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화
청연의 시선을 느낀 무호는 슬쩍 옷깃을 여몄다. 보일락 말락 하던 붕대의 끄트머리가 검은 옷 속으로 자취를 감췄다.
“…….”
청연은 그것의 정체에 대해 함부로 묻지 못하고 입술만 깨물었다. 무호의 맨몸을 보았던 어제 아침까지만 해도 멀쩡했던 것 같은데 또 언제 저렇게 된 걸까.
그와 청연이 떨어져 있었던 시간은 어젯밤이 유일했다. 부끄러워 방으로 돌아오지도 못하고 떠돌아다니는 사이, 그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고민하다 보니 두려움이 엄습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그의 몸에 감히 상처를 남길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심지어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이나 말이다. 그렇다면….
차마 떠올리고 싶지 않은 추측 한 가지가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청연의 안색이 눈에 띄게 어두워지자 무호는 한숨을 내쉬고는 그의 팔을 끌어당겨 침상 위에 앉혀 놓았다.
“그거… 붕대….”
청연은 입술을 달싹였다. 그에게 묻고 싶은 질문을 던졌다가 자신의 추측이 옳다는 확답을 듣게 될까 봐 두려웠다. 그러던 중 무호가 먼저 입을 열었다.
“요리하다가.”
“…응?”
“요리하다가 기름을 흘려서.”
네가 대체 언제 요리를 했냐고 물으려던 청연은 그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알아차렸다. 자신이 손을 다친 이유를 숨기고자 대충 둘러댔던 핑계와 같았다.
‘숨기고 싶으니 그냥 넘어가 달라는 건가….’
청연은 더 이상 말을 꺼내지 못하고 입술만 잘근잘근 물었다. 자꾸만 차오르는 불길함에 주먹이 움츠러들었다.
“청연.”
무호의 낮은 목소리가 이름을 불렀다. 시선을 들어보니 그는 걱정하지 말라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입술을 깨물지 못하도록 쓰다듬는 손길이 따뜻했다. 조금 전 그의 팔에 안겼을 때와 같은 따스함이었지만, 심장을 조여 오는 불안감 탓에 더 이상 전과 같은 위안은 얻을 수 없었다.
***
청연은 초조하게 민아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렸다. 무호를 방에 두고 몸이 이상하면 알리라고 신신당부한 채, 혼자 일 층으로 내려가 대문 앞을 서성거렸다.
아침을 먹고 돌아오겠다는 말과 달리, 민아가 돌아온 건 해가 저물어갈 때였다. 그는 대문 앞에서 기다리다 못해 죽어 가는 청연을 발견하고서는 놀란 듯이 물었다.
“거기서 뭐 해?”
“너 기다렸지.”
“날 왜? 아, 혹시 결심이 선 거야? 나랑 같이 떠나기로?”
그럴 리가 있나.
청연은 민아를 질질 끌고 가 자리에 앉혀놓았다. 그러고서는 맞은편에 앉아 진지한 얼굴로 그를 빤히 응시했다.
“뭐, 뭔데.”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감지한 민아는 눈알을 데굴데굴 굴렸다. 청연은 잠시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아까 하다 만 얘기 마저 해 봐.”
“무슨 얘기….”
“제하의 무위가 어쩌고 하던 거.”
“아.”
민아의 목울대로 침이 꿀꺽 넘어가는 게 보였다. 청연은 눈을 가늘게 뜨고 그의 반응을 살폈다.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이 꼭 커다란 비밀을 숨기고 것 같았다.
“그러니까 네 말은 제하의 무위가 그렇게 높지 않아도 그 일을 할 수 있다는 거야?”
청연이 언급한 ‘그 일’이란 당연히 무호의 목을 치는 일을 뜻했다. 혹시라도 대화 내용이 방에 있는 그에게 들릴까 싶어 직접적인 언급은 피하는 중이었다.
“솔직히 말해. 또 도망갈 생각 말고.”
“어… 음….”
도망가기 위해 눈치를 보고 있던 민아는 뜨끔한 표정을 지으며 손톱을 물어뜯었다.
“뭐길래 그래. 제하한테 숨겨진 힘이라도 있는 거야?”
“아니…. 그건 아니고.”
“그게 아니면 뭐냐고.”
시원한 대답이 돌아오지 않자 마음이 점점 조급해졌다. 청연은 계속해서 민아를 추궁했다. 결국 사실을 말해 주면 중원에서 떠나는 걸 진지하게 고려해 보겠다고 거짓말까지 늘어놓은 뒤에야 그가 입을 열었다.
“으음…. 사실 너랑 여기서 처음 마주쳤을 때부터 알려 줘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했는데, 생각보다 쟤랑 연이 깊은 것 같아서 망설여졌어.”
민아는 무호가 있는 이 층 방을 손가락으로 콕콕 가리키며 말했다.
“네가 알면 속상해할까 봐….”
내가 알면 속상해할 일이 뭔데?
청연은 커지는 불길한 예감 속에 숨을 쉬는 것도 잊고 민아를 바라보았다.
“혈교니 사술이니 하는 뒷이야기는 나도 몰랐지만, 나름대로 쟤한테 부여한 설정이 있었거든.”
“설정?”
민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전쟁을 일으키고 정파와 양민을 상대로 살육을 벌인 건 맞는데….”
“맞는데?”
“사실 타고나기를 악하게 태어난 애는 아니었어.”
“…그래서 뭐 어쨌다는 거야.”
무호가 악한 사람이 아니라는 건 청연도 이미 알고 있었다. 민아의 말대로 사람을 쉽게 죽이긴 한다만, 현대인의 시각으로 봤을 때 이해하기 어려운 일일 뿐이지 이 세계에서는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니라고 합리화하는 중이었다.
애초에 무호가 사람을 쉽게 죽이지 못했다면 지금까지 살아남지도 못했을 터였다. 감옥에 갇혀 있던 어린 시절에 이미 다른 누군가의 손에 살해당했을 게 뻔했다. 그가 살아온 세상은 그런 곳이었으니까.
“중요한 건… 전쟁이 한창 벌어지던 중에 걔 정신이 잠깐 정상적으로 돌아왔던 적이 있거든?”
“정신이 돌아왔다고?”
“응. 일단 내가 만든 표면적인 설정은 걔가 마성에 잠식되어 제정신이 아닌 채로 전쟁을 일으켰다는 거거든. 그러던 중에 잠시 벗어난 거지.”
“…….”
“아무튼 깨끗해진 맨정신으로 산 정상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데, 순간 그동안 살아온 자기 삶이 눈앞에 스쳐 지나간 거야. 어려서부터 항상 싸우고, 죽이고. 행복했던 기억은 단 하나도 없는 삶이.”
민아는 잠시 말을 멈추고 청연의 눈치를 살피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
“그 와중에도 아래에서는 끊임없이 전쟁이 벌어지고 있고, 피 흘리면서 미친 듯이 싸우는 사람들을 보니까 어느새 인생에 회의감이 든 거지. 말했듯이 얘는 타고나길 악한 사람은 아니었으니까.”
“…그래서?”
“그때 마침 제하가 마교도들을 뚫고 산 정상까지 올라온 거야.”
청연은 민아의 입에서 나오는 한마디 한마디를 들을 때마다 심장이 쿵쿵 떨어지는 느낌이었다. 그다음 이야기는 하지 않아도 알 것만 같아 손끝이 파르르 떨렸다.
“그러니까 사실은….”
민아가 한숨을 내쉬며 목소리를 낮췄다.
“사실은 그 애가 전쟁을 끝내기 위해서 자결한 거야. 호신강기를 거두어들인 것도, 제하가 자기 목을 치게끔 틈을 내어준 것도 다 직접 한 일이었어.”
“…….”
“이걸 본문에 쓰지 않은 이유는… 어쨌든 악역이고 엄청나게 많은 사람을 죽인 살인마인 건 사실이니까 그 중요한 순간에 구구절절 사연을 부여해 주고 싶지도 않았고…. 세화 이야기처럼 외전에서 언급해도 충분하다고 생각했어.”
참담했다. 그제야 민아가 제게 했던 모든 말들이 이해되기 시작했다. 무호의 죽음이 제하의 무위와는 상관없다던 말, 그리고 계속해서 무호의 곁에 있다가는 크게 상처받을 거라던 말.
전부 무호의 선택이었다. 죽임을 당한 게 아니라 죽음을 택한 것이었다. 사술에 이용당하며 계속해서 꼭두각시로 사느니 차라리 제하의 손에 죽는 게 낫다고 판단했을 터였다. 그러니 정말 전쟁이 일어난다면, 이번에도 역시 스스로의 의지로 자결을 택할 확률이 높았다.
청연의 머릿속에는 어제 오후, 무호가 제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너무 애쓰지 마. 위험해지면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알아서 한다는 게 이런 의미였어?
“…너 괜찮아?”
민아가 청연을 바라보며 물었다. 가만히 앉아 다리만 덜덜 떠는 청연의 안색이 하얗다 못해 시퍼렇게 질려 있었다.
“이럴까 봐 말 안 하려고 한 건데….”
청연은 참지 못하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당장 무호에게 가야만 했다. 가서 바짓가랑이라도 붙들고 애원하고 싶었다. 죽음 같은 건 꿈에도 생각 말라고. 혼자서 모든 걸 떠안고 가지 말라고.
“야, 잠깐만!”
민아의 목소리를 뒤로한 채 청연은 계단을 향해 뛰어갔다. 그 와중에도 머리는 쉴 틈 없이 팽팽 돌아가고 있었다.
‘사술이 생명력을 토대로 자라난다고 했지.’
사술을 억누르기 위해서는 생명력을 최소치로 낮춰야 한다고도 했고.
무호의 왼쪽 가슴에 감겨 있던 붕대. 붕대에 묻어 있던 피. 그리고 시뻘게진 눈으로 아끼는 대도를 찾던 무호. 그 모든 장면이 스쳐 지나가며 추측은 확신이 되었다.
그동안 주술이 발작하려고 할 때마다 스스로 가슴을 찔렀구나.
너무나도 강해져 평범한 무기로는 쉽게 해할 수 없는 몸이다. 그러니 전장의 피와 원기가 깃들어 사악한 기운을 지닌 대도를 심장 가장 가까운 곳에 직접 박아 넣은 거다.
어젯밤, 청연이 부끄러움을 이기지 못해 정처 없이 객잔을 떠돌 때도. 상대의 기분은 안중에도 없는 거냐며 서운해할 때도. 혼자 방 안에서 가슴에 칼을 꽂은 채 고통을 참고 있었던 거다.
누가 알았을까. 원래대로라면 세상을 향했어야 할 저주받은 칼날이 호연이라는 이름을 얻은 순간 무호 자신의 심장을 향하게 되었을 줄을.
‘이 미친놈이 진짜….’
그렇게 해서 사술을 억누르는 게 가능하니 그동안 중원 전역에 소문이 퍼지지 않았으며, 의원의 진료도 거부한 모양이었다.
청연은 허둥지둥 계단을 뛰어 올라가 자신의 방 앞에 멈춰 섰다. 그는 망설이지 않고 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그리고 열린 방 문 너머는 텅 비어 있었다. 그곳에 있어야 할 무호가 보이지 않았다. 청연은 미친 듯이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방 안으로 들어섰다. 창문이 열려 있었다.
창가로 다가가 밖을 내다보니 객잔 후원에 서 있는 익숙한 뒷모습이 보였다. 강렬한 노을빛에도 물들지 않는 검은 옷과 아무렇게나 풀어 헤친 검은 머리. 그리고 그의 손에 들린 번쩍이는 칼날.
그 칼날만이 유일하게 붉은 하늘빛을 반사하고 있었다.