 훨씬 안전하게 느껴졌다. 적어도 저 사특한 것들에 물려 죽는 일은 없겠지 하는 생각이었다.
청연은 강시가 눈에 보이는 족족 그것의 목을 베며 앞으로 나아갔다. 제하도 마찬가지였다. 그가 검을 쓸 때마다 바람이 휘몰아치는 듯했고, 바람이 잦아든 곳에는 시커먼 머리통들만이 나뒹굴었다.
덕분에 청연은 수고를 훨씬 덜 수 있었다. 아무리 베고 또 베어도 끊임없이 나타나는 놈들 때문에 속도가 나지 않아 막막했지만 제하가 있어 든든하기도 했다.
‘시랑도 이 근처에 있을까.’
고개를 쭉 빼고 살폈지만 주변이 워낙 혼란해 사람을 찾을 정신 같은 건 없었다. 여기저기서 각개전투를 벌이는 사람들을 붙들고 얼굴을 확인하느니, 목적지를 향해 가는 게 우선이었다.
생각해 보면 이토록 정신없는 시점에 여길 지나가게 된 게 다행이었다. 누군가 청연의 얼굴을 알아보았다면 강시고 뭐고, 오래전에 도망친 간자의 목을 치겠다며 당장 달려들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담장을 옆에 끼고 천천히 나아가던 두 사람이 반대편에 거의 다다랐을 때였다. 누군가의 외침이 청연의 걸음을 멈춰 세웠다.
“사저!”
마침 눈앞으로 달려들던 강시의 목을 베어 낸 청연은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왠지 눈에 익은 아이들 두세 명이 서 있었다.
“사저, 진소가 보이지 않습니다. 옆에 꼭 붙어 있으라고 몇 번을 말했는데… 방금까지 분명 제 옆에 있었거든요. 그런데….”
“뭐? 어디서부터 안보였는데?”
“모르겠습니다. 저쪽 숲 속에서 사라진 것 같기도 하고….”
“일단 가보자.”
청연이 그들의 대화에 귀를 기울이는 사이 제하는 강시 몇을 더 베었다. 주변이 어느 정도 정리되자 그는 청연을 바라보며 물었다.
“아시는 애들이에요?”
“응….”
청해에서 여운과 재회했던 날, 식당에서 보았던 아이들이었다. 여운을 잘 따르는 듯했던 삼대제자들.
“걱정되시는 거면 따라가 볼까요?”
“어차피 우리도 지금 저쪽으로 가야 하니까, 가는 길에 한 번 살펴보자.”
청연은 못내 걱정되는 얼굴로 답했다.
가는 방향이 같으니 저들에게 시간을 뺏길까 봐 걱정되는 건 아니었다. 문제는 곤륜여신봉으로 향하는 저 길이 아이들이 가기에는 험하다는 거였다. 천방지축이던 세화도 한번 발을 헛디뎌 절벽에서 떨어진 후 겨우 기어 올라온 적이 있었다.
물론 저들도 곤륜의 일원이니만큼 이 사실을 잘 알고 있겠지만, 강시를 상대하느라 바쁜 이 상황에 험한 지형까지 주의하며 조심히 다니기는 힘들 것 같아 신경 쓰였다.
두 사람은 다시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다행히 도관의 중심에서 벗어날수록 강시의 수는 줄어들었고, 숲 속으로 들어선 뒤에는 간간이 나타나는 놈들만 처리하면 되었다.
“와, 여기 길이 정말 험하네요. 객주님, 발 헛디디지 않게 조심하세요.”
몇 번을 당부하던 제하는 그래도 마음이 놓이지 않는지 커다란 바위를 오를 때마다 청연의 손을 잡아 주거나 허리를 감싸 올려 주었다. 전혀 그럴 필요가 없는데도 말이다.
“나 예전처럼 그렇게 약하지 않다고 말했잖아. 검도 쓰고 경공도 쓰는 거 못 봤어?”
“그래도요. 객주님께서 다치시는 걸 보느니 조심하고 또 조심하는 게 낫습니다.”
제하는 한 번 더 청연을 안아 높은 바위 위에 올려놓으며 말했다.
서로에게 의지해 험한 길을 올라가던 중, 제하가 입을 열었다.
“그런데 조금 이상하지 않습니까?”
“뭐가?”
“도관을 덮친 강시의 수가 엄청나기는 했지만, 정확히 목을 노려야 한다는 걸 제외하면 처리하기에 그리 힘든 놈들은 아니었습니다. 곤륜이 아무리 예전만 못하다 해도 저 정도로 무너질 리는 없잖습니까.”
“그렇지….”
“이쯤 되면 더 강한 놈들이 나타나야 맞을 것 같은데… 어?”
제하는 말을 하다 말고 멈춰 섰다. 그러더니 걸음을 옆으로 틀어 어딘가로 향하기 시작했다.
“왜? 저기 뭐가 있어?”
“잠시만요, 객주님.”
청연은 조심히 제하의 뒤를 따랐다. 무언가 나타나기라도 할까 경계를 바짝 세운 채였다.
그렇게 나아가던 두 사람 앞에 펼쳐진 건 탁 트인 절벽이었다. 깎아지른 낭떠러지 너머로 무수히 많은 바위산이 보였다. 그동안 제법 높이 올라온 건지 구름이 멀지 않은 하늘에 걸려 있었다.
청연은 그제야 이상한 점을 알아차렸다. 이 절벽 위에 제하와 자신을 제외하면 아무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이었다.
“아이고, 무거워 죽겠네…. 어린애가 뭘 먹고 이렇게 무겁대? 야, 무공을 배웠으면 이 정도는 혼자서도 올라야 할 거 아니야. 네가 그러고도 곤륜의 제자야?”
누군가가 불평을 잔뜩 늘어놓으며 투덜거렸다. 그 소리가 절벽 밑에서 들려오는 것임을 깨달은 청연과 제하는 고개를 빼꼼히 내밀고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그와 동시에 맨손으로 절벽을 기어오르던 누군가와 눈이 마주쳤다. 열대여섯 살쯤 되어 보이는 소년이 도복을 입은 아이를 업은 채 올라오고 있었다.
“에엥?”
사람이 있을 거라 예상하지 못했는지 그는 눈을 크게 뜨고 청연을 바라보았다. 청연은 순간 그의 얼굴에 스친 표정에서 당혹스러움을 감지했다.
반면 그의 등에 업힌 아이는 마치 은인을 만나 죽다 살아난 것 같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얼굴 여기저기가 까지고 긁혔으며 헝클어진 머리는 흙투성이였다. 청연은 조금 전 삼대제자들이 찾던 사라진 아이가 바로 이 아이임을 알아차렸다.
낑낑거리며 절벽 위로 올라온 소년은 아이를 내려 주고는 제 어깨를 두드렸다. 평범한 양민들이 입는 옷을 걸친 걸 보아, 어느 문파에도 속하지 않은 것 같았다. 그런데 이 높은 절벽을, 그것도 아이를 업은 채 기어올랐다는 게 놀라웠다.
그에게 구해진 아이는 가슴을 쓸어내리더니 은인에게 몇 번이고 감사 인사를 하며 저를 찾아 헤매는 사형제들을 향해 쏜살같이 사라졌다.
‘…뭐지?’
청연은 의심스러운 눈길로 소년을 바라보았다. 평범한 양민 소년이 이 난리 통에 스스로 곤륜산에 찾아올 확률은 희박했다. 게다가 자신을 힐끔힐끔 훔쳐보는 그의 얼굴에서 무언가 싸한 기운이 느껴져 눈을 뗄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