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6화
‘주군께선 곤륜여신봉 정상으로 향하고 계십니다. 그곳으로 오시면 제가 은밀히 길을 터드리겠습니다.’
마지막 말을 남긴 지홍은 따로 수행해야 할 임무가 있다며 창문을 넘어 빠르게 사라졌다. 그가 떠난 뒤 제하는 다급히 물었다.
“정말 가실 생각인 거 아니죠?”
“…가야지.”
“객주님!”
더 이상 망설일 시간이 없었다. 청연은 부랴부랴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그러다 큰일 나신다며 말리는 제하의 목소리를 뒤로 한 채, 최소한의 짐을 챙긴 후 세화의 검을 집어 들었다.
그러자 제하가 성큼성큼 다가와 청연의 손목을 낚아챘다.
“차라리 저를 베고 가시라고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그렇게 말하는 제하의 얼굴이 슬퍼 보여 마음 한구석이 저릿하게 아팠다. 손목을 잡은 채 주저하던 제하는 이내 청연의 허리를 끌어안으며 고개를 떨궜다. 고통스러운 목소리가 귓가에 들려왔다.
“어찌 이리도 제 말을 안 들으세요….”
“미안해. 나는 아무도 포기 못 하겠어, 제하야.”
청연은 그를 토닥이며 말했다.
전쟁을 막지 못한다면 죽어 갈 무수히 많은 사람의 목숨을 포기할 수 없었다. 소중한 객잔 직원들도, 단골손님들도, 무호와 여운도.
그러니 청해로 가야만 했다. 가서 무호를 만나야만 했다.
“걱정하게 만들어서 미안해. 그런데 나는 꼭 가야겠어.”
“스스로 사지에 뛰어드시겠다고요.”
“어쩔 수 없어. 너도 들었잖아. 막을 사람이 나밖에 없다는걸.”
제하는 청연을 꼭 끌어안은 채 놓아주지 않았다.
“대체 어쩌다 그자와 엮이셔서….”
“다 내가 선택한 거야. 너와의 인연도, 그 애와의 인연도 전부 내 선택이었어. 그러니까 이번에도 내가 선택하게 해 줘.”
“그러다 객주님께서 잘못되시면 저는 어떻게 살라고요.”
“…그런 말 하지 말고.”
청연은 한 걸음 물러나 제하를 떼어 놓았다. 어느새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채로 자신을 빤히 응시하는 제하의 머리를 살짝 쓰다듬었다.
“다 괜찮을 거야.”
“정 가셔야겠다면… 그렇다면….”
그렇다면 저도 함께 가겠습니다, 하고 읊조리는 제하를 향해 청연은 고개를 저었다.
“나 때문에 너까지 고생할 필요 없어.”
“객주님께서 사지에 계시는데 멀리서 소식도 듣지 못한 채 기다리기만 하는 게 더한 고생입니다.”
제하의 태도는 여전히 강경했다. 그는 죽어도 청연을 따라나서겠다며 단호하게 입장을 굳혔다. 끈질긴 설득 끝에 청연도 하는 수 없이 동행을 허락하게 되었다.
청연은 제하와 함께 객잔을 떠나며 해령에게 신신당부했다. 항상 바깥 소식에 귀를 열어두고, 이상한 낌새가 보이면 직원들과 함께 저 멀리 도망가라고. 혹여나 자신이 돌아오지 못하게 될 상황을 대비해 남기는 마지막 전언이었다.
***
곤륜산까지 가는 길이 유독 멀게 느껴졌다. 앞으로 펼쳐질 일에 대한 걱정 때문인지, 뒤숭숭한 주변 분위기 때문인지는 모르겠으나 한 걸음 한 걸음이 무거웠다.
청연이 조용해지자 제하도 덩달아 말이 없었다. 두 사람은 입을 닫고 걸음을 재촉했다.
청해 땅에 들어서자 곤륜과 마교에 대한 소문이 간간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곤륜이 곧 마교에 패해 무너질 거라는 둥, 그러니 당장 청해에서 떠나야 한다는 둥.
그중에 들려온 한 가지 소문이 청연의 마음을 심히 괴롭혔다.
‘마교가 혈교의 잔당과 손을 잡았다.’
드디어 모습을 숨기지 않고 드러낸 혈교의 잔당들이 마교 편에 붙어 정파를 치려고 한다는 소문이었다.
이 또한 혈마가 꾸민 눈속임일 뿐일까. 아니면 정말 무호의 정신이 사술에 지배당해 그들과 연합을 맺기라도 한 걸까. 청연은 수많은 걱정에 짓눌릴 것 같았지만 어지러운 마음을 다잡으려 애썼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신강과 청해 전역의 묘지가 누군가에 의해 파헤쳐졌다는 소문이 돌았다. 파헤쳐진 게 끝이 아니라 땅 밑에 안장되어 있던 시신들도 전부 사라졌다고.
괴담에 가까운 이 소문을 듣는 순간 청연은 깨달았다. 전투에 사용할 강시를 만들었겠구나.
마음이 급해져 쉴 틈 없이 경공을 쓰며 달리다 보니 어느새 두 사람은 곤륜산 기슭에 도착해 있었다. 산의 중심부까지 가려면 아직 갈 길이 멀었지만 벌써 사람들의 소란스러운 외침이 들려오는 것 같았다.
여기저기서 타는 냄새가 진동을 했고, 발밑에서 땅이 쿵쿵 울렸다. 산봉우리 너머 저 멀리서는 검은 연기까지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었다.
“아직 안 늦었습니다, 객주님. 지금이라도 마음이 바뀌셨다면….”
“그럴 일 없어. 가자.”
청연이 단호하게 말하자 제하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러고서는 걸음을 옮겨 청연의 뒤를 따랐다.
세화의 기억이 남아 있으니 길을 찾아 헤맬 필요는 없었다. 청연은 어디로 가야 할지 잘 알고 있었다. 곤륜여신봉으로 향하려면 산맥 중앙에 위치한 도관을 지나 험한 길을 한참 올라가야 한다. 그러니 혈교가 되었든 마교가 되었든, 검을 든 살수들과 정통으로 마주하는 일은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안전한 길을 택할 수도 있겠지만 그쪽으로 돌아서 가기에는 시간이 제법 오래 걸린다. 너무 늦어서 시도도 못 해보고 끝나는 것보단 정면 돌파가 낫겠지 하는 생각이었다.
“객주님, 잠시만요.”
한참을 달리던 끝에 제하가 청연을 멈춰 세웠다. 그는 잠시 기다리라는 듯 손가락을 세워 보이더니 조심히 한 발짝씩 내디뎠다. 그의 귀가 수풀 속을 향해 쫑긋 서 있는 것 같아 청연도 그쪽을 향해 귀를 기울였다.
아주 작은 소리였지만 풀잎이 바스락거리고 있었다. 짐승 비슷한 게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기도 했다. 청연이 입을 열려고 하자 제하는 쉿, 소리를 내며 손짓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소리는 점점 가까워졌다. 두 사람은 검을 쥔 손에 힘을 주고 주위를 살폈다. 이내 나뭇잎이 파들파들 흔들리더니, 수풀 속에 있던 무언가가 튀어나왔다.
“…저게 뭐야?”
숨을 헉 들이쉬는 소리와 함께 제하의 혼잣말이 들려왔다. 반면에 청연은 그것의 정체를 단박에 알아차렸다.
창백한 흰 피부에 돋은 파란 핏줄, 날카롭게 드러난 송곳니, 산 사람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초점 없는 눈동자. 강시였다.
놀라는 것도 잠시, 제하가 강시를 향해 빠르게 검을 휘둘렀다. 날 선 검이 가슴을 베고, 복부를 베었지만 그것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그 자리에 멀쩡히 서 있었다. 오히려 자극을 받아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더욱 커지고, 흉흉한 송곳니가 번쩍 빛났다.
제하는 당황한 얼굴로 걸음을 물렸다. 동시에 강시가 팔을 앞으로 쭉 뻗더니 높게 뛰어올랐다.
“이리 나와!”
청연은 급히 달려가 제하를 밀치고는 검을 고쳐 잡았다. 그리고 강시가 허공에서 내려오는 시점에 맞춰 뾰족한 검 끝을 그것의 목에 찔러 넣었다. 검이 푹 박히며 목 안쪽에서 검은 피가 줄줄 흘러내렸다.
박힌 검을 슬슬 움직이자 이미 부패한 시신의 목이 간단히 잘려 나갔다. 툭 떨어진 머리통이 데굴데굴 굴러 제하의 발치에 닿았다. 청연은 안색이 어두워진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강시야. 다른 곳은 공격해도 안 죽으니까 목을 단칼에 잘라야 해. 아니면 불에 태워 버리거나.”
“객주님께선 이런 걸 어떻게….”
어떻게 아냐고? 세화가 동네 길거리 이야기꾼을 아주 좋아했는데, 그 집 단골 소재가 강시였거든.
청연은 설명을 생략한 채 제하를 이끌고 계속해서 산을 올랐다.
“호북에 강시가 나타난다는 소문을 들은 적 있습니다. 그걸 쫓던 무당파의 도사 하나가 밤중에 실종되었다는 소문도요. 그게 다 이날을 위한 준비 과정이었군요.”
“그래. 그러니까 조심해. 혹시라도 물리지 않도록 주의하고.”
“객주님께선 저런 사특한 것을 눈앞에서 보고도 두렵지 않으십니까?”
두렵지. 어떻게 안 두렵겠어.
하지만 지금은 소중한 사람들을 잃을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더욱 커서 그런 것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빨리 가자.”
“예.”
산을 오를수록 사람들의 다급한 목소리가 더욱 크게 들려왔다. 무어라 소리치는 건지는 알 수 없었지만 이미 전투가 시작된 것이 분명했다. 하긴, 이곳까지 강시가 내려왔을 정도라면 도관은 어떻게 되었을지 안 봐도 눈에 선했다.
그때, 누군가의 외침이 산속에 울려 퍼졌다.
“살려 주세요!”
흰옷을 입은 누군가가 두 사람에게 손을 흔들며 외쳤다. 가슴팍에 새겨진 문양을 보아하니 곤륜의 제자였다. 열 몇 살밖에 안 되어 보이는 어린 제자가 강시에게 쫓겨 산을 뛰어 내려오고 있었다.
청연이 곧장 그에게로 달려가려고 했으나 이번에는 제하가 더 빨랐다. 보이지 않을 만큼 날쌔게 다가간 그가 강시의 목을 단숨에 베어버렸다. 얼굴이 새파래진 어린 제자는 그 자리에 주저앉아 헉헉거리며 숨을 골랐다. 그가 들고 있던 검이 흙바닥 위로 툭 떨어졌다.
“지, 지원하러 오신 겁니까?”
그가 물었으나 청연은 대답할 시간 따위 없었다. 곧장 그를 붙들고 궁금했던 질문을 쏟아 냈다.
“도관은? 다른 사람들은? 다들 어떻게 된 거야?”
“예? 에에… 저, 저 이상한 것들이 시커멓게 떼를 지어 몰려와 도관을 덮쳤습니다. 그 수가 수천, 아니, 수만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겁니다. 지금도 다들 산 위에서 저것들을 처리하느라 바쁘십니다. 저는 아직 검술을 제대로 익히지 못한지라… 부끄럽게도 도망을….”
시퍼렇게 질렸던 아이의 뺨이 붉게 물들었다. 정파의 이름을 달고 혼자 도망치려던 걸 들켜 수치스러워하는 눈치였다.
청연은 검을 집어 다시 그의 손에 쥐여 주며 말했다.
“괜찮아. 네 나이에는 위험하면 도망치는 게 맞아.”
그러자 제하의 따가운 눈초리가 느껴졌다. 당신은 위험한 걸 알면서도 왜 도망치지 않느냐고 묻는 듯한 눈빛에 뜨끔한 청연은 목을 가다듬었다.
“그렇지만 사부님께서….”
“자, 검 똑바로 쥐고. 저런 것들이랑 또 마주치면 다른 데 말고 목을 노려야 해. 그러다 정 힘들면 그냥 도망쳐.”
그러면서 자리를 털고 일어나 제하에게 눈짓했다. 제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저 위쪽에서 더 내려오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응….”
아이를 데려가기엔 갈 길이 멀고도 험했다. 저들과 정면으로 맞서면서 아이까지 보호할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기 어려웠다. 그러니 조언 몇 가지 해 주고 보내는 수밖에.
청연이 제하와 함께 떠나려고 하자 아이가 물었다.
“저, 실례지만 어느 문파의 누구신지 여쭤보아도 되겠습니까?”
그 말에 청연은 머쓱하게 목덜미를 긁적이고는 손을 저었다. 차마 내뱉을 수 없는 대답은 목 너머로 꿀꺽 삼켰다.
‘네 사숙이다, 인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